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에서 딸 효진이는 아빠 종구를 쏘아보면서 말한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인 이 말은 어린 소녀의 감정이 연기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면서 스크린에 강렬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 때문에 ‘곡성’의 명대사로 꼽히면서 한때 유행어가 되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장기간 프리랜서로 소속되어 일해오고 있는 잡지에 취업 재도전에 성공한 중장년들을 인터뷰하는 코너가 있었다. 지인의 추천을 통해 대상 인물로 중견기업에 가까운 A사의 상무를 만난 적이 있다. 50대 중반에 대기업 계열사인 전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3년 간 쉬다가 재취업한 사람이었다.
“연구소 소장이었어요. 25년 간 회사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방에 있는 계열사 공장장으로 보내더라구요.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받는 보상이 결국 이거였나 싶었죠. 1년도 못 버티고 그만두었어요.”
S대 출신으로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그로서는 회사에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했다. 갑자기 퇴사를 하고 쉬게 되자, 그제야 자신의 눈에 새롭게 들어오는 게 있더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내와 자식에 대해 자신은 정말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였다고 했다.
지난 20여 년 간 지적장애인인 아들을 보살피면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을까에 대해, 또 고생은 얼마나 많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라면 하나도 혼자 힘으로 끓여 먹을 수 없는 다섯 살 아이 수준의 지적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자신은 과연 그 아들에게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생겼다. 또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오던 거래처 사람들과 선후배들이 전화가 뚝 끊기는 것을 보면서 인간관계의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퇴직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는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스스로 차단시킨 후 오직 한 가지 아들 돌보는 일에만 시간을 쏟기 위해서였다. 지인의 소개로 재취업을 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에게 중요도 1순위가 바뀌었다. 일보다는 더 소중한 것은 가족이고, 다가오는 노년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다. 20대 시절엔 40대는 물론이고, 50대 60대의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못한다. 미래의 자신을 내다보지 못한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체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일반 기업의 직장인이라면 특별한 능력이나 회상에 대한 기여도가 없는 한 직장 내에서의 자리도 정점을 찍고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한다. 철밥통으로 불리는 직장을 다녀도 마찬가지다. 50대 중반에 들어서면 남은 시간 큰 사고(?)없이 잘 넘기고 퇴직을 해야 연금을 받으면서 노년기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한다. 60이 넘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 꼼꼼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직을 은퇴한 지인 중 한 사람은 2~3년 동안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고 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현직 은퇴 인구가 급증하면서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직장생활 시절엔 문득 문득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하지만, 문제는 진지하게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조차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성과를 요구하는 직장에서 동료들에 비해 뒤처지거나 조기퇴직이나 명예퇴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열정을 쏟다보니 정작 자신의 삶은 돌보지 못했다는 식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문가로부터 40대부터 인생 2막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나이 들기 전까지는 그저 남의 일쯤으로 여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장바구니 들고 이웃집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60대 초반의 남성이나 지하철 안에서 시집간 딸과 손자 손녀 얘기를 주고받는 할머니들, 아파트 경비실 입구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경비아저씨와 대화를 주고받는 노인들을 종종 보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라는 것에 대해 실감하지 못한다. 시쳇말로 ‘꼰대’라고 부르는 나이가 자신에게도 현실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명퇴나 은퇴 후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방황하는 그 하루는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예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잊고 있었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눈앞의 현실에 치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을 수 있고,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자신도 노인이 될 거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런 미래가 피부로 느껴지질 않는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라도 냉정하게 진지하게 고민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곧장 현실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버킷리스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셋 중의 하나이다. “난 그런 거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와 “있긴 있는데 아직 정확하게 정하질 못했어.” 그리고 하나는 “○○○하기, 다음은 ○○○○가 되어 보는 거.”라고 말한다. 세 번째 답을 내놓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중에서도 첫 번째 답을 거침없이 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마치 “나는 지금 열심히 살고 있어. 이거면 되는 거 아냐. 버킷리스트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과연 지금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산다고 해서 그게 전부일까? 30년 후 ‘난 왜 그때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라고 후회할 일은 전혀 없을까?
누군가는 자만에 길들여져서, 또 누군가는 늙는다는 그 자체를 거부하고 싶어서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든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거역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 모두 늙어간다. 어느 날 눈주름이 그어진 50대의 얼굴이 지금의 나라는 자각을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라도 노년인생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현직에서의 은퇴가 10년도 남지 않았는데, 한 직장에서 천 년 만 년 보낼 것처럼 미래에 대한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50, 60대가 아닌 20, 30세대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한 가지 인생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버킷리스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아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테마인 버킷리스트는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해서 삶을 어떻게 하면 더 알차고 건강하고 멋지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는 일이라는 것이다. <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것들(박창수, 새론북스,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04.18.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