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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6) 무명화가의 삽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세속 권력은 잃고 교황의 영적 권위를 얻은 공의회
- 칼 벤징거 저, 「1873년 비오 9세 교황에 관해서」에 나오는 ‘1869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삽화.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교황령의 위기
1800년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운동(Risorgimento)의 격변 속에서, 그보다 더 큰 격변을 겪은 것은 반도의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운명이 바뀐 교회 국가였다. 그 시기에 성 베드로 사도 다음으로 긴 시기(32년간) 교황으로 재임한 비오 9세(재임 1846~1878)는 1854년 12월 8일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Dogma dell’Immacolata Concezione)’를 선포하고, 이어서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두 가지 교회의 일은 시대적인 정황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맥락에 있었다. 당시 교황령의 행정은 국무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이 맡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리소르지멘토’가 진행 중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3걸 중 한 사람인 카부르(Camillo Benso Cavour, 1810~1861)는 반도의 통일을 쟁취하고 자유로운 정책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과 피에몬테 정부의 패권 장악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민족통일운동주의자들과 영국과 같은 반(反) 교황청 세력과도 손을 잡아야 했다.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시키려는 정책으로 교황청과 대립했고, 로마의 병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청의 세속 지배권을 빼앗는 대신 왕국 내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종교 활동의 자유와 연금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 왕국의 교섭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원 제도의 병폐를 비난하며 계속해서 교회 행정에 관여했다. 비오 9세는 1864년 12월 8일 회칙 「전적인 돌보심(Quanta cura)」과 거기에 덧붙인 ‘오류표(syllabus errorum)’를 통해 종교무차별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실증주의를 포괄하는 근대주의를 비난하며 그런 성격의 정부와는 협력할 수 없다고 했다. 1866년 7월, 급기야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원 해산에 관한 법률, 종교단체의 재산 국유화, 성직자들의 재산 몰수와 매각 등을 놓고 교황청과 재차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말이 교섭이지, 실제로는 1859년에 롬바르디아, 1866년에 사르데냐와 나폴리 왕국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교황령 침공을 앞두고 있었다.
공의회를 소집하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약화된 상태에서 1848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혁명’, 리소르지멘토 운동으로 교황령이 통일 이탈리아라는 국가 건설에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계몽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혁명가들이 외치던 반(反) 가톨릭, 반(反) 교황 분위기까지 고조되던 시점에서 소집됐다. 사실 1563년에 트렌토 공의회가 폐막된 이후, 1864년 12월 6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예고하기까지 약 3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트렌토 공의회에 힘입어 교회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계몽주의와 각종 혁명과 운동, 이념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세상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1864년 비오 9세 교황은 교회의 가르침에 상반되는 내용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80여 개 항목의 ‘오류표(Syllabus)’를 작성해 시대적인 위험 요소들을 지적했다. 거기에는 자연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유리주의(唯理主義), 자유주의와 맹목적 진보주의 등이 포함됐고, 신앙을 위협하는 오류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1867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예고했다. 그리고 1869년 12월 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개최했다.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개막식에 참석한 교부들은 모두 1050명 중 774명이었고, 관련 학자와 전문가들까지 1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교들 외에도 미국과 영국은 물론,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주교들까지 참석했다.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주교들이 참석한 건 공의회 역사상 처음이었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각국 군주들의 사절단 형태가 아니라, 모두 나름의 자율권을 갖고 참석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예정된 날짜에 맞추어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점이었다.
공의회는 준비위원회를 거쳐 올라온 51가지 안건을 의결했는데, 거기에는 주교와 공석인 주교좌, 성직자의 생활과 규율, 교리서 및 신앙과 이성 등 교회와 교의에 관한 6가지 안건이 포함됐다. 특히 주교의 권한과 관련해 공의회의 최대 의제로 떠오른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세계사와 교회사에 새긴 중대한 사건이 되게 했다. 이것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며,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세계 교회와 모든 교구에서 완전한 주교권, 곧 ‘수위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무류성’은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해 사도로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교회 동의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르칠 수 없고 변경될 수 없다는 것으로, 신앙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공격받을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의결사항이었다.
공의회 교부들은 헌장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1870년 4월 24일)을 통해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논의를 거듭했고, 의결사항을 규정한 「영원하신 목자(Pastor aeternus)」을 통과시켜(찬성 533, 반대 2) 신앙의 윤리적인 차원은 물론 세계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문제를 정리했다.
가톨릭출판사 운영하며 가톨릭 문학 발전에 공헌
소개하는 작품은 스위스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출판업을 하던 칼 벤징거(Karl Benzinger, 1854~1937년)가 쓴 「1873년 비오 9세 교황에 관해서」에 나오는 ‘1869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라는 제목의 삽화다.
