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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고린도전서 특강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말씀/고전15:35-58
요절/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어제는 누가 죽고, 오늘은 누가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언젠가는 나도 죽을 순번이 돌아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인생이라는 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처럼 허무한 게 없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믿음과 기대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부활의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소망을 굳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같은 부활 소망이 현재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할까요?
우리는 지난 주일 말씀에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5절. 그런데 의구심이 남습니다. 사람은 죽고 땅에 묻히면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화장하면 가루만 남습니다. 이런 경우 형체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날까요? 교통사고 나서 처참한 몰골로 죽었으면 어떻게 살아납니까? 살아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날까요?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면 그대로 부활해도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자신 없는 사람은 부활의 소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질문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때에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사실, 이것은 자연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바울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How foolish!” “야, 이 바보야!” 이런 의미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고 합리적인 것 같은데, 실상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왜 어리석습니까? 바울은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씨의 비유를 통해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부활은 마치 한 알의 씨가 땅에 뿌려져 죽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땅에 묻혀 죽습니다. 씨의 형태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모양의 생명체가 다시 살아납니다. 뿌리가 나고 줄기와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납니다. 나무와 꽃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알기 때문에 농부들은 씨앗을 심으며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퍼 울면서 장례 치르듯 씨를 심는 농부 보셨을까요? 우리도 씨가 땅에 묻혀 사라지고 그 씨가 다시 생명체로 살아나는 이 과정이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가운데 씨앗을 심습니다.
바울이 씨의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이라고 합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라고 합니다. 알맹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그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에는 장래 형체를 보장해주는 DNA가 들어있습니다. 사과를 원한다고 처음부터 사과가 열린 나무 통째로를 땅에 묻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사과 씨를 심습니다. 그 씨가 땅에 묻히면 그 자리에서 싹이 나오고 사과나무로 자라고, 예쁜 꽃이 피고, 나중에 붉고 달콤한 사과가 열립니다. 씨만 봐서는 나중 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씨앗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때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육체가 죽을 때 하나님은 부활의 새로운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 몸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때에는 현재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훨씬 그 이상의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생각해보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 동물,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마다 각각의 육체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각 피조물이 사는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그 형체를 주셨습니다. 새는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날개 뼈가 얇고 속이 비어 있습니다. 다리는 새 다리로 날씬합니다. 새가 코끼리 다리 가진 거 보셨습니까? 그런 새는 없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균형을 잡고 헤엄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다리가 없고 지느러미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때의 우리 형체도 사람이라고 해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형체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과 별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해는 낮을 주관해야 하기에 밝고 강렬한 형체를 주셨습니다. 달은 밤을 주관해야 하기에 은은하고 단아한 형체를 주셨습니다. 별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총총하게 박혀서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존재 의미가 각각 다릅니다. 하나님이 각각에 맞게 존재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각각의 영광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의 차등이나 비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닷속 고래의 영광과 공중 나는 독수리의 영광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영광에 차등을 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활하기에 가장 합당한 형체와 영광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떠셨습니까?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죄가 들어와 우리는 많은 부분이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본래 형상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습니다. 죄로 욕되고 죽게 되었습니다. 연약하고 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이런 죄와 모든 허물이 없고 지극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몸은 죽어 썩을 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피부에 탄력도 사라지고, 소화 능력도 떨어집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키도 크고 날씬하고 예쁜 어머니를 다른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면, 어깨를 펴고 당당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세가 들어 뇌종양 수술도 하시고, 한쪽 시력은 보이지 않으시고, 다리와 허리가 자주 아프시다고 그러시고, 힘이 없어 자주 쓰러지기도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깝고 더 잘 모셔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인기 있는 아이돌들도 다 나이 들면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BTS’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늘이 같은 초딩들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과 ‘아이브’도 다 나이 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BTS, 아이브, 여자아이들... 저리 가라입니다. 항상 천사 같은 웃음으로, 영원한 청춘으로 싱그럽게 살아가게 됩니다.
또 이 땅에서의 육신은 욕된 것이어서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고백하며 회개 소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는 신령한 존재들로 다시 살게 됩니다. 더 이상 죄로 고통당하지 않아도 되고 회개 소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만 하면 됩니다.
