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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도사(節度使)란 강력한 '군벌(軍閥)'의 이칭이다.唐과 宋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제도로 지방의 軍政및 행정
사무를 총괄했던 직책이다.문관의 '관찰사(觀察使=都觀察黜陟使의 약),부윤,도호부사,목사,郡守.현령,현감 등
은 民政 업무를 관할하는 것으로 구분하나,관찰사들이 무관직을 겸하는 것으로 봤을때 지방에서 문무의 조화를
잘 이루며 협조 관계를 잘 유지하라는 뜻도 있는듯 하다.무관으로 지방장관에 해당했던 이들은 당시 거대한 土
豪이자 강력한 호족들이 아니면 될수가 없다.1911년 청조의 붕괴후 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우후죽순 처
럼 생겨났던 지방의 군벌들로 이해하면 된다.무력을 동반한 군벌인 절도사란 직책은 그것이 兵馬(육군,기병)든,
水軍(선군)이든 아무나 할수 있는 벼슬이 아니다.절도사가 될려면 우선 황제에 대한 충성과 신임도가 각별해야
한다.절도사의 '節' 은 '황제가 고급관원에게 황제를 대신해 직권을 행사 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서 證票로
주는 것이 '節' 이다. '節' 은 길이가 약 180cm 정도의 대나무 막대인데,손잡이 끝에 야크(Yak)꼬리털이 3겹으로
꼬여 묶여있다.오늘날 군대의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지휘봉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다.
2, 이러한 '節' 을 가진자는 그 누구든 황제의 법도(度)에 따라 지방의 일을 대신 한다(使)하여 '절도사(節度使)
로 부른다.황제를 대신한 절도사는 관할지역에서 황제의 명으로 오늘날의 3권을 행사 할수가 있었다.절도사
란 명칭은 시대에 따라 '按察使와 按廉使' 란 이칭도 있었으나 업무는 변동이 없었다.관찰사가 종 2품 이듯이
병마절도사는 종 2품,수군절도사는 정 3품으로 임명했다.절도사들의 위용을 역사에서 살펴보면,唐나라에서
'개원과 천보의 治' 란 번영의 시대를 열었던 唐 현종을 '蜀(사천성 成都)' 으로 도망가게 했던 안록산도 '河東
절도사' 였고,宋을 개국했던 태조 조광윤도 '歸德절도사(하남성 상구)' 였다.더하여 5대 10국시대 황하유역에
서 중원의 대권(낙양과 장안)을 위해 수시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대의 '이존욱,석경당,유지원,주전충,곽위' 등
도 중원에서 절도사를 지냈다.隋唐시대의 핵심 세력중 서역에서 동방으로 진출했던 탕구트(동호) 세력들이
많았던 것처럼, '이존욱,석경당,유지원' 등은 동호와 돌궐족 출신으로 위탁의 절도사들 이었다.이들도 일시적
이기는 하지만 중원을 지배한바 있었다.
3, 한국사에서 절도사들의 활약은 거의 없었다.역사서를 보면 조직은 있는데 이들의 활약은 미미하거나 거의
없었다.지방에서 軍政을 책임지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 데도 외침이 빈번했던 나라에서 정작 그
들이 한일이나 역할은 없었다.반도의 경우라면 정사서들의 군영과 그 조직들은 자리를 펼곳 조차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즉 물샐 틈이 없다.胡亂(호침)과 倭亂(왜침)이 있었을 때도 지역의 군벌인 절도사들은 한일이 없다.
특히 나라의 중심이자 왕이 있었다는 도성을 침공하고자 고속으로 쳐들어 왔던 호침과 왜침의 세력들을 목숨
을 바쳐 막았던 '병마절도사' 들도 없었다.倭寇의 침입때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순신)와 경상우도 수군절
도사(원균)의 역할만 미미하게 설명되고 있으나,이것도 이순신 위주의 많은 과장과 왜곡이 있다.
