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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 론
계속되는 북한군의 유격대 남파와 전선지역에서의 대귬보 군사훈련 등이 진행되면서 경계강화 조치는 5월 1일 노동절을 전후로 총 26일, 6월 11일 북한의 거짓 평화공세(북한의 조만식 선생과 남쪽에 붙잡혀 있는 간첩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는 제의를 해 놓고 무산시킴)를 전후해 총 13일의 비상경계가 발령되었다.
대기태세와 경계태세가 '50.4.7~6.23일까지 반복되면서 6.25전쟁 발발 하루 전날인 6월 24일 자정을 기해 해제되었다. 그러자 많은 장병들이 그동안 미루었던 휴가를 떠나기도 하고, 남아 있는 장병들은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작 전쟁이 발발 했을 때는 부대별 격차는 있지만 3분의 2, 적게는 절반 정도의 병력만이 영내에 남아있던 실태였다.
여기에 '50.6월 110일 군 부대 이동과 지휘관급의 인사이동이 단행되어 특히 전방 38도선에 배치된 6,7,8사단의 3개 사단 사단장의 이동이 있어 군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고도 사단장과 연대장의 대부분을 인사이동을 단행한다
◇ 주요지휘관 인사명령('50.6.10부)
| ~ 에서 | ~로 |
| 유재흥 준장 제2사단장(대전) | 의정부 제7사단장(전방사단) |
| 김종오 대령 제1연대장(동두천) | 원주 제6사단장(전방사단) |
| 이성가 대령 제16연대장(청주) | 강릉 제8사단장(전방사단) |
| 이형근 준장 제8사단장(강릉) | 대전 제2사단장 |
| 신상철 대령 제6사단장(원주) | 육본 인사국장 |
일선 지휘관 중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참모학교에서 교육 중이라 전쟁이 발발했을 시는 현지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전방의 명태사건(북에서 명태를 가져오고 우리는 군수물자를 건네주는 망국 행위로 김석원 장군이 부임하여 이를 못하게 막아버리자 당시 채총장과 갈등이 빚어져 결국 전쟁 직전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에 보임된다)으로 김석원 장군과 교체되어 제5사단장(광주)에서 새로 제1사단장 직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였다('50.4.22).
가. 6.25전쟁 개관
6.25전쟁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는 북한의 불법 남침기, 2단계는 유엔군 반격기, 제3단계는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 제4단계는 전선 교착 및 휴전협상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1단계 : 북한군의 불법 남침기('50.6.25~9.15)
1950년은 30년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고, 아직 장마철도 아닌데 6월 19일부터 24일까지 연거푸 비가 내리다 멎어가는 실태였다. 6월 25일 04시에 "폭풍"이라는 공격개시 명령이 전군에 내려졌고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38선 240km를 넘어 일qkd적인 불법 남침을 감행한다.
당시 육군 수뇌부는 바로 전날 밤에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연회에 참석하fj 근무지에서 서울로 떠나 버린 상황이었으며 과음으로 대부분의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이 깊이 잠들어 38도선의 지휘체계는 먹통이 되어 초기 대응작전은 마비 상태가 되었다.
사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북한의 남침 첩보가 무려 420여 건이 되고 수 없이 많은 전쟁 징후가 육본에 보고 되었다. 북한은 무력 남침을 위해 '48년 2월부터 약 28개월동안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6.25일 당일까지도 휴일을 즐기는 것을 벗어나 많은 병력이 휴가나 외출 외박을 나갔다. 여기에 국군은 기동장비나 통신 장비에 대한 입고 조치 등이 벌어져 어떻게 보면 오히려 우리 군 수뇌부에 프락치가 들어와 전쟁을 이끌었다는 비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이 시간 채병덕 총참모장은 작일 장교국락부 개관식에서 술을 마시고 갈월동 총장 공관에 6월 25일 02시에 도착하여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05시 10분에 전방 춘천의 제7연대장 임부택 연대장이 전화를 걸었으나 담당 부관은 총자이 잠을 잔다고 바꿔주지 않았다. 06시에 육본 닐직사령이 총장 공관에 달려가 북한군의 남침사실을 알리게 된다. 채총장은 술이 덜 깬 상태에서 09시 30분에 미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를 대동하고 의정부에 가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상황보고를 듣고서야 전면 남침을 확인하게 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10시 10분에야 보고되었다.
◆ 서부지역 초기전투
(가) 옹진지구 전투
개성 서쪽 옹진반도에는 국군 독립 제17연대(백인엽 대령)이 45km 에 달하는 38선경게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적군은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가 전차를 선두로 양원 및 강령 방향으로, 북한군 제3경비여단은 기마대를 앞세우고 옹진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북한군의 기습을 받은 제17연대는 아침 6시경 전방 진지들이 돌파되고오후 5시에 옹진과 강령이 점령되면서 연대 방어진지는 무너졌다.
(나) 개성-문산지구 전투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기 위해 주공 부대인 제1군단이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방향과 개성에서 문산에 이르는 방향에 T-34전차를 앞세우고 밀려왔으며, 조공 부대격인 제2군단이 화천과 인제, 양양 일대에서 춘천. 강릉 방향으로 자주포(SU-76)자주포를 동원하여 38도선을 돌파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전방에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로 보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으로 , 그 중 제1사단은 구하리-고랑포-문산 방향으로, 제6사단은 개성-문산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결국 25일 아침 9시 30분에 개성이 피탈되고, 임진강교를 폭파하지 못하고 북한군 제6사단 주력부대가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밀려들게 되었다.
(다) 동두천-포천-의정부-미아리 전투
서울북방 의정부 방면에 북한군 제3사단, 제4사단이 제105전차여단을 앞세우고 밀려내려왔다. 여기에 국군 제7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작일 서울에 올라가 장교구락ㅂ부 개관식에 참여하고 약수동 집에서 머물다 남침 소식을 듣고 의정부에돌아가게 된다
북한군 제3사단이 포천방향으로, 제4사단이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하게 되며 당일 11시에 포천이 피탈된다. 해질 무렵에는 동두천이 피탈되면서 의정부 방어선이 구축되지만 축차적인 병력투입문제로 옥신각신하다 단 하루만에 국군 제2사단, 국군 제7사단, 수도사단이 밀려나고 27일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며 창동-미아리 방어선마저 무너진다.
서울의 마지막 저지선인 미아리방어선은 대략 27일 밤중에 무너지면서 수도서울에 맨 처음 돌입한 부대는 북한군 제105전차여단과 제4단이 들어오고 뒤이어 제3사단이 들어왔다.
(라) 한강교 폭파('50.6.28일 새벽 2시 30분경)
'50.6.28일 새벽에 한강의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면서 미쳐 한강이남으로 철수하지 못한 많은 부대들이 무기와 탄약을 유기한채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도생의 길을 걷게되었다. 그 중에 많은 인원은 한강이남에서 재편성 되어 한강선 방어에 투입된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는 최초국군 제1사단의 임진교 폭파 실패의 연장선에서 세밀한 준비가 있었지만 결국은 폭파시기에 대한 혼란과 국군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폭파되면서 다리 위의 수많은 피난민과 차량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버렸다.
강북에 고립된 국군 6개 사단(제1사.2사.3사-22연. 5사.7사)과 기타 증원부대(보병학교.육사.보국대대.기갑연대.포병교 등) 병력 6만여 명중에 한강철수 후 병력은 13,000여 명으로 무려 4만 3천여 명이 실종 또는 포로가 되고 사단별로 경우 500~1,000여 명이 한강을 도하하여 한강방어선을 편성하게 된다.
(마) 서울 점령 후 3일 동안 지체한 북한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제일 먼저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과 죄수들은 석방시킨다(남로당원 약 9,000여 명) 이들이 선봉에 세워져 이른바 반민족주의자를 색출한다며 3개월동안 전국적으로 165,000여 명이 학살되고 122,000여 명이 북으로 납치된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서울시청에서 승전 축하연회를 여는 등 3일을 지체하게 된다. 실로 국운이 풍전등화에서 실낯같은 여명이 살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남로당으로 북에 월북하여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실행한 박헌영의 60만 남로당원의 봉기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고대하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7월 1일, 한강을 도하하여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 중.동부지역 초기전투
(가) 춘천-홍천지구 전투
중부전선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2군단으로 조공으로서 다일에 춘천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 예하 제2사단을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ㅎ고, 인제-홍천 축선에는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의 강력한 방어에 조기에 춘천을 함락하지 못하고, 나아가 홍천 말고개에서는 조달진 육탄용사들에게 자주포 10문이 파괴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춘천지구에서 3일이상 머물게 되면서 조기에 춘천-홍천-여주방향으로 웋뢰 진출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던 그들의 작전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겨룩 김일성은 그 책임을 물어 당시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이 2군단장으로 임명된다.
(나) 강릉지구 초기전투
동해안 지역은구군 제8사단이 2개 연대로, 제10연대가 전방에 제21연대는 삼척에 배치하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5사단으로 정면공격을 감행하고, 제766부대와 제949육전대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시켜 남북에서 협공을 하게 된다.
국군 제8사단은 공병과 포병(서북청년단이 많아서 용기 백백했다)이 투입되어 적과 치열한 교전을 거듭하며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축차적으로 강릉으로 철수하며 인잡 제6사단의 춘천-원주-충주로의 철수에 맞춰 사단은 제천-단양 -안동방향으로 축차 철수하게 된다.
◆ 지연작전으로 전환
한강선 방어를 마친 국군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7월 4일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미군의 최초 상륙부대인 스미스부대가 평택-안성에 전개되고 7월 5일부로 군은 제1군단을 창설하였다.
초기전투의 실패 책임으로 채병덕 총장이 물러나고 정일권소장이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초대 제1군단장에는 김홍일 소장이 임명된다. 또한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재기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태를 고려하여 제3.5.7사단을 잠정 해체하여 제대로된 사단을 재편성하였다.
제1군단에 수도사단. 제1. 제2사단으로 서부지역을 담당하고, 육본 통제하에 중부전선의 제6사단, 동부지역의 제8사단 그리고 제17연대와 제23연대. 기갑연대를 육본 직할 연대로 하였다.
