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餘白 / 문병란
나는 태평한 사람처럼 창가에 앉아 있다
심심해서 수호지를 읽고 있다
양산박의 108호걸들의 애기를 읽고 있다
창밖은 화창하고
5월도 가고 6월로 접어드는 쾌청의 初夏
떨기져 피어있는 홍장미가 장관이다.
2주일째 숨어 있는
어느 남쪽 항구 제자의 집
2층 응접실 남창 가에 앉아
모처럼 누려보는 느긋한 휴식이다
정말 나는 태평한 것일까?
모 기관에서 덮칠 거라 하여
광주를 빠져나온 건 5월 19일 새벽,
천은사, 상원암, 지리산 노고단을 거쳐
순천 처가에서 은신 2박3일
광주 본가에 반갑잖은 새벽 방문객이 찾아오고
다시 본적지 고향에까지 손이 뻗쳤다 하여
결국 이 곳 남쪽 항구 국도의 끝
어느 제자 집으로 피신,
오늘이 벌써 6월 7일,
마수는 순천 처가에 까지 뻗쳤다는데
나는 정말 태평한 것일까?
시간이 없어 못 읽은
수호지 5권을 다 읽었고
다시 읽기 시작한 대 나폴레옹 전집
때때로 맥주도 얻어 마시며
송강이 혁명가냐 도둑놈이냐
수용주의자냐 개혁론자냐 판단도 해 본다
아들과 안 사람은 서울로,
세 딸들은 학교도 못가고
아버지 대신 인질로 잡아간다 하여
외가에 내려와 있다는데
빈 집을 수진이와 흰둥이가 지키고 있다는데
나는 수호지 5권 째를 읽는다
송강의 기구한 운명을 슬퍼해 본다
義편에 서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본다
전대 조대에 가서 4.19 기념 강연했고
민주주의 하자는 모임에 나갔고
민족 지도자 김대중선생 존경했고
민중시대의 민중시 쓰며
이 시대의 양심을 대변한다고 애쓴 것뿐
아무런 범법도 잘못도 없는데
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연행하는 의도는 무엇일가?
날마다 TV와 신문에 나오는
현상금 붙은 사나이
죽지 못한 부끄러움 안고
살고 싶어 도망쳐온 사나이 괴로운데
나의 죄명은 무엇일까?
쿠테타 일으켜 불법정권 잡아 놓고도
왜 선량한 사람들을 엮어다
자기네들의 죄상을 합리화시키려 들까?
나는 지금 창가에 앉아
6월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을 쏘이며
항구의 뱃고동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있다
나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쫓겨나 있다
내 죄목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죄목을 안고
나는 수호지를 읽고 있다
양산박 호걸들과 대화하고 있다
오 송강이여
그대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나는 영웅도 호걸도 아니면서
무슨 정치가도 혁명가도 아니면서
광주사태 관련자 폭도 명단에 끼어
200만원 현상 붙은 죄인이어야 하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쩨쩨하게 마누라 새끼들 걱정에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면서
사망자 명단이 아닌 수배자 명단에 끼어서
나는 지금 누구와 대결하는 것일까?
다시 창밖을 본다
하늘은 쾌청,
나라는 망해도 보리는 푸르다더니
6월의 바다 위에선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홍장미가 마지막 기운을 다해 붉게 타고 있다
하늘이 푸르름도 저주스럽구나!
차라리 세상이여 와장창 무너져 버려라
수호지에도 길이 없고
대 나폴레옹 전집에도 길이 없고
목구멍 까지 밀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
주먹을 쥐었다 폈다
두 평 응접실을 몇 바퀴 돌아도
가랜지 울분인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노지심이여, 그대의 주먹은 어디서 쉬고 있는가?
다시 앉아 바라보는 남창가
서슬 푸른 가시 위에
선홍빛 홍장미가
구멍 뚫린 염통처럼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
아 진정 지금 나는 태평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