당시 전라도(2명),경상도(3명),충청도(2명)의 지상군 병마절도사들은 외침에 의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형국에
처했을 때도 한일이 없다.그렇다고 왜군의 침략길목에 있던 충청의 수군절도사(2명)나 수군만호(3명),강원의
수군절도사(1명)와 수군만호(4명)들 역시 한일이 없다.내륙을 통해 나라의 왕도인 도성으로 침입 할려면 이러
한 무관들의 '鎭(군영이 있는 도시)' 들을 모두 통과 해야 도성으로 들어 올수가 있었다.그러나 왜구와 胡軍들은
새그물에 바람이 빠져 나가듯 저항없이 또 소풍오듯 수도인 도성에 도착해 왕이 도망가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4, 역사적으로 水軍은 강이나 호수,수로에서 활동하는 군대이지 바다(海)에 필요한 군대가 아니다.또 왜적이란
것도 조선내(동국) 에서의 소란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倭寇였기 때문에,큰 바다 건너의 침입이 아닌 조선내의
'倭亂' 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자주 쓰이는 수전(해전)의 '梁(노량,명량)' 이란 표현도 강에서 낙차가 있는 급류나
병목의 여울진 곳을 말하는 것이지 바다의 해류가 빠르게 흐르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閑山대첩 의 한산
역시 바다와 연계된 한산도란 섬(島) 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육지의 閑山에서 있었던 지상전 전투
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이순신의 승전을 말할때 나오는 '학익진' 이란 것도 명나라 척계광(1528~1588년)
의 '원앙진' 명칭을 빌려 '학익진' 으로 변경한후 재사용 한것일 뿐이다.바다에서는 모두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공격대형의 원앙진(鴛鴦陣)이든 학익진(鶴翼陣)이든 안된다.이러한 陣은 은폐와 엄폐물이 충분한 육지에서 지
상군들이 주둔의 진을 칠때의 그 '陣' 이다.공격 대형으로의 '鴛鴦陣(원앙진)' 이나 '鶴翼陣(학익진)' 이 될수없다.
5, 원앙진의 설계자 척계광은 이순신보다 앞서 지금의 절강과 복건성 지역에서 왜구와 왜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오랜세월 동안 싸웠고,명장 兪大猷(1503~1579)와 함께 변방 수호에 동분서주했던 명나라 장군이었다.이들은 모
두가 이순신(1545~1598) 처럼 지역의 군벌로 선배였다.따라서 역사의 왜구나 왜적들이 조선을 향해 침략해 올
때 '명나라를 칠것이니 조선은 길을 비켜 달라(征明假道)' 고 했다는 말은 반도에 역사의 조선을 놓고는 상당한
거짓말이 된다.즉 성립이 안된다.근거는 왜구들이 임진년(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왜적이
자 왜구들은 지금의 '절강,복건,강소,산동성' 지역을 침략해 척계광과 유대유 등과 같은 明의 장군및 병사들과 수
없는 공방전(明과 倭)을 벌였다.따라서 반도 조선을 향해 明을 칠것이니 길을 비켜 달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근
거는 明史가 쓰기를 역사의 왜는 임진왜란 수십년전 부터 명을 공략해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임진전쟁의
종결을 위한 나라간 강화회담을 열었을 때 전권을 행사했던 현장의 대표는 지금의 절강성 가흥 출신인 명나라
'沈惟敬' 이 아닌가?따라서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곳도 지금의 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것은 당연한 것
이다.
6, 역사에서 '左道는 東道를,右道는 西道' 를 말하는 것이다.湖左는 湖의 東쪽을,湖西는 호의 서쪽인 湖右를 말
하는 것이다.따라서 반도의 현 전라도 지역이 역사의 湖南이 되는 것은 실로 웃긴다.湖가 없는 남쪽을 억지로
만들어 놓고 지형물에 의탁한 지명으로 '湖南' 이 될 근거는 없다.더하여 湖도 없는데 호좌 의병이라 하여 충북
산골 저수지인 제천의림지를 기준으로 그 동쪽의 강원도에서 호좌의병(영월)이 발생했다고 하니 얼마나 웃기
는 억지인가? 한말의 호좌(湖東)의병을 말할려면 최소한 대륙의 '寧越' 이 있는 강서성과 절강성의 접경지대의
太湖 동쪽이나,더 서쪽으로가 호남성의 동정호,강서성의 파양호 동쪽의 호좌 의병이라면 일단 설득력이 있다.