칼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아인지델른의 기업가이자 가톨릭출판사의 4대 공동 소유주이며 상업이사였고, 슈비츠(Schwyz)의 오랜 귀족 가문의 후손인 모친 덕분에 가족은 아인지델른과 슈비츠에 집과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칼은 슈비츠의 마리아 힐프 기숙학교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인지델른으로 와서 수도원 학교에 다녔다.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영국과 이탈리아를 장기간 여행했다.
1875년 22살에 그는 아인지델른의 가족 사업에 합류했다. 이후 40년 넘게 스위스 출판업계에 큰 자취를 남기고, 당대 가톨릭 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하인리히 페더러(Heinrich Federer)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을 지원했고, 외국 문학을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1916)의 소설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가톨릭출판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했고, 그의 집은 저명한 예술가와 작가는 물론 고위 성직자들도 북적였다. 1924년 출판사의 광범위한 조직 개편이 있자 스스로 가장 먼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났다. 1937년 83세의 일기로 슈비츠의 헤렌가쎄에 있는 별장에서 생을 마쳤다.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 발표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가 발표(1870년 7월 18일)된 다음 날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에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이 철군하면서 로마가 위태로워졌다. 1870년 9월 1일 공의회 교부 120명은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일주일 후 이탈리아 군대는 교황령을 침공했고, 9월 20일 로마가 함락되면서 교황령은 붕괴했다. 교황은 공의회를 중단했고, 다시 열리지 못했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성만 강조 혹은 맹신하여 계시의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반대로 신앙만을 내세우고 인간 이성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신앙주의의 오류를 극복함으로써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했고,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것으로 공의회 우위설에 기반한 갈리아주의나 페브로니우스주의 같은 오류들에 제동을 걸고 교황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후 교황은 세속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되어 통치 기반이 사라졌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확고하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세속 군주가 아니라, 교회와 세계의 영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던 것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7)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목가적 풍경 이면에 담겨진 19세기 농민들의 팍팍한 삶
-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857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파리.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불어닥친 혼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은 이탈리아 반도에는 통일을, 교황에게는 교황령의 종식을 가져왔다면, 프랑스에는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그로 인해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00년대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 대혁명이 남긴 자취로 몸살을 앓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이념(자유, 평등, 형제애) 중 하나로 등장했던 자유주의의 영향은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안에선 나폴레옹에 의한 제1 제정이 시작되고,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에 맞서 전쟁을 치르느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이어 러시아와 전쟁을 했고,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내린 ‘대륙봉쇄령’은 결국 자신이 몰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간 뒤, 살아남은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를 국왕으로 왕정이 복고(復古)되지만, 시민들을 의식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했다. 노동자와 농민 등 하위계급에도 온건적인 정책을 펴 정치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샤를 10세가 왕이 되면서 혁명 정신에서 벗어나 특권 정치로 후퇴했고, 1830년 7월 프랑스는 다시 봉기하여 샤를 10세를 추방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루이 필리프 1세가 국왕으로 즉위(1830년)하면서 다시 입헌군주제에 자유주의 정책을 펴지만, 시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부 힘 있는 부르주아(자본가) 계층에만 선거권 등 각종 특권을 주는 바람에 1848년 2월 프랑스는 또다시 혁명의 깃발을 들어야 했다. 결국, 루이 필리프도 영국으로 도망가고 프랑스의 정치는 왕정복고 체제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갔다.
1848년 제2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뽑힌 루이 나폴레옹은 힘으로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1852년 국민투표에 부쳐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제2 제정을 열며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 대혁명과 2월 시민 혁명을 겪은 프랑스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하며 혁명의 정신을 구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내부 정리보다는 대외 팽창에만 주력하다가 급기야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수모를 겪더니 패전국이 되어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독일의 감정이 악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마저 실각하자 프랑스 사회는 왕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했고, 사회 분위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격동의 시기, 종교와 혁명
그 격동의 시기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 온 가톨릭교회도 여러 수모를 겪다가 결국 붕괴를 면치 못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실로 다양했고, 규모도 컸다. 성직자 민사기본법, 선서, 탈그리스도교화 등으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끝없이 수난을 당했다. 성직자 민사기본법과 선서를 거부한 신부들은 절반가량이 망명을 떠났고, 나머지는 갖은 핑계로 형벌에 처해 졌다. 탈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면서 선서한 신부들도 처벌을 면치 못했다. 그 바람에 절반은 사제직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났고, 성당은 폐쇄되고 미사는 금지되었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어떤 형태건 모두 파괴되었다. 야만적인 반달리즘은 교회 미술을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었다.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프랑스 대혁명이 ‘선언’한 ‘자유’는 종교와 약자들의 자유는 철저히 배제된 것이었고, ‘인권 선언’이라는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정작 ‘인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또 다른 앙시앵 레짐(Ancien Rgime)이 탄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종교에 대한 박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유다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향한 칼날이었고, 이제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종교를 대신하여 또 다른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신념은 기존의 종교와 다를 게 없었기에 마치 두 종교가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혁명가들조차 “두 광신의 대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종교(혹은 신념)는 ‘다른’ 종교와의 양립을 거부했고 그런 점에서 혁명은 구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옹호한 계층에서 여성과 농민, 노동자 등 정작 혁명이 필요했던 계층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고, 계층 간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농부들 일상을 종교적 분위기로 승화시킨 작품들
