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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깃든 온달산성을 찾아서...
<전설과 설화도 역사의 일부다>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시장바닥에서 구걸하던 바보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맹장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극적이다. 부와 영화의 상징이던 고구려 공주가 자신을 내던지고 굳은 의지로 한 사내를 키우고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는 전설은 뭇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다.
국문학적인 온달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설화의 수준에 머물지만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가면 더욱더 화려한 주인공으로 승화된다.
온달과 평강공주는 엄청난 신분 격차를 뛰어 넘는 단순한 설화 속 인물들이 아니다. 정말 온달은 바보였을까? 라는 의문이 역사적 사실로의 재탄생을 낳았으며, 사료의 분석과 발굴의 게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역사 소설가 이기담과 역사학자 임기환은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에서 온달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낸 사람들이다. 온달이라는 설화에 묶였던 전설 속의 일화는 당시의 민족, 계급, 이데올로기 등으로 파고 들어가며 거대담론의 중요한 사실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온달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6세기 고구려 사회에 실존한 하급 귀족 출신의 인물일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역사와 설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온달의 참 모습을 적고 있다.
설화와 역사가 결합하여 당시의 상황과 시대적 역사성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또는 문자로 전해지며, 이야기 줄거리에 상상의 힘이 보태지면서 새 줄기가 생기고 잎이 무성해진다.
<남한강과 절벽으로 천험의 요새를 이룬 온달산성>
<줌으로 당겨 본 온달산성>
<최가동 마을을 지나 산꼭대기에서 산성으로의 산행이 시작된다>
<북쪽 망루>
<충주 고구려 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연은 삼국사기 45권에 들어 있는데 스토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설화에 의하면 온달은 촌놈이고 못 생겼으며 가난했다고 한다. 그는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팔아 소경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늘 말없이 누더기 차림으로 동네를 지나치곤 했다.
시장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놀렸는데 평원왕은 늘 울기만 하는 평강공주에게 또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다.
어느 덧 울보공주가 시집갈 때가 되자 평원왕은 공주를 상부 소씨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공주는 “왕의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며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평원왕은 펄쩍 뛰었지만 공주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화가 나서 공주를 궁궐 밖으로 쫒아냈다. 결국 쫓겨난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온달에게 글도 가르치고 말 타기, 활쏘기를 가르쳤다. 바보 온달이 온달 장군으로 거듭나는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공주는 온달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무술을 익히게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삼월삼짓날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가 열렸는데 온달이 능숙하게 말을 몰아 많은 사냥을 하였다. 평원왕은 그가 온달임을 알고 놀랐다.
신분의 벽이 두꺼웠던 고대사회지만 그나마 신분 이동이 조금은 자유로웠던 고구려이기에 그리고 어지러운 세월의 소용돌이 속이었기에 온달의 뛰어남은 평원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온달은 요동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평원왕은 전공을 기려 대형 벼슬을 내렸다. 평민에서 그야말로 벼락출세한 셈이 된다. 영양왕이 즉위했을 때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고 그 이북까지 영토를 삼으려 했다. 이에 온달은 자청하여 ‘죽령 서쪽을 빼앗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출정하였다. 동쪽의 울진지방과 서쪽 한강 일대의 옛 고구려 영토를 찾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온달은 신흥 무사계급으로 성장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온달설화는 고구려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하였고 평민들에게 전쟁에서의 공에 따라 신흥귀족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은 인물이기도 했다.
혹시 평원왕이 시대가 요구하던 참신한 영웅을 평강공주를 내세워 사위로 삼아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온달산성에서 보이는 남한강과 주변 산 모습>
<현판암으로 견고하게 쌓은 온달산성>
<성(城)의 명칭과 의미>
성(城)의 뜻은 본래 인민들의 생업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흙으로 쌓은 방어시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곽은 내성을 의미하는 성(城)과 외성을 의미하는 곽(廓)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즉 성곽은 일정한 영역 안의 생활인들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로부터 평안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하여 만든 인위적인 시설물을 말한다. 또 성곽은 나라의 겉옷과 같은 것으로 외환도 막으려니와 내부의 반란과 폭동․내전 등 무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한편 나라 ‘國(국)’의 의미가 인민[口]이 일정한 울타리 안[口]에서 토지[一]를 경작하며 무기[戈]를 가지고 그 생산물과 사회 안정을 지키는 뜻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로 그 울타리가 성(외성, 국경)인 것이다.
