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특구 상해의 거리
중국 땅이 넓은 만큼 도로도 넓었다. 산 하나 막힘없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평야지대에 직선으로 쭉 벋은 4차선 고속도로 (중국에서는 고속도로를 고속공로(高速公路), 주행선을 주차선(主車線), 추월선을 초차선(超車線)이라한다)는 잔디로 조성된 폭 2-3m 정도의 중앙분리대의 넉넉함과 갓길의 여유로움은 우리나라 6차선 도로보다 더 넓어보였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그 구조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나 내부는 한산하기만 하였다. 오가는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 대부분이다. 휴게소 안에는 음료수, 과일, 음식, 차, 옷을 비롯한 기념품 판매대가 있었지만 이용자는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진열된 상품도 팔리지 않아 적체가 오래된 것 같았다. 주차장에는 승용차는 별로 없고, 화물트럭이 상대적으로 많아보였다. 버스도 몇 대 보였지만 우리처럼 관광버스 몇 대가 주차해 있을 뿐이다.
상해 시가지의 도로는 더 넓었다. 오래된 고목나무 프라타나스 3그루가 가로로 일직선이 되게 큰 가지를 벌릴 만큼 넉넉하게 심어놓은 중앙분리대는 폭이 20m는 족히 될 만큼 넓었다. 그곳에다 잔디밭을 조성하여 오가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한 왕복 4차선 도로와 자전거도로, 2차선 정도로 드넓은 인도는 참으로 대국다운 원대한 스케일과 여유가 있었다.
상해시의 번화가는 빌딩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인구 1,700만의 세계적인 산업도시로, 중국최대의 상공업 도시답게 상해시를 상징하는 동방명주탑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에는 88층 자유빌딩을 위시한 수많은 호텔들(호텔을 酒店이라한다) 세계굴지의 상사 건물들, 각국의 은행건물들, 20층 이상의 아파트 군, 각종 공공시설의 웅장함은 개혁개방의 상징적인 경제특구로 각광을 받을 만큼 세계 시장의 축소판으로 시장경제의 활발한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계획경제에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한 그들이 말하는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 실현의 시험장이 되고 있었다.
중심가는 우리나라 서울 번화가를 능가할 만큼 건물의 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했다. 지하철, 전차, 시내버스, 승용차, 자전거가 시내 교통수단으로 병존하고 있었으나 속도가 만만디답게 여유로왔다. 승용차의 물결은 우리나라 중소도시보다도 통행량이 적었으며 번잡하지 않았다. 개발이 한창 진행되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와는 빈부의 격차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토지가 국가 소유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이점을 살려 이상적인 도시개발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두부를 잘라내듯이 기존의 낡은 건물들을 과감하게 철거하고 용도에 맞게 구획정리를 다시 함으로써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길 건너편 미개발지역에는 낡은 단층건물이 잡초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의 거대한 힘이 낡은 건물을 거침없이 때려 부순 후 웅장한 새 건물을 짓듯이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세력이 쇠잔한 사회주의 잔해를 밀물처럼 엄습해가는 기세로 상해시의 개발은 탄력을 얻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명징하게 대비되는 현장이다.
그래서 중국은 무서운 나라인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이를 역이용하는 철저한 실리추구는 등소평이 말했다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유명한 흑묘백묘론의 실체를 보는듯했다.
구시가지의 낡고 작은 규모의 건물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낙후된 모습과 찌든 빈곤의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 놓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60년대 지방 중소도시 뒷골목 풍경과 비슷했다. 노후된 2층 연립주택으로 즐비한 좁은 거리는 차도 다닐 수 없으며, 대나무 가지를 수평으로 드리운 빨랫대에는 겉옷이나 속옷이나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빨랫감이 빈민촌의 상징처럼 내걸려 있었다. 그래서 이웃간에는 어느집 아주머니 팬티는 무슨 색깔을 입고 있다는 것 까지도 안다고 했다. 가게는 그 규격이 일률적이면서도 규모가 3-4평정도로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역시 사회주의답게 평등하게 분배를 한 모양이다. 진열된 상품들은 시골가게의 오래도록 팔리지 않아 사용기간이 지났음직한 먼지 묻은 상품들이 불결하고 궁색스럽게 진열되어있었다. 구멍가게, 식품점, 자전거 수리점, 기계부속품점, 타이어빵구 수리점, 편물점, 농약가게, 완구점, 주점, 음식점 등 모두가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가게들이 조밀하게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때 묻은 옷을 입고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 주인의 형색도 표정 없이 우울하게만 보였다. 생기도 활기도 없는 가난한 시민들의 무표정은 오래 통제된 사회에서 길들여지며 순응해야만 했던 피곤이 쌓여 있는 듯 했다.
우리나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한 골목은 개발이 멈춘 가장 가난한 빈민가중의 하나라고 했다. 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비좁은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돌고 또 돌아 도로 한편에 겨우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청사를 보존하기위한 우리나라정부의 외교적 압력과 여러 통로의 교섭으로 중국정부에서도 이 지역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고 했다. 임시정부 시절만 해도 이곳은 프랑스 정부의 조차지역으로 상당히 활기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곳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청사도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상당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청사 주변이 빈빈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청사 건물도 최근 내부수리를 했다고는 하나 그 규모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임시정부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정부청사로는 초라하기만 하다. 건물 규모는 벽돌집 3칸 2층 건물로 한 칸의 넓이가 3평 남짓하다. 내부 연건평이 30평정도 되는 청사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회의실, 사무실, 간이식당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고 거기에는 그 당시 사용했던 집기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요인침실로 사용되는 방에는 1인용 침대가 두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입장료 징수, 시설 관리, 성금함 관리, 기념품 판매 등은 중국인들이 위탁 관리를 하고 있었다.
상해시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국제도시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겐 해외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로 활동무대로 임시정부 청사 외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면 반드시 거쳐야 할 또 하나의 기념할만한 명소가 있다.
홍구공원이다. 홍구공원을 찾는 우리 일행이 한국인임을 알아보는 듯 공원입구에서 거리의 악사 한사람이 아코디온반주로 아리랑을 목청껏 병창하면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현장에는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위대한 사상가 루쉰(노신-魯迅)의 동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공원 이름도 홍구공원이 아닌 노신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비는 타원형의 자연석에 새겨 의거현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 치우쳐 있는 듯 소외되어 있었다. 이것도 자기네 마음 대로인가 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키 큰 나무들만이 그 때 격분했던 한국의 한 젊은 의사의 장렬 했던 역사적 현장을 증인처럼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키 큰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원형 잔디밭에서 여유를 즐기는 군중들, 인공호수에서 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의 한가하면서도 낭만적인 모습, 떼를 지어 오가는 수많은 행락객들의 대열에서는 어느 누구도 약소국가의 한 젊은이의 울분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국인만이 그때 그 피맺힌 사연을 가슴 속에 담아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