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이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도원이다. 다음에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1
안견이 어떻게 화원화가가 되었으며,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화가로서 능력이 뒤어나다는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개인 정보는 없다. 당시로서는 개인정보래야 어느 가문의 출신이며, 선대 조상은 누구누구라는 것임으로, 미천한 기문의 출신이고 내세울 만한 선대가 없는 하층민에게는 개인 정보가 없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화가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음도 분명해 보인다. 기록에 의히면
산수화의 대가이고, 우리나라 산수화가의 1인자이다.
신숙주는 안견과 동시대의 사람이고, 안평대군의 사저를 들락거렸으니까 친분도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畫記를 남겼다.
“우리 조정에 유명한 화가가 한 사람 있다. 비유당(안평대군의 호)을 오래 동안 모셨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그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신죽주는 자신의 화기의 끝에 1445년이라고 적었다.
이외에도 여러 자료들을 보면 안견은 오래 동안 안평대군을 모셨고, 안평도 안견을 총애했다. 안평의 사랑방에는 당대의 명문 사대부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 자리에 불려간 안견은 기가 죽었고, 사대부들은 안견을 낮추어 보았다고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안경의 사랑방을 들락거린 수많은 사람들, 예로서 정인지, 신숙주 등등의 사대부들이 안평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는가. 이런저런 사정들을 감안한다면, 안견이 안평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이유도 없으리라.
안견의 화풍에 대하여서도 당대에 남긴 많은 언급이 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안견의 작품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곽희 화풍이고(몽유도원도), 마하 화풍도 조금 보인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단순히 그림 한 점이 아니고, 조선 초의 회화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 몽유도원도의 그림을 보기로 하겠습니다.(위의 사진)
이 그림을 안견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유세계를 펼친 안평대군의 작품이고, 안견은 자기의 사유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고, 그림그리는 기술만을 발휘하였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안평의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면 안견이 서러워할까.
첫댓글 몽유도원도의 앞 부분 그림을 보시면, 왼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험하디 험한 바위 산 안으로 들어가면, 이것은 아마도 낙원을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상징하겠지요. 험한 바위 들 사이로 한 가닥 길이 보이시나요. 이 길이 도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산수화를 보실 때, 길을 찾아보세요. 대부분의 산수화에는 길이 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합니다. 길은 바위 뒤로, 숲 속으로 자신을 감추기도 하지만 --- 길을 찾아가면 마지막에 도원, 정자 또는 사찰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산수화를 볼 때마다 길찾기를 해 봅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해보세오. 뭉유도원도의 앞 부분 그림에서도 길을 찾아보세요.
오른쪽에 길이 보입니다
보일듯 말듯한 바위산 길을 따라 가다보면 도원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림에 조예가 없는 저는
평범한 토산 아래 사는 현실 그림에 더 정감이 갑니다.
저라면
험하디 험한 암산을 지나 낙원을 찾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주어진 대로 살겠습니다.
문학 예술을 하려면 험하고 험한 길을 거쳐야 참예술이 나온다는 말을 참고하면
저는 더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사님 성찰하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