따라서 성은 곧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곽은 시대와 위치에 따라 국가의 상징인 왕권 등 절대 권력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심이자 왕권의 상징인 궁성과 도성이 축조되고, 각 고을에서는 평화로운 생업과 생활을 위하여 평지 읍성을 쌓았으며,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지형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고 샘을 찾고 식량을 비축하는 등 시설물을 축조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도성제(都城制)를 살펴보면 삼국시대 도성은 왕권의 상징뿐만 아니라 방어기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도성은 방어기능보다 점점 도성 그 자체가 왕실과 국가의 표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성은 단순한 적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와서는 오히려 왕권과 국가의 상징으로서 그 성격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에게 당나라 세력을 축출한 뒤에 성을 쌓는데 대한 의견을 전하면서 “나라의 정교(政敎)가 바르면 비록 풀만 난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하여도 인민들이 감히 이것을 넘지 못하기에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실로 밝지 못하면 장성(長城)이 있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곽이 외적 방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란이나 기층민의 반란에 대비하여 왕권을 상징하고 이를 지키지 위한 수단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나라를 지키는 진정한 힘은 정교를 밝게 하여 인민들이 평안하고 풍요롭게 산다면 그 자체가 국력이고 방어력이 되는 것이지, 인민들의 노역을 강요한 시설물 축조에 의해 국가와 왕권이 지켜지는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성곽의 의미는 시대와 장소 따라 달리할 수 있으나, 대내∙외적으로 나라와 정권을 상징하고, 지배집단에 의한 피지배집단의 통치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국력을 표현하며, 완강하고 횡포한 내외의 적대세력을 물리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온달산성 남문으로 보이는 소백산>
<남문>
<남문과 소백산>
<온달 세트장>
<곡성의 만으로 축성된 온달산성>
<고구려성에 대하여>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중국의 양자강과 황하 주변 그리고 만주 벌판이 우리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2007년 백두산 트레이킹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만주벌판과 중국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들을 현장에서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신라와 백제의 유적지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문화의 체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산성의 답사에서 갖는 기대도 컸다.
고구려가 북방에서 여러 민족들과 다투면서 영토와 국력을 확장하고,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와 겨를 수 있었던 것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산성을 쌓은 성곽에 힘입은 바 크다.
고구려 초기에는 도읍을 산상에 정하였다고 전하는데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기록이 나오는데 외적 침입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於沸流谷(어비류곡) 忽本西域(홀본서역) 山上而建都焉(산상이건도언)>
유리왕의 국내성과 산상왕 때의 환도성, 동천왕 때의 평양성 축성 등은 고구려가 국토와 왕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산성은 대부분 만주 지방에 남아 있는데 이는 요동 반도로부터 요하 동방에 걸쳐 방어선을 이루도록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석재를 정연히 쌓아올린 석루로 산정으로부터 골짜기에 걸쳐 고리모양으로 돌아 나감는 형상으로 축성하였으며, 가장 낮은 쪽 근처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가장 낮은 곳이 망대가 되도록 하여 자연적 조건을 잘 이용하였다.
천험의 지세인 요동성을 얻은 영류왕은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개소문을 시켜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중국에서도 크게 두려워하였음이 기록에 보인다.
수의 양제 때 고구려 침공에 참여했던 전 의주 자사 정원숙이,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 운반이 곤란하고, 동이는 성을 잘 지키므로 단번에 함락시키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안시성의 처절한 일전은 중국 역대의 가장 영명하다는 당태종의 패주와 부상으로 너무도 유명한데, 이런 고구려의 굳센 항전은 강인한 기세와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성곽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패망할 당시 고구려에는 176개의 성이 있었고, 호구(戶口)는 69만호라고 되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만주 지방의 고구려 산성은 성자산산성, 간도의 삼산산성, 요동에 있는 동방 해성의 영성자와 남방 산성, 개평 석성산성과 단산자 산성이 있다.
<한국의 산성에서 가장 미학적인 특징을 지녔다>
<북문과 온달성>
<남서벽에 쌓은 성곽>
<현판암으로 겹겹히 쌓은 온달성>
<남한에 위치한 성곽 중 고구려 성으로 대표적이다>
<북동쪽 성문 모습>
<온달산성 개요>
온달산성은 서북쪽으로 남한강 상류와 절벽을 끼고 있는 해발 427m의 산 정상에 축조되었는데, 서남쪽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납작하고 반듯한 정판암을 사용한 까닭에 다른 산성과 달리 매우 특이하다. 성벽의 내외면은 모두 석축이며, 석재는 대부분 검은 색깔을 띤다.
성벽이 휘어지는 곡성 부분은 완만하게 잘 처리되어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데 국내의 다른 산성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또한 동문과 남문 터가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 빠지는 정방형의 수구도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2km, 성벽의 높이는 3~4m인데 높은 곳은 8.5m나 된다. 성벽의 북면에 돌출된 망대가 하나 있으며, 남면에 3곳의 망대가 가지런히 축조되어 있다. 지형으로 보아도 온달산성은 남쪽 영주 방면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온달산성은 긴 타원형이다. 산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린 타원형의 끝이 북쪽 끝에서 둥글게 마무리되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고개를 쳐들어 보아야 할 정도로 장대하다.
