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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
문재인 정권의 임기가 4년을 지나면서 말기로 접어드니, 여기저기 대선주자(大選走者)들이 나서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연일 매체에 실리곤 합니다. 마치 무협소설(武俠小說)에서 무림지존(武林至尊)을 뽑기 위하여 강호(江湖)에 모이는 모습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협객열전이 있듯이, 무협(武俠)이라는 말은 무술(武術)과 협의(俠義), 두 단어의 조합입니다. 무협의 기본정신은 파사현정(破邪顯正), 곧 사악함을 깨트리고 올바름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권력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지요.
한때 민주화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씨가 경쟁할 때, 무림지존을 뽑기 위하여 강호(江湖)에서 혈전을 치루는 모습에 비유하여 대중검자(大中劍者), 종필노사(鐘泌老師), 공삼거사(公三居士)라는 무림고수의 이름을 부쳐 무림세계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기 더하여 감사원장을 지내며 혜성같이 나타난 대쪽검사 이회창은 회창객(會昌客)으로 등장하여 무림세계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습니다. 회창객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신공(神功)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끝내 지존(至尊)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무림에서도 공작정치와 같은 비무기(秘武器)가 있어 회창객의 아들 병역비리를 병풍(兵風)으로 포장한 병무청의 하급관리 김대업(金大業)이 조작하여 회창객의 대업(大業)을 좌절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대업이가 대업을 망친 꼴이었습니다. 무림계에도 그런 사도(邪道)가 있었던 겁니다. 한참 지난 후 그것이 비무기였음이 드러났으나 무림의 현실은 냉정한 법, 때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격동의 한국사회에서 대선 때마다 특정인에게 한국인의 정치적 메시아로 오버랩되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 반열에 고건 전 국무총리,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벤처기업인이자 의사인 안철수교수, 문재인 변호사겸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이 대중적인 지지도를 업고 대선가도에 진출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별의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현실의 정치에서 그들의 인기는 허상임이 드러났습니다. 시대정신과 소명의식도 없이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던 겁니다.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결국 당주 노무현의 비극적인 최후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문재인이 지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지존의 자리가 정해지면 강호(江湖)의 무림(武林)들은 뜻을 접고 떠나는 법. 그러나 몇몇의 무림은 강호에 남아 계속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존무상(至尊無常), 지존의 자리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월만즉휴(月滿卽虧)라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하는 법. 당주 노무현과 문재인의 더불어 민주당에서 새로운 계승자가 나타나 당주의 못다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부심하고 있으나, 이미 정의와 공정은 민심을 잃고 반문연대에 힘이 결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 별을 마주한 사람들 중에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강호에 혜성같이 나타나 만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나타난 고수들과는 다른 비기(秘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며, 무엇보다도 무림에서 가장 많은 검객들을 이끌며 무림계(武林界)에 만연했던 불의와 싸워온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정치인으로서 우리 시민들에게 보여 주어야 되는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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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낼리티를 두가지 관점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 카리스마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정신입니다. 그가 만약 이 두 가지에 대해 남다른 강점이 있다면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리스마(Charisma)는 ‘재능’ ‘신(神)의 축복’을 뜻하는 헬라어 Karisma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톨릭에서는 성령이 내리는 특별한 은혜, 은사(恩賜)라는 뜻으로 씁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이나 정치가, 군인, 경찰, 법조인 같은 수직적인 구조에서 많은 조력자나 하수인 또는 열혈팬을 얻기위하여 스타나 지도자들이 꼭 가져야 할 자질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매료시키고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군집, 즉 사회를 이루면 이내 이끄는 존재외 따르는 존재로 나눠집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어떠한 집단의 상층부로 진입하려면 이러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포스, 아우라, 위엄, 존재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누구보다도 카리스마의 의미에 천착한 학자였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고자 했던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하여 이 책을 썻다고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도 체사레 보르자의 카리스마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는 볼 수 없는 ‘우아한 냉혹’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도 그에 비견될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포스’라는 말은 SF영화 『스타워즈』라는 영화에서도 나타났으며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영화의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서도 이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꼽으라면 ‘나훈아’정도 같은 가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으로 2시간을 혼자서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할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대중을 사로잡는 면에서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인의 카리스마는 한 나라를 흥하게 할 수도 있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공공재(公共財)라 할 수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그러므로 정치인에게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닌 공공에 대한 소명(召命)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서 읽은 영웅전이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진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서양에서는 플루타크 영웅전이 있다면 동양에서는 『사기(사기)』의 열전편, 초한지, 삼국지, 수호지 등에는 영웅과 위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당연히 위인들의 역사인 줄 알았습니다.