유생의병의 봉기란 것도 먹고 살만한 곳에서 자신들의 위상과 입지가 위협받고 곤란해 졌을때 반발이나 저항
심으로 생겨나는 것이지,첩첩산중에서 나무하며 살던 나무꾼과 천사의 얘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왜란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전라우도 수군절도
사 이억기' 등도 활약은 있지만,눈앞에서 왜군을 볼수 밖에 없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이 한일은 거의 없
다.당시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왜군들을 길목에서 막기만 해도 물리칠수 있었던 지상군 사령관인 '병마와 관련
된 휘하 군벌' 들은 어디로 갔는지 역할이 없다.정사서 직제에는 있는데 이들이 한 역할은 없는 것이다.
7, 수군절도사들도 서류상으로는 있으나,그들도 외침이 있을때 황제와 조정을 위해 한일은 없다.그중에 전라좌
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행적이 다른 3명의 절도사들에 비해 터무니 없이 부각된 것은,전란의 조정실권이 당시
東人들에게 넘어가 동인이었던 이순신을 밀었던 결과가 아니겠는가?반면에 동인들에 의해 서인의 원균은 배척
당했다.그래서 이순신은 별로 한일도 없었는데 수군만호와 현감(군수) 정도에서 몇계급 고속특진하여 정 3품의
수군절도사가 된것이 아니겠는가?지금으로 말하면 대대장급 지휘관이 군사령관이 된 꼴이다.정크선 12척으로
100척이 넘는 왜선과 싸워 이겼다는 얘기는 소설이지 실제성이 있는 얘기가 아니다.영국과 스페인 함대의 해전
에서 영국이 승리할때 처럼 이순신의 수군들 대포가 영국 함대처럼 포신이 길어 포탄이 멀리 날아갈수 있는 무
기의 우월성이라도 있어야 탄생 가능한 승전 얘기다.무기의 성능도 비슷하고 전함도 왜군에 비해 10% 정도인데
지휘관의 지휘력과 정신력(충성혼)으로 승리했다는 해설은 그를 빛나게 하기 위한 의도성이 있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돈많은 놈이 이겼고 전비(전쟁물자)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했다.당시 이순신의 수군은
戰費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자신의 처지도 왕명을 거역한 죄로 전쟁 끝나면 조정으로 압송될 처지에 놓여있어,왜
적의 유탄이든,流矢에 맞아 죽든 그는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왜란이 끝나자 개혁의 광해군 시대가 열였고 그개혁
을 싫어했던 西人이자 대지주들은 인조반정이란 반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이들이 권력은 잡았지만 내적으로 功을
공평하게 나누지 않고 당시의 주변정세를 읽지 못해 병자호란(호침)이란 외침을 당해 나라를 망하게 했다..
8, 근세 이씨 왕조의 세조 6년(1460년)에 편찬을 시작해 성종16년(1485년) 완공했다는 '경국대전' 이란 것이 있
다.이는 나라를 경영하는데 기준이 되는 법전으로 나라를 건국한지 거의 90년 만에 완성했다.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기사들은 대부분 문관 위주의 서술이 많으나 성종(1469~1494년)때 완성한 경국대전(19
36년 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활자인쇄,간행)에는 나라의 지방과 변방(국경)을 지키는 '무관(병마,수군절도사와
이하 조직까지)' 들의 구분과 조직(병력의 수까지)도 상세히 기술해 놓고 있음은 물론,나라의 노비들 숫자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이기사들을 살펴보면 세조에서 성종까지의 이씨 황조는 대황제국으로 병마절도사가 15명(겸
직포함),수군절도사 17명(겸직포함)들이 나라에 자리를 펴고 있었다.즉 절도사란 군벌이 32명이나 있었던 대국
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절도사는 자신이 보유한 사병의 군사력을 동원해 중앙조정의 권력과 왕권도 탈취 할수가
있는 막강한 세력들이다.그래서 군벌인 이순신도 선조와 광해군에 개기며 명령을 듣지 않았고,그러자 선조도 이
순신을 죽이려 했었을 것이다.절도사의 위력을 현재화 하면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하마스,헤즈볼라,IS,이슬람
형제단,후티반군,외인부대,구르카 용병,블랙워터' 등과 비견 할수가 있을 것이다.즉 사병및 특수목적으로 군대
를 보유한 세력으로 보면 된다.