(가) 경부축선 지연전
7월 4일 평택을 출발한 미 제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가 서부전선의 최전방 부대가 되어 7월 5일 03:00시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산 죽미령에 도착하였다. 국군과 미군은 국군이 경부축선의 동쪽을 그 서쪽은 미군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1) 죽미령전투 ※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북한군과 최초로 전투한 지역
북ㅎ산군 제4사단 제107전차연대가 선두에서 1번국도를 따라 북한군이 남진하는 가운데 스미스부대의 포탄 사격이나 2.36" 로켓조가 적 전차를 사격했으나 별 반응없이 북한군은 계속진출하게 되고 전장공황이 발생하며 철수하게 된다. 당시에 국군 제17연대가 철수하여 이곳 오산-평택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나 우리가 조사한 결과로는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하였다. 다만 백인엽 연대장이 비행기 오폭에 의한 부상으로 제17연대는 김희준 부연대장이 지휘하게 된다.
당시 스미스부대는 총손실이 150여 명에 으르고, 북한군 손실은 전사 42명, 부상85명, 전차 4대가 파손된다.
2) 평택-천안 부근 지연전 ※ 지휘책임을 물어 최초로 야전에서 연대장 교체,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 천안에서 전사
오산 죽미령에서 전투가 진행 ㄷ될 때에 미 제24-34연대가 오산 후방 평택-천안에 제2저지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제34연대는 스미스부대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철수 병력이 진전에 나타나서야 실상파악이 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선두의 제105전차여단 뒤를 따라 제4사단이 진출하고 제3사단이 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수 당시에 유.무선 통신의 단절, 지휘통제의 어려움으로 제34연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잉에 제24사단장 딘소장은 지휘책임을 물어 제34연대장을 , 제2차 세계대전시 함께 싸웠던 "마틴 대령"이 러브레스 대령을 대신하여 야전에서 지휘관 교체가 있었다.
천안지구 전투에서 신임 마틴 대령은 직접 2.36" 로켓포를 가지고 적 전차와 맞서다 전사하게 되고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십자무공훈자을 추서받는디
3) 전의 -조치원부근 전투('50.7.8~11) ※ 적전차 38대 파괴, 북한군이 야간기동으로 전환한다.
7월 8일에 제34연대의 뒤를 이어 제21연대가 전의-조치원의 경부국도에 지연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계속 남진하는 적의 선두를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으로 초토화 시키는 가운데 적의 진출은 잠시 둔화된다. 이 전투에서 특히 개미고개 일대에서 북한군 전차 38대, 반궤도차량 7대, 트럭 117대 그리고 다수의 병력이 살상되면서 북한군 기동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 이후에 북한군은 야간기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북한군은 7월11일부터 제3사단으로 제4사단을 초월 공격하도록 하고 제4사단은 공주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나) 차령산맥선 지연전
한미연합전선의 형성 결과에 따라, 미 지상군이 평택-안성선에서, 국군이 차령산맥선에서 방어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 한강선 방어에서 영등포 방면을 지탱하던 혼성 수도사단이 7월 6일 진천으로 이동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게 된다(7.7일부 신임 감석원 사단장 부임)
북한군은 인제-홍천지역으로 해서 남한강을 도하한 제2사단(초기전투시 춘천지역에서 대량 피해발생하여 전시동원으로 신병보충하여 진출)이 국군 제6-19연대를 밀어내며 진출하고 있었다.
1) 진천-청주지역 전투(7.6~12)
문안산-잣고개-봉화산에 수도사단 연대들과 군단에비 제2사단의 제20연대, 군에서 제17연대와 기갑연대를 지원받아 7월 9일까지 방어작전을 수행하다 철수하여 청주북방 오근장역 부근 미호천 제방에 진지를 편성한다. 그러다 청주시내의 보호를 위해 13일 미호천ㅇ에서 청주남족 고은리-국사봉 일대로 축차 철수하게 된다ㅣ
2) 음성-괴산부근 전투(7.5~11)※동락리전투로 유명한 지역으로 초등학교 여선생(김재옥)의 신고 일화가 있다
※개전 후 최초로 제6-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전장병 1계급 특진한다.
음성은 장호원-음성-진천, 장호원-음성-괴산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다. 이 지역은 국군 제1사단이 담당하게 되는데 , 제1사단이 도착하기전에 엄호부대로 원주-충주를 거쳐 남하중이던 국군 제6-7연대가 적 제15사단과 접촉중에 있었다.
북한군 제15-48연대는 국군이 지나갔다는 증언에 무방비 상태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부용산 일대에 진지를 편성한 제7연대와 지원나온 제19-2대대의 협동작전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무력화 되어었다. 국군 제6-7연대는 적 군수참모를 비롯한 132명을 포로로 획득하고 각종포 54문, 차량 75대 등을 노획한다.
이무렵 음성에 도착한 국군 제1사단이 7월 8일부로 전선을 인수하게 된다. 북한군 제15사단 제49연대가 다시 진출을 하다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제1사단은 군단으로부터 전선 조정을 위해 괴산을 경유하여 미원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10일부터 철수를 개시하게 되고 적과 조우하면서 괴산-거리고개 전투를 실시하먀며 미원으로 철수한다.
3) 충주-수안보부근 전투('50.7.6~11)
충주에는 국군 제6-2연대가 있었다. 사단은 홍천에서 철수하여 7월 3일에 충주에 집결하는데 군으로부터 제1군단의 엄호작전 명령을 받고 제19연대와 제7연대가 이천-여주방면으로 투입되었다.
반면에 충주로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은 제12사단으로 홍천 말고개에서 대량 피해가 발생한 부대다. 여기에 후속하는 적 제1사단도 이천-여주를 거쳐 충주로 향하고 있었다.
적은 남한강을 도하하여 밀고 내려오고 연대는 충주 남쪽 수안보일대로 철수하게 된다. 층주를 점령한 적 제12사단은 후속하던 제1사단에게 인계하고 단양을 목표로 마지막재를 넘어 갔다.
4) 중동부지역 지연전
가) 제천-단양부근 전투(7.2~11) ※ 기차 속에서 요요작전 , 제8사단의 이상한 기동
중서부지역에서 지연작전이 전개될 당시 강릉에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단양에서 제천에 이르는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게 된다. 당초 제8사단장(이성가 대령)은 7월 2일 이곳에 도착한 후원주-제천, 평창-영월로부터적의 진출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본으로부터 충주로 이동하라는 전문을 수신하여, 사단은 5일 기차편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선발대가 대구에, 본대가 안동.영천에 도착한다. 이에 사단장이 대전의 육본에 가서 확인결과 그럱 전문은 없었다고 하며 즉각 북상하여 제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자은 바로 대구로 내려가 부대를 되돌려 6일 18:00시에 단양까지 진출하지만 이미 단양의 남한강 교량이 폭파되었고, 영월지역에서 우회하는 적 제8사단이 남한강 대안 상에 나타났다.
매포 초등학교의 적 연대 지휘소를 기습하여 심대한 피해를 주기도 하고, 남한강 차안상에서 비음산, 664고지 등에서 적과 교전하다 풍기 북방 소백산맥 죽령으로 7월 11일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나) 울진-영해 지연전('50.6.29~7.11) ※ 태백산으로 침투한 제766유격대
육본은 6월 28일 강릉의 제8사단을 제천방향으로 전환시킨다. 그 대신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3사단 제23연대를 동해안에 투입하여 지연전을 실시하도록 한다.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 제5사단은 국군 제8사단을 추격하는 한편 먼저 내륙으로 진출한 제949육전대를 흡수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저항없이 남진하게 된다. 한편 적 제766유격대는 지방공비와의 연계를 꾀하면서 대구-부산 간 통신선 차단 임무를 띠고 일월산-영양-청송방면으로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3일 평해를 돌파하여 제23연대는 영해로 후퇴한다.
이와 같이 한.미 양군은 7월 5일부터 차령산맥의 평택-충주-울진에 연한 방어선에서 12일가지 약 1주일간 적을 지연하고, 금강-소백산맥을 잇는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미군이 금강선을, 국군이 소백산맥선을 맡아 지연작전을 계속하게 된다.
◆ 유엔군 사령부 창설 /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
(가) 국군의 작전권 이양
7월 12일 미군이 금강선에, 국군이 소백산맥선에 지연진지를 구축한다. 이 무렵 유엔군이 편성되면서 유엔군사령북가 창설되고 제8군사령부는 작전 지휘권을 유엔사에 넘기게 된다. 그리고 국군은 2개 군단 체제로 재편성 한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사가 창설되고 맥아더 장군이 7월 8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공표되었다. 맥아더는 7월 24일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한다.
워커장군은 7월 12일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13일을 기하여 주한 미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라"는 구두명령을 받고 7월 13일 도쿄에서 대구로 이동하여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 미 대사를 통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한다는 서한을 전달한다. 이리하여 '50.7월 14일부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맥아더사령관에게 이양되고, 맥아더 원수는 17일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재이양하였다.
(나) 국군의 재편성
국군은 '50.7월 초에 제1군단 창설과 더불어 8개 사단에서 5개사단으로 감소 개편한다. 한반동에 들어온 미 제24사단과 평택-충주-울진선에서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광정면에서 5개사단으로는 임무수행이 곤란하여 당시 주한 미 지상군사령관 처치 준장과 협의하여 해편한 3개 사단을 복원하고, 나아가 후방지역의 방위와 병력보충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편성관구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군은 해편한 제3사단(이준식 준장), 제5사단(이형석 대령), 제7사단(민기식 대령)을 다시 살리고 부산에서 제9사단(이종찬 대령)을 찰설하기로 결정하지만 가용인원과 장비의 부족으로 실현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50.7월 17일에는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신태영 소장)를 신설하고, 전남및 전북 편성관구와 경북및 경남편성관구를 설치했지만 유명무실하였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7월 24일에 들어서 군은 제1군단이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하여 영주-안동 축선을, 제2군단이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지휘하여 문경-함창-상주 축선을 방어하고, 동해안의 제3사단은 육본 통제로 하는 부대편성을 단행한다.
◆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전
'50.7월 13일 대구에 지휘소를 개소하고 지상작전을 지휘통제하게 ㄷ되 ㄴ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엔군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공세이전의 시기가 조성될 때까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금강-소백산맥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워커 중장은 미 제24사단으로는 금강선에 배치하여 공주-대전지역에서, 미 제25사단은 중부 산악지대(상주-의성 일원)의 주요 도로상에서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국군을 지원하며 1개 대대로 포항의 영일비행장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가) 금강선 지연전
1) 공주-대평리 전투(7.14~15) ※ 공주 검상리에 국군 기병중대 지원, 적 야크기가 출현, 포병 대량 피해,
전차를 이용한 연대장 탈출
북한군 제1군단은 제3사단을 대평리로, 제4사단을 공주로 진출시켜 대전을 공격할 태세였다. 양 사단은 12일 야간부터 전차 50여 대의 지원하에 금강도하를 계획하여 14일 새벽부터 도하공격을 감행했다.
