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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너가 바로 나로구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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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바로 나로구나]
정대구 시집 / 시산맥시인선 015 / 시산맥사(2014.11.2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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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바로 나로구나
정대구
저 예쁜 여인과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수작을 걸며 오솔길을 걷고 있는 숫기 좋은 너가 바로 나로구나
그날 저녁 노래방에 가서 밤새도록 수십 곡씩이나 목이 터져라 줄기차게 불러대던 너가 바로 나로구나
탱고면 탱고 왈츠면 왈츠 고전무용이면 고전무용 막춤이면 막춤 못 추는 춤이 없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어느 회식 모임에 나가 품위 있게 음식을 들며 능란한 화술로 좌중을 휘어잡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저것 좀 봐 또 저것 좀 봐 모두가 어울려 확 풀어져 거침없이 노는 데도 역시 멋진 너가 바로 나로구나
아무리 술이 떡이 되어 돌아와도 마누라의 푸근한 품에 따듯이 안기는 대접을 받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나에게는 없는 너 내가 부러워하는 너의 못난 짝퉁 나가 바로 나로구나
내 별을 찾습니다
정대구
별 볼 일 없는 일에 억매이다 보니
정작 내 별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서해 그 섬에 가면
내 별을 만날 수 있을 런지
별난 사람 다 보겠다고
사람들은 나를 흉보겠지만
분명 그 시절 그 섬에
그미의 두 눈동자에 꿈끄듯
내 별이 들어 있었는데
서해 그 섬에 다시 가면
바닷가 모래언덕에 벌렁 누워 있어도
반짝반짝 하늘가득
눈으로 가슴으로 입으로 마구 쏟아지던 별,
나의 별을 찾습니다
귓속에서 매미가 울어요
정대구
귓속에서 매미가 운다
들어오나 나가나
시끄러울수록 더 커지는 매미소리
의사선생 왈
이명은 스트레스가 쌓여 생기는
병도 아닌 병입니다
따라서 약도 없어요
안팎으로 신경 끄세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풀어내세요
매미는 절로 나갈 겁니다
겨울에도 시끄러운 매미소리
세상소리 듣지 말라고는 소리가
스트레스 되어 더 높은 매미소리
나는 물입니다
정대구
나는 물입니다
금붕어가 마시고 금붕어 되어
뻐금뻐금 나를
물었다 뱉었다 하며 놀고
고래가 마시고 고래 되어
분수처럼 등으로 나를 품어 올리고
꼬리로 바다를 치며
바다와 놉니다
나는 물입니다
뿌리가 나를 빨아들이고
하늘로 팔을 뻗어 바람과 놀고
풀들이 나를 실어 올려
풀이 되어
바람에 흔들립니다
나는 물입니다
짐승이나 새가 마시고 짐승이나 새가 되고
벌레나 매미 잡자리가 빨아 마시고
벌레나 매미 잠자리가 되어
땅을 기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가지 나는 물입니다
나는밥통, 나는 약주머니
정대구
나는 밥통이다 하루 세 그릇×365, 거기에 다시 곱하기 내 나이를 먹은, 한 끼도 거를 수 없는, 거르면 큰일 나는, 나는 걸어 다니는 멍텅구리밥통
나는 약주머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지금도 각기 다른 알약을 몇 병씩이나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복용하는, 딸랑딸랑 소리 나는, 나는 약 주머니
밥과 약,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두보의 율시 강촌에서(多病所須唯藥物 微軀此外更何求)
나를 찾습니다
정대구
TV 안에 있는 건지 TV 밖에 있는 건지
드라마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내가 나인지
나는 없고
드라마 주인공이 나인지
속으론 타면서 그녀 앞에 얼어붙는 나
불인지 얼음인지
불과 얼음이 만나 물이 되어버리는 나
갑돌이도 아니면서 그런 척 안 그런 척 하는 나
어느 것이 나인지
매번 뭔가에 정신이 팔려
넋 놓고 먼 산 바라볼 때
나는 어디 잇는지
나는 없고 먼 산만 있는 건지
그녀만 있는 건지
물밑 속에라도 숨어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나는 또 누구
지금 그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그 나가 나인지 저 나가 나인지
그도 저도 까먹는 이 나가 나인지
날더러 야하다고
정대구
남들은 날더러 야해라 애해 너무 야하게 벗긴다고 말들 하지만
더 빼고 벗겨야 할 것들 나에겐 아직도 많아
몸에 밴 50년 절은 백묵가루하며
익숙한 고전적 정서하며
뼈대 있는 집안에서 뼈에 박힌 엄숙주의하며
나의 지유에 제동을 거는 것들 너무 많아
벗겨야 해, 더 야해지고 야해야 해
알겠니?
