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영조의 홍룡포/중: 태조의 청룡포/우: 고종황제의 황룡포
임금
그러나 곤룡포는 용문양이 들어간 옷을 의미하는 것으로 곤복 익선관
袞龍袍
"곤복", 또는 "용포"라고도 한다. 수나라 이후 고려, 조선, 베트남, 류큐국의 황제, 국왕, 황태자, 왕세자 등이 착용하던 단령 형식으로 되어있는 웃옷이다. 용은 동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성스러운 동물인데, 제왕은 하늘의 대행자이기 때문에 용으로 비유를 하였다고 한다.[1] 노란색, 또는 붉은색 비단으로 지었고, 황색 단(緞)이나 사(紗)에 붉은색 안을 넣었으며, 가슴, 등, 양어깨에는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을 붙였다고 전한다.
2. 한국의 곤룡포
2.1. 고대 ~ 중세 왕조
649년 신라 진덕여왕이 중국식 의관을 채택한 이후 신라~고려 시대 임금들은 단령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를 지향하였기에 태조[2] 이는 황색 의복이긴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용보가 붙여져 있는 그런 곤룡포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곤룡포는 명나라 이후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문종 12년(1058) 4월 때 문종이 신하에게 군주의 의복 색에 질문하자 신하는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의복 말고는 입을 수 있는 의복은 없다."고 대답하는 기사가 있다.[3]
의종 대에는 여러 왕실 행사에는 자황포(赭黃袍), 치황의(梔黃衣)를 입는다고 상정한 바가 있다.
몽고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충렬왕은 몽고의 예를 따라 지황(芝黃)색 옷 입으려했지만 딱히 의복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다시 황포를 입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년) 윤 1월 7일의 기록으로 보면
"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
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고려 국왕도 우리에게 익숙한 명나라식 곤룡포를 입게 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곤룡포를 입을 때는 익선관
이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향이 큰데,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년) 12월 25일 기사를 보면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황제·황태자와 친군왕세자(親郡王世子)는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데 황제의 곤룡포는 황색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적색인 것으로 되어 있고....... 면복(冕服)은.... 위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그 제도가 대개는 같고 단지 장수(章數) 및 물색(物色)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명나라에서 황제의 곤룡포는 세계의 중심이란 의미에서 황색이었고, 그 제후왕의 곤룡포는 붉은색이었다.
곤룡포 서열에 대해 황색>>넘사벽>>적색>청색 순서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에만 통용되는 말이다. 이유는 조선왕조의 임진왜란 곤복
홍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왕 26년(1444년) 부터다. 세종 26년 기사를 보면 구장복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입는 옷(상복常服/일상으로 입는 곤룡포) 및 그에 갖추어야 할 모든 부속 장식품까지 일습을 내린다.
또한 세종 32년 기사를 보면 사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紗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나대홍직금곤룡포(羅大紅織金袞龍袍)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홍직(紅織)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즉 붉은 색으로 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태조 어진 중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초상화도 남아있지만 이것은 후대인 1837년에 모사된 것으로, 헌종이 당시 시대상에 맞게 붉은색 용포로 그리라고 지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태조가 생전에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사극 중에서는 용의 눈물
한편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
조선 시대 왕세자의 용포는 선조 때까지는 붉은색이었다가 광해군 때 검은색 또는 아청색[4] 현종 즉위년 5월 9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사왕(嗣王)이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검정 곤룡포를 입고 규(圭)를 받들고 여차에서 나오자...."
라고 되어 있다.
국왕의 보는 오조룡(五爪龍),왕세자의 보는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의 보는 삼조룡(三爪龍)으로 하였다. 조선 시대 보의 크기는 시대마다 다른데, 태조와 세조, 영조의 어진에 그려진 보는 매우 커서 가슴과 복부를 거의 다 덮을 정도이고 금실로 옷감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들었지만(어진 그림을 보고 추정하는 것으로, 수를 놓은게 아니라 금박을 옷에 찍어 만들었다는 학설도 있다), 고종황제의 사진이나 영친왕 흥선대원군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홍룡포는 황태자의 용포가 되었고, 황제는 황룡포를 착용했다.[5]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한 후 귀국해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를 배알할 때 입었던 것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곤룡포 실물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종 황제의 황룡포는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있다.
3. 중국의 곤룡포
중국에서는 통일왕조를 세운 수문제가 처음 황색으로된 용포인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당태종의 황룡포
송나라 황제들은 주로 붉은 색상의 단령을 착용한 것으로 남아 있다.
좌측은 명나라 선덕제, 우측은 그의 아들인 정통제
원래 명나라의 황룡포도 조선의 홍룡포처럼 몸 앞뒤와 양 어깨에 용보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정통제가 토목보의 변으로 폐위되었다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보의 갯수도 늘이고 원래 곤복에만 붙이던 12가지 문양[6]
명나라 황제 곤룡포 중에는 곤복
명나라 황제 용포의 한 종류로 곤복 곤복[9]
정확한 등장 시점과 구체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정통제의 어진 관복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황제의 곤복 사용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성종과 중종 실록[10][11]의 기사에서는 '명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황색의 용포를 입는다'며 명나라 정통제 시기가 지난 즉, 12장 곤복이 등장한 이후다. 모든 대신들은 제복(祭服)을 입는 이 엄중한 국가 의례 때 입을 수 있는 황색 용포는 무엇일까? 바로 현색 곤복과 똑같은 12장 문양이 들어가는 12장 곤복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관련 학계에서는 12장 곤복이 등장하면서 현색 곤복을 일정부분 대체하여 착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진 만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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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黃袍) 차림으로 일강(日講) 듣는 중인 만력제_1585년. | 운견통수용란포(雲肩通袖龍襴袍) 차림으로 경연(經筵) 중인 만력제_1583년. | 운견통수용란포 차림으로 어문청정(禦門聽政) 중인 만력제_1577년. | 4단용포 차림으로 알릉(謁陵)하고 돌아오는 만력제. |
명나라 시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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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색 8단용 원령포 복제품. | 청색 4단용 직신 유물. |
청나라는 자신들의 전통대로 소매가 좁고 기마에 편리한 의복을 사용했지만 황제의 용포에 수놓은 문양 등은 대체로 명나라의 제도와 유사한 편이다.
세종대왕 시절, 신숙주는 이 곤룡포를 이불로 사용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세종이 갸륵히 여겨 덮어준 것이긴 하지만, 신숙주에겐 정신적 벌칙(…)
포청천 시리즈 가운데 '이묘환태자'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송인종
인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던 인조는 추위와 피로로 인해 제대로 거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인근에 살던 나무꾼인 서흔남이란 백성이 직접 인조를 업고 피신하였다. 이에 인조는 보답으로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서흔남은 인조가 입고 있는 곤룡포를 입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인조는 선뜻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
원래 곤룡포는 한 번 입으면 태워버리는 일회용이었다.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
2000년대 이후로 결혼식 폐백용 복장이 기존의 문관 관복인 사모, 단령에서 업그레이드되어 몇몇 결혼식 업체에서는 신랑에게 익선관과 곤룡포
어떤 만화의 어떤 직장 작가
생전 이구씨가 양자로 지목했던 이원씨의 곤룡포는 검은색인 흑룡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