공주방면에서는 정면이 아닌 검상리로 우회 도하한 적이 포병진지를 유린하여 10여 문의 곡사포와 차량 80여 대의 손실을 입고 진지를 탈출행야 했다. 이로인해 포위돌파를 우려한 제34연대는 논산-대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대평리 방면에서는 7월 15일부터 적 제3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19연대는 좌우측방으로 도하한 적의 기습 공격에 부상당한 연대장은 전차에 몸을 실려 적진을 강행 돌파하여 살아났으나 대부분의 포와 차량을 유기한 채로 대전으로 철수한다. 당시 미 제19연대는 1,753명 중 481명의 손실을 입었다.
2) 대전부근 전투 ※ 포항에 상륙중인 미 제1기병사단의 영동 투입을 위한 20일까지 2일간의 대전 사수 명령
한국전 최초로 대전차 무기인 3.5"로켓포로 8대 파괴, 항공지원으로 15대파괴, 사단장 실종(포로)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북한군 공격제대를 후속하고 있는 북한군 제2사단이 우회기동으로 대전을 ㅡ포위할 것을 고려하여 제21연대를 마달령에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영동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북한군 제1군단은 3개 사단으로 대전을 공격하려 했으나 제2사단이 진천-청주에서 국군 수도사단에 의해 지연되자 제3. 제4사단만으로 대전을 공격한다.
7월 19일 아침 야크기 6대의 영동 철교와 대전비행장 일대를 강타하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어, 금산가도와 옥천가도가 차단되고, 대전시내로 적이 진입하면서 사단자인 딘소장이 직접 3.5"로켓포로 적 전차 1대를 격파한다.
하지만 철수로를 확인한 부대들의 혼선과 대전을 빠져나갈 세천 터널이 적에게 피탈되어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딘소장 일행은 보문산을거쳐 탈출을 기도하게 된다. 결국 사단장 딘소장은 7월 21일 전북 무주 적상면 방이리 고방마을에 이르게 되고 다시 진안으로 철수 중에 8월 25일 지역 주민이 북한군에 밀고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3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 1953년 9월 4일 포로교환시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게 된다.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6군단장을 끝으로 예편했다.
3) 영동-김천부근 전투 ※ 포항에 상륙중인 미 제1기병사단으로 상륙작전을 고려했던 맥아더의 구상 차질, 즉시 경부국도 투입
미 제25사단이 상주에서 황간우측으로 제27연대 투입
영동-김천가도에서 적 전차 19대 파괴, 적 제3사단 2,000여 명 살상
대전이 무너지자, 상륙부대로 운용하려던 미 제1기병사단을 즉시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제25사단을 화령장-상주로 전환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김천 축선에 투입하고, 상주 이동의 축선을 국군이 전담토록 했다.
제1기병사단은 7월19-20일에 영동에 도착하여 22일 제24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하였다. 영동 우측 황간에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가 투입되었다. 상시 제25사단은 제27연대가 안동에서 국군 제8사단을 지원하고 제24연대는 상주에서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며 예비인 제35연대는 상주에 집결하고 있었다. 제27연대는 황간 북방에서 국군 제2사단과 교대한다.
북한군 제3사단은 영동을 목표로 22일부터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하여 25일 영동시내로 진입한다. 제1기병사단은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을로 적을 무력화 시키는데 혈전을 거듭하였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북한군 2,000여 명이 손실이 발생했다고 하였다.
또한 황간 북동쪽의 미 제25-27연대는 우측방으로 기도하려는 북한군 제2사단을 맞아 27일 철수헤 되자, 사단은 29일 김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29일 사단은 경찰로 부터 김천 동측방 지례에 적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적이 31일 전차 25대를 앞세워 김천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기병사단은 포와 항공지원으로 적 전차 19대를 파괴하였으며, 적 제3사단 병력 2,000여 명을 살상하고 제203전차연대를 격멸한다. 미군은 919명의 손실을 입었다.
(나) 소백산맥선 지연전
1)미원-상주부근 전투(7.16~24) ※ 부흥리 거리고개 전투에서 국1-13연대 대전차 특공조 13명이 적 탱크 2대 파괴 1계급 특진
김재일 중사는 2계급 특진, 국군 제17연대의 화령장 전투 승리 (적15-48, 49연대 무력화),
국군 제17연대 미 고문관 : 30년 군생활에 가장 통쾌한 승리
진천-음성에서 물러난 국군 제1군단은 제2사단과 수도사단(제17연대 배속)이 고은리일대, 제1사단이 미원 북방에 방어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 북한군 제2군단은 갈령, 화령장, 이화령, 조령, 죽령에서 소백산맥을 신속히 돌파하여 상주와 안동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이에 청주를 점령한 북한군 제2사단이 수도사단 정면으로, 괴산으로 진출한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공격을 계속 중이었다.
7월 17일 적의 계속 공격으로 국군 제2사단과 수도사단이 고은리에서 문의와 보은으로 철수하고, 국구 ㄴ제1사단은 미원 남쪽으로 진지를 전환한다.
이 무렵 적의 작전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 후일 밝혀졌다. 적 제2사단이 대전공격의 동측방 포위부대로 기동하려 했으니 진출 속도가 느려져 보은-황간 쪽으로 진로를 바꾼다. 적 제15사단은 이미 괴산에서 제48연대를 갈령-화령장으로 통하는 산악지대로 은밀 기동을 실시하고 사단 주력도 미원을 점령한 후 국군과 접촉을 단절하고 화령장 방향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국군은 우측방 이화령-죽령 전선이 무너지자 문경-함창축선이 무너지면 국군 전선이 동부와 서부로 갈라져 각개격팓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수도사단에 배속된 제17연대를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며, 연대는 제1대대가 차량으로 16일 화령장에 도착하여 정찰을 실시, 적 1개 대대가 이미 작일 야간에 상주방향으로 진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어서 적의 전령 1명을 생포하여 이 부대가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이며 후속부대가 곧 상곡리 일대로 진출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체 상곡리에 도착하여 주변 하천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목욕과 휴식을 즐기다 국군의 기습공격으로 무력화 되었다. 다시 후속하는 적 제15-49연대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체 접근하다 동관리일대에서 무력화되었다.
7월 22일 제17연대는 국군 제1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상주로 이동하고, 제1사단도 7월 24일 미 제25사단 제24연대에 진지를 인계 후 제2군단으로 재편성되어 함창으로 이동하고 제17연대는 대구를 거쳐 합천 권빈리로 투입되었다.
2)이화령-함창 부근 전투( 7.13~31) ※ 이화령에서 아군 제6-2연대의 역공으로 북한군 800여 명 사상
문경 옥녀봉 전투에 국군 제6-7연대에 학도병 180명 참전
유곡리 전투에서 국6-19연 대전차 특공조가 적전차 4대 격파
수안보에서 철수하는 국군 제6사단은 소백산맥의 요충지인 이화령과 조령을 포함한 문경 정면을 방어하게 되었다.
7월 13일, 추격하는 북한군 제1사단은 문경-상주 축선으로 진출을 하고 있었으며, 새로 배속된 북한군 제13사단(-)이 이화령에서 서측방으로 침투준비를 갖추었다.
7월 22일까지 각 부대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치며 전선을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제7연대의 옥녀봉 탈환전에 학도의용군 180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7웕 23일 문경-유곡간 도로로 전차 7대를 선두로 진남교 부근에서 영강 도하공격을 감행해 왔으나 결국 25일 진출이 부진한 제1사단을 초월하여 적 제13사단이 정면돌파를 시도했지만 국군 제6-19연대는 유곡리에서 조달진 일병이 포함된 대전차 특공조가 4대를 파괴하면서 방어한다. 그러나 중앙의 수도사단 제1연대가 돌파되면서 유곡리 선이 무너졌다.
이 무렵 함창으로 진출 중인 국군 제1사단이 황간지역을 미 제25사단에게 인계후 해체된 국군 제2사단의 제5연대. 제20연대를 통합편성하여 제6사단의 좌측방을 방어하게 된다.
7월 26일에는 국군 제1사단(7.25일부 백선엽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이 영강 동쪽으로 추진하여 반격작전으로 오정산 일대를 탈환함으로써 적의 퇴로를 위협하게 되자 적이 일시에 와해되면서 제6사단은 유곡리선을 회복하고 , 제1사단은 함창 서북방 지역을 방어하게 된다.
7월 29일 미명, 적 제1사단이 공격을 개시했으나 수차례의 공격에도 실패하게 되자 재편성에 들어가게 된다. 상주로의 진출을 차단한 국군은 7월 31일 낙동강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6사단이 먼저 제1사단의엄호하에 용기도으로 철수하고, 이어 제1사단이 낙동리로 철수하게 된다.
3) 죽령-안동 부근 전투( 7.13~31) ※ 개전이후 최초로 민간인 노무자가 배치
철수명령의 지연과 안동교 폭파로 제16연대는 장교 21명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
국군 제8사단은 단양을 실함한 후 죽령일대로 7월 12일 야간에 도착한다. 반면 북한군 제8사단은 그동안 전투손실로 인하여 14일 아침까지 재편성 후에 죽령을 넘기 시작한다. 그러나 풍기 일대에서 아군의 탄막지대를 정면 돌파하려다 대량 피해를 입고, 부대를 바꾸어 단양에서 정비 중인 북한군 제12사단을 풍기-안동 축선에 투입한다, 대신 제8사단은 단양-예천-안동으로 우회토록 했다.
7월 18일 적 제12사단은 국군 제8사단의 주저항선인 장군봉과 노인봉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23일 영주를 상실하였다. 당시에 국군 재편에 따라 도착한 제2사단 16연대를 편입함을로써 3개 연대가 되어 내성천 일대의 지연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국군 제8사단은 7월 24일부로 수도사단과 더불어 제1군단에 편입 되며, 적 12사단이 내성천 서측에서, 적 제5사단 일부와 제766부대가 청송-안동 방향을 압박하고 있었다.