알겠어, 내가 나를 더 벗겨야 하는 이유
빛
정대구
어느 날
어린이집에 다니는 어린이와 엄마가 나누는 말을
중간쯤부터 들었습니다.
그럼, 엄마, 이 세상 모든 것들
다 엄마 아빠가 있는 거야?
그럼,
그럼, 저 전구도?
전구? 그래 전구도 엄마 아빠가 있지.
누구야? 어떻게 생겼어?
응, 전구의 엄마는 음전기
전구의 아빠는 양전기
양전기는 +(♂) 이렇게
음전기는 –(♀) 이렇게 생겼단다.
어떻게 불이 켜져?
양전기어ㅘ 음전기가 만나 뜨겁게 사랑을 헤서.
그럼,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날 낳은 거야!?
그렇다니까.
엄마, 그럼 난 엄마 아빠의 빛?
옳지, 그래그래
너는 엄마 아빠의 빛
우리 집의 빛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
내가 들은 부분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뿌리들의 합창
정대구
뿌리는 불평하지 않는다
햇빛 못 보는 뿌리들이
햇빛 받겟다고
잎이나 줄기가 고되겠다고
불평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줄기나 잎에게 대신 빛을 보게 하고
자신은 완강히 빛을 거부하고
자유공간을 거부하고
더 깊은 어둠 속 파고 들어가서
끝끝들이 생生을 밀어 올리는
목숨 건 침묵의 노래
뿌리들의 합창이
세상을 푸르게 한다
수평선의 지퍼를 열고
정대구
하늘 밖인가 하늘 안인가
바다 밖인가 바다 안인가
달아나는 바다와 하늘이 맞물린 지퍼
누가 열어 보았나
열고 나가 보았나 들어가 보았나 하 궁금해
배도 띄워보고 구름도 띄워 보고
불고기들과 갈매기들을 풀어놓아 보지만
개벽 이후 아직도 열리지 않아
화끈 달은 그녀와 나
물오른 입맞춤으로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처음으로 수평선을 열고 들락날락
바다와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안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정대구
거기 누구 없니 누구 없어
날 좀 살려
연거푸
감감 무소식
위잉 위잉
연속으로
안 보이는 데서 암호처럼 전류가 흐를 뿐
농밀한 흡수지에 흔적 없이 빨려드는
말의 발자국
잠시 뒤,
농부 속에서
물먹은 무슨 물체가
투웅 쓰러지는 소리
아마도 길 잃은 말인 듯싶은 큰 물체가
희망 연습내 별을 찾습니다
정대구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자신 있게 엄지손가락 하나를 추켜세워 볼까
그날
우주로 떠나는 이소연이 그랬던 것처럼
박수갈채를 받으며
주목 받으며
나도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지
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수 있을지
오늘 아침 나는 거울을 보며
씩 웃으며
거울 속 내 앞에서
엄지손가락 하나를 들어 우뚝 세워 보는 연습을 하는 거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그랬던 것처럼
서러운 우산
정대구
나는 우산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누구를 위해
비를 가려주지 못했습니다.
받쳐주지 못햇습니다.
아내마저도 내 그늘 속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마저도 재대로 못 가리고
양 어깨에 구멍 뚫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결코 별 볼일 없는
한 자루 나는 낡은 우산.
