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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 강도사 인허식이 있었는데 최영근 전도사님이 이제 강도사님이 되셨어요. 잠깐 자리에 일어나고 박수 한번 축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미시가 축제를 하는데 아침에 보니까 주일 학교 학생들도 좀 줄었고 예배드리는 성도들도 좀 줄었습니다. 아마 접근성 때문에 좀 애로사항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 주간 저 노회 기간이었어요. 제가 노회 기간 동안 어떤 간증을 잠깐 듣게 됐습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 가서 이렇게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고 온 거예요. 물론 총탄이 오가는 그 장소에서 한 건 아니고 이제 그 나라에 간 거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왜 무모하게 그러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런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봤어요. 저분에게는 저분의 내면에는 무엇이 들었길래 저런 결정을 하게 했을까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잖아요. 전쟁 중인 나라에 가서 물론 전장은 아니죠. 그냥 그 나라에 좀 안전한 지대에 가서 사냥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게 여러분 만약에 우리 교회에서 그런 결정을 하면 여러분 중에 몇 명이 따라오실까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마 저 혼자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목사님 먼저 다녀오세요.
이렇게 그런데 많은 성도들과 청년들이 그 일에 참여했어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들의 삶에 어떤 사고의 틀이 있길래 아니면 행동의 틀 믿음의 틀 오늘 본문에 오늘 설교 제목을 따오면 어떤 프레임이 그들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길래 있어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이 좀 주어졌어요. 왜냐하면 내가 어떤 프레임에 갇혀 있느냐는 되게 중요하거든요.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요. 내가 어떤 프로그램에 갇혀 있냐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과 말하는 것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초반에는 평소에 하지 않았던 조금은 어떻게 보면 어려운 말들이죠.
말들을 조금 하려고 해요. 레이코프라는 언어학자가 있어요. 이게 미국의 학자인데 이 학자가 프레임 전쟁이라는 책을 이렇게 썼어요. 그 안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잠깐 제가 추렸습니다.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고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프레임에 따라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 사고의 틀을 가졌느냐 사고의 체계를 가졌느냐 프레임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말과 행동과 결정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요즘을 프레임 전쟁이라 그래요. 이 시대에 눈에 보이는 총과 칼로 싸우는 이 전쟁이 아니라 사회 현상을 프레임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런 거죠. 어떤 한 팀에서 미리 잘 짜져 있는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이렇게 공격을 해요. 그러면 그 집단들은 그 집단들은 실제로 그런 존재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프레임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생각하게 돼요.
그러니까 교회는 비민주적인 집단이다라는 이 프레임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서 끊임없이 언론에서나 이렇게 노출을 시켜요.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비민주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만약에 우리가 그러면 이제 교회에서는 반박을 해야 될 거 아니야 교회는 비민주적인 집단이 아니라고 막 반박을 하잖아요. 그러면 오히려 교회는 비민주적인 집단이라는 그 프레임이 더 사람들 머릿속에 공고하게 돼요.
그러니까 많은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우리 여러분과 제가 모르게 이런 프레임을 짜서 어떤 집단과 어떤 현상과 어떤 공동체를 막 공격을 하는 거예요.
그 사실이 아닌데 사실처럼 믿게 하는 그래서 이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어떤 영역에 많이 쓰이냐 하면 쇠내 어떤 한 집단과 어떤 한 사람들을 쇠뇌시킬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프레임을 만들어서 교회를 공격해요.
예를 든다면 십일조는 율법이다.
여러분 이게 맞는 말일까요?
십일조는 율법이다. 그래서 최근에 저희 지도했던 교수님께서 십일조는 복음이다는 책을 쓰셨어요.
왜 쓰셨을까요?
사람들이 십일조는 율법이 아닌데 십일조는 율법이라고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막 공격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들조차도 십일조는 율법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거예요. 아닌데 그래서 이분은 평생 동안 연구하는 모든 지적인 에너지를 모아서 십일조는 복음이라는 책을 썼어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프레임 중에 또 하나는 교회는 코로나의 온실이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여러분 이 넓은 교회에 숙명이 예배했나요?
근데 백화점이든 식당이든 사람들 바글바글할 때 교회는 몇 명이 예배하지도 못했어요. 실제로 교역자들과 그리고 방송실 싹 빼버리면 진짜 성도들은 몇 명 오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교회는 코로나의 온실이라는 프레임으로 교회에 대한 불만 세력들이 프레임을 가지고 공격을 덮어 씌워버린 거예요.
