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胃臟)질환과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菌)
강력한 위산(胃酸)이 분비되는 위장(胃臟)에 세균(細菌)이 살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답을 구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1875년 독일의 과학자들이 위(胃) 속에서 나사 모양의 균을 발견했지만, 배양(培養)에 실패했으며 뒷날 잊혀졌다. 이 세균은 1982년 호주의 로빈 워런(J. Robin Warren)과 배리 마셜(Barry J. Marshall) 박사팀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으며, 그들은 세균을 분리ㆍ배양시키는데 성공했다. 워런 박사와 마셜 박사가 2005년 노벨 생리학ㆍ의학상(生理學ㆍ醫學賞,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은 수상했다.
헬리코박터균(菌) 또는 파일로리균(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균 명칭의 ‘helico’는 나선형(螺旋形), ‘bacter’는 세균(bacteria), ‘pylori’는 유문(幽門ㆍpylorus)이라는 뜻이므로 위장의 유문부위에 사는 나선형 세균을 말한다. 헬리코박터균은 실타래처럼 생겼고 껍질에는 7-8개의 섬모가 늘어져 있어 풀어진 짚신처럼 보인다. 크기는 현미경의 고배율에서만 보일 정도로 작다. 길이는 2-7㎛(마이크로미터)이고 폭은 0.4-1.2㎛쯤 된다.
워런 박사와 마셜 박사는 ‘대부분의 위장 질환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내용의 가설(假說)을 논문을 통해 학계에 발표했다. 당시 학계에서는 어떤 세균도 위산(胃酸)을 오래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 가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위액에 포함된 염산(鹽酸)으로 인해 위의 내부가 강산성(强酸性)이기 때문에 세균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소화성궤양(消化性潰瘍)의 발생 원인으로 위에서 산분비가 많이 됨으로 인해 궤양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마셜 박사는 스스로 균을 배양한 시험관(試驗管)을 통째로 마셔서 위궤양(胃潰瘍)을 만들어내고, 그 위궤양이 항생제(抗生劑)로 치유됨을 보여주는 등 스스로 임상실험(臨床實驗)을 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1994년 위궤양의 대부분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의한 것이며,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을 권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우레아제라는 효소(酵素)를 만들어내고, 이 효소로 위점액 중의 요소를 암모니아와 이산화탄소로 분해한다. 이때 생긴 암모니아로 국소적으로 위산을 중화(中和)하면서 위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다. 헬리코박터균은 위 점막의 점액층 바로 밑, 즉 위의 상피세포 표면에 붙어살며, 스스로 독소를 배출해 기생하는 부위의 위장 세포를 손상시킨다.
헬리코박터균 감염/감염증(Helicobacter pylori infection)이란 위점막과 점액 사이에 기생하는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감염질환을 말한다. 헬리코박터균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감염되어 있으며, 선진국에서도 국민의 약 30%가 감염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 국민의 46.6%, 성인의 69.4%가 감염된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헬리코박터균 검사 방법 중 혈액검사(血液檢査)는 핏속의 면역반응을 살피는 방법으로 감염을 확인할 수 있지만 멸균된 후에도 상당 기간 양성반응을 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위 내시경으로 조직을 채취해 세균을 배양하거나 직접 세균을 관찰하는 방법도 있다.
튜브를 통해 숨을 내쉬게 하여 공기를 채취해 헬리코박터균의 존재 여부를 알아보는 요소호기(呼氣)검사(UBT)를 통해 진단한다. 위장에 헬리코박터균이 있으면 요소(尿素)를 분해하면서 암모니아를 만드는 데, 이때 생성되는 탄산가스를 측정해 헬리코박터균의 유무를 파악한다. 이 검사법은 간편하며, 치료 4주 후 멸균 여부를 파악하는 재검사를 시행하는 데 적합하여 많이 활용되고 있다.
증상은 균주(菌株)의 다양성과 숙주(宿主)의 감수성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무증상(無症狀) 감염이 지속된다. 일부에서만 소화불량(消化不良), 급ㆍ만성위염(胃炎), 만성활동성위염, 만성위축성위염, 위ㆍ십이지장궤양(潰瘍) 뿐만 아니라, 위암(胃癌), MALT 임파종 등의 발생으로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또 특발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병, 소아의 철 결핍성 빈혈, 만성 두드러기 등의 원인이 되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역학(疫學) 조사연구에 따르면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된 사람은 위암 발생위험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2배 이상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도 1994년 헬리코박터균 감염을 확실한 발암인자(發癌因子)로 규정했다.
