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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소식 스크랩 고려의 江都 시기(강화도 답사 2008.8.15~17)
연개소문 추천 0 조회 33 10.12.20 22:5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 프롤로그 - 강화도 천도의 배경

 

지난 여름 강화도 답사를 다녀왔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사에 이르는 유적들이 있는 강화도는 섬전체가 하나의 역사관 같은

곳이었다.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년)까지 2대 39년 동안 이곳은 고려의 수도였다.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은 몽고에 쫓겨 남하한 거란군을 고려와 몽고군이 연합하여 물리친데서 시작되었다.

이에 고려와 몽고는 형제관계를 맺고 통교를 하였으나, 몽고의 끊임없는 무리한 공물의 요구는 고려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런상황에서 1225년 고려에서 돌아가던 몽고사신 적고여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는 이를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고의 침입에 농민을 비롯한 지방의 군민들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당시 집권세력이던 무인세력은 적극적인 방어대책

세우지 않은채 강화교섭에 주력하였다.  각지의 항전에 부딪힌 몽고군도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강화를 맺고 물러 가게 된다.

 

그러나 몽고는 물러간 후에도 약탈적인 물자강요, 내정간섭이 계속되었다.  몽고의 내정간섭은 무신정권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막대한 물자 강요는 고려 정부의 재정파탄, 나아가 민중의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민중의 반정권 투쟁을 폭발시킬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최우는 항전을 결의하고, 1232년(고종 19년) 7월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였다. 당시 왕이던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고 개경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무신정권은  주변의 반대파을 제거하고 강제로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게 된 것이다.

 

2.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 손돌목, 손돌의 묘

 

고려고종이 무신정권의 강압에 못이겨 마지못해 강화도로 들어가는 발길이 가벼웠을 리가 없다. 허수아비 왕으로서의 한치

앞길도 예측할 수없는 운명,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했을 것이다.

 

고종이 현재의 광성진을 지나는데 갑자기 해협이 좁아지고, 물살이 세어져 앞길이 막히자 왕은 크게 화를 냈다. 이에 뱃사공

손돌이  "이곳은 바다의 자연암초가 선회하여 앞목이 막힌 배길이오니 절대로 염려를 마시옵소서"하고 진언하였으나 왕은 국난 

중 파천하는 때이라 초조한 심정에서 손돌이 무슨 흉계를 품은 것이라 착각하고 대신에게 크게 명하여 손돌의 목을 베이라

명하였다.  손돌은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가 떠나가는 대로 따라가면 자연 배길이 트일 것이옵니다'라는 마지막

한마디 충언을 남기고 형을 받았다.  왕은 그 바가지를 따라 진로를 택하여 무사히 난을 피하였다.

 

고종은 그 험한 뱃길을 피한 후에야 충성스런 손돌을 참수한 잘못을 후회하시고 정절을 지켜 슬프게 돌아간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현 대곶면 신안리 덕포 하류 손돌목 상보에 묘지를 만들고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로부터 이 좁은 물길을 손돌목(손돌항)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기일이 되면 매년 강풍과 혹한이 닥쳐오니 이는 필시 원통한

죽음을 당한 손돌의 넋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손돌의 추위'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손돌목>

 

광성보의 용두돈대앞의 손돌목의 모습이다. 물밑으로 암초가 드문드문 보이기도 하고 물살이 소용돌이쳐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손돌의 묘>

 

손돌목의 동남쪽의 언덕에 양지바른곳에 서있는 손돌의 묘이다. 그전의 손돌의 묘와 사당은 일제 강점기에 없어지고,

현재 있는 이 묘는1970년 김포 신안리의 토박이인 김기송씨가 주축이 되어 덕포진(사적 제292호) 내에 복원한것이다.

김포군에서는 김포의 3대 얼의 하나로 손돌의 충성심을 선정하여 받들고 있다.

 

 

 3. 전시정부 - 고려궁지, 강화산성, 정족산 가궐지

 

천도는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황급히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강화에 왔을때 거처할 곳이 없어 객관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2년 후인 1234년에서야 궁궐과 관아의 건축을 모두 마쳤다. 규모는 비록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 그리고 행궁, 이궁, 가궐 등의 여러 궁궐과 정궁이 있었던 너른 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전시정부였지만 왕실의 위엄과 기개는 보여줄려고 했을 것이다. 궁궐의 여러시설과 전각들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하면서

모두 허물어 버려서 지금은 정확한 범위를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다.