서럽고도 서러운
슬픈 가장
-‘을乙’의 비애
정대구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히루 종일 구겨진 얼굴을 그냥 달고 들어갈 수는 없지
말끔히 지우고 밝은 표정을 달고 들어가
마누라와 아이들의 기를 살리고 그들에 의해 다시 구겨지기 위해서라도
꿀꺽, 울음을 가장假葬한 가장假裝의 달인 우리들의 가장家長
가장인지도 모르는 식구들에게 언제나 당당한 가장
안에서 마누라에게 자식들에게
부대낄 대로 부대껴도
밝는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새 얼굴을 달고 나가
또다시 당할 만치 당하고 들어와
꿀꺽 꿀꺽 울음을 삼키는
가장의 명수 우리들의 당당한, 가장 슬픈,
안개경보
정대구
발도 없이 눈도 없이
소리 소문도 없이
코도 냄새도 없이
공간이란 공간을 다 점령해 버린
어느 날 아침 안개군단
어디서 누가 터뜨린 망령인가
지독한 걸식성걸식성
닥치는 대로 침을 바라고
어디서부터 먹어 들어가는지
육중한 빌딩도 집어 삼키고
순식간에 사람도
전봇대도 모조리 주워 먹는 불가사리
최면을 살포하는 선․전․포․고
늘어선 병사들
ㄱㅜㅅㅣㅂㄱㅜㅁㅏㄴㄱㅜㅊㅓㄴㄱㅂㅐㄱㄱㅜㅅㅣㅂㄱㅜ
한꺼번에 몰수된 거리
지독한 오리무중 속에서 이미
사건은 일어나고 은폐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물우물 대항할 무기도 없이
빛도 소리도 없이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수만 수천 수백 수십만 평의 천상천하
우산 1
정대구
같이 받읍시다.
빗방울이 바쁘게 튀는 아스팔트 위로
찰랑대는 감색 스커트 아래
종아리가 눈부신
한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가지 반세가가 넘는 세월
내가 그녀의 우산 되어
어께를 감싸며 낡아갑니다.
전신으로 비를 맞으며
가을비에 젖어
정대구
추적추적 소리가 젖습니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들여 소리를 덮습니다
덫인 만큼 젖은 만큼 또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우산을 받칩니다
우산을 받쳐도 내 마음은 젖습니다
젖은 만큼 마음이 무겁습니다
젖은 마음으로 어딜 가겟습니까
우산 바깥을 우산 안으로 불러들여
진하게 한잔 꺾어야겠습니다
젖은 마음 말려야 하겠습니다
흥얼흥얼 한잔 술에 젖고
빗소리에 젖어서 걸어가는데
걸어가는데 가등 안 불빛고도 기어들어
함께 걷자 합니다
함께 젖자 합니다
시간은 밤 11시로 깊어 가는데
바짝 달라붙는 빗소리
빗소리로 함께 눕자 합니다
나의 시
정대구
달콤 씁쓰름하고 시금털털하고
아리고 쓰리고 짭짜름하고
한도 끝도 없이 몸을 낮추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희망사항은
바다에 가 닿는 거, 증발하는 거
증발하여 다시 구름 되고 물이 되는 거
때로는 뛰어내래 불이 되고
돌도 뚫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고
그 사이 눈물이고 싶고 핏물이고 싶고
종당엔 무취 무미 무색의
투명하고 부드러운 맹물로 돌아가는
나의 시 나의 물
가방의 반란
정대구
나는 당신의 가방
계통 없는 당신/ 주책바가지 당신/ 욕심쟁이 당신
참견 잘하고 간섭 좋아하는 자본주의
자유브인 당신~ 처럼
마구마구 처넣고 쓸어 담는 바람에
난 늘 재배가 불러 퉁퉁해 터질 것 같아
미칠 것 같아
냉큼 내다버리고 싶은데
그게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와
꾸게꾸게 쑤셔 낳은 일상들
뒤죽박죽 팬티 한 몇 장/ 너절한 속옷가지
때 묻는 손거울/ 이것저것 화장 도구 널브러져 있고
돈지갑도 따로 없이 얼마가 어디 있는지
헷갈려 정신 사나워
별의 별 욕지거리
꾸역꾸역 토해 내는 남 흉보기
제 자랑은 진수성찬
모두 수용 거의 용수 쓴 감방수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 모욕
터져 나오는 볼멘소리
젠장, 내가 쓰레기통도 아니고
명색이 가방인데 나, 걸레 같은 자본주의 당신의 가방 안 할래
가방 없는, 가방 바깥이고 싶은 나
나의 존재
내기 나를 내동댕이친다
리모컨
정대구
리모컨은 심심풀이 땅콩이나 팝콘 같은 것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현대판 요술방망이
손 안 대고 TV를 켤 수도 잇고
물론 끌 수도 있고
채널을 이리저리 바꿀 수도 있지
리모컨은 심심풀이 땅콩이나 팝콘 같은 것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손쉽게 손이 가는 군것질
먹다가 흘려도 가볍게
손가락으로 주워 먹을 수도 있는
리모컨은 팝콘 같은 거
위로 올려, 아래로 내려, 더 내려
아내에게 있어서
리모컨은 섹스 같은 거
말 잘 듣는 아이보다 더 말 잘 듣는
남편이 심심풀이 땅콩
그만큼 편안한 거 리모컨
당신의 스트레스를 곧장
카타르시스로 바꿔 놓는 리모컨