헬리코박터균은 위장 질환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지만, 이 세균에 감염된 모든 환자가 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대한소화기학회’의 지침에 따르면 위궤양 환자, 합병증을 동반한 십이지장궤양환자, 조기 위암 환자, 변연부 B세포 림프종 환자는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또한 위암환자의 직계가족, 원인 불명의 철분(鐵分)결핍 빈혈(貧血) 환자, 만성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환자의 경우 헬리코박터 박멸치료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치료는 헬리코박터균의 제균(除菌)으로 궤양을 치료하는 약제와 항생제(抗生劑)를 1-2주 정도 복용하면 된다. 그러나 항생제 내성(耐性)이 높아져 재감염(再感染)되면 같은 항생제로는 제균 효과를 보기 어렵다. 서울 강동성심병원의 연구 결과(2011년)에 따르면 클라리스로마이신 항생제에 대한 헬리코박터균의 내성이 20년 전보다 최대 6배까지 높아졌다.
헬리코박터균의 정확한 감염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어릴 때 가족에게서 주로 감염되며, 대변(大便) 속 균에 오염된 음식과 물을 통해 감염되거나, 음식을 한 그릇에 담아 함께 먹거나 비위생적인 생활습관을 통해 전염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손 씻기, 개인용기(個人用器) 쓰기 등 위생(衛生)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프랑스 파리 11대학의 알랭 세르뱅 박사팀은 1998년 헬리코박터 보균자(保菌者)에게 7일간 항생제(抗生劑) 치료를 하면서 유산균(乳酸菌)을 투여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을 비교 실험했다. 그 결과, 유산균 투여 그룹에서는 87%의 헬리코박터균이 사라졌지만, 유산균을 투여하지 않는 그룹에서는 70%만 사라졌다.
세르뱅 박사팀은 유산균이 만들어내는 박테리오신이란 물질이 헬리코박터균의 성장을 억제할 뿐 아니라 헬리코박터균이 위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비하는 우레아제라는 요소 분해효소의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학교 의대 정현채 교수(내과학)는 ‘유산균이 함유된 발효유(醱酵乳)의 인체 위점막에서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억제 효과’라는 논문에서 세균이 점액층 및 점막에 있기 때문에 위액 내의 항생제가 도달하기 어려우며, 두 가지 이상의 약제를 동시에 투여해야 하므로 부작용이 심하고 환자들의 순응도가 떨어진다 등의 한계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에 헬리코박터균 치료의 특수성을 고려한 새로운 방법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유산균(Lactobacilli)을 이용한 헬리코박터균의 억제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즉 치료제로 유산균을 함께 사용할 경우, 항생제로만 헬리코박터균을 치료할 때보다 부작용을 줄이고 치료율도 높아진다는 연구결과 때문이다.
최근 미국 뉴욕대학 메디컬센터 마틴 블레이저(Martin Blaser) 박사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감염된 사람은 장기간의 혈당(血糖)을 나타내는 당화혈색소(A1c)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과 혈당 사이의 관계는 체질량지수(BMI)가 높은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전염병 저널(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최신호(2012년 3월 14일자)에 실렸으며, 당뇨병 치료와 예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화혈색소는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赤血球)의 혈색소(헤모글로빈) 분자가 혈액 속의 포도당과 결합한 것으로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낸다. 적혈구는 일정기간(약 120일)이 지나면 새로운 적혈구로 바뀌기 때문에 당화혈색소는 대개 2-3개월 동안의 장기적인 혈당치를 나타내게 된다. 혈중 A1c 수치가 5.0-5.5%이면 정상, 6.0-6.5%이면 당뇨병(糖尿病) 위험이 높고, 6.5%이상이면 당뇨병으로 진단된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豫防醫學)교실 유근영 교수팀이 1993년부터 함안, 충주 등 4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약 2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혈액 검사를 실시한 후 10년 이상 추적하는 유전체 코호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콩 섭취에 따른 이소플라본(isoflavon) 혈중 농도가 높은 사람에서 위암의 발생 위험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콩 단백질의 이소플라본 성분이 암 덩어리가 커지는 것을 막고, 암세포 스스로 죽게 할 뿐만 아니라 헬리코박터균도 억제했다.
즉, 콩을 적게 먹은 사람이 1만명에 100명 꼴로 위암에 걸렸다면 콩을 많이 먹은 사람은 1만 명 가운데 9명만 위암에 걸렸다. 콩 섭취가 위암 발생률을 91% 낮추었다. 위암 예방 효과를 보려면 하루에 콩밥 한 그릇과 두부 한 모 이상을 먹어야 한다. 된장, 청국장 등 콩 발효식품은 항암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 연구결과는 미국암학회(癌學會)의 공식 학술지(Cancer Epidemiology, Biomarkers and Prevention) 2010년 5월호에 게재됐다.
소화불량(消化不良)은 자극적인 음식, 음주(飮酒) 등으로 인해 위에 자극이 가해진 상태에서 불규칙한 생활, 과도한 스트레스, 신경과민 등이 겹치게 되면 위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여 생긴다. 이에 ‘소화가 잘 안 된다’, ‘속이 쓰리다’, ‘명치 부위가 답답하다’ 등의 증상이 있으면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소식(小食)하며 맵거나 짠 음식을 피하도록 한다. 또한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고 항상 긍정적이고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 靑松 朴明潤(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서울대학교 보건학박사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