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며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형제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을사년 새해를 맞이한 오늘 우리는 성전에 모여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새로운 축복을 기원합니다.을사년 새해 아침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우리를 구원해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내려주심으로 우리는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새해 아침을 여는 오늘 우리는 경축하던 성탄 8일 축제를 마감하면서 천지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복음 말씀대로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신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예수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왜 예수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꼭 예수라고만 해야만 되는가? 하는 질문도 드릴 수 있지만, 예수라는 뜻은 성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과 맥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에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그래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결국 구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결국 예수도, 구세주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루카 복음 전체는 바로 이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요.예수님께서 유다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하여 오신 분 곧 구세주이심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루카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특히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일생 투신하셨고 그들이 진정한 친구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오늘 복음도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들판의 평범하고 순박한 목자들이 제일 먼저 그분을 찾아가 뵙고 경배해왔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또한 루카는 경건함을 역설합니다.
참된 경건함이란 바로 세상사와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고 그분께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리아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가 바로 경건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성령께서 그들의 삶 안에서 특별하게 활동하시거나 그들이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서 읽으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점입니다.특히 성모님의 일생이 바로 그러 했다고 생각해 봅니다.오늘 복음의 순박한 목자들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순박할 때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 배울 수 있습니다.천지의 모친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한 해 목자처럼 아주 단순하게 살아가는 새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목자들은 그 위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목동들의 이야기와 축하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를 마음속에 새기셨습니다.새해 첫날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 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과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신앙인으로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시며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과 희망을 주고 계심을 알고 깨닫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성모님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받았습니다.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지만,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올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 사랑과 희망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행복의 다른 이름은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복을 빕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평화를 빕니다. 하고 기원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견디어야만 합니다.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아드님의 가시밭길을 함께 가신 삶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레오나르도 다빈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그분께서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는 것도 역사적으로 증명된 겁니다.149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님의 품위를 잘 드러낼 것 같은 19살의 젊은이 피에트로 반디네리를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습니다.12 사도가 그려져 있는 최후의 만찬에 제일 먼저 첫 번째 예수님을 그렸습니다.그 뒤 6년 동안 11 제자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결국 세 번째로 그리고 유다를 누리게 됩니다.근데 유다 이스가리옷의 특징을 잘 담을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그러다가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어느 부랑자의 얼굴에서 유다를 느꼈고, 그를 모델로 배반자의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랑자는 자신이 바로 예수님의 모델이었던 피에트로 반디네리라고 동일한 인물입니다.참 이상합니다. 그 동일한 19살짜리 그 예수님을 그렸는데, 피에트로 반디네리를 바로 보고 예수님을 그렸는데, 마지막으로 그린 유다도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사실은 참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것은 전설이 아니고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고 1492년에 증명된 사건입니다.그렇습니다. 세월은 죄인을 성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성인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새해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365일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지나가는 시간들을 그냥 바라보지만 말았으면 좋겠습니다.예수님의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던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들을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되씹어가며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더욱 의미 있게 느껴보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나간 세월이 모여 얼굴 구석구석에 평화로 가득 찬 인격자로 드러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받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을사년 새해 출발을 하는 아침 허영에 들뜬 우리 마음일랑 모조리 흔들어 없애주시고, 아무리 흘러도 지치지 않는 힘을 우리에게 달라고 천지의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며, 새해에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천지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해 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오늘 강론을 들으면서 이렇게 예수님을 그린 인물과 유다를 그린 모델의 인물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어쩌면 나의 모습은 지금 천사의 모습처럼 미사를 드리고 있지만, 내 안의 모습도 천사의 모습처럼 그렇게 자리하고 있는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있는 사제는 언뜻 보면 예수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속 안에는 유다가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이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모두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늘 말씀드린 대로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의 원천이 되어야 되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의 표출이 되어서 결국 이제는 유다는 사라지고 오직 구원 예수님만이 자리하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