성의 서북쪽 면을 보면 지형에 맞추어 크게 만(灣)으로 휘어지게 축성하였고, 중간 부분 아래쪽에는 하수구를 설치하여 물 빠짐이 이루어지도록 배려한 것이 이채롭다.
서남쪽으로의 성곽은 지형도 가파른데다가 성벽이 수직으로 높아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의 성곽은 성 안에서는 쉽게 성벽에 오르도록 흙을 돋우었는데 이 성은 안에서도 쉽게 오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것이 특징이며, 시루떡같이 켜켜이 쌓아올린 성돌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성돌에 끼어 있는 이끼의 모습은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하다.
문헌에 전하는 기록을 보면 <여지도서>에 온달이 이곳을 지키기를 청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선 중기(1530년)의 인문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성은 반쯤 파손됐고, 안에 우물 한 개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500여 년 전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실지 회복을 위하여 남쪽으로 진출했을 때 지금의 죽령과 조령까지 내려왔으므로 실질적으로 온달성이 남방 전초기지가 되었음이다.
실제 영춘면 일대에는 온달 장군에 관한 여러 가지 지명과 전설이 전해지는데, 온달이 전사했다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이 근처라는 주장도 있다.
온달산성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산 정상 부근을 테처럼 둘러싼 산성)으로,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한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6세기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까지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땅이었으므로, 새롭게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가 온달을 시켜 이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고, 온달장군은 한강 유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기반으로 이 산성은 온달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만(灣)의 형태를 이루며 곡선미를 자랑하는 온달성>
<성곽의 모습이 가히 철옹성이다>
<한국의산성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만 형태의 성곽 모습>
<성벽과 배수구>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배수구>
<구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 주는 성곽 모습>
<온달에 얽힌 영춘 지방 지명>
단양 온달산성 주변 4㎞ 이내 47개 자연마을 가운데 36군데에 온달에 얽힌 전쟁 용어가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장군목은 온달이 전투를 지휘했던 본부요, 면위실은 신라의 맹공격에 포위된 온달이 위기를 피한 곳으로 6·25때도 인민군이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이때 피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은 곳은 자삽(자습·自習)이라 한다. 군간교가 있는 군간(軍看) 나루는 전쟁 당시 초소였다. 온달과 평강이 윷을 놀았다는 윷판바위도 남아 있다.
정발1리 선돌은 성을 쌓는 온달을 돕기 위해 마고 할멈이 들고 왔다가 온달이 성을 버리고 후퇴했다는 소식에 땅에 꽂아버린 돌이다. 온달 전사 소식에 굳어버린 여동생이라는 말도 있다.
사지원리에는 태장(泰葬)묘가 있다. 죽은 온달을 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새마을 운동 때 길 뚫리고 돌을 거둬가 무척 초라했으나, 지금은 복원이 이뤄져 웅장하다. 몹시 가물었던 1994년, 마을에서 “장군 자리를 이제 더럽힐 터이니 비로 씻어 달라”며 닭피와 개피를 뿌리자 30분도 안되어 비가 내렸다고 했다. 최근 발굴 결과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신라 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전설이 퇴색됐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온달 무덤으로 믿고 있다.
산성 아래 최가동(最佳洞·최개울) 마을은 고구려 병사들이 고향 식구들을 생각하던, ‘살아생전 마지막 보는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했다. 병사들 피로 적신 피 바위, 무기를 제련했던 쇠골, 지친 병사들이 대굴대굴 떠내려간 망굴 여울, 전쟁 뒤 함께 남은 양국 부상병들이 마을을 이룬 안이골 등 온달에 얽힌 지명은 수없이 많다.
<성곽 보수 공사를 끝내고 완성된 온달산성 모습>
<현재도 북쪽 성곽은 보수 중이다>
<동문과 북문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온달성>
<온달산성이 주는 사회적 교훈>
온달산성이 단양군 영춘면에 위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당시의 삼국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는 항상 한강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맨 처음 도읍을 한강 변에 정한 백제는 선진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 들였고, 강 주변의 평야를 옥토로 바꾸었으며 빠른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런 한강을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고구려가 빼앗게 되었는데 중원 고구려비가 이때 세워진 것이다. 장수왕이 한강지역을 정목하고 고구려 땅임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막강했던 고구려가 신라 진흥왕에게 밀리는 6세기에는 한강유역의 영토를 잃게 된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는 한강을 되찾고 싶어 했는데 이때 온달장군이 등장하는 것이다.
온달장군은 빼앗긴 한강 아래쪽의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 영양왕 1년에 신라로 출격하게 된다.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평강공주에게 “우리 땅을 되찾지 않으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요.”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전장에 나선 것이다.