또 이 땅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면 항상 환자들로 붐빕니다. 우리 가운데도 질병으로 고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민 목자님도 최근에 이석증으로 많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는 또 감기 몸살에 심하게 걸리면 금방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고 드러누워 신음합니다. 또 하룻밤만 못 자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수많은 질병들에 우리 인생들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 우울증, 화병, 분노조절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게 되면 질병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아픈 데가 다 사라지고 강하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형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보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몸은 낮은 몸으로 저차원의 존재들입니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죄로 인해 욕 되고 부끄러운 모습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게 되면 영광스러운 몸으로, 높은 차원의 형상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로 변화될 것입니다(벧후1:4). 이것은 막연한 기대나 허상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동일한 특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이 되었습니다. 썩어 죽고, 욕되고, 약한 육의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영광스러운 형체로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살려주시는 영인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입니다. 부활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지니고 하늘의 속성을 지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아담의 후손으로 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약하고 병들고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은 현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저 하늘에 속한 사람의 속성을 몸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에 속한 사람의 속성이 조금씩 나타납니다.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때에는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에 가장 합당한 형체를 입게 됩니다. 요즘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의 유명 아이돌 연예인들 사진을 들고 와서 “이렇게 성형 수술해 주세요” 이런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성형외과 의사라 한들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꾸어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속사람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부활의 소망을 소유한 사람은 그 얼굴과 내면이 수술하지 않아도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옆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 소망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이요,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아갈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주는 두려움이나 걱정 염려에도 시달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현실 문제들이 다 해결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마다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유할 영원한 형상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그날을 기대하면서 이 땅 사는 날 동안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집니까?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때 천군 천사들은 마지막 나팔을 붑니다.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형체로 홀연히 변화됩니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홀연히 함께 변화됩니다. 여기 ‘홀연히’는 헬라어 원어로 ‘앤 아토모’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단 시간’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부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태초에 천지창조도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즉시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 나팔소리와 함께 홀연히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53절.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산 소망이 실제 이루어지게 됩니다(벧전1:4).
그날에는 온 인류의 공공의 적이었던 사망이 완패를 당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힘센 장사라 할지라도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순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것, 그 어떤 사람도 다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두려움이요, 패배요, 끝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역전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이 사망을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54). 사망은 이때까지 인류 위에 왕노릇 해왔습니다. 56절에 보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여기 ‘쏘는 것’은 찌르는 도구를 말합니다. 죽음은 죄를 도구로 삼아 우리를 마구 찔러댔습니다. 죽음이 그동안 우리에게 수없이 화살들을 쏘았습니다. 허무, 무의미, 절망, 두려움, 패배의식, 안일, 정욕, 미움, 교만, 시기심 등등. 우리를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과거 우리는 사망이 쏘는 죄의 화살들을 맞고 패배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망이 쏘는 화살들을 다 꺾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 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우리는 이제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망에게 어떻게 도전합니까?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사망 권세에 눌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생명,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5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무엇보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견실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부활 또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어리석은 자가 헛소리할지라도 부활의 소망 위에 굳게 서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은 부활의 소식만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 된 이 사역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 역사에 열심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 역사를 섬기다가 멈칫멈칫합니까? 왜 슬그머니 그만둡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서의 우리의 수고가 헛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고에 대한 대가가 기대만큼 빨리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또 눈앞에 당장 닥쳐오는 삶의 필요들을 채우기에 바쁜 것도 문제입니다. 주님의 일은 멀리 보이고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관심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목자요, 성경 선생으로 살기 위해 나름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며 기도하고 여러모로 봉사합니다. 우리의 수고를 누군가 알아주기도 하지만 몰라 줄 때도 많습니다. 누군가 알아주면 의미가 있어도 몰라주면 헛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요.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주님의 칭찬과 영생과 보상에 참여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주님 안에서 하는 작은 수고와 헌신들, 찬양하고 기도하고 청소하고 헌금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양들과 일대일하고 우리가 섬기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그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는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주님이 보상해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가운데 주와 복음 역사에 수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덧입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살아나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그런 부활의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장차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그날을 소망하면서 더욱 주의 일에, 특별히 생명구원 역사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