“역사는 위인의 전기(傳記)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토마스 카알라일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그런 역사관을 이야기 한다면 초등학교 수준의 역사관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겁니다. 사실 영웅이나 위인들의 역사라는 인식은 근대 이전, 즉 계몽시대 이전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중요하지 않던 신분제사회의 지배계급에서 통용되던 사고체계였습니다. 어릴 때 보통은 어머니나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듣던 교훈적인 역사관이지요.
그러나 계몽시대 이후 억눌렸던 민초들과 시민들의 자각이 일어난 후로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민중과 시민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알라일 자신도 『프랑스 혁명사』라는 저서에서 혁명이 일어난 배경이 된 비극적인 참상을 웅변적인 말로 비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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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과 헐벗음과 당연한 압박이 이천오백만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상처받은 허영과 철학적인 지지자
들의 상반된 철학, 부유한 상인, 시골귀족 등은 원동력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에서의 어느 혁명이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는 레닌의 말한대로 “정치는 수천이 아니라 수백만명의 군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 곳이야말로 진지한 정치가 시작되는곳이다.”라는 것도 같은 수준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촛불혁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촛불혁명이 만약 지방에서 수천 혹은 수만명에 그쳤다면 혁명의 동력도 얻지 못하고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서울 한 복판 광화문에서 수십, 수백만명이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치든 혁명이든 결국 역사에는 민중이 중요하며 숫자가 중요합니다(Numbers count in history). 이러한 역사관은 동학 농민혁명이나 러시아의 푸카체프의 농노반란도 봉건적인 정통 귀족계급에 대한 민초들과 농노들의 자각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역사인식입니다.
저는 청소년 시절 『대위의 딸』이라는 푸시킨의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지만, 그때는 푸카체프라는 반란군 지도자와 당시 에카테리나2세가 어떠한 역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후 역사의 인과관계와 동력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에카테리나2세가 러시아의 계몽군주라는 것, 그리고 당시 러시아 인구가 7천만 가량일 때 그 사회를 지탱시켜준 것은 인구의 60%인 4천만 이상이 노동력을 착취당한 농노였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노동력 착취와 농노를 매매할 수도 있는 신분제사회에서 푸카체프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케테리나2세를 위인으로 본다면 푸카체프도 위인으로 보아야 역사는 공정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동학의 접주(接主)인 전봉준도 마찬가지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인이란 알 수 없는 곳에서 기적같이 나타나는 존재도 아니며 역사의 흐름을 방해하는 인물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야마가 말했듯이 헤겔의 고전적인 관점은 지금도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는 사람이며 그 시대의
의지가 무엇이고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의 행동은 그 시대의 심장이며 본질이다. 그는 자기
의 시대를 실현한다.”