이때의 접전지가 온달성인데 치열한 전투 중에 온달장군은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관을 움직이려 했지만 관이 꿈쩍도 안했는데 평강공주가 와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갈라졌으니 돌아가시라”하고 말하니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사모정(思慕亭)은 온달장군의 관이 멈추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온달산성을 답사하며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갈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북쪽 망루 근처는 성이 허물어져 있어 보수가 시급하다>
<북쪽 망루 근처 성곽 모습>
<현존하는 고구려 성의 망루 모습>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과정에서 부유해진 평민 계층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사회 변동기였다는 사료로 거론되기도 한다. 미천한 출신의 온달을 등장시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을 만들어내고, 당시의 정서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는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 넘는 당시의 이슈로 볼 수 있다. 미천한 충신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의 결단력이 용맹한 장수로의 거듭나는 일화를 통하여 고주의 주체적 삶과 민중의 소망과 언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달 설화가 당대 사회의 이념에 매몰된 시골 한 청년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가능성으로 승화시킨 점은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자기를 비약시키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역사적 사료와 구전의 테두리라는 제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삶의 교훈을 준다.
첫째, 평강공주를 통하여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둘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셋째,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
넷째, 사회의 편견이나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능력 있는 사람의 현명함보다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일깨워준다.
온달에 대한 글을 쓴 이기담은 소서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서노”와 “대륙을 꿈꾸는 여인” 등을 펴냈다.
<사모정>
<영춘교에서 본 온달산성>
▣ 이기담과 임기환이 쓴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의 Short Summary
『삼국사기』에 기록된 후 1,40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온달은 실존 인물이지만,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없어진 보편성을 띤 설화 속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온달을 ‘바보’로 생각하면서도 ‘단순히 바보로 단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상반된 인식.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키포인트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주인공들이었다. 시장거리에서 구걸하던 바보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맹장으로 변신하는 극적인 성공 스토리, 그리고 부와 영화를 초개처럼 내던진 공주의 굳은 의지와 뜨거운 사랑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온달 이야기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국문학계가 전담해왔다. 국문학계에서는 온달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설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온달을 단순히 설화 속 주인공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은 고구려 사회에 실존한 하급 귀족 출신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역사와 설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온달의 참모습을 더듬어보았다. 설화와 역사의 결합인 셈인데, 이러한 시도는 온달 이야기에 역사성을 입혀주는 동시에 민족·계급·이데올로기 등 기존의 역사학이 파고 들어온 거대담론의 무거움을 벗겨내어 인문학의 다변화를 꾀하고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에서는 온달이 과연 바보였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설화가 가진 픽션으로서의 성격을 고려하려고 하다 보니 소설가적 감각이 요구되었고, 엄연한 설화를 역사학의 잣대로 엄정히 분석해야 될 필요를 좇으려니 자연히 역사학자의 냉철한 시각이 필수적이었다. 온달을 설화라는 테두리에서 끄집어내 역사의 전면에 세우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였다.
온달 이야기에는 설화와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대체로 온달과 평강공주가 만나게 되는 부분까지는 허구일 가능성이, 온달이 사냥대회에 나가 무공을 세우고 벼슬을 얻어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책은 「온달전」을 해체하여 온달이 실존했던 인물이며 바보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온달 이야기에서 설화라는 구름을 걷어내고 보니 바보스런 온달 대신 고구려 옛 땅을 되찾고자 제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고구려의 어느 용맹스런 장수가 남았다.
한편 온달이 바보가 아니었다는 점, 평강공주와의 만남에도 허구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논증을 통해 밝힘으로써 온달 이야기가 계속 설화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소설가와 역사학자의 대담자리를 마련하여 온달 설화의 미래를 내다보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사진을 보니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강건너 차를 타고 가면서 그냥 처다보기만 하였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성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오작교선생님~저도 살곰살곰 공부 많이합니다...안온한밤 되세요...
지향님! 살곰살곰이 아니고요, 전문가이십니다. 제가 많이 배웁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멋진 풍경 감사히 잘 받습니다...
예~고맙습니다 자주오셔서 많은참여 바랍니다...
장시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온달산성과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설화와 역사적사실, 각분야 학자들의 견해와 소설을 쓴 작가의 숨결까지 느낍니다. 지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제가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일인데 그분이 집나가면서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돌아오지않겠다(장부출가불생환)칠판 가득써주고
열변을 토했는데 온달도 출정하면서 '성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했군요.
방대한 자료, 꼼꼼한 설명. 존경스럽네요.저는 답사는 많이 다닌 편인데
정리하고 사진찍을 줄을 몰랐습니다.
언제 한번 인근을 답사하고 한번 글올려 보아야겠다는 충동이 새록새록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