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는 사람들이 몇있다.어려웠던 시절 사람의 정을 나눴던 사람,젊은 시절 서로 좋아서 사랑을 했던 사람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한 그 달콤했던 시절의 상대, 그리고 자기를 이끌어주었던 선배, 삶의 심오한 문제를 경쾌하게 풀어주던 사람 등등 그 가운데의 한 분이 전달문(全達文) 선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지나간 60년 세월로 치자면 그분과의 만남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 가운데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몇가지 영상이 지금도 가끔 떠올라서 문득 만나서 회포를 풀고 싶어진다. 내가 잡지사를 처음 들어갔을때 그분은 그 회사의 편집장이었다.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내게 그분은 글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쳤고 사장에게 나를 잘보이게 하기 위해 가끔씩 당신이 내가 취재한 자료를 기사로 만들어주어 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분이 내게 가르친것은 글을 다루는 재주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이었다.지금 살아계신가.어디 계신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느 문학카페 생각이 나서 그곳을 뒤져보았다. 뒤늦게 배운 컴퓨터 실력이 아렇게 요긴하게 쓰일줄은 누가 알았던가.
나이가라폭포 전달문
역사의 덩이가 쏟아져 내린다
포말을 이룬 장엄은 알알이 부서진 한처럼 조각난 밀어를 대화하고 부딛쳐 뒹구는 밀어는 한점 물방울로 산화하고 있다
억만 년 응어리진 덩이가 밀어 낸 약속들은 지상에서 언어를 잃고
천년 전의 신비에 다시 젖고 있다. < 전달문 시>
그 전달문 형의 소식이 궁금해서 조금 방정맞은 말이지만 혹시 돌아가시지 않았나 여러 채널을 통해 수소문해보았다. 그러나 벌써 그분과 만나지 못한지가 십수년이 지났고 나역시 일선에서 손을 뗀 지금 그분과 종적 횡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여간 어려웠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어느 문학 카페에서 그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기에는 그분의 늙은 얼굴이 박힌 사진도 들어있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정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이분도 노인이구나. 다행히도 이생에서 아직 만날 수 있는 희망이 생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분은 지금 LA의 한국문학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불편한 몸을 마다하면서 문학하는 사람들의 왕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은 중앙대 대 선배로서 원래는 평양출신인데 피난 내려와서 제주도 우도(牛島)에 정착, 부친은 의사였고 형제들 모두 지식인 집안이었다.중앙대에서는 철학과를 졸업했고 이미 그때 현대문학에 시를 추천받아 시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된것은 40여년전 맨처음 취직이랍시고 잡지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편집장을 하고 계셨고 나역시 술을 좋아해서 선배겸 술동료로서 "흠집"나는 청춘을 함께 보낸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분은 마음이 착하고 그래서인지 생활능력이 "궐(厥)"해서 부인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다가 결국 미국 이민을 가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90년도인가 한국에 나오셨을 때 청진동의 서울 호텔 로비에서 20여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때 그분은 새로 얻은 살집 좋고 맘씨 좋은 부인과 재혼을 해서 그쪽의 자식들 여럿을 접수(?)해 오히려 대가족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만 후두암에 걸려 성대를 제거해서 목소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그때 잘 나오지 않는 탁음으로"나 천주교에서 세례받았다. 베드로야.앞으로 달문이 형하지 말고 베드로 형하고 불러라." "에이 형님이 무슨 세례를, 그거 아무나 안해주는데.그리고 형님은 그런거 할 타입이 이니에요." 그랬다.마음속에 경건함을 묻고 지내는 부자유스러움보다 희로애락에 민감한 그냥 그런 사람으로 남는 것을 나는 원했었다. 나는 그 형님이 미국 신부(神父)가 주재하는 성당에 나갈것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영 그런쪽하고 문화권이 맞질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울때 울고 화날때 화내면서 그렇게 살지.
아! 우리들의 삶이 그 당시 비록 가난했지만 얼마나 인간적이었던가.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약고 눈치 빠른 사람들만 남아있다.