그렇습니다. 위인은 자기의 시대를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박정희 이후 자기의 시대를 실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당연히 그런 카리스마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위인이 없는 무미건조한 초라한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을 통하여 그가 고양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의식을 위해 정신적 분투를 하는 사람이듯이,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기존의 세력을 대표하거나 또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창조하려고 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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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운이 살아 있다면, 그리고 좀 더 성숙한 역사를 가지고 싶다면 많은 민초들과 시민을 대표하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라고 행복한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그래서 카리스마는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와 달리 개인의 특출한 자질에 의해 연마되는 것이며, 그 아우라가 시대가 요구하는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과 조우(遭遇)할 때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역사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윤석열이 가진 카리스마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의식에 맞추어져 있는지 앞으로 죽 지켜 볼 작정입니다.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이라는 말은 계몽시대에 독일철학자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에서 주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확장되어 정치학, 철학, 볍학, 사회학 등에서 보편적으로 쓰게된 중요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미디어시대(디지털 미디어를 포함하여)에 시대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이 신문의 칼럼이라고 생각하며, 시대를 읽는 단상(斷想)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엘리트들이 가장 많이 보는 잡지로 그 영향력은 세계적이어서 시대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하나의 언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칼럼이란 “특정한 저자가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지식은 외형적이어서 그것의 철학적 숙고에 근접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팩트도 사안의 특성상 어떤 때는 횡간의 의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하듯이, 칼럼의 내부세게를 알고 싶다면 그 글을 쓴 칼럼니스트의 전문성과 사고의 철학적 경향도 알아야 그것의 가치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통찰은 ‘사전 너머의 세계’에 있습니다.
물론 칼럼니스트에 따라 취급하는 분야가 전문화 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시대정신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전문지식을 모르기 때문에 칼럼니스트의 전문성을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칼럼니스트들의 글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지만, 저명한 칼럼니스트의 글은 그 영향력이 지대하므로 하나의 권력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칼럼은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대변의 공간’이자 ‘설득의 공간’입니다. 그 설득의 공간은 사회구성원들이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하는 초대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정신은 지나간 시대와 다가올 미래사회를 연결하는 가치의 철학입니다.
역사를 가진 사회는 과거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억하는 기능도 필요합니다. 과거를 기록한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맞닿아 있으니 그 접점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일구어 나가야 할 ‘도래하는 세계’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시대정신이 만들어지는 당위성이 존재합니다.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하니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이상(理想)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삶의 기초가 되는 지극히 실용적인 정의와 상식의 회복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자유와 평등, 정의가 살아 숨쉬는 사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지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가올 미래사회로 진군하는 지도자가 나타나야 하며 그것만이 지난 4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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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나라를 구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전개될 대선(大選)을 카리스마와 시대정신이라는 관점에서 계속 주시해 볼 생각입니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그런 위인들이 서서히 조용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시대정신도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식통에 의하면 윤석열 검찰총장은 선후배간에도 친화력이 좋으며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는 통음을 할 정도로 대화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물론 과음은 삼가야 된다는 것이 일반론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란 면에서 좋은 점도 있다는 양면성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또 다른 희망적인 이야기는 감사원의 직원들이 요즈음 어느때 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에 임한다는 말이 들리며,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한 신뢰가 전임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사청문회에서도 보시다 시피 그는 여야의원 모두에게서 찬사를 듣는 미담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월성원전 경제성평가 감사에서도 흔들림없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관료를 ‘영혼없는 공무원’이라고 우리는 곧 잘 폄화하지만 일부 공무원들은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으며, 조직의 우두머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라고 만기친람(萬機親覽)형으로 24시간 긴장하고 살 수 없으며, 저의 지론은 때로 통음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봅나다. 오히려 일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곳곳할 수 있는 사람이 내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이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명동신사라고 불리었던 구상(具常)시인과는 영관장교 시절부터 통음하는 사이로 박정희는 구상시인을 ‘임자’라고 부르며 시대의 불만을 토로했고 구상시인은 ‘박첨지’라고 부르며 맞장구를 치며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상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는 “의협심이 많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상시인과 많은 대화를나눈다는 것은 박정희가 많은 독서량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소장파 군인으로 독서량이 많기로 유명한 김종필도 박정희의 넓은지식을 인정할 정도 였습니다. 결국 혁명을 일으켜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구상시인을 옆에 두고 싶어했지만 명동신사 구상은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유신(維新)말기에는 구상시인이 “박첨지, 이젠 그만 해먹고 내려오지”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구상시인은 박정희 사후(死後) 5년 동안 성당에서 제례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두사람 사이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사나이의 우정이란 무엇인가?’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런 박정희 밑에는 유능한 관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비서실장을 십년이나 지낸 재무부 장관 출신의 김정렴의 회고록을 보면 그 시대 관료들의 소명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박태준 회장과 포항제철을 만들었던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 출신으로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남덕우 부총리, 내무부 장관 출신의 김현옥 서울시장 등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실용적인 국가개조에 참여했습니다. 절망의 끝에 선 국민들을 생존에의 의지로 전환시킨 영혼있는 관료들이었습니다.