9, 왕씨 고려를 물려받은 이씨 왕조의 강역도 동서가 넓고 남북이 좁은 강역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세종실록
에 이어 '경국대전' 도 말한다.현재 반도에서 전라와 경상도는 南北으로 나뉘어 있지만,경국대전을 보면 전라도와
경상도는 '東道(左道)와 西道(右道)' 로 나뉘어 진다.즉 고려에 이어 이씨 왕조도 동서가 넓은 강역을 가진 것이다.
오히려 반도에서 가장 척박하고 강이나 하천도 없는 함길도(영안도)가 남북으로 나뉘어 병마는 물론 수군절도사
를 남북으로 3명이나 배치되는 어색한 경우가 만들어 졌다.사서의 함길도와 반도의 함경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군은 바다(海)가 아닌 '수로나 운하,대강,대하천,호수' 에서 활동하는 船軍(수군)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나 후예는 지금도 중국의 강,하천과 호수에서 사는 '船上,水上人'들로 대신 할수가 있다.아무튼 반도
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말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좌도(동도)와 우도(서도)'를 만들어 놓을
면적이 없다는 것이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지금의 함경도 조차 강,하천과 호수가 많아 수군의 수군절도사를 3명이
나 둘 정도로 지역이었다.지금처럼 산악의 함경도가 아닌 것이다.
10, 현실적으로 반도는 남북이 긴 지형이라 그것이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뉠지라도 남북이라면 몰라도 동도(좌도)
와 서도(우도)로 나눌수는 없다.반도에서 역사해설 권력을 가진자들이 말한 것으로 이순신이 '三道수군통제사' 가
되었다는 진실도 이순신이 '충청,전라,경상도' 의 3도의 모든 수군들을 총괄 통제하는 통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
니다.역사서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라좌도(동도)와 전라우도(서도),경상우도(서도)를 합친 3도 수군을 통제' 했다
는 뜻이다.3도 수군통제사의 지휘부의 군영이 있었다로 해설되는 경남의 '統營' 이란 곳도 일제와 반도의 식민사
학자들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지명일 뿐이다.오늘날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을 김삿갓이 잠시 머물렀다는 전설에
따라 역사와 연계시킨후 지방특화 사업의 목적으로 '김삿갓면' 으로 개명한 경우와 같다.반도에서 경상도나 忠武,
통영이란 지명은 역사가 길지가 않다.통영이자 충무는 본래 固城郡의 일부로 있다가 거제군의 일부를 떼어 통영
(충무)이란 신지명의 도시를 만든 것이다.
11, 절도사들을 세분해 보면 '경기의 종 2품 병마절도사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정3 품의 수군절도사(折衝將軍=
통정대부)2명도 관찰사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수군절도사 1명을 별도로 두웠다(2명).충청도는 종2 품의 병마절도
사를 2명을 두었는데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수군절도사 2명중 1명을 관찰사가 겸직했다(2명).경상도는 병마
절도사를 3명 두었는데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2명은 좌도와 우도에 1명씩 배치하고,수군절도사 3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2명은 좌도와 우도에 두었다(4명).전라도에는 병마절도사 2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1
명의 병마절도사를 별도로 두었으며,수군절도사 3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2명은 좌,우도에 두었다(3명).
황해도는 병마절도사 1명과 수군절도사 1명은 모두 관찰사가 겸직했다(1명).절도사의 군영은 '주진(主鎭)' 이라
고 했고,절제사와 첨절제사의 진영을 '거진(巨鎭)',만호와 도위의 진영을 '제진(諸鎭)' 이라 부른다고 했다.