7월 29일부터는 안동 외곾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수도사단이 예천방향에서 적 제8사단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다 7월 31일 24:00시에 안동철수 명령을 받고 8월 1일 04:00시에 먼저 제8사단이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철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고, 인도교와 철교폭파가 제21연대가 강안에 도달하기전에 폭파됨으로써 익사자가 속촐한다. 제16연대는 가장 늦게 철수명령을 받고 적에게 돌파되어 각개 철수하게 되는데 장교 21명, 사병 814며이 전사 또는 실종된다.
(다) 영해 -영덕 지연전
7월 10일 제3사단장에 임명된 이준식 준장은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로 영해-영덕간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반면 북한군 제5사단은 그동안 유엔 해.공군의 폭격과 병참선의 신장으로 기동속도가 느려졌다. 태백산으로 진입한 제766부대는 진보-청송 방향으로 진출 중에 있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14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17일 국군 제3사단은 영덕이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유엔 공군기와 함대의 사격으로 영덕에서 공방전이 계속된다. 영덕이 피탈시 포항이 위협을 받고 그러면 영일 비행장이 문제가 되기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제5공군사령고나 패트리지 소장과 제25사단장 킨 소장을 대동하고 포항에 도착하여영덕확보를 위한 화력지원을 강조하였다.
7월 24일 제22연대가 대구에서 강구에 도착하고, 해군의 포항경비부 육전대가 강구에 도착하여 전투력이 증가된다. 25일부터 영덕탈환 작전이 감행되어 8월 2일 영덕을 재탈환하였다. 또한 육군은 26일 진보-청송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대한 적의 우회기동을 차단하기 위해 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하여 반변천 일대에 진지 편성하여 적 제766부대를 저지하게 된다. 기갑연대는 영덕의 제3사단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수도사단이 안동 철수후에 좌측 일안으로 진출함에 따라 수도사단으로 배속이 변경된다.
(라) 서남부 방면 지연전
1) 서남부 전선 상황 ※ 북한군 제6사단의 호남지역 우회,
대전에서 금산-안의로 진출하는 제4사단를 알지 못한 미 제8군사령부
대전전투에서 물러나 재편성 중인 미 제24사단을 서남부지역에 투입,
국군은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민부대 통제
북한군 제1군단은 7월 11일 제3.4사단을 공주-대전 축선으로 투입하면서 후속하던 제6사단을 호남지역으로 우회시킨다. 천안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제6사단은 예산을 지나 16일 제4사단이 논산 장악과 때를 맞추어 금강을 도하하여 17일 강경을 점령하여 이리-군산으로 남진하면서 전북지구가 위기에 몰린다.
군은 7월 17일 서해안지구사령부(신태영 소장)편성하고, 전남북지역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 했으나 병력과 장비가 없는 유명무실한 방어계획이었다.
다만 17일 제7사단 예하의 독립대대(김병화 소령) 300명과 경찰 700명이 강경으로 진출하였고, 해병 고길훈 부대가 장항으로 진출하여 선제공공격으로 다소간 적을 지연하며 철수하였으나, 강경지역은 일방적으로 몰리게 되고 특히 강경경찰서 67명 전원이 전사하게 된다. 북한군 제6-13연대는 장항에서 금강을 건너 군산을 점령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23일 정읍-광주 일대를 석권하게 된다. 이에 군은 서해사와 편성관구 모두를 해산한다. 대신 제7사단의 전신이 되는 민부대(민기식 대령)가 육본 직접 통제하에 이영규. 김성은. 오덕준. 김병화부대 등을 통제하여 이 지역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광주에서 나누어 제13연대는 목포로, 제14연대가 보성으로, 제15연대가 순천으로 진추ㅜㄹ하여 25일 순천에서 합류하여 , 하동방면으로 진출하게 된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이 금산-안의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7월 23일 항공정찰로 확인한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군부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더구나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방을 석권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서남부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4일 부대재편 중인 미 제24사단을 진주-함양-거창선으로 투입한다. 25일 안의-진주에 제19연대(제29연대 2개 대대 배속), 제34연대는 거창으로, 제21연대는 합천으로 이동하였다.
국군은 25일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민부대를 통제하여 영남지역을 방어하도록 한다. 당시 민부대는 북한군 제6사단과 접촉을 유지하며 남원-운봉-함양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2) 하동-진주 부근 전투 ※ 국군 초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하동 쇳고개에서 전사, 미군 313명 전사. 100여 명이 포로가 됨
한국전쟁사 최초로 미군 중형전차 M-26퍼싱 전차 3대 진주전투 등장
7월 22일 경 여수-순천 학도병 200여 명이 자진 입대하여 열차로 남원으로 진출하다 적이 먼저 진출한 관계로 구례로 이동하여, 도보로 하동으로 진출하면서 지금의 화개장터부근에서 집결지 편성 중에 적의 기습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하면서 흩어진다.
7월 26일 육군의 혼성부대는 북한군 공격으로 진주로 축차 철수하면서 하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하동방어 명령을 받은 채 소자은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려을 진주에서 만나 하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게 된다. 이에 무어 대령은 배속된 미 제25-29-3대대로 하여금 하동을 탈환하도록 명령하고 채 소장이 이 전투에 동행하게 되었다.
7월 27일, 하동으로 진출하던 대대는 솟고개에서 아군복장으로 무장한 북한군의 매복작전ㅇ에 걸려 4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고 함께 있던 국군 채병덕 소장도 전사하게 되었다.
7월 29일 북한군 제6사단이 하동-진주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되고, 미 제24-19연대는 진주로 물러나게 된다. 이에 미 제24사단장은 국군 김성은 부대(해병), 민부대 , 새로 배속된 미 제25-27연대를 통제하여 지누 마산 도로상에서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한다.
3) 함창-거창 부근 전투 ※ 국군 초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하동 쇳고개에서 전사, 미군 313명 전사. 100여 명이 포로가 됨
국군 제17연대 권빈리 도착, 8월1일 전투에서 승리후 낙동강 전선형성을 위해 현풍으로 이동
대전에서 금산-안의 방뱡으로 우회한 북한군 제4사단이 25일 금산과 대전에서 2,000여 명의 병력을 보충받아 함양-거창을 공격하게 된다. 7월 26일 차량을 동원하여 무주를 거쳐 동남진하고 있었다.
이에 미제24-19연대장은 배속된 미 제25-29-1대대를 진주에서 안의 방향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 당시에 국군 민부대가 남원에서 철수하며 남강 서측방에 진지를 편성했다.
7월 27일부터 적의 공격으로 안의가 피탈되고 적의 주력이 거창방면으로 진출하게 되고 이에 미 제24-34연대는 대전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핝 상태에서 겨우 개인화기만 휴대하고 있었다. 28일 오후부터 적의 공격으로 돌파되어 거창 남쪽 산수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하게 된다.
이때 화령정 전투에서 승리한 국군 제17연대가 30일 거창 동남쪽 권빈리에 도착하여 적 제4사단의 공격을 물리친 후, 낙동강선 방어를 위해 현풍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시기에 미군은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에 이어 미 제2사단, 해병여단 등의 증원부대가 도착하게 된다.
◆ 낙동강선 방어작전('50.81~4) ※ 워커라인=부산교두보=낙동강방어선 240KM
데이비드슨(미 제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슨 준장 이 선정)라인 90KM
(가) 낙동강 방어선 형성
1950년 7월 말로 시간과 공간과의 전투인 지연작전을 마감하고 8월 1일부터 4일은 낙동강방어작전으로 전환하여 한국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낙동강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일명 "부산교두보"라고함며 미 제8군사령관이 설정한 최후의 방어선이라 하여 "워커 라인"이라고도 한다.
남쪽의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잇는 동서간 약 80KM, 남북으로 약 160KM 구간으로, 크게 세 구간으로 나누어 한구간은 낙정리-왜관-남지를 잇는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이도, 한 구간은 남지-마산서측 진동리를 잇는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으로 부터 전투산(661), 필봉(742), 서북산(738) 등 험준한 고지군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구간은 낙정리-영덕으로 낙동강 상류의 남쪽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방어선으로 설정하였다.
미 제8군은 낙동강선의 부대배치를 계획할 때 북한군이 산악지대의 침투, 근접전투, 우회기동에 뛰어난 반면, 기동공간이 넓고 각종 화력의운용이 용이한 개활지 전투에서는 취약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미군에게는 낙동강변 일대의 개활지 정면을 산악지대인 낙동강 상류인 낙정리-영덕 구간에 국군을 배치하게 된다.
맥아더 사령관언 낙동강 교두보 계획을 검토하면서 만일에 대비하여 예비방어선인 "데이비드슨 라인"을 선정하고 8월 11일부터 9월 1일까지 미 제25사단. 미 제2사단과 인근 주민의 협조를 얻어 울산 동북방 17KM 지점 시동리. 밀양 북방 유천과 무안리를 따라 마산 동북방을ㄹ 잇는 90KM,의 예비진지를 구축한다.
(나) 한.미군의 방어편성 ※ X선 : 마산 서쪽 서북산일대-합천 북쪽 산제리-지례 동쪽-김천-상ㅈ주-예천-안동-청송 북쪽 흥구동
-영덕을 연하는선
Y선 : 강을 연한 낙동강 방어선
미제25사단 한국 이승만 대통령 부대표창 :상주-왜관-마산이동 완수(8.1~8.3)
미 제25-27-1대대가 진동리 초등학교를 잘못 기습한 북한군 제6-14연대 600여 명을 사살한다
'50년 8월 1일부터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당시는 낙동강 외곾선(X선)에서 8.2~3일까지 적을 지연하다 8월 4일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인 Y선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8월 1일 상주의 미 제25사단이 남쪽의 신방어진지로 이동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삼랑진으로 이동하라는 수정명령이 하달 된다. 이때 북한군 제 제4. 제6사단이 낙ㄷ오강 서부로 접근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 제25사단은 상주-김천-왜관까지는 도보와 차량으로, 여기서 열차로 8월 2일 밤에 출발하여 8월 3일에 마산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미 제24사단장은 북한군 제6사다의 진출을 대비하기 위하여 8월 2일 사단에 배속된 제25-29-2대대와 제25-27-1대대로 진주방향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 제27-1대대가 진동리에서 적 제14연대의 기습을 받았으나 오히려 적이 진동초등학교에서 600여 명을 사살한다.