또한 아웅산에서 북한의 테러 만행으로 희생을 한 5공화국의 비서실장 함병춘과 김재익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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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은 정권에 관계없이 국가를 디자인 한 관료들이었습니다. 저의 옛날 노트에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단상(斷想)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그는 원칙론을 맹신하는 선비, 수신제가 좋아하는 도덕군자, 서구식 민주주의
좋아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좌파이론에 중독된 사람, 그들을 철저히 무시
하고 권력의 논리만을 따라 통치권을 휘둘러 잠들어 있던 민족의 야성을 흔들
어 깨운 비상한 에너지의 소유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 담배인심과 술인심이 제일 좋은 국민이라 합니다.
우리 세대는 병역복무 기간에 그런 경험을 톡톡히 한 세대입니다. 고참이나 졸병이나 문제나 고민이 있으면 우선 담배부터 권합니다. 필터도 없는 화랑담배를 그렇게 피워됐습니다. 고향초라 불리기도 하고 심심초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것이 거친 군생활을 중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것을 잘 이용한 듯합니다.
새로운 국정구상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저녁이면 전문관료들과 맞 담배를 하며 술잔을 주고 받으며 논의를 하곤 했다는 겁니다. “각하, 저는 방금 전에 피우고 왔습니다.”하며 사양을 해도 억지로 담배를 건네며 라이트로 불을 부쳐준다는 겁니다.
나라 살림이 어려운 때라 그런 프로젝트를 할려면 재정이 받쳐주지 못할 때였습니다.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관료)들은 그런 자리를 함께 하며 나라에 대한 열정과 용기를 내곤 했습니다. 오원철 경제수석은 우리나라의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을 박정희와 그렇게 주도해나간 대표적인 관료입니다.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 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전쟁을 치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은 쿠바 반군의 지도자인 가르시아 장군에게 비밀리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밀림에 있는 가르시아 장군에게 밀서를 전달할 사람은 누구인가?
참모 중 한사람이 로완 중위를 추천합니다. 대통령은 로완 중위를 불렀고, 로완 중위는 4주만에 밀림에 있는 반군지도자 가르시아 장군에게 밀서를 전달하는 임무에 성공합니다. 이 임무를 성공하지 못하면 가르시아 장군이 이끄는 반군이 대단한 위험한 경지에 몰려 전쟁이 실패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완 중위를 추천하는 참모나, 매켄리 대통령이 로완 중위를 불러 임무를 맡긴 것이나, 로완 중위 자신도 중언부언하지 않고 임무를 맡은 것은 그 조직이 물흐르듯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떤 중대한 임무를 맡았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적임자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국가의 운명에는 이런 열정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국정 전반에 신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한 나라의 지도자는 참모들과 조직의 상하간에 이런 신뢰의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유신 말년에 박정희는 정보부장에게 살해 당하는 비운을 겪지만, 통치과정은 나라를 근대국가로 만드는데 신명을 다 받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혁명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회를 뿌리채 흔들어 놓고간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감히 위인이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찬사로 부르크하르트의 저서 『세계사에 관한 고찰』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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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따끔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바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러한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
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
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다. …중략…위기에는 기
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2021년 6월7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
첫댓글 오랫만에 올라온 김논객의 긴 글을 음성비서로 들었더니 한참 걸리네.
이런 좋은글 자수 올리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