나는 당신의 리모컨일 뿐입니다
물의 변주곡
정대구
방울방울 빗방울
돌 틈에서 퐁 퐁 퐁
흙 알맹이 속에서 보글보글
풀잎 끝에서 톡 톡 톡
나뭇잎에서 똑 똑 똑
추녀 끝에서 뚝 뚝 뚝
산골물로 졸졸 졸
폭포수로 콸콸 콸
시냇물로 모여 솰솰 솰
큰 강이 되어 유유히 라라 라
장장 바다에 닿아 둥둥 둥
찰랑찰랑 출렁출렁
금세 먹장구름 속
미세한 안개알맹이 부딪쳐 우르르 쾅쾅
다시 빗방울 후드득
초로草露初老의 길목에서
정대구
결혼식장에서 나와
여의도에 어느 곳을 걷다보니
길 양편에 옷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나를 맞이하는
아가씨들 좀 봐
황홀해라 하지만, 난,
나목처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누나
부끄럽다기보다
비겁하게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남을 의식하지 않는 너희의 그 용기가 부러울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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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나는 미사여구를 찾아 시를 치장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나의 시는 살아 있는 나의 삶의 증언이요 요구다. 언제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그 내용이 좋든 싫든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것은 나를 구성성하는 빛과 그늘이다.
2014년 늦가을
정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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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구 詩集 [※너가 바로 나로구나※]
[ 해설 ] -
시원始原을 향한 질주, 그리고 시
유 정 아(시인, 문학박사)
정대구 시인은 말한다. “나는 미사여구를 찾아 시를 쓰지 않는다.(중략) 나의 시는 살아 있는 나의 삶의 증언이요, 요구”이며 “그 내용이 좋든 싫든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것은 나를 구성하는 빛과 그늘”(「시인의 말」)이라고. 다소 단순해 보이는 이 언설을 들여다보면, 시인은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세목들과 의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현상학적 실체들을 바로 하나하나의 시로 구현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곧 그의 ‘의식의 지향성’(후설)은 “미사여구를 쓰지 않”으려는 그의 의도에 걸맞게 매우 투명한 삶의 내부를 향하고 있다. 그의 시는 가식이 없다. 단순히 수식어를 버린 것을 넘어서 그 어떤 의도적 왜곡이나 비틀림, 애매한 상징이나 비유를 고집하지 않으니 그의 삶과 시 혹은 의식의 지향성을 따라가는데 큰 무리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물입니다
그대 목말라 컵에 물을 따르나요
대접에 따르나요
컵물이 되었든 대접물이 되었든
내 몸을 좁혀 그대 목구멍으로
휘어 들어갑니다
나는 물입니다
그대 슬픈 일이 있나요
힘쓸 일이 있나요
나 눈물 되어
땀방울 되어
그대의 몸과 맘의 수위를 조절하고
달래 줍니다
그대 샤워하고 목욕하나요
그대의 몸
부끄러운 곳 다 구경하고
어루만지며 흘러내리며
구석구석 다 즐기는
나는 물입니다
-「나는 물입니다2」전문
물은 색도 맛도 없고 향기도 없다. 형태를 갖추고 있지도 않다. 공기와 더불어 무색무취하면서도 인간에게 지극한 유용성을 주는 물은 여러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미지의 원형을 물과 불, 흙과 공기로 보고 이를 체계화한 것은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원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 때 상상력은원형을 향해가는 힘이다. 정대구 시인의 상상력은 자신을 물이라는 물질로 유형화하고 그로써 자신의 물질적 정체성을 들여다본다. 물은 특정한 모양이 없으나 역설적으로 어떤 용기에도 담김으로써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더러움을 씻어주는 일을 하는 것도 물이며, 그것은 갈증을 해소하고 위무하는 속성을 보증하기도 한다. 시인은 스스로을 정의하고 삶의 지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속성을 담보한 ‘물’의 상상력을 꾸준히 대입하고 있다.