이렇게 하여 8월 초에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청송-구미동, 제8사단은 구미동-사아동, 국군 제2군단 예하 제6사단은ㄴ 상아동-낙정동, 제1사단은 낙정동-왜관, 미 제8군 예하 미 제1기병사단이 왜관-현풍, 미 제24사단과 구군 제17연대가 현풍-남지, 미 제25사단 제5연대 전투단. 민부대가 남지-진동리에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그대로 영덕을 방어하게 된다.
8월초 쌍방의 전투편성
| 적전지역 | 한 . 미군 | 북 한 군 | ||
| 영덕 | 육직 | 제3사 6,469명 | 제2군단 | 제5사 7,500명 |
| 청송-구미동 | 제1군단 | 수도사단 5,778명 | 제12사단 6,000명 | |
| 구미동-상아동 | 제8사단 8,154명 | 제8사단 8,000명 | ||
| 상아동-낙정동 | 제2군단 | 제6사단 6,570명 | 제1사단 9,500명 | |
| 낙정동-왜관 | 제1사단 7,660명 | 제13사 9,500명 제15사 5,000명 | ||
| 제105전차사단(40여대) 3,000명 | ||||
| 왜관-현풍 | 미 제8군 | 제1기병사단 10,270명 | 제1군단 | 제3사 6,000명 |
| 현풍-남지 | 제24사단 9,700명 국군재17연대 1,800명 제25사단 5연대전투단 17,000명 | 제4사 7,000명 | ||
| 제6사, 제83차령연대 제104치안연대 5,000명 | ||||
| 남지-진동리 | 예비 2사단 7,500명 | |||
(다) 북한군의 8월공세 방어선의 위기 ※
1) 북한군의 공격준비
북한군의 공간사에 "연속적인 타격과 대담한 기동으로 미군과 국군을 김천-함창-안동지역에서 포위소멸하고 빨리 낙동강을 도하하여 적의 기본 집단을 대구일댕에서 포위소멸하여 마산-대구-영천-포항 계선에 진출하여 미군들을 최종적으로 격멸소탕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8월의 디본목표로 삼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작전개념에 따라 북한군은 전선부대의 절반을 대구 방면에 투입하여 제2군단 예하 제15.13사단을 다부동-대구 축선으로, 제1사단을 군위 -대구 축선으로, 제1군단 예하 제3.제10사단을 어ㅙ괸-대구 축선으로 지향한다.
이 밖에 제6사단이 마산-부산 축선으로, 제4사단이 영산-밀양 축선으로 공격하고, 제8사단이 의성-영천으로, 제12사단이 기계-경주 축선으로, 제5사단이 영덕 -포항 축선으로 돌파하도록 하였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계속적인 폭격으로 정상적인 보급이 어려워지자 야간수송으로 전환하여, 서울에서 시민을 강제동원하여 한강교를 보수하고, 각 지역별로 보급대를 편성하여 야간 위주로 전선 11개 사단을 지원했다.
2) 유엔군의 결전준비 ※ 7월 말부터 국군 및 미군부대에 대대별 노무자 50여명 지원, 7월 23일 한국경찰 15,000명 미군 배속
8월 15일부터 미군 사단에 각각 8,300명 카츄사 지원
피난민이 7월 중순까지 약 380,000며이 남하하였고, 매일 25,000며이 증가하며, 이 대열에 적 오열이 침투하여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7월 31일 ~8.5일 제5연대전투단, 미제2사단 연대 도착
8.2일 임시 미 제1해병여단 도착, 8월 3일 한국전 최초 미군 탱크대대 도착 제89전차대대(50대)
당시 북한군이 70,000~92,000명 선이고 국군이 45,000명. 미군이 47,000명 수준으로 병력면은 대등하게 되었다. 공세이전을 하기 위한 병력보충과 장비 보강을 위해 유엔군이 편성되어 영국군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7월 31일 제5연대전투단이, 제2사단 제9연대와 제23연대가 7.31~8.5일사이에, 임시 제1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도착하였다.
아울러 7월 말 미 항공모함 복서호가 145대의 F-51 무스탕기를 만재하고 일본에 도착하고, 8월 초에는 미 극동공군은 F-80전투기 625대와 F-51 전투기 264대를 보유하여 1일 출격능력이 525기로 증강된다.
미군의 전력증강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최초로 제89전차대대(50대)가 8월 3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전차의 쌍방의 불균형이 해소되었다.
여기에 한.미 양국은 국군 5개 사단의 완편과 신편사단을 창설하며 국군의 일부 보충병을 미군에 증원한다는데 합의를 본다. 육본은 8월 1일 대구에 육군 중앙훈련소를 설립하게 되며 이 당시에 자원한 학도의용군과 노무자 수가 크게 증가하여 현지 입대하기 시작했다. 대구의 신병교육대인 제25연대에 학도의용군 2천여 명이 훈련을 받고, 제주도에서는 하사관교육을 받고 일부는 간부후보생으로 임관하기도 한다.
당시 국군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가 활동하고, 미군부대에도 지원하였다. 7월 23일에는 한국 경찰 15,000명이 미군에 배속되었으며 카츄사는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간에 합의하에 구성되며, 1차로 8월 16일 313명이 선발되어 교육을 위해 일본행 배에 오르고이어서 8월 24일 까지 총 8,637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는다. 덩시에 구포의 제3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카츄사들이 각 사단에 8월 20일부터 250명씩 보충되었다. 카츄사는 소총중대 및 포댕에 각 100명씩 사단별로 8,300명을 보충 받았다.
3) 대구 북방의 위기
가) 북한군 동향
북한군은 제13, 제15사단이 상주 및 김천일대에서 낙정리와 구미로 진출하고, 왜관 서쪽 대안에서는 제3사단이 대구를 목표로 성주일대엥 집결한다. 이와 협조하기 위해 제10사단이 고령일대로 이동하였다. 함창 일대에서는 제1사단이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하며 은밀도하를 준비한다.
북한군의 도하는 8월 3일부터 시작된다. 30년 만의 혹심한 가뭄으로 수심이 1~1.5M로 격감되어 적의 양호한 접근로가 되었다.
나) 아군의 위기 ※ 왜관 남방 금무봉에서 미군 부사단장. 참모장등 주요 직위자 사상, 북한군 400여 명 사살
미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제3. 제10사단 도하공격 무력화, 적 제3사단 전선에서 물러남
왜관 북쪽 303m 작오산 피탈, 미군의 역습으로 점령시 미군 26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학살당함, 북한군 200여 명 사살
국군 제1.6.8사 : 왜관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 잇는 선으로 후퇴
8.16일 : 왜관 서남쪽 낙동강변에 8월 16일 폭격기 96대 출격하여 융단폭격 5.6*12km 지역에 960톤의 폭탄 투하
8월 18일 : 새벽 가산에서 적이 대구에 박격포탄 사격, 대구역에 낙하, 대구 일대 혼란 발생
8월 21일 :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 최초 전차전(미 제27연대) : "볼링장 전투"라 하며 적 전차9대, 자주포 4문 파괴 및 북한군 1,300여명 사살, 적 포병연대장 귀순
8월 3일, 국군 제1사단은 낙정리로 도하하는 북한군 제13사단의 총공격을 받게 되고, 미 제1기병사단 정면에서는 도하탐색전만 있었다. 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는 적 제1사단이 도하공격을 하게 된다.
8월 8일부터는 국군 제1사단지역으로는 적 제13사단과 더불어 제15사단이 수중교를 부설하여 전차를 동반한 도하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은 적 제1사단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9일 용기동을 포기하고 위천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편 왜관방면의 미제1기병사단은 9일 적 제3사단의 도하공격을 감행하였다. 적의 일부가 금무봉으로 은밀침투 하였으며 정찰 중에 부사단장 참모장 정부참모 등이 전사 혹은 부상당하게 된다 미군은 화포와 항공기를 동원하여 금무봉일대를 초토화시켜 북한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 도하공격에서 북한군 제3사단은 치명적 피해를 입고 뒤로 물러나고, 제10사단이 현풍일대로 도하공격을 시도한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국군은 축소된 방어선인 왜고나 북방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방어선을 조정하여 제1사단은 다부동-유학산일대에서, 제6사단은 군위-다부동-신령선에서 적과 대치하게 된다.
▶국군 제1사: 적 제13사단 일부 병력이 도하하여 다부동 328고지 선점, 적 제15사단 일부가 유학산 선점, 328고지와 유학산 쟁탈전
8월16일 적이 가산침투, 다부동 일대 공격, 미 제8군 미 제25사단을 17일 투입
▶국군 제6사: 적 제1사단이 군위에 집결하고, 적 제8사단(제103치안연대 배속)이 의성에서 남하, 효령 일대 고지군 쟁탈전
▶미 제 1기병사 : 적 제10사단이 왜관방면에서 8월11~12일 사이 도하공격 살패, 14일 다시 도하공격하여 용포교 일원 도하공격, 미 제7기병연대의 반격으로 2,500여 명 손실 입고 후퇴, 적 제3사단 일부가 국군제1사단의 좌측을 교란하며 14일 왜관 북쪽 303m 작오산 공격 피탈, 미군의 역습으로 점령시 미군 26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학살당한체 방치. 북한군 200여 명 사살
국군 제1사지역 : 왜관 동측 328고지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15회 이상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다부동 북방 천평 일대에서는 미 제25-27연대 투입, 328고지 우측 수암산 일대로 쟁탈전 계속되면서 육본은 제8-10연대를 가산지역에 추가 배속시키고 미 제2-23연대도 다부동으로 투입된다.
8월 21일 :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 최초 전차전(미 제27연대) : "볼링장 전투"라 하며 적 전차9대, 자주포 4문 파괴 및 북한군 1,300여명 사살, 적 제13사단 포병 연대장 (정봉욱 중령)이 제11연대지역으로 귀순
국군 제6사단 지역 : 적 제1사단이 국군 제1사단과 전투지경선으로 돌파하여 효령까지 진출하게 ㄷ되자, 육본은 제7-5연대(민부대)와 독립기갑연대를 배속하여 가산동 일대로 투입하게 된다.
이 무렵 북한군은 다부동지역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학산 지역의 적 제15사단을 의성-영천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고, 적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 적 제13사단 일부가 유학산 일대를 담당하였지만 공격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8월 23일에 적 제1사단이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741고지를 점령하고 가산까지 침투하여 제1-15연대가 탈환하면서 다부동 동측방 위기를 수습한다. 미 제27연대는 마산의 모체 부대로 복귀한다ㅣ.