12, 강원도 역시 병마절도사 1명과 수군절도사 1명을 관찰사가 겸직했다(1명).함길도는 병마절도사 3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2명은 남도와 북도에 1명씩 두고,수군절도사 3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을 하고 2명은 1명씩
남도와 북도에 둔다(4명).평안도는 병마절도사 2명중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하고 1명의 병마절도사를 둔다.수군
절도사 2명중 1명은 병마절도사가 겸직하고 1명은 관찰사가 겸직한다(0) 고 기록하고 있다.즉 평안도에는 바다
와 접해있고 대동강이란 강을 두고 있었음에도 별도의 전문 수군절도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사서의 평안도
와 현실의 평안도는 다른 곳이다.따라서 관찰사 겸직의 조선의 절도사는 병마와 수군을 합쳐 32 자리나 있었다.
그밖의 지방무관 조직들을 살펴보면 정밀하고 견고하다.만약에 이러한 군사조직들이 왜란이나 호란 당시에 반
도에서 가동 되었다고만 한다면,왕이나 조정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정사서에 따라 지방의 문무관 조직
들을 반도로 국한시켜 살펴보면 그가 누구든 빠져나 가거나 들어올수 없을 정도로 군영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13, 이씨 조선의 지방문관과 무관 조직들 위용을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한다.15세기 성종의 경국대전 시대로 되돌아
가 보면 지방의 문관으로 '관찰사 8명,부윤 3명,대도호부사 4명,목사 20명,使1명,도호부사 44명,군수 82명,도사 8명,
판관 36명,현령 34명(종5품),찰방 23명,현감 141명(종6품),교수 72명,참봉 14명,훈도 262명' 등이 자리를 펴고 있었
다.여기에 국경 경비와 軍政을 책임지는 무관으로는 관찰사 겸직을 포함해 '병마절도사가 15명,수군절도사가 17명'
이나 있었다.그 휘하이자 별도의 작은 군벌로는 '병마수군절제사 1명,병마절제사 2명,병마우후사 6명,병마첨절제사
53명,수군첨절제사 12명,수군우후사 5명,병마동첨절제사 105명,병마만호 18명,수군만호 54명,병마평사 2명,병마
절제도위 20명을 두엇었다.실로 강력한 무력(군벌)들이 나라의 요새와 변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왜군이 침략했었다는 경상도 지역은 다른지역과 다르게 '병마절도사 3명,수군절도사 3명 휘하에 병마우후사
2명,병마첨절제사 5명,수군첨절제사 2명,수군우후사 2명(좌도,우도),병마동첨절제사 20명,수군만호 19명,병마절제
도위를 46명이나 두었다.그런데도 왜군은 침략하여 무인지경으로 달려 조선의 도성에 14일 만에 도달했고,이어 왕
이 도망가는 수모를 겪었다고 왜곡된 역사를 전한다.
14, 사실 임진왜란이란 역사적 사건을 반도에서 해설하면서 반도의 전라좌도와 우도의 절도사들이 관여한다는 것은
왜군의 침략 의도나 목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특히 경상좌도와 우도에 포진했던 지상군과 수군의 무관 조직만해도
수십만의 왜군들을 충분히 물리 칠수가 있었다.북방의 청나라 胡軍들이 침략했다는 호란의 경우도 그렇다.반도에 강
제로 이식된 역사를 보면,반도로 들어온 북방의 침략군은 반도의 북방이자 평안도와 황해도를 통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평안도와 황해도 역시 경국대전에 의한다면 병마절도사 휘하 막강한 무력이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군들
이 내집에 들어오듯 무혈로 도성이자 한양을 쳐들어 올수가 없다.'大東輿지도와 동국輿地승람' 에서 '東輿와 輿地' 가
글자로 말해 주듯이 대황제국의 위용을 모든 정서서들이 밝혀주고 있는한,황제국의 역사서를 들고 반도에서 신음할
필요는 없다.