달콤 씁쓰름하고 시금털털하고
아리고 쓰리고 짭짜름하고
한도 끝도 없이 몸을 낮추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희망사항은
바다에 가 닿는 거, 증발하는 거
증발하여 다시 구름 되고 물이 되는 거
때로는 뛰어내려 불이 되고
돌도 뚫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고
그 사이 눈물이고 싶고 핏물이고 싶고
종당엔 무취 무미 무색의
투명하고 부드러운 맹물로 돌아가는
나의 시 나의 물
-「나의 시」전문
물이 지닌 매력을 시인은 “낮은 데로” 흐르는 것, “바다”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 두고 있다. 첫연에 보이는 물은 “달콤 씁쓰름하고 시금털털하고/아리고 쓰리고 짭짜름”한 것으로 보아 순수한 물은 아니다. 본래의 속성에서 벗어나거나 더해진 즉 오염된 물을 일컫는 것이리라. 결국 이러한 오염된 물, 곧 나는 목적지에 닿기 위해 흐르는 것을 지나 이에 그치지 않고 “증발하여 다시 구름 되고 물이 되는”것을 염두에 둔다. 즉 이렇듯 탄생과 소멸의 순환과정을 온전하게 수행하는 물은 그 자체로 영원성을 담보한 원형질이 된다. 그는 자신과 시를 등가에 놓고 ‘물’의 원형을 대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체적인 시의 지향성을 드러내준다. 맹물 같은 나, 맹물 같은 시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살펴보자면 바로 이 ‘맹물’이라는 것의 정체이다. 관용적 표현으로서의 ‘맹물’은 정의롭고 순결하고 이타적인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는 하는 일이 야무지지 못하고 싱거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남을 넘어서고 이겨야 가치를 인정받는 세태에서 맹물을 자처하는 시인의 태도는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TV안에 있는 건지 TV밖에 있는 건지
드라마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내가 나인지
나는 없고
드리마 속 주인공이 나인지
속으론 타면서 그녀 앞에 얼어붙는 나
불이지 얼음인지
불과 얼음이 만나 물이 되어버리는 나
갑돌이도 아니면서 그런 척 안 그런 척하는 나
어느 것이 나인지
-「나를 찾습니다」부분
정대구 시인은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40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창작활동이 그러하듯 그 출발과 여정은 모두 자아를 찾아가는 일련의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다움’을 찾고 완성해가는 작업을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구현해낸다. 텍스트 안팎을 넘나들며 창작자의 ‘그다움’을 찾아내는 일은 통속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범위에 있다. 숨겨진 아이콘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고 유추하며 나름의 서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하나의 창작을 구현해내는 묘미다.
오랜 시력에서 오는 시적인 물음은 매우 직설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습니다”와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미사여구로 가려지지 않는 맨살이 그대로 보인다. 투명하다.
나는 우산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누구를 위해
비를 가려주지 못했습니다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아내마저도 내 그늘 속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마저도 제대로 못 가리고
양 어깨에 구멍 뚫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결코 별 볼일 없는
한 자루 나는 낡은 우산
서럽고도 서러운
-「서러운 우산」전문
‘물’과 더불어 정대구 시인이 스스로 비유의 상관물로 여긴 여거 개의 사물 가운데 하나가 ‘우산’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우산은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으로 비 내리는 밖과 안의 구분하는 경계를 갖는다. 우산은 외부의 풍우를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조건, ‘나’와 외부를 분리하는 하나의 기제이다. 이런 점에서는 집과 같은 기능을 한다. 우산 속에 있으면 외부에서 내리는 비로부터 안전하다.