8월 26일부터 국군 제1사단은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를 하게 되고, 제12연대 수색대 배성섭 특무상사 외 11명이 유학산 정면 상림동의 적 제13사단 사령부를 습격하여 다수를 살상하고 군관등 3명을 포로로 하여 2계급 특진과 상금을 수여받았다. 사단은 8월 28일 수암산도 탈환하여 328-수암산-유학산-741고지 방어선을 확보하여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한다.
4) 낙동강 돌출부 공방 ※ "힐특수임무부대 편성 :미 제2-9연대. 제34연대. 제19연대. 제21연대" 돌출부 공격 명령
영산 피탈후 다시 탈환
해병여단 투입, 결국 오봉능선과 클로버고지 회복, 적 제4사단은 엄청난 피해로 전선이탈
낙동강 방어선 형성시 대구 서측방 현풍에서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점 남지에 이르는 하천거리 60km, 직선거리 37km 방어정면은 미 제24사단이 담당하게 된다.
이중에서 부곡-창녕, 박진-영산에 이르는 도로는 창녕 영산을 지나 대구-부산 축선의 밀양으로진출하기에 양호한 접근로 였다.
미 제24사단은 8월2~3일에 산제리지역에서 지연전을 마감하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제34연대가 영산, 제21연대가 창녕, 배속된 국군 제17연대가 현풍지구로 들어와 강변고지를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제19연대는 창녕에서 예비가 된다,
8월 5일, 북한군 제4사단이 도하공격을 개시한다. 오항나루터와 부곡일대로 미군의 부대 간격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침투하여 클로보고지를 피탈하고 오봉리 능선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현풍지역에는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제17연대의 도하저지 사격으로 격퇴되고, 제17연대는 국군의 재편성 계획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게 되고 대신 미 제24사단 "하이저특수임무부대"가진지를 인수하였다. 이어서 미 제8군 계획으로 미 제2사단이 창녕으로 도착하게 된다.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미 제2-9연대장 힐 대령에게 돌출부 적을 몰아내라 명령을 내렸다. 8월 6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10일에 이르도록 공격은 실패한다. 이에 사단장은 "힐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돌출부 적을 격퇴하도록 명령한다.
당시 북한군 제4사단은 오항, 박진나루에 수중교를 가설하고 대규모 병력을 도하시킨다. 적은 영산으로 후방침투를 기도하고, 남지교가 피탈되고 영산이 적의 포격을 받기 시작한다.
사단자은 8월 11일부터 "힐특수임무부대"에 돌출부 탈환작전을 명령하게 되고, 밀양에 있는 사단본부에서 본부중대자이 전차 2대, 행정병 취사병 등 135명을 지휘하여 영산-밀양간 심곡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침투한 적을 격퇴하고 전투근무지원을 한다.
일시적 영산 피탈에 다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제27연대를 투입항여 침투한 적을 소탕하도록 하여 13일 영산을 탈환한다. 이에 다시 14일 힐부대에 총공격을 명하여 전투기 100여 대의 지원속에서 클로버고지 일부에 도달하지만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수차례 백병전 수행했으나 철수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마산에 있던 미 제1해병여단을 투입하여, 8월 17일 공격을 개시히였다. 그러나 해병 제2대대는 7시간의 전투에서 병력 60%가 손실을 입었다. 다시 제1대대로 교대하여 오봉능선과 클로버고지를 공격하여 북한군 제4사단을 몰아붙혀서 겨룩 낙동강선을 회복하게 된다. 이 전투이후에 북한군 제4사단은 엄청난 손실로 다시는 전선에 나타나지 못한다.
5) 마산 서부의 공방전 ※ "킨특수임무부대편성" : 한국전 최초로 사단급 역공격을 8월7일 개시, 2개 연대, 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 제89전차대대, 경찰중대 등 총병력20,000명, 전차 100대, 야포 100여 문을 투이하여 진주탈환 명령
● 6.25전쟁 최초로 8월 8일 미군으로서 야간공격을 감행 : 야반산과 장성점 부근을 제5연대 전투단 2대대와 해병 2대대가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 봉암리계곡 " 미 포병의 무덤" : 8월 10일 봉암리로 진출한 제5연대가 적에 포위되어 제555포병대대는 105밀리 야포 8문, 사상자 180명, 제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 155밀리 6문 차량 손실 26대의 피해 발생
●서북산 일대 한국 경찰 432명 투입, 노무자 500여 명이 산악지대 보급 추진
● 통영에 들어온 북한군 제7사단 104연대 일부를 국군 해병 김성은 부대가 8월 19일 기습상륙하여 원문고개 차단, 적선 4척 격침 하고 일대 통제
낙동강 돌출부 남쪽 남지에서 마산까지의 낙동강방어선은 급거 김천에서 마산에 도착한 미 제25사단이 담당하였다.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미 제24사단장으로부터 방어책임을 인수받고, 8월 4일까지 제35연대를 중암리, 제24연대를 함안부근, 제27연대를 진동리에 배치하고 국군 민부대. 김성은 부대를 통제하여 북한군 제6사단과 대치하였다. 미 제25사단은 8월 2일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동한 제5연대전투단을 배속받았다.
북한군 제6사단은 남측방을 돌파하여 진주-마산-부산 축선으로 공격하려 마산을 공격할 계획으로 그 선두가 이미 중암리. 진동리로 진출하였다.
킨특수임무부대는, 진주탈환을 위해 북쪽에서는 제35연대가 중암리에서 무촌리로, 제5연대가 진동리-봉암리-무촌리로, 제5해병연대가 고성-사천로를 따라 진주 남동쪽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제24연대(민부대.김성은 부대.경찰 배속)가 서북산 일대 적을 소탕하기로 했다.
그러나 봉암리 일대에서 대량 피해를 받게 되자, 미 제8군은 진주 탈환을 포기하고 12일 킨부대를 반격작전을 중지하고 킨부대를 서북산 일대로 전환하면서 제5연대는 마산으로, 해병여단은 낙동강 돌출부로, 킨부대는 해체되었다.
8월 14일부터 미 제25사단은 남지-검안리에 제35연대, 중앙의 서북산 일대에 제24연대, 그 남쪽 진동리까지는 제5연대전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 배치하였다. 이 당시에 국군 경찰 432명이 서북산 남쪽 능선에 배치되고 노무자 500여명이 산악지대에 지게로 보급을 초진했다.
반면 북한군 제6사단은 지금까지 4,000~5,000명, 전차 13대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 무렵 적 제7사단이 제6사단의 후방방호 임무를 받고 15일 진주에 진출하여 그 일부가 통영과 여수로 진출시키고 있었으며 제6사단에 강제징집병 2,000여 명이 보충된다.
미 제35연대는 17일부터 함안읍 서측 십이당산과 도로변에서 적과 접촉하고 있었고, 제24연대도 18일부터 서북산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계속한다. 서북산 일대는 무려 19차례나 주인이 바뀌어 가며 8월 말까지 혈전이 계속 되었다.
한편, 마산 정면 고지일대에서 격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에 , 17일 북한군 제7사단이 고성을 무혈 입성한 후 경찰중대를 제압하고 통영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진해에서 정비 중이던 국군 해병 김서은 부대가 2척의 함정으로 통영반동에 기습상륙하여 원문고개를 점령하여 적을 역습하여 적선 4척을 격침시키고 일대를 점령 통제하게 된다.
결국 미 제25사단이 8월 말까지 검안리 정면, 전투산. 서북산. 일대로 돌파하려는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6) 기계-포항 쟁탈전 ※ ● 수도사단이 길안에서 의성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청송-기계 축선이 공백지대 발생, 적 제12사단이 무혈 남진
제1연대 후방이 적의 기습으로 사단 전술지휘소까지 피습되어 구수리 양곡재 일대에서 대량 피해 발생
● 제3사단의 강구 사단지휘소에 적이 침투하여 기능마비, 사단장 해임하고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8.7일 부임.
8월 8일 181고지 피탈, 8월 9일 제22연대장의 과오로 05:-00시에 오십천교 폭파로 1개 대대규모 병력이 익사
● 영덕-강구 쟁탈전(8.5~8.15)
● 기계 피탈((8.10) 적 제12사가 진입,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 기갑연대와 포항지구사 남북에서 협동 공격
● 포항피탈(8.11) 적 제766유격부대 8월 11일 미명에 침입, 당시 국군 제3사단 후방지휘소. 해군경비부. 공군 지부대가 위치. 포항, 학도의용군이 포항여중에서 결사항전하며 47명 전사, 포항 피탈
● 8월 13일, 포항 영일비행장의 미 제40전투비행대대(45대)가 어떤 협의도 없이 일본으로 철수
● 국군 제3사단 장사동 일대에서 흥해 북방으로 침투한 적과 교전하며 포위 위험 직면
낙동강 방어선 형성시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제8사단이 의성일대, 수도사단이 길안일대에서 방어편성을 하고, 동해안에는 제3사단이 영덕을 놓고 적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1.제13. 제15사단 등 3개사단을 대구 방면으로, 나머지 제8사단을 의성-영천으로, 제12사단을 청송-안강-경주로 진격하고, 제5사단은 계속하여 포항 방면으로 투입하여 대구 동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제3사단은 길안과 영덕에서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 8월5일부터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수도사단은 제1연대가 의성일대로,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가 구수동을 경유하여 의성으로 철수하게 된다. 적 제12사단은 청송-기계 축선을 무혈 진출하여, 8월 9일에 기계를 점령한 후 이미 침투한 보현산의 제766유격대와 연결되어 포항 점령을 획책한다.
한편 국군 제3사단은 5일 야간부터 적 제5사단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유엔 해.공군의 지원하에 영덕 남쪽 고지를 놓고 치열한 근접전을 반복한다. 8월 6일에도 181고지일대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강구의 사단 전술지휘소에 적이 침투하여 한동안 지휘체계가 마비된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준식 사단장이 물러나고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임명되었다.
사단은 오십천교의 조기폭파로 1개 대대병력이 수장되는 가운데 워커장군의 영일비행장 사수결의에 따라 적의 남진을 계속 저지토록 하여 흥해 남쪽 냉천동으로 적 1개 연대가 출현했지만 철수를 할 수 없었다.
● 포항 영일 비행장 위기
8월 10일, 흥해 남쪽에 적 1개 연대가 출현하면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제2사단장에게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비행장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 제2사단 부사단장 브래들리 준장이 즉시 제9-3대대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브대"를 편성하여 10일 비행장 경계를 인수받았다.
