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명장열전>
(4) 이성계(李成桂) 장군과 피바위
천하 명궁에 목 뚫린 왜장, 남천 바위를 피로 물들여
|
근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기에는 최영 장군 등과 같이 무신(武臣)이었다. 함경도 북방 여진족과의 경계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호협(豪俠)한 기상을 지녀 여진 땅을 넘나들며 자랐다. 이때 사귄 여진 출신의 이지란(李之蘭: 퉁두란)은 이성계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그를 형으로 섬기며 때로는 형제로, 친구로, 전우로, 동지로 지내며 또한 앞날의 원대한 꿈도 같이 꾸며 자란 사이다.
남원 가면 피 흘리는 바위가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내용은 이성계의 화살에 맞은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都)가 흘린 피로 붉은색이 됐다는 전북 남원시 남천가의 바위전설이다. 이 바위는 남원시 인월면 남천에 있는 붉은 바위다. 1380년(우왕 6)에 왜적이 지리산까지 쳐들어와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던 때였다. 조정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에게 왜구 토벌을 명했다.
이성계는 황산에서 아지발도를 잡으려고 기다렸다. 아지발도는 열여덟 살 정도에 키가 8척이 넘는 장사였으며, 철갑으로 온몸을 무장해 화살이 뚫지 못했다. 아지발도의 괴력은 아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지발도는 장차 개성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이었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귀화병과 고려군의 혼성부대를 편성한 뒤 변안열을 참모로 하고 이지란을 부원수로 삼아 전주와 남원을 거쳐 인월로 향했다. 이성계 장군은 본진을 황산에 주둔시켰다. 황산은 운봉과 동면의 중간에 우뚝 솟은 해발 695m의 고지였다.
아지발도는 고려 관군이 토벌 나온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의 용력만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 진을 친 다음에야 인월에 당도했다. 인월과 황산은 가까운 거리였다.
이성계 장군은 이지란과 젊었을 때부터 함경도와 여진 국경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무술을 익히던 사이로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천하의 명궁이었다.
이성계·이지란 ‘황산대첩’ 합작
두 사람은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한 사람이 활을 쏘아 입을 벌리면 다른 사람이 입을 맞혀 죽이기로 작전을 세웠다. 작전대로 아지발도가 다가오자 이성계 장군의 첫 번째 화살은 어김없이 아지발도의 투구를 명중시켰다.
투구가 벗겨지려는 순간 아지발도는 당황한 나머지 벗겨지려는 투구 끈을 내리려고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화살 한 개가 벌린 입을 제대로 명중시키며 목을 뚫고 나가 버렸다. 두 번째 화살은 이지란의 것이었다.
아지발도가 내뿜는 피는 목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아지발도는 중심을 잃고 말 위에서 바위로 굴러떨어졌다. 바위에 피가 벌겋게 고이면서 순식간에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 그 후로 바위를 깨면 붉은색이 나온다고 해 사람들이 피바위[血巖]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남원시는 이 대승을 기념해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라는 표석을 세웠다.
명장의 역사적 기록을 소개하며 전설을 인용한 것이 이상하기는 하나 정사(正史)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 증거물을 제시한 만큼 황산대첩비지를 보면서 우리 선조의 용맹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이성계 장군과 이지란, 두 사람의 동지적 우애는 계속돼 혼란에 빠진 고려왕실을 정리하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개창(開創)해 새 시대 새 역사의 조선시대를 열었다. 이성계 장군은 조선을 세운 태조(太祖)로 518년 27명의 왕조 역사를 열었고, 현재 그의 후손인 전주 이씨는 260만 명으로 이씨 가운데 가장 큰 문벌이 됐다.
귀화한 이지란, 개국공신 1등 올라
이지란은 조선으로 귀화(歸化)해 개국공신 1등에 올라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청해는 함경도 북청(北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李和英)은 세종 초 우군부판사에 이르렀고, 9세손 이인기(李麟奇)는 선조~인조 대에 벼슬해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이 밖에 인기의 아들 이중로(李重老), 중추부첨지사 이핵의 아들 이유민(李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수민(李壽民) 등이 유명하다. 청해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713가구에 1만20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륙지역인 남원까지 왜구의 침입을 허용한 우리의 허술했던 방비(防備)태세는 반성해야 할 것이나, 왜병을 일거(一擧)에 대파한 우리의 용맹은 오늘날 자랑거리로 삼을 일이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추억의 영화 음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