나는 15년전에 그분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던 것이다.이른바 실명소설이다. 그분은 그만큼 소설적인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지금 그분의 사진을 보니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쩌다가 이렇게 늙었을까?나도 늙어가는데... 그 많은 이야기, 한권도 넘을 이야기를 썼지만 아직도 더 쓸것이 남은 전달문 형님,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를 생각하니 소식 전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을 뿐이다.
형님 왜 그렇게 늙으셨수? 넌 임마 안늙었냐? 우리 소주나 한잔하자. 그러시죠.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평양 출신 제주인
전달문(38년생)시인의 출생지는 평양이다. 1·4후퇴 때 부친이 제주로 피난 와서 동문통에 ‘전(全)의원’을 개업했다. 북교-피난중-오현고(6회,58년 졸)를 나왔고 중앙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고교 2년 후배인 현경대 전의원과 오윤덕 변호사 등과 오류동에서 자취생활을 했다고한다. ‘대한일보’, ‘매일경제’의 전신인 ‘대한상공’의 기자로 있었으며, ‘여원’ 편집장, 한국화장품 기획실장을 지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예림원’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는데, 예림원은 제주문화예술인들의 서울 집결지로 기능했다(아직도 이 출판사의 대표직을 그는 유지하고 있다). 61년 한국문학 ‘심상’을 통해 데뷔. 당시 한국문학에는 김동리 씨가 있었고, 박목월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최근 4·3을 그린 소설 ‘연북정’을 출간한 한양대 명예교수 ‘김시태’ 교수와 동기이며, 현길언과 함께 제2회 한라문화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수상하기도 했단다. 김광협, 오성찬 씨등과 함께 ‘석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아열대 문학’에도 관여했다. 지난 80년에 이민 와서 27년째 된다. 미국에 와서 ‘US Korean Business Times’라는 신문을 창간, 83년부터 87년까지 운영하다 폐간했다.
전달문 시인이 미국에 왔을 때, 미국에는 한국출신 문인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전선배는, 이제는 작고한 박남수(뉴저지 거주), 한갑주, 이세방 사진작가, 송상옥(조선일보 출신) 등과 함께 ‘미주한국문인협회’를 창설했다. 그 때가 82년 9월, 그해 12월에 이민문학의 효시인 ‘미주펜문학’을 창간했다. 당시 하와이에 구상 선생이 계셔서, LA로 초대하여 출판기념회를 열었다고한다.
LA에서 전달문 모르면 문학인 아니다
5년 후인 87년에는 ‘재미시인협회’를 창립했고, ‘수필문학가 협회’도 97년 창립시켰다. 당시는 수필가가 거의 없어서 그가 20여명 추천했다. 그야말로 이민문학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9월에는 재미시인협회 제정 제4회 ‘재미시인상’을 수상했다. 전씨는 “내가 만들고 내가 타는 게 그래서 그동안 사양했었다”며 계면쩍어 한다. 91년에 후두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마르고 딱딱한 것은 잘 넘기지 못한다. 하루에 담배 3갑반을 피우다가 성대 1개를 잘라내고 한 개를 시술한 것. 보이스 박스가 2개인 줄은 그때야 알았다고 너스레를 떠는 전선배. 94년 경 귀국해서 제주 문인들도 만나고 오현 출신 귤림문학회 동인들도 만났다. 상금이 없어서 ‘귤림학생문학상’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5회까지 매년 2천불씩 송금했었다고. 이제는 ‘귤림문학상’도 ‘귤림학생문학상’도 자체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며 흐뭇해한다.
우도(牛島)가 제 2의 고향
전씨는 제3대 김광태 향토회장 시절, LA제주향토회 이사장을 맡았다. 그 때, 우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6명을 초청, LA를 견학시켜 보냈다. 그의 우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평양 출신인 그가 우도와 어떤 연이 있었길래...대학 재직시절 우도에서 작품을 구상한 적 있다는 그. 우도에서 교편생활도 했었다.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우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모두 기증하고 왔다. 당시 제주대에 재직하고 있던 현길언 교수 도움으로. 우도면사무소와 연평중에 전선배가 쓴 시화(詩畵)가 있다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궁금하다.