 

<정족산 가궐지>

 

전등사에서 사고로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가궐이 있었던 터가 나오는데 금줄을 쳐놔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假闕은 가짜 궁궐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왕이 기거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묵어 가기도 했던 궁궐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가궐은 왕이 거주하는 것 처럼 항상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가궐은 풍수지리설에 지어진 것으로 여기다 가궐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를 하면 몽고에 대한 親朝 문제가 해결 

될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몽고침입으로 소실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2000년에 발굴하였다고 한다.

 

 

<강화유수부 동헌>

 

조선조에 들어와서 인조9년(1631년) 고려궁터에 행궁을 건립하고 전각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다.  현재의 동헌 건물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들로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이다. 동헌의 명위헌(明威軒)이라 쓰인 현판은

영조 때의 명필 백하 윤순의 필체이다. 

 

<외규장각>

 

 

강화도는 서울과 멀지 않다는 점과 섬이라는 특징은 이곳을 유사시에는 왕의 피난처로 적합하였고, 중요한 문서의 보관처로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실록보관을 위한 사고가 있었고,  중요한 왕실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규장각의 부속

기관적인 성격의 외규장각을 만들었다.

외규장각은 정조 1781년(정조5년)에 설치되어 왕실의궤를 비롯하여 1,0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1866)때

건물은 소실되어 버리고 보관중이던 서적들은 프랑스가 약탈하였다. 지금도 이 서적들의 반환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강화산성>

 

1232년 몽고의 2차 침입에 대비하여 쌓기 시작하였다.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내성은 현재의 강화산성으로 둘레가 1,174m가 되었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연)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남아있는 성곽은 조선조에 다시 석성으로 축성한 것이다.

 

 

 

 

4. 강화에서의 삶

 

천도이후 강화도에서는 거주도 문제였지만 갑작스럽게 불어난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식량문제는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시기에 대규모로 연안 저습지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개간된 땅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으며 재정과 식량의 조달은 지방으로부터의 공급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심각한 경제 사정은 강도에서 생애의 말년을 보낸 당시 재상이었던 이규보 조차도 그의 시에서 자신의 궁핍상을

호소하곤 하였다.

 

  "굶주린 종놈은 배가 고파 집 못 짓고

   파리한 말 쓰러지자 땔나무 떨어 졌네

   온 집안 술 못 빛아 병에는 술이 없고

   며칠 동안 불 못 지펴 솥에는 먼지 뿐

   정승이 이처럼 돌 볼 줄 어찌 뜻이나 하였으랴 "  <<동국이상국집>> 18  上崔相國二首

 

천도이후 관리들은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계속되는 몽고의 침탈과 농촌의 피폐, 강도건설등 여러가지의

재정적 압박 요인들은 강도정부를 더욱더 궁핍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무인집정자 및 일부 권세가들은 대체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천도초 고종 21년에 최우의 저택은

정원수를 본토에서 실어와 수십 리에 달하는 園林을 조성할 정도였고 최항때의 저택에는 격구장까지 부설되어 있었다. 또한

무인집권자에 의한 연회도 자주 베풀어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최씨 무인정권이 공식적인 제도를 통한 경제운영이 아닌 독자적인 사적 경제기반을 확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씨정권은 방대한 사병집단의 유지, 정방과 같은 사적 정치기구의 운영, 문무 신료 야별초군에 대한 사적인 시혜,

새 궁궐의 조영과 공적시설물의 건축비 충당, 팔만대장경의 제작비 지원, 사원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등 그 재정요소는 일개

정부를 방불케 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경제적 기초는 비교적 전쟁피해가 적은 경상 전라도 지역의 최씨정권의 농장이었다. 이는 식읍으로 하사 받은 토지와

불법으로 점탈한 토지가 기반이 되어 후계자에게 세습이 되었다. 그리하여 강도시대의 무인정권은 이러한 사적 경제기반을

기초로 정부의 극심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정권 운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말 부터 조성된 간척지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강화도의 목장화 시책과정에서 방치되어 황폐하게 되었지만, 조선후기 이후

정부의 주도아래 강화도의 농지 개발은 활기를 띠었다. 마니산에서 바라본 간척지의 모습이다.