외부와 분리된 작은 공간은 잠시나마 외부의 존건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을 수 있으며, 만약에 그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둘만의 친밀감과 동질감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우산은 위로와 구원, 견고하고 청결한 도덕을 암시”(장석주,『철학자의 사물들』)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이라는 고형물과는 달리 우산은 많은 변수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 된다. 바람의 방향을 타면 한쪽으로 기울거나 부러지기도 하고 갑자기 큰 비가 한꺼번에 내리칠 경울 속수무책으로 젖을 수밖에 없다. 우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비라도 맞게 되면 처연한 신체가 되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비롯한 몇 편의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을 ‘우산’이라고 비유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우산은 그 자체로 이미 우산으로서의 기능이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만큼의 결함을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은 내리는 비를 막아낼 수 있는 기본적 조건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자조의 심경을 드러낸다. 정작 “한 번도 누구를 위해/비를 가려주지 못”한 우산은 “아내마저도 그늘 속으로 들어오려하지 않”는, “자신마저도 제대로 못가리고/양 어깨에 구멍 뚫려/비에 젖어 축 늘어진 결코 별 볼일 없는/한자루” 낡은 우산이라고 토로한다. 서러운 고백이다.
나는 밥통이다 하루 세 그릇×365, 거기에 다시 곱하기 내 나이를 먹은, 한 끼도 거를 수 없는, 거르면 큰 일 나는, 나는 걸어다니는 멍텅구리밥통
나는 약주머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지금도 각기 다른 알약을 몇 병씩이나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복용하는, 딸랑딸랑 소리 나는, 나는 약주머니
밥과 약,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나는 밥통, 나는 약주머니」전문
어떤 시인은 자신을 ‘가죽소파’에 비유하기도 한적이 있지만 정대구 시인은 자신을 ‘밥통’과 ‘약주머니’로 형상화한다. 살아오는 동안 셀 수 없이 먹은 밥을 수를 헤아려가면서 스스로를 밥을 담아놓는 “밥통”, 나아가 “멍텅구리밥통”으로 비유하거나 병이 들어온 몸을 치유하기 위해 섭취한 약의 개수를 헤아리다가 그런 자신의 정체를 “약주머니”라고 지칭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뭉쳐진 자괴감으로 그대로 묻어난다. 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적절히 기능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표이다.
나는 당신의 가방
계통 없는 당신/주책바가지 당신/욕심쟁이 당신
참견 잘하고 간섭 좋아하는 자본주의
자유부인 당신~처럼
마구마구 처넣고 쓸어 담는 바람에
난 늘 배가 불러 퉁퉁해 터질 것 같아
미칠 것 같아
냉큼 내다버리고 싶은데
그게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와
꾸게꾸게 쑤셔 넣은 일상들
뒤죽박죽 팬티 몇 장/너절한 속옷가지
때 묻은 손거울/이것저것 화장 도구 널브러져 있고
돈지갑도 따로 없이 얼마가 어디 있는지
헷갈려 정신 사나워
별의 별 욕지거리
꾸역꾸역 토해내는 남 흉보기
제 자랑은 진수성찬
모두 수용 거의 용수 쓴 감방 수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 모욕
터져 나오는 볼멘소리
젠장, 내가 쓰레기통도 아니고
명색이 가방인데 나, 걸레 같은 자본주의 당신의 가방 안 할래
가방 없는, 가방 바깥이고 싶은 나
나의 존재
내가 나를 내동댕이친다
-「가방의 반란」전문
‘가방’에 상정된 의미는 편이성 혹은 포용력 등이다. 규격의 크기만 충돌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잘한 용품 모두 담을 수 있게 설계된 물건이다. 성격이 같은 물품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용도별로 활용할 수 있다. 가령 공부와 관련되었다면 책가방일 것이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면 여행 가방이 될 것이다. 가방이 만들어지기 전 불과 사반세기 전만하여도 네모진 헝겊 보자기로 그 용도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봇짐’이나 ‘책보’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던 것들이다. 눈에 뜨이는 몇 사람들이 앞선 유행을 선도하며 어깨에 메던 핸드백이나 한 교실에서 한 두명의 학생들이 등에 지던 책가방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풍속도이다.