교회는 범죄 집단이다. 목회자는 기득권자다. 여러분 목회자가 기득권자인지 일단 저의 삶과도 한번 비교해 보세요. 와서 한번 보세요. 제가 과연 기득권을 뭘 누리고 살아가는지 그렇게 프레임을 짜서 교회를 공격하는 거죠. 기독교 복지단체는 불법적이다. 기독교 사립학교는 비리의 온상이다. 현대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 국가주의 그래서 우리가 성시화 운동 같은 데서 한국이 복음화 되게 해주고 이렇게 기도한 걸 가지고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막 프레임을 짜서 공격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들, 그 교회의 반대 측에 서인 사람들이겠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아니면 반기독교 단체들이 교회에 덮어 씌운 프레임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프레임으로 사람들이 공격했을까요?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로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 모독자가 될까요? 말도 안 되는 거죠.
또 하나 예수님을 로마의 반역자라는 프레임으로 덮어 씌운 거예요. 그래서 로마의 공권력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했던 거죠.
왜 현대를 현재를 프레임 합니다. 사고나 사상의 틀 그러니까 프레임이 싸우는 전쟁터가 됐어요. 흑은화 극좌라는 프레임,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라는 프레임, 진보냐 보수냐는 프레임, 사회주의냐 민주주의냐는 프레임 자유주의냐 복음주의라는 프레임 전쟁 중에 있어요.
문제는 이 프레임 전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거예요. 이건 당연한 일이에요. 우리가 듣고 말할 때 우리 머릿속에 이 프레임이 작동하기 때문인 거죠.
그러니까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말을 하지만 교회에서 대화하고 교제하고 교육하고 훈련할 때는 이 프레임이 작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가 어떤 프레임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교회를 운영하는 방침과 성도를 대하는 방침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면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이 교회 안에 작동하게 되고요. 만약에 성도가 자본주의라는 사상을 가졌다면 자본주의 프레임이 교회 안에 작동하게 되는 거예요. 이 두 프레임은 바로 다른 극과 극의 프레임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전쟁을 일으켜야 되게 돼요.
여러분 프레임이 왜 무섭냐 하면 앞에 말했던 것처럼 최면이나 쇠뇌를 시킬 때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 프레임이에요. 쉽게 이야기하면 쇠뇌를 시키려고 프레임을 쓴다는 거죠. 공산주의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프레임을 써요.
그러면 이제 진짜 좀 말씀으로 돌아와서 문제는 교회가 공산주의라는 프레임과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으로 움직이는 것이 과연 맞냐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의 프레임 전쟁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 교회 안에 진보와 보수가 싸워요. 우리는 형제 자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인데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싸우는 일이 벌어져요.
물론 교회는 객관적으로 비정치적이긴 어렵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비정치적인 단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헌법이나 또 말씀에는 그렇지는 않아요.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 살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비정치적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교회의 핵심 프레임은 아니라는 거예요. 성도들 중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절대로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 1순위의 프레임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죠.
자본주의가 예를 들면 좋아요.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를 지배하는 사람도 있겠죠. 우리 교회는 있을까 싶지만 아마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런 부류의 사람도 그걸 좋아하겠죠. 그런 사람이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근데 문제는 그게 과연 내 피를 나누는 형제들과 교회 안에서 싸워야 될 일이냐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세상의 사상이 여러분과 저를 움직이는 첫 번째 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마귀의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교회가 복음을 품지 못하도록 교회가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지 못하도록 세상의 사상 프레임을 성도들에게 심었어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새해가 되어서 이 세상의 프레임을 가지고 교회 여부를 판단하고 목회자를 판단하고 교회 사역을 판단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교회가 힘을 잃어요. 복음을 전하지를 않아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래 우리가 지금까지 16년 동안 전도 인원이 가장 적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였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엄청 심각하게 봐요. 뭔가 문제가 있다. 변화가 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 이게 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사상이나 세상의 어떤 이념이나 이것이 1순위가 돼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면 절대 안 돼요.
그럼 교회는 뭐 해서 움직여야 되느냐 복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의해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 어릴 적부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프레임들을 좀 벗어버릴 수 있었어요. 만약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잘못된 프레임에 평생 갇혀서 살았을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어떤 프레임에 갇혀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율법이라는 프레임, 유대인들은 율법 이상이 없어요. 토라 이상이 없어요. 율법이라는 프레임에 갇혔고,
두 번째로는 바리새인이라는 집단주의 이념에 갇혀 있었어요.