 

 

 

 5. 남은 자들

 

1258년 무관 김인준등에 의해 최의가 살해됨으로써 60여년의 최씨 정권은 끝이 나고 정권은 다시 김인준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1259년에는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되었고 개경환도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다춤이 벌어졌다. 원종을 비롯한 문신관료들은

개경환도를 주장한 반면 소극적이나마 반몽의 입장에 있던 무신 지권층은 개경환도후의 권력상실을 염려하여 개경환도를 극력

반대하였다.

 

1269년 말에 원종은 몽고를 찾아가 무신 집권층 제거와 개경환도를 위해 몽고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1270년에

무신집권층을 제거하고 개경환도를 선포하였다. 100년에 걸친 무신 집권시대는 막을 내렸으나 몽고라는 또다른 세력에

종속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석릉> - 희종의 무덤(1169~1237)

 

희종은 신종의 장남으로 1204년에 즉위하였으나, 최충헌의 횡포가 심하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최충헌에 의해서 7년만에

왕위에서 폐위된다(1211). 강화도 교동에 있다가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덕정산 남쪽에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석릉주변에는 귀족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여러기의 무덤들이 있었지만, 석곽이 드러나고 석물도 쓰러져 도굴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엇다.

 

<홍릉> - 고종의 무덤

 

1259년 6월 고종은 무신정권의 강압에 의하여 들어왔던 강화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건 몽고와 항쟁을 택했던

왕으로서, 국토와 많은 백성들이 황폐화되고 핍박받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가릉> -고려원종의 왕비 순경태후의 능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채공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러나 고종 31년(1244)에 태자비였을 때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후에 원종 3년(1262)에 정순왕후에 추봉되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에 추존되었다.

 

현재는 석실의  한쪽을 유리로 하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놓아 당시의 묘제를 살펴볼 수 있다.

 

 

<곤릉> 고려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무덤

 

강종의 비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채후의 무덤이다.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지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그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이규보 묘>

 

당대의 최고의 문장가라 할 수 있는 이규보의 묘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재가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여러차례 낙방을 하였다. 몇차례의 낙방끝에 과거에 합격하지만 관직을 받지 못하여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32세가 되고 나서야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서

임관하였으나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각별한 후견덕에 최씨정권하에서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아마 무신정권이라는 약점을 자신들의 입에 맞는 문신들을 후견하는 것으로 메울려고 한 무신정권의 하나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강도에서의 말년은 당시 많은 문신관료들이 그러했듯이 그다지 좋지많은 않았다.  고종 24년(1237) 나이 70으로 퇴임한

이후 녹봉이 반감됨에 따라 가난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저는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 없이 녹봉만을 의존해 오다가 녹봉마저 뜸하여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이며 老物이 쓸모가 없어져

 탄마저 구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기가 일수였습니다." -동국이상국집 8. 上普陽公幷序

 

 

 

현재 이 묘역은 여주이씨 종중에서 고나리하고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재실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리고 있다. 

묘앞에 놓인 石羊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이다.

 

6. 에필로그 - 대몽항쟁을 이끈 고려민중들

 

고려의 1차 침입후 고려 조정은 강화도 천도를 하여 적극적이기 보다는 소극적 저항을 택하였다. 그후에도 몽고는 출륙환도를

요구하며 5차에 걸친 침략을 감행하였다.

천도후에도 호화스런 생활을 하고,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정권유지에 급급했던 위정자 밑에서도

40년이라는 세월을 몽고에 저항 할 수 있?던 것은 민중의 저항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들은 무신들의 수탈과

몽고의 침략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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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2.27 18:18

    첫댓글 많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작성자 10.12.28 12:07

    벌써 3년전 일입니다. 흥사단산하 daum카페 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님,회원수100여명)의 강화도2박3일 문화유적답사를 제가 안내했고,감동을 받았습니다. 준비한 방대한 자료,학생들을 포함한 회원남,여 10여명의 열정,제주도에 대한 사랑....저는 그이후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같은 모임을 강화도에도 만들자라고 결심하고 지금까지 노력했습니다. 그러나,인원은 있으나 그분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열정,그분들의 고향에대한 사랑만큼은 따라 갈수 없었습니다. 제주문화유적답사회는 15년간 회장님 없이 운영되다 최근 고영철님을 회장으로 위촉했다고합니다. 카페 구경한번 해보시길.... 우리카페가 가야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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