자본주의는 물질만능시대를 불러왔다. 자본주의 시장체제 안에서 소비나 소유의 욕망은 확대 재생산 되면서 거대한 공룡의 모습으로 자본은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계획적 진부화”(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낭비사회를 넘어서』,민음사,2014,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기존이 상품을 의도적으로 진부하게 만들게 하고 싫증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를 말함)의 덫에 걸린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눈이 멀어 소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또한 용도를 위한 물건의 구입이 중요한 것이 아닌 이미지를 구입하는 것에 더욱 비중을 주는 소비의 형태, 즉 고가의 명품구매나 브랜드 선호도를 중시하는 태도도 자본주의가 팽배한 결과에서 온다. 단적으로 ‘명품가방’에 와서 이런 유형의 소비 형태는 두드러진다. 몇 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방이 매장에 진열되기도 전에 판매가 되는 일이 반복되는 일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처럼 가방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양태를 시인은 고발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계통 없”고 “주책바가지”이며 “욕심쟁이”이다. “참견 잘하고 간섭 좋아하는”“자유부인”의 속성을 갖고 있다. “마구마구 처넣고 쓸어 담는” 행태를 자행하며 “배가 불러 터질 것”같이 욕망을 과도하게 소비한다. 가방이 쓰레기통처럼 취급당하면서 가방의 본질을 훼손당한 것처럼 자본이 그 본래의 성질을 잃고 과도하게 “헷갈려 정신 사나운” 지경까지 치닫는 현실이 구현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에 대한 저항을 버리지 않는데 “가방 없는, 가방의 바깥이고 싶은 나/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가 나를 내동댕이치”는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엄밀히 저항이라기보다는 탈주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자본에 저항하는 보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에 공감을 할 수 있다. 자본의 ‘홈파인 회로(니체)’를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탈주이다. “내동댕이치고”달아나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무조건 대안 없이 달아나는 것이 최종회(?)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탈주는 “대체 얼마나 더 비워야/여여한 나를 볼 수 있을까 몰라/”(「나는 누구인지」)로 짐작컨대 욕망을 비워내고 “여여한” 경지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뒤를 잇는 행이 “빌어먹을”이라고 지르는 것을 보면 그 일이 그리 쉽사리 얻어지는 결과는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맹목이긴 하지만
확확 달려서 왔다
불이 나도록 몸을 부리면서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걸음걸음 놓이는 발꿈치에서
머리끝에서
얼굴에서
손끝 발끝에서
더운 연기가 뭉게뭉게
향불 피운 자리인 듯 향내가 난다
아, 내 온몸에서 향내가
-「소신공양」전문
기능 혹은 효율을 강요하는 사회, 그리고 마땅히 이에 적절히 기여해야 하는 책무를 가진 현대 사회에서 시인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올곧게 오래도록 시를 쓴다는 것은 ‘나’를 사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맹물”과 “찢어진 우산” 그리고 쓰레기통과 같은 “가방”이나 “멍텅구리밥통” 또는 “약주머니”로 은유된 삶은 “맹목이긴 하지만 확확 달려” 온 길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놓이는 “걸음걸음”의 “발꿈치”로부터 “언제부터인가”“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능과 효율을 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탈주, 새로운 영토 위에 피는 것은 “소신공양”의 향기로운 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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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정대구 시인은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40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창작활동이 그러하듯 그 출발과 여정은 모두 자아를 찾아가는 일련의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다움’을 찾고 완성해가는 작업을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구현해낸다. 텍스트 안팎을 넘나들며 창작자의 ‘그다움’을 찾아내는 일은 통속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범위에 있다. 숨겨진 아이콘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고 유추하며 나름의 서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하나의 창작을 구현해내는 묘미다.
오랜 시력에서 오는 시적인 물음은 매우 직설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습니다”와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미사여구로 가려지지 않는 맨살이 그대로 보인다. 투명하다.
- 유정이(시인, 문학박사) 시집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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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구 시인∥
∙ 1936년 경기 출생
∙ 숭실대 문학박사
∙ 1972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으로『나의 친구 우철동씨』『무지리 사람들』 『양산일기』등 다수
∙ 수필집으로『녹색평화』『구선생의 평화주의』
∙ 저서로『김삿갓 연구』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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