한편 적 제5사단이 강구로 진입할 무렵 무방비 상태인 기계가 적 제12사단에게 피탈되고 있었다. 이에 놀란 육군본부는 동부전선의 위기를 깨닫고 제1군단 참모장 이성가 대령에게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히 편성하여 신편 연대인 제25연대와 곧이어 제17연대, 민부대, 그리고 신편 제26연대를 배속하여 대비시킨다.
아울러 제1군단은 의성으로 철수 주인 수도사단(-)을 안가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제18연대와 기갑연대를 현도으로 진출시켜 포항지구사와 협조하여 기계를 남북 양면에서 포위하게 한다.
8월 11일 포항이 적 제766유격부대에 피탈되고, 13일에는 영일 비행장의 미 제40전투비행대(45대)가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위기가 고조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국군 제3사단은 강덕에서 철수하여 장사동 일대에서 적과 교전을 반복하며 흥해 북쪽에 출현한 적으로부터 포위가 된다
8월 13일, 국군 제1군단의 명령에 따라 국군 제8사단이 보현산 일대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는 동안 수도사단은 제1연대가 안강으로 이동하고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구산동에서 동남진 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까지 국군 제17연대, 제1연대, 제26연대가 안강에 도착하자, 수도사단은 제17연대와 해군 육전대를 통제하여 안강 북쪽고지를 공격하여 기계 남쪽 고지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기계 북쪽 용기동에서는 제18연대가 내려오게 되자 북한군은 비학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에 제18연대 제3대대로 포항터널 부근에서 작전 중인 민부대와 연결되었다.
● 8월 17일~20일, 국군 제3사단 장사동 해상철수, 구룡포에 도착하여 20일까지 재편성
● 8월 17일~19일 : 민부대가 포항시내 진입, 그런데 북한군이 이미 포항을 버리고 도주하여, 포로 180명. 야포 및 ㅂ막격포 53문. 기관총 160정. 소총 940정 노획. 제3사단에 진지 인계후 대구로 이동
● 8월 17일~19일 : 수도사단 제18연대 및 제17연대가 기계공격 적 1,245명 사살. 제12사단 막대한 손실을 입고비학산으로도주
8월 15일 국군 제3사단은 해상철수명령을 받고 17일 장사동 독석리 해안에서 LST 4척을 이용하여 사단병력 9,000명. 경찰 1,200명. 노무자 1,000명이 구룡포에 도착하여 20일까지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 22일부터 재 역습을 가해 오면서 다시 수도사단은 26일 기계 남쪽 고지군으로 철수하게 된다.
반면 국군 제3사단은 제26연대를 받아 3개 연대러 편성되면서 포항으로 진출하여, 흥해-포항 으로 연결된 접근로를 제압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한다.
동부전선의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잭슨특수임무부대"(제24-21연대를 기간으로 제9-3대대, 제73전차대대(-)를 편성하여 27일부터 수도사단 제17연대가 다시 잭슨부대의지원을 받아 기계를 재탈환하였다가 다시 적의 역습으로 그 남쪽 고지군으로 밀려난다.
이 무렵 북한군은 비전투요원까지 모두 전선에 투입하는 등 교두보 돌파를 위한 총공세를 기울인다. 그 동안 큰 손실을 입은 제12사단의 전력을 보강핟고, 대구 정면에서 이동해 온 제15사단이 국군 제8사단 정면으로 진출하여 동부전선 돌파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 말 기계-포항 전선은 소규모 정찰전이 벌어지는 등 소강상태를 유지한다. 북한군의 8월 총공세는 서부에서 낙동강도하 실패와 동부전선에서는 왜관-다부동-의흥-기계-포항선에서 저지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한다.
◆ 북한군의 9월 공세와 유엔군의 방어선 사수
(1) 피아의 최후 결전태세
(가) 북한군 ※ 남한에서 제36보급사단 창설, 30만명 인력동원, 릴레이식으로 전선 사단에 1일 15톤 보급
북한군은 8월 공셍의 작전목표였던 부산은 고사하고 대구도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종말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들은 8월21~30일을 새로운 작전준비기간으로 하여 부산점령을 위한 최후 공세를 준비한다.
그들의 작전방침은 낙동강에 압축된 유엔군과 국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서쪽과 북쪽에서 타격하여 대구.영천 일대에서 유엔군을 포위 소멸하고 부산 근거지를 최종적으로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쪽의 제1군단이 8월 31일 공격하여 유엔군의 병참선인 대구-부산간을 차단하고 제2군단이 9월 2일 후속 공격하도록 한다.
9월 공세에는 군예비까지 동원하여 제1군단이 6개사단, 제2군단이 7개사단으로 증강하여 결전태세를 갖추었으며 당시 전선 사령부는 김천에 위치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왜관-마산까지를 담당하여 제1공격집단으로 편성된 제6.제6. 제104치안연대가 마산 정면의 미 제25사단(5연대전투단. 제1해병여단)을 돌파하여 김해-부산으로 공격하며, 제2공격집단인 제2. 제4. 제9. 제10사단이 낙동강 돌출부에서 미 제2사단을 돌파하여 밀양(미제24)으로 진출하여 대구-부산간 도로를 차단하며 여기에는 105전차여단의 일부와 제16기갑여단(43대)가 배속되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왜관-포항까지를 담당하여 제3공격집단으로 제1. 제3. 제13사단이 왜관-다부동 축선(미 제1기병사. 국군 제1사)를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하며, 제4공격집단인 제8. 제15사단이 영천방면( 국군 제6. 제8사)을 돌파하여 대구 또는 경주로 진출하고 제5공격집단 제12. 제5사단이 안강-포항(국군 수도. 제3사)을 돌파하여 부산으로 진격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제2군단에 제105전차사단(-)과 제17기갑여단(40대)이 배속된다.
이들 부대들은 그동안 전투에서 많은 병력과 장비의 손실로 남한에서 1/3병력을 강제로 징집하여 충원하였다. 사단별 병력 수는 평균 5,000~10,000명 수준이었다. 여기에 8월초에는 보급 사단인 제36사단을 김천에서 창설하여 점령지 주민들 30만명을 강제동원하여 개인당 하룻밤에 20kg의 보급량을 20~30km운반하고 다른 마을 주민이 인계받는 형식으로, 각 사단은 1일 평균 15톤 정도의 보급을 받으며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나) 국군 및 유엔군 ※ 9월 총반격까지 전차 500대 부산도착, 적보다 5:1도 우세, 두번째로 영국군 제27여단이 29일 도착
9월13일 여학생을 포함한 제일학도의용군 641명 국군과 미군에 편입,
8월 15일 카츄사는 각 사단마다 8,300명지원, 8월부터 미군이 105밀리 야포여 문지원하여 9월 10일까지 4개 대대를 증설하여 10개 대대 보유, 3.5"로켓포 900문, 소화기 50만정, 기관총 등 중화기 3만 4천문, 전투차량 743대, 일반차량 15,000대
극동군사령부는 "레드볼 특급"이라 불리는 수송작전으로 해상과 열차로 매일 300톤을 수송하여 9월중에 총 86만톤이 부산에 도착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중 병력증강의 일환으로 미 본토에서 미 제2사단 주력이 19일까지 도착하였으며, 8월 29일에는 영국이 홍콩의 보병 2개 대대를 제27여단본부와 함께 도착시킨다. 또한 전차는 9월 총반격 때까지 부산교두보에 500여 대가 도착하여 적보다 5:1로 앞서게 된다.
미 제8군은 미 제2사단이 도착완ㄹ료하자8월 24일 미 제24사단과 교대하여 낙동강 돌출부를 방어토록 하고 미 제24사는 예비로 경산에 대기 시킨다.
이와같이 미군의 전투력이 증강됨에 따라 유엔군은 다부동의 국군 제1사단 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인계토록 하고, 제1사단은 팔공산 정면을 담당케하여 신령 정면의 제6사단 방어정면이 축소되었다. 그리고 9월에는 총반격을 위하여 제1. 제9. 제10군단의 3개 군단으로 편성한다.
한편 국군은 중앙훈련소 통제하에 신병양성에 주력하여 8월 중에 제1. 제3훈련소를 창설하면서 9월까지 제2. 제5. 제6. 제7훈련소를 증설하여 이들 훈련소는 수용병력이 5~6천 명이며 1~2주간 훈련을 실시하였다. 9월부터는 하사관교육대를 별도설치하고 우수병사를 선발하여 화기별로 전문교육을 시켰다.
국군은 장교충원을 체계화하여 폐교된 육사가 8월 7일 육군중앙훈련소 내에 재설치되었다가 15일 육군보병학교로 합병 개칭되고, 21일 육군 제병학교로 , 9월 7일 다시 육군종합학교로 각각 개칭되었다. 종합학교는 개교와 더불어 간부후보생을 선발하게 되어 매주 250명의 초급장교를 배출하게 된다.
아울러 사단 증편에 따라 8월 20일에는 민부대와 독립 유격 제1.2대대를 기간으로 제7사단이 재창설되고, 27일 제11사단의 신편작업이 진행ㄷ됨녀서 제2. 제5의 재창설과 제9사. 제3군단의 신편계획이 추진된다.
(2) 대구 부근의 결전 ※ 미 제1기병부대들이 대구-군위간 도로 좌우측 고지군에서 적을 고착 견제하여 대량 피해를 입임
국군 제1사단이 가산산성 탈환 적을 북으로 물러나게 함
8월 31일 밤 적 제1군단의 공격으로 낙동강 돌출부지역이 위기에 처하자, 9월 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는 미 제1기병사단장에게북쪽 또는 서쪽을 공격하여 적을 유인하도록 명령한다.
9월 3일부터 기병사단이 다부동 서북방 수암산의 적 제3사단에 대한 공격을개시했으나 실패하고, 다부동 전방에서는 적 제13사단이 진출하고, 오히려 가산산성이 북한군 제1사단에 피탈되면서 위기에 처하게된다.
9월 5일, 미 제8군은 기병사단에게 왜관-다부동 도로 남쪽의 진지로 철수토록 하고 국군 제1사단도 팔공산 정면으로 철수하면서 제11연대를 영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군 제8사단에게 증원토록 한다.
이로부터 미 제1기병사단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고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국군 제1사단이 가산을 점령토록 하였다.