기존의 역사해설에서 반도는 늘 책봉을 받고 정삭(년호)을 받아다 썼다고 해설되는 나라(제후)가 어떻게 '祖나 宗' 이
란 묘호를 쓸수 있나.이런 해설부터 고쳐야 한다.부연 설명을 또 하자면,통일신라는 '9주 5소경,117군,293현' 의 대국,
고려는 '4경,8목,15부,129군,335현,29鎭' 의 중원 황제국,이씨 조선은 '6부,16(19)목,4대호부,39(45)도호부,91(84)군,
180(171)현' 을 거느렸던 대왕국 이었음을 역사서들이 말하고 있는데도 역사서를 들먹이며 거짓말 해서는 안된다.
15, 한반도에 있는 충청북도는 바다나 대강이 없다.그래서 수군을 통제하는 수군만호는 없다고 쓰고 있다.그러나 정
사서에는 수군들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수군이 '충주 465명,단양 26명,청풍 21명,
괴산 137명,음성 46명,연풍 13명,제천 70명,영춘 15명,청주 47명,옥천 87명,영동에 85명,진천에 213명,보은 136명,
연기 156명,전의 92명' 이나 있었다고 쓴다.특히 제천이란 곳은 제대로 된 하천이 있을수 없는 해발 230m 의 고지대
라 수군이 있을 필요가 없다.그런데도 수군이 70명이나 있다고 한다.괴산에도 작은 괴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수군을
둘 정도는 아니다.이곳도 수군이 137명이 있고,지상군은 66명 정도였다.반면에 지상군이 단양 26명,청풍 26명,괴산
66명 뿐인데도 종 4품의 '병마동첨절제사' 를 두고 있었다고 하나,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대륙의 청풍,괴산,단양이
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기록에서 단양현감은 종 6품이었고,26명의 지상군 지휘관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두었
다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충북의 '연풍,음성,영춘,제천' 등지에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 를 두었다고 하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누구를 막
기위한 병마도위인가?더하여 반도의 강원도 첩첩산골에 배정된 역사의 정선(24명)과 횡성(20명),인제(4명)에도 수군
을 두었다고 역사서는 쓴다.그러나 그 병마동첨절제사,병마절제도위및 수군만호의 '諸鎭(제진)' 들의 흔적은 어디 에
도 없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려만리지국이라고 가로(동서) 5천키로 세로(남북) 1천키로로 대충보면 맞을것 같습니다
정치행정에 관한건 기록으로 남으나 진실의 지명과 함께 있었던곳은
지명이동으로 인하여 확실하게 알지못함을 그래서 모두 속고있습니다
세계가 협잡해서 우리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한 나머지 지명이동을 시키고 그래야만했던
서양의 자신 역사를 그릴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댓글 감사 합니다.냉전종식과 세계화,더불어 역사의 종말을 맞았다고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했지요.역사에서 배울것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를 알고자 함이지요.그래서 역사를 현대사라고 합니다.해석의 시대가 지금이니까?역사 강역 연구를 통한 자존감의 회복도 많이 필요하지요..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조선의 군대의 규모나 수군의 위치 등이 반도조선사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확실한 수단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재활용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폐기물이라는 것 다시 한 번 실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원전을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합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경국대전의 기록은 과거에 접하였지만
고려의 기어만리 강역은 상상이 불가능한 영역까지 이르네요
동유럽까지 영역을 넓혀도 될른지요.....
이해는 합니다.지구조선사란 이름의 카페도 있습니다만,정사서들의 기록에 동유럽은 없더군요.실제로 동유럽을 보면 유목민들의 고향으로 정착민들을 중심으로 엮어진 역사서들에는 타당함이 적더라구요? 실제로 유목민들은 문자가 없는 경우가 많아 연구에 어려움이 크지요.섬서성과 사천성 동쪽의 동국 기록들은 있습니다.조선은 동방(동국=조선)이란 뜻이고,고려란 황제국으로 중원(중국=까오리)의 제국이란 뜻이니까요?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