소개하는 작품은 너무도 잘 알려진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이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원래 1854년에 세로 형태로 그렸던 것의 두 번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밀레는 프랑스 그레빌-아그(Gr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이웃의 가난한 농부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다. 그는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도움으로 라틴어와 근대문학을 배웠고, 성인들의 생애에 감명을 받아 데생으로 종교화를 그리곤 했다. 1833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셰르부르-옥트빌(Cherbourg-Octeville)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4년 뒤 파리로 옮겨 에콜 데 보자르(cole des Beaux-Arts)에서 공부하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후 파리, 셰르부르, 르아브르(Le Havre)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다가 1849년 이후엔 파리 인근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그곳 농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
밀레는 자신이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훗날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로 승화시켜 사실주의(Realism), 자연주의(Naturalism) 색채로 그렸다. 이 그림들은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사회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그만큼 많은 비평과 함께 밀레의 명성과 성공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그 결과 1860년대와 1870년대는 그에게 영광의 시기였다. 밀레는 1875년 결핵으로 바르비종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추수 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다. 농촌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저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 여인들의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파리 외곽 바르비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농촌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동작을 세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풍성한 수확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다. 허리가 아픈 듯, 한 손을 등 뒤에 올리고, 거친 손으로 바닥을 뒤적여 찾아든 것은 몇 안 되는 이삭이다. 수확철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땅 없는 이들의 삶의 현장을 그린 것이다. 이들에게 이삭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진 빵 조각’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다.
당시 프랑스는 당국의 허가 없이는 이삭도 주울 수 없었다. 이삭을 줍는 여성은 극빈 계층의 사람들이다. 가난한 프랑스 농민들을 대변하듯, 세 여인의 굽은 등을 비추는 지는 해의 여운과 달리, 멀리 뿌연 안갯속에서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게 그린 풍성한 수확과 말을 탄 지주가 대조를 이룬다. 이런 극적인 대비로 인해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선동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밭은 더없이 넓고 크지만, 궁핍한 근대 민중들의 삶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한 톨의 밀이삭에만 집중할 뿐이다. 밀레가 바라본 19세기 프랑스 농부들의 삶의 진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과 제1, 2 정부를 거치며, 혁명으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의 대가 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현실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다. 혁명가를 자처했던 정치인들이 불편하게 여겼던 작품인 이유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8) 루크 필즈의 ‘노숙자 임시 수용소 입소 허가를 기다리는 지원자들’
‘새로운 사태’ 산업화의 그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민들
- 루크 필즈, ‘노숙자 임시 수용소 입소 허가를 기다리는 지원자들’(1874년).
비오 9세(재임 1846~1878) 교황 시절인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과 교황령의 종식,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회는 지금까지 수 세기에 걸쳐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교회다운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교황은 세속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되어 통치 기반이 사라졌지만, 그로 인해 이제 세계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영적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는 약자들과 동행하는 데 주력했고,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다’는 걸 교회 역사가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권력자의 길에서 돌아와 백성과 더불어 호흡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 더는 ‘교황(敎皇)’이 아닌, 백성을 섬기는 교회의 어른 ‘교종(敎宗)’으로 20세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비오 9세 이후 레오 13세(재임 1878.2~1903)를 시작으로 교종이라는 칭호가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산업 사회, 비참한 도시환경과 인권 문제
지난 호에 이어 비오 9세 재임 말기부터 레오 13세 재임 초기 사회 현상에 좀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20세기 교종들의 사목 방향이 결정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등장한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이라는 사실주의 회화의 한 분파를 통해 당시 사회 하층 계급 사람들의 열악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를 예고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던 1760년경부터 혁명 정부에 의해 유럽 대륙이 아수라장이 되던 1820년 사이,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기술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으로 엄청난 변화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른바 세계 근대화의 촉매가 된 제1차 산업 혁명을 앞두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유럽 대륙에서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건 1800년대 중ㆍ후반기였고,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거대한 물줄기였다.
