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해상 조난 영화 '생존자들' (원제목은 어게인스트 더 선 against the sun, 2014년)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러시아 극동 오호츠크해상에서 벌어졌다. 영화는 1942년 전투기를 타고 남태평양을 날아가다 바다 위에 추락한 미 공군 세 명이 구명보트를 타고 30여일간 표류하다 극적으로 생환하는 실화를 담고 있지만, 이번 사건의 생존자를 태운 작은 보트는 무려 67일간 차가운 오호츠크해 바다를 떠돌았다. 함께 탄 세 명중 두 명은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 지나가는 트롤 어선에 극적으로 구조된 생존자는 16일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데, 체력을 회복하면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보도다.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생존자 미하일 피추긴/현지 TV 채널 렌 영상 캡처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구조된 생존자 미하일 피추긴(46세)은 형 세르게이(49세), 조카(15세)와 함께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고, 고래 구경도 할 겸 8월 9일 태평양 연안의 하바로프스크주 페로프스키 곶에서 보트를 타고 150여㎞ 떨어진 사할린섬 오하를 향해 떠났다. 아름다운 꿈의 항해는 그러나 보트의 엔진이 고장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보트는 파도에 휩쓸려 항로를 잃었고, 육지와의 통신도 끊어졌다.
오호츠크해와 접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주 베로프스키곶(왼쪽 작은 동그라미 표시)에서 사할린섬 오하(오른쪽의 작은 붉은 점)으로 가려다 표류한 선박이 발견된 곳은 맨 오른쪽 캄차카 반도의 한 어촌(표식) 부근 해상이었다/사진출처:dzen.ru 블로그 핀고래와 함께 하는 여행, Путешествия с Финвалом
사흘 뒤인 12일 사할린에서 만나기로 한 보트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자, 해난 구조대(연방 비상사태부)에 실종 신고가 들어갔고, 구조대(우리 식으로는 119)는 AN-74 항공기 4대를 오호츠크해 상공에 띄워 하바로프스크에서 사할린 섬에 이르는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 구조대는 2주간에 걸쳐 20만 평방미터(㎡)를 조사했으나 보트는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달 뒤 구조작업은 끝이 났다.
그 사이 표류한 보트는 차가운 파도에 떠밀리며 정처없이 밀려갔다. 보트에는 따뜻한 옷과 구명조끼, 조명탄, 상당량의 식량, 20리터의 식수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식량과 식수가 바닥나 기력이 떨어진 세 사람은 추운 바닷바람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9월 초 10대 조카가 탈수와 저체온증, 혹은 영양 부족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인 세르게이는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생존자(미하일)는 "형이 아들의 사망에 거의 미쳐버렸다"며 "같이 죽겠다고 바다로 뛰어들어, 간신히 그를 보트 위로 끌어올려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껴안아 체온을 올려야 했다"고 밝혔다.
사망 원인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형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조카와 형의 죽음을 지켜본 미하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두 사람과 함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는 병원에서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했고, 낙타털로 만든 몽골 침낭으로 추위를 이겨냈다"고 회상했다.
그의 아내는 미하일이 100kg에 이르는 큰 덩치 때문에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기뻐했다. 실제로 두 달 동안 해상에서 표류하는 동안 그의 몸무게는 50㎏, 반토막났다. 당연히 정신 상태도 엉망이라고 의사는 진단했다.
어선에 발견될 당시의 생존자 보트 모습/영상 캡처
보트가 발견된 곳은 당초 가고자 했던 목표 지점에서 무려 1천㎞이상 떨어진 캄차카반도의 오호츠크 해상이었다. 캄차카반도 해안 우스트-하이류조보(Усть-Хайрюзово)마을의 트롤 어선 '안겔(Ангел, 천사)이 지난 14일 우연히 표류하는 보트를 발견했다. 캄차카 해안에서 23km 떨어진 해상에서다. 안겔 선원들은 처음 레이더에 뭔가 잡혔을 때, '부표' 혹은 '쓰레기 묶음'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장에 가보니, 놀랍게도 실종된지 2달이 넘은 보트였다. 생존자 미하일은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축 늘어진 상태였고, 두 구의 시신이 보트에 그대로 있었다. 보트의 빨간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트롤 어선은 그를 구조해 구조대로 인계했다.
생존자를 구조하는 장면/사진출처:러시아 극동해양경찰청 텔레그램 영상 캡처
현지 언론 렌타.ru 등에 따르면 생존자는 동반자 두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수상 운송및 안전 규칙 위반(형법 제263조)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 출항 전에 안전 운항에 필요한 제반 물품(무전기와 비상용 통신 장비,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것이 입증되면 최대 7년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
현지 검찰과 (중대사건을 수사하는) 연방 수사위원회는 보트가 육지와의 통신이 왜 끊어졌는지, 특히 무전기와 비상용 통신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출항했는지 여부를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죽은 형 세르게이가 촬영한 영상을 보면 보트는 나름대로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오호츠크해 해안으로 가면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서 그는 “이것이 우리가 타고갈 배다. 바다까지 600㎞가 남았는데, 거기에서 산타리섬까지 80㎞(직선 거리)를 타고 가면서 고래도 만나고 낚시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산타리섬을 거쳐 사할린으로 가기로 했다.
생존자 이송 장면/사진출처:비상사태부 영상 캡처
생존자는 발견될 당시, 죽을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했다. 그는 그 험난한 바다 한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그가 형과 조카의 죽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등 영화 '생존자들'에 못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