70노인으로 만나다니
20년만에...
*오늘 아침에 어떤 목이 몹시 가라앉은 나이 지긋하신 분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이 본인이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혹시 전달문 선생을 아느냐고 해서 역시 그렇다고 하니까 맞군요, 그래서 물었다. 혹시? 제 생각은 미국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분은 전달문 선생이 서울에 와 계시다는 거였다.나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하니까. 한국문협에서 나온 월간문학에 게재된 전화번호를 갖고 알았다고 한다.그분은 전달문 형과 친구였다.내가 어느 문학카페에 써놓은것을 전달문 형의 친구가 읽고 바로 미국으로 연락햇다는 것이다. 전딜문형은 내 글을 읽고서 그것을 스크립해서 벽에 붙여놓았다고 했다.
. 그러더니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면서 전달문 형의 목소리가 이어서 나왔다.20여년만의 목소리였는데 목소리가 죽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후두암 수술을 받고 성대를 제거했던거였다. 처음에는 존대말을 했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기에는 우리들의 나이도 그렇고 만나보지 못한 세월이 너무나도 길어서 반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던 거였다. 그 다음부터 약간의 근황, 즉 요즘 뭣하느냐에서부터 애들은 다 치웠냐에까지 그리고 건강은 어떠냐에서 끝나고 내일 을지로 3가 명보극장 고개길 풍전호텔 로비에서 4시에 만나기로 했다.그쪽길은 젊어서 단골로 다니던 술집이 많았던 곳이다.방석집이라 불리는 니나노집도 즐비했고 포장마차에 초막집같은 특주집도 있었다.그분 아들이 변호사 개업을 했다고 해서 한국에 나왔다고 한다..그래서 잠깐 들렸다는데 모레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같아서 내가 물었다. "형님 뭐 잡숫고 싶은 거 없으세요." "응 나 막걸리밖에 못먹어." "그거 제가 싫컷 사드릴께요." "그래. 만나자" 돈을 좀 준비를 해야지.비행기 타고 갈때 맛있는거 사잡수라고... 40년 세월, 그분이 그때는 나를 글 잘 쓴다고 천재라고 했었는데, 천재는 커녕 양아치같은 일생을 보냈는데, 나를 잘 아는 이분마저 떠난다면 나는 정말 외로울것같다.
재회
참으로 세월도 많이 흘러 보내고 70대 노인으로 만나게 되다니.70년대 초 아닌 60년대 말부터 서울 관철동 청진동 등 동아일보 김광협 형 등 죽은 임홍재 수없이 소주잔을 비우면서 낙지볶음 퍼 마시기도 하였는데 온데 간데 없이 미국으로 이민 가던이 이제는 LA 교포 세대에서는 특히나 문단에서 어른 노릇 하시는 분이 되었다.언론계에서도 무목을 끌던 달문 형이 벌써 늙어서 우리 집에 방문을 해 주니 어찌나 반가운지.우리나라 문단 단체는 미국 교포 문인들 (LA200+전체 미국 사회 200=400명)모든 산모 주역을 해 주는 왕손이시다. 그리고 교포 사회 후배 양성도 많이 해 주는 전달문 시인 형님은 밤 늦도록 이야기가 많았다.
헤어질때 나는 그분의 손에 갖고있던 돈을 모두 쥐어드렸다. 모두라지만 몇푼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것이 금생의 마지막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분은 내가 쥐어준 돈을 받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정이 고마워서였다. "형님 건강하세요. 그래야 만나지요" "그래 내가 가을에 초대할께" 그러나 우리 나이에 긴시간이 걸리는 약속이 이뤄진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분은 내가 지하철을 타는 역까지 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첫댓글 사랑하는 방법을 전수해주시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