산업 사회가 시작되면서 농촌 인구의 대규모 도시 유입으로 도시 환경은 말이 아니었다. 도시 행정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이한 인구 집중화 현상은 의·식·주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어디를 가나 악취가 심한 비위생적인 도시환경에 자본가들의 탐욕에 내몰린 공장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침해도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남성 노동자는 물론 여성과 어린이 노동자까지 사회 발전에 가려진 인간의 비참한 삶의 현실로 결국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정치와 철학이 몰입하는 요인이 되었다. 노동자 계급과 사회 약자의 고단한 삶이 한 개인의 운명이나 불행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리얼리즘
이 시기에 이런 사회 문제를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들이 있었다. 그것을 일컬어 ‘사회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리얼(real)하게’ 붓으로 표현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주의 회화와 같은 맥락에 있고, 실제로 유럽의 사실주의 회화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리얼리즘’을 ‘사실주의’와 약간 다르게 보는 것은 ‘리얼리즘’이 사회 문제에 집중하여 작가가 자신의 신념을 담아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토양에서 성장한 자유주의 회화의 한 면을 보는 동시에 20세기 다양한 사회 문제를 예술로 표현했던 거대한 흐름의 시발점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밀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농촌 사회에 치중했다면 오늘 소개하는 루크 필즈(Luke Fildes, 1843~1927)는 도시 빈민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판화로 제작되어 시사잡지에 실렸다. 이런 그림들이 영국에서 많이 나온 것은 당시 자본주의 발전을 선도했던 영국의 현실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따라서 자본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무제한 착취했고,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생활 수준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글이나 훗날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에서 보듯이 말이 아니었다. 열악한 주거 시설, 비위생적인 상하수도와 환경,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며 살인적인 노동량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질병도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그런 런던의 현실 속에서 「자본(Das Kapital)」(1867년, 1885년, 1894년)을 집필하고 있었다.
소개하는 작품 루크 필즈의 ‘노숙자 임시 수용소 입소 허가를 기다리는 지원자들’은 원래 1869년 12월 4일 자 「더 그래픽(The Graphic)」 삽화 신문 첫 호에 ‘노숙자와 배고픔(Homeless and Hungry)’이라는 제목으로 싣고자 판화로 제작되었다가, 「선데이」 「콘힐」 「젠틀맨」과 같은 다른 정기 간행물에 실리면서 유화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필즈의 대부분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통해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만큼, 분위기는 무겁다. 작품이 단순하고, 인물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불결하고 절망적인 부분이 많다는 평을 받았다.
영국 출신 화가이자 삽화가
루크 필즈는 영국 리버풀 출신의 화가며 삽화가다. 워링턴 미술학교, 사우스 켄싱턴 미술학교를 거치며, 프랭크 홀과 휴버트 폰 허코머를 만났다. 세 사람은 1870년대 영국의 사회 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하던 프레데릭 워커의 영향을 받아 영국 사회를 조명하는 ‘사회적 리얼리즘’ 삽화들을 여러 시사잡지에 실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신앙심 깊었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그가 처음 사회생활을 한 것도, 사회 개혁가며 「더 그래픽」 신문 발행인 루손의 요청으로 그의 신문에 사회 문제를 다룬 삽화를 싣는 일이었다.
필즈와 룩손은 ‘가난과 부정부패에 관한 문제에 있어 여론을 바꾸는 시각 이미지의 힘’에 관한 생각에 공감했다. 그의 삽화는 주로 흑백으로 제작했는데, 그것 역시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예술가로 활동했다. 1874년 소개하는 작품을 시작으로, ‘홀아비’(1876), ‘웨딩 빌리지’(1883), ‘야외 화장실’(1889), ‘닥터’(1891)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닥터(The Doctor)’는 미국에서 의료 민영화 사업에 이용되기도 하는 등 정치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첫째 아들 필립이 사망했을 때(1877년), 아들 곁에서 헌신하는 의사의 직업에 크게 감명을 받아 그린 걸로 알려져 있다. 이후 로얄 아카데미 회원(1887년)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2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안개가 짙게 낀 겨울밤, 도시 빈민들의 춥고 배고픈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찰서 밖에서 표를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는 여성과 어린아이들도 있다. 표를 받고 임시 수용소에 들어가려면 거기에 있던 사람이 죽어야 하지만, 경찰이 시급한 경우라고 인증해주면 통상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나와야 했다. 그리고 다음 밤을 위해 다시 줄을 서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은 숙박과 빈곤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임시 수용소의 표는 1864년 약 20만 장에서 1869년에 40만 장 발행하여 두 배 증가했다고 한다.
작품 속 사람들 뒤 벽보판에는 추위 속에서 떨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다며 20파운드 후사’라는 광고가 있다. 필즈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걸로 추정되는데, 개보다 못한 당시 빈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라는 걸로 보인다. ‘인간’이 상실된 당시 산업 사회의 발전은 분명 ‘새로운 사태’였고, 작가는 그 문제를 이렇게 붓으로 고발했다면, 이제부터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보호하고 그 존엄성과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사태’는 교회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함께 교회가 가야 할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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