세 번째로는 유대인이라는 프레임,
네 번째로는 로마의 시민권자라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었지만 로마의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진 자였어요. 만약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네 가지 프레임에 평생 갇혀서 평생 갇혀서 살았을 거예요. 만약에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율법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자유를 맛보지 못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 실체인지 알지 못하면서 율법의 종 노릇을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만약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리새인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 바리새인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이 복음의 훼방꾼들이었어요. 하나님의 나라의 해방꾼으로 평생을 살았을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서 잡아 핍박하기 위해서 가던 길이었잖아요. 평생 바리새인이라는 이 프레임에 갇혀서 예수님을 저항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자로 사도 바울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거죠. 하나님의 문을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는 자로 살았을 거예요. 유대인은 선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실체 여러분 율법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예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으로 사도 바울이 평생을 살았을 거예요. 만약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불행한 프레임에 갇혀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을 겁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정말 자랑스러운 시민권입니다. 신분이에요. 그러나 천국 시민권에 비하면 비할 바가 되지 못해요. 만약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로마 시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살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못하고 로마의 시민권자인 것을 자랑하고, 유대인인 것을 자랑하며 자기가 율법을 준수하는 자로 평생을 살고 있다는 걸 자랑하고 자기가 바리새인인 걸 자랑하면서 평생을 살았을 거예요.
바울의 인생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프레임이 찾아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진짜 버릴 게 뭔지 아세요?
예수를 만나서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이것도 되게 중요한 일이기도 해요.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내 사고의 틀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리 잡게 하는 거예요. 이전의 지식을 버리는 것, 내가 이전에 알던 지식을 버리는 것은 돈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사람은 사상에 갇혀 사는 체계 체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또한 모든 것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생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이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나니까 버려지게 되더라는 거예요. 만나서 버리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나니까 버려지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 어떤 것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왜 세상적인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성도들은 그 프레임으로 목회자와 성도를 보고 교회의 사역을 보고 있을까요?
그 중심에는 우리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예수님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걸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들이 아니라 그냥 버려지는 것들인 거예요.
잘못된 삶, 삶의 스타일들, 지식들, 체제 프레임 이것들은 그냥 버려지는 것들이에요.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우위에 있기 때문인 거죠. 이 모든 것에 견주는 정도가 아니에요. 절대 위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것들을 세상과 비교하려는 그 자체가 정말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이러는 이 예배 때로는 제가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해서 때로는 좀 부족할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러 준비하지 못해서 예배가 참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 예배라는 이 자체는 세상에 어떤 그 의식보다 비교할 수 없는 의식인 거예요.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가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그냥 자동적으로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고 자동적으로 버려지게 된 거죠.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만났다고 하더라도 혹 잊어버리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제 생각에는 다 만났다고 생각은 확신이 있어요. 그러나 혹 잊어버릴 분은 있을 것 같아요. 만났는데 이 만남을 잊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잊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잊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내 삶에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잊어버린 거예요. 구원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잊어버린 거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모든 것을 복음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프레임이 바뀐 거죠. 바리새인이라는 프레임이 빠져나가고 로마 시민권자라는 프레임이 빠져나가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거죠. 그랬더니 이제 그가 이전에 보던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 로마는 정치적인 목적의 도시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이 사도 바울에게 로마는 선교의 대상이 되었던 거예요.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행전 19장 21절에도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여야 하니라.
그러니까 이전에는 복음의 도시, 정치적인 목적의 도시였어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로마는 선교지로 바뀌게 됐던 겁니다. 예수를 만난 후 복음이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게 여겼어요.
여러분 복음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부끄러운 게 생각보다 많아요. 내가 복음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고 복음으로 결정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는 부끄러운 게 많아요. 부담스러운 것도 많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그 가난과 가난한 사람이 복음으로 보여요. 전쟁 중인 곳을 가도 복음으로 보게 되고요. 돈을 봐도 복음으로 보게 되고요. 직장을 봐도 복음으로 보게 돼요. 그러니까 직장이 선교의 대상지가 된 거죠.
옛날에는 나를 돈벌이를 나에게 월급을 주는 곳, 내 가정의 수익을 책임지는 곳이 직장이었다면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에 직장은 선교지가 되는 거예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는 복음보다 더 강력한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복음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이 결국 로마도 무너뜨렸어요. 유대인이라는 헬라인이라는 프레임도 다 무너뜨렸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거예요.
