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인 그리스도인 - 논어 18 미자 편
20240531
어느 나이 어느 사회적 위치에 있던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와 역할이 있다. 부모로서는 자녀 양육, 가장으로서는 가정 부양, 직장인으로서는 성과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학생 신분으로 마주하는 가장 큰 과제는 학업이다. 많은 학생이 학업에 책임을 지고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공부에 사용한다. 나 또한 학생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주어진 과제를 외면하는 순간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끼치며 나의 삶 또한 생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에서 성실함은 한 사람으로서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친구들에게 공부를 왜 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과 가족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대답을 한다. 놀랍게도 교회에 있는 아이들의 대답은 반대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그리스도인들은 학업뿐 아니라 부모로, 자녀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사회인으로, 국민으로 맡게 되는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 이처럼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따라 부여되는 또 다른 역할이 있다.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가 가진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요구함을 보여준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가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인지 의문이 든다. 내가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생각할 때면 확실하게 답을 하지 못하겠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이런 말은 나도 여러 번 했었지만 말할 때마다 이것이 공부 동기부여에 불과한 것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쫓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리 또한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 있는 요소로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논어 미자 편을 읽으면서다. 논어를 읽다 보면 곳곳에서 공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은둔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따름이니, 물이 깊으면 벗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어 올리고 건너야 한다.” (14.39) “도도하게 흐르는 물처럼 천하는 모두 이렇게 흘러가는 법인데, 누가 그것을 바꾸겠소?” (18.6)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거늘, 누가 선생이란 말인가?” (18.7)
은둔자라고도 불리던 산속 지혜자들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피해 몸을 숨긴 사람들로 격변하는 세상을 바꾸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흙탕물을 만드는 공자를 곱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공자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어거지를 부린다고 비판한다. 또한 권력자들 아래서 벼슬을 얻는 것에 집착한다며 나무라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미자 편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자로가 은둔자와 마주쳤을 때 있었던 일이다. 은둔자는 공자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로를 붙잡아 자고 가라고 하고 닭을 잡고 기장밥을 해서 먹였으며, 자신의 두 아들을 만나게 했다.” 공자와 이 일을 논한 자로는 이렇게 말한다.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다. 어른 아이의 예절을 없앨 수 없는데, 군신의 도의를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하여 큰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은 그러한 도의를 실행하는 것이니,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신다.”
특이한 것을 은둔자가 예를 이해하고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길에서 만난 손님에게 닭을 잡고 밥을 해주며 자식들을 소개한다. 자로는 은둔자가 숨어 살면서 정치적인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공자를 비판하지만, 예절은 철저히 지키려는 점을 지적한다. 어른 아이의 예절은 지키면서도 군신의 도의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자로의 대답은 군자 혹은 지식인의 역할과 과제를 보여준다.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의롭지 않은 이유는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이 도의 즉, 자신의 역할을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선택적으로 지켜 손님 대접의 예는 따르면서도 자기 몸 더럽히지 않으려고 사회적 혼란은 방관하는 것은 지식인의 역할을 져버리는 것이다. 시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옳다며 혼란의 때에는 은둔하는 것이 미련하게 개입하는 것보다 낮다는 또 다른 은둔자의 말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하구나! 어려움이 없겠구나.” 자기 옷 깨끗하게 하려고 세상에 미련을 버리는 것은 자신 또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적 혼란을 내버려 두는 것은 예를 지키려 하는 지식인이 지향해야 할 자세가 아니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은둔자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은둔자들이 한정된 공간에서는 예를 지키면서도 정작 혼란스러운 시대는 외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은 외면하고 기독교가 지양하는 차분하고 절제된, 이상적인 분위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일 수 있다. 은둔자들이 예를 선택적으로 따랐던 것처럼 어느새 하나님을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조화롭게 만들어 줄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잘 안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도구 말이다.
나는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받은 복음으로 내 삶과 가족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넘어서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아직은 내가 어떻게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과정에 머물러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직업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또한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매체에 맞게 메시지를 왜곡하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직업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을 간간이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함을 알았기에 조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가까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