복음으로 해석하고 복음으로 말하고 복음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 잠깐 동안 복음이라는 프레임이 아닌 다른 프레임으로 목회를 했어요. 다른 프레임이 제 속에 들어온 거죠. 원래 복음이라는 이 프레임이 목회자에게 늘 1순위여야 돼요. 성도의 가난을 봐도 복음으로 봐야 하고 성도들의 질병을 봐도 복음으로 봐야 하고 교회를 봐도 복음으로 봐야 하고 주변의 이웃을 봐도 복음으로 봐야 되는데 잠깐 동안 복음이 아닌 다른 프레임이 제 안에 자리를 잠깐 잡았습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닌 세상적인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이 어떻게 보이냐는 거예요. 세상은 살 가치가 없고 세상은 허무하고 세상은 의미 없는 곳이 돼 이런 거죠. 목회자가 열심히 수고해도 의미 없는 것이 돼요.
여러분 목사가 이러면 되나요?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고 지금 비록 내 눈앞에 물질과 내가 원하는 것들이 쌓여지지 않아도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게 목회자인 거잖아요. 오늘 복음이라는 프레임이 빠져나가니까 그렇지 않게 잠깐 보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프레임으로 세상을 봐야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되고요.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담겨 있는 곳이 돼요.
세상은 사람과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복음이라는 프레임으로 봐야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로 구원의 대상으로 영혼으로 보이게 돼요. 로마서 2장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왜 이런 결정을 했냐 하면 가장 복된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만 알아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몰라서 그렇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서 예수님이 부족한 것처럼 예수님을 살면 안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살면 무능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할렐루야 세상과 견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어서 이 자리에 예배한다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지위와 그 어떤 자리와 그 어떤 명예와도 견줄 수 없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가장 복된 자리에 가장 행복한 자리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믿어지려면 이게 아멘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붙잡아야 돼요. 여러분 지금까지 세상을 살다 보니 잘못된 프레임이 여러분의 머리와 여러분의 삶을 이렇게 둘러싸고 있을 거예요.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야 내가 돈을 벌고 근데 이제는 이제는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뭐냐 하면 세상에 프레임을 가져와서 교회를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의 프레임을 가지고 복음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는 이 거대한 프레임을 가지고 다시 세상을 보고 다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해야 되는 시대가 온 거예요. 그런 교회가 살아남고 그런 성도가 살아나는 시대가 온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은 젊었을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프레임을 벗어버리고 복음이란 프레임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복음이란 프레임으로 살기 시작하자 다른 삶이 사라지고 다른 목표가 보이고 다른 미래가 보였어요.
우리의 미래가 세상 사람과 똑같다는 것은 여러분 우리의 프레임이 세상 사람과 똑같다는 거예요. 아직 내가 예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직 복음이 중심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친구들과 대화를 해요. 친구의 머리 속의 생각과 여러분의 머릿속의 생각이 같다면 이게 바른 일일까요?
세상적인 뜻은 잘 통할지 모르지만 세상적인 친구로 오래 남을지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들인 거죠.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에 복음의 프레임으로 무장한 친구들을 하나씩 두십시오.
여러분 그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예요. 좀 바보같이 맨날 교회 생각하고 맨날 교회 일 말하고 맨날 어떻게 하면 교회에 가서 드릴 생각하고 맨날 교회에 가서 기도할 여러분 이게 진짜라니까요. 이게 가짜가 아니에요. 세상이 그게 가짜다 잘못된 신앙이라고 평가하도록 우리에게 잘못된 프레임을 넣어서 그런 거지 그게 진짜라고요. 그렇게 산 선조들로 인해서 지금 이 땅에 교회가 있고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는 다시 다시 복음이라는 프레임으로 무장을 하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저는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복음으로 살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는 복음으로 살아야 될 사람이에요. 그리고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될 사람이에요. 꼭 여러분 가운데 열심히 살다 보니 잘못된 프레임이 여러분을 자리 잡고 있다면 오늘 찬양하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내가 지금까지 세상을 살다가 잘못 만난 잘못 가지게 된 이 세상적인 프레임은 오늘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게 해 주십시오. 복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복음으로 말하고 복음으로 해석하는 자로 내가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복음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십자가가 보이나요?
여러분의 삶에 제 삶에 십자가가 보이나요? 십자가 없는 복음은 능력이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라는 프레임으로 복음이라는 프레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레임으로 무장을 하고 다시 세상을 보고 나의 삶을 살고 교회를 섬기면 그 안에 복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