9월 10일 적 제1사단이 가산에서 대구를 감제하는 도덕산(660)일대로 진출하게 되는데 여기서 도덕산에 배치된 국군 제5신병대대가 적의 공격을 용감히 저지하고, 미 제1기병부대들은 대구-군위간 도로 좌우측 고지군에서 항공지원과 우수한 화력을 앞세우고 적과 수차례 쟁탈전을 수행하며 적을 고착 견제하여 대량 피해를 입혔다.
국군 제1사단은 가산산성을 9월 14일 탈환하게 되면서 북한군 제2군단의 대구 돌파는 실패로 돌아가고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3) 창녕-영산(낙동강돌출부)위기 ※ 영산 정면에서 만주특수임무부대가 고립된 상황에서도 공중보급을 받아가며 3일까지 적과 근접전으로 저지하며, 대부분 병력이 희생됐다.
※ 미 제1임시해병여단을 미 제2사단에 배속, 오봉-클로버고지 능선 회복
낙동강 돌출부 창녕-영산에는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과 결전을 벌였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미 제24사단으로부터 현풍에서 남지까지를 담당하였다.
북한군 제2공격집단은 제9사단이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한 제2사단이 창녕 정면에, 적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여 8월 31일 22:00시에 9월공세를 개시하게 된다.
영산 정면의 미 제2-9연대는 적 제9사단의 기습으로 박진-오항간 강안진지들이 무너지면서 지난 전투에서 탈환한 오항-클로버 능선이 피탈된다. 또한 일시적 영산이 두번째로 피탈되었다가 전차와 전폭기가 동원되어 수복된다.
창녕 정면의 미 제2-23연대는 적 제2사단의 기습으로 강안진지가 돌파되어 본초리 모산리 진출, 사단은 예비 대대를 투입한다
현풍 정면의 미 제2-38연대는 적 제10사단의 기습으로 강안진지가 돌파되었으나 적은 더이상 진출하지 않고 정찰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북한군 제10사단의 향방이 대구-부산간 도로통제에 매우 민감한 문제였으나 적이 현풍입구에서 대기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차후 포로를 통하여 알려진 것은 북한군 제10사단은 현퐁지역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다.
9월 2일 부터는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8군사령관 워커는 미 제1임시해병여단을 미 제2사단에 배속하여 낙동강선을 회복하도록 하여 해병대가 오봉리 능선을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로 전진하여 9월 5일 전선을 회복하게 된다. 이후 해병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9월 5일 창녕 정면 본초리에 적의 일부가 침투하지만 연대본부 중대 및 특수지원병과까지 투입하고 항공기의 지원폭격으로 적을 저지하면서 9일 낮부터 적의 공격이 중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관의 진술에 의하면 적 제2사단은 그동안 전사 1,300명, 부상 2,500명으로 공격력을 상실하였다고 진술하였다.
(4) 함안-마산 위기 ※ 미 제24연대의 함안 피탈, 제27-1대대와 전차를 투입하여 2일간 전투에서 적 1,000여 명 사살하고 회복
※ 사단 후방지역인 마산-창원 일대에 적 오열과 유격대들이 준동, 창원 무선중게소 습격, 마산형무소 간수 7명이 공산당원, 8월 10일부터 소개령으로 마산 시민 12,000명 LST 등으로 분산
※ 미제 25사단은 9월 1~7일까지 방어정면을 제외하고도 전선 후방에서 적 병력 2,000여 명을 매장하였다.
8월 하순, 마산 정면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남지교에서 십이당산, 진주-마산간 철도를 따라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쳐 진동리 해안에 이르는 48km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장 킨소장은 남강변과 검안리 일대에 제35연대, 전투산-필봉 등 함안 일대에 제24연대, 서북산 남쪽-진동리 해안까지는 제5연대전투단을 각각 배치 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제6사단이 진주, 제7사단이 의령에서 공격대기 중이었다.
8월 31일 23:30분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적 제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여 검안리 일대로, 제6사단은 진주-검안리-마산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된다.
이 당시에 함안지역의 작전 중앙을 담당한 미 제24연대는 초기 지연전시 미 제25사 연대로 상주지역에 진출했을 군기문란과 전투정신 결여로 후퇴를 거듭하거나 많은 장비를 유기하는 등의 전투력이 미약한 연대였다. 따라서 이곳 전투에서도 전투력 발휘를 못하고 분산후퇴함으로서 함안이 피탈된다. 결국 사단장이 워커사령관에게 연대장 교체를 건의하게 된다.
9월 5일부터 적의 공격이 현저히 즐어들고, 적이 점령하고 있던 서북산. 전투산을 몇차례의 공격으로 결국 미 제27연대(서북산)와 제27연대9전투산)가 탈환하면서 작전 주도권을 확보하여 총반격의 계기를 마련한다.
미제 25사단은 9월 1~7일까지 방어정면을 제외하고도 전선 후방에서 적 병력 2,000여 명을 매장하였다.
(4) 영천 탈환전 ※ 국군 제6사단 : 갑령 축선에서 적전차 21대 파괴, 변규만 소위등 대전차 특공조 1계급 특진과 50만원 포상급
※ 국군 제8사단은 9월 10일 적 제15사단의 돌파구를 차단하고 무력화시켜 12일부터 총반격태세로 돌입한다
※ 국군은 영천부근에서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노획, 차량 85대. 소화기 2,327정 등 노획
8월 말 북한군 제2군단 에하 제4집단군에 편성된 제8. 제15사단은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신령과 영천을 목표로 최후공세를 준비한다. 적 제8사단은 의흥일대에서 강제징집병으로 병력을 보충하고 제17기갑여단에서 전차 21대를 배속받는다. 조림산-갑령축선을 돌파지역으로 계확하였다. 적 제15사단은 다부동 정면에서 의성을 거쳐 영천 북방 입암리로 이동하고, 제73독립연대, 제103치안ㅇ연대, 전차 12대를 지원받아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 또는 경주방향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은 산성-갑령-화산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 북방의 제8사단은 노고재-보현산선, 입암 남쪽에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북한군은 9월 2일 야간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적 제8사단은 수미상의 전차를 앞세우고 갑령으로 진출하고,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병사격과 변규영 소위 등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여 적 전차 7대를 파괴한다. 여기에 유엔군 항공기가 출현하여 네이팜탄 사격으로 총 21대의 적전차를 파괴하여 적 8사단의 돌파계획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전차 특공조는 1계급 특진과 5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한편 국군 제8사단은 9월 2일 적 15사단의 공격을 받는다. 제8사단은 제2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며 북한군 제15사단은 박성철 소자이 경질되고 5일 조광열 소장을 임명하여 영천돌파를 재촉하였다. 9월 5일 영천북방 저지선이 무너지자 ,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차출하여 제8사단 방어력을 증강토록 한다.
9월 5일 야간에 영천 읍내에 적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적전차가 시내에 진입하면서 경주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적 제15사단 일부 부대와 예비대들이 영천으로 들어오며 돌파구 확장을 기도하였다. 이날 지원부대인 미군전차 1개소대(5대)가 영천시내로 돌입하고 지원부대들이 도착하여 영천 남쪽에 방어준비를 하였다.
신령방면의 적의 기도 : 적 제8사단은 국군 제6사단의 일부 부대가 영천방면으로 전환된 것을 간파하여 9월 6일 아침 대낮에 신령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유엔 전폭기들이 출현하여 대량 피해를 입고 적 주력이 궤멸되다시피 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은 공세이전의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영천방면 돌파구 차단 : 9월 7일 제8사단 21연대가 영천일대에서 적 103연대의 수차례 공격을 격파하며 적 사살 300명, 포로 98명, 소화기 2대분 노획하였다. 제6-19연대는 적 보급지원붇대를 기습 공격하여 적 200명을 사살하고 차량 30대를 파괴하여 영천을 재탈환하게 되며 300만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
영천에서 적 돌파구를 차단하는데 성공한 국군은 10일부터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12일 9월 공세 이전의 제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하고 적 제15사단은 전투력이 완전히 상실된다.
국군은 영천부근에서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노획, 차량 85대. 소화기 2,327정 등 노획
(5) 안강-포항의 피탈 ※ 수도사단은 안강피탈 및 9월6일부터 안강 이남 곤제봉 쟁탈전에서 15회를 반복하는 가운데 제2대대는 대대장 이 두 번 바뀌는 등 대부분 장교가 전사 또는 부상하여 현지 임관으로 보충
※ 제3사단은 지원부대인 제10연대가 제8사단으로 원복되는 과정에 부대교대가 되기 전에 병력을 철수하여 정면의 적 제5사단이 형산강을 도하하여 후방으로 침투함으로서 포항을 적에게 넘겨줌. 형산강을 도하하여 적 1,600여 명이 운제산까지 침투
※ 경주로의 적의 진출을 차단하고 9월 15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환된다
국군 제2군단이 영천에서 결전을 치르고 있을 때에 국군 제1군단은 안강-포항-경주 축선에서 적 제5공격집단 중 기계를 장악하고 있던 적 제12사단과 흥해 일대에 집결한 적 제5사단의 9월 공세를 받게 된다.
당시 국군 수도사단은 기계 남쪽고지 일대에 있었고, 제3사단은 포항 북쪽 학천동-천마산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 방면의 상황이 급변하고 불안하게 되자, 제8군사령관은 이곳에 "잭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육본은 9월 1일부로 김백일 준장을 제1군단장에 보임하고, 수도사단장은 송요찬 대령으로 교대하고, 제3사단장에는 이종찬 대령을 임명했다.
9월 2일 기계.안강 도로로 적제12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도사단 방어선인 운주산이 피탈되고 어래산까지 진출하면서 위기에 빠진다. 한편 국군 제3사단도 적 제5사단의 공격을 받아 천마산(93)를 놓고 수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고 중앙 저지선이 돌파되면서 포항 외곾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9월 4일, 수도사단은 안강 남쪽 곤제봉-호명리일대로 철수하게 되면서 안강이 실함이 된다. 이에 잭슨 특수임무부대(처치특수임무부대로 개칭)가 경주로 이동하여 재비하게 되고, 적은 경주를 목표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이 무렵 제8군사령관는 군예비 미 제24사단을 경주에 투입하고 육군도 대구의 기갑연대를 추가 투입하게 된다.
9월 5일, 제3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좌측 수도사단이 안강 이남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더이상 포항사수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를 하여 형산강 남안에 진지를 편성하게 된다.
9월 6일, 수도사단의 무릉산-곤제봉 일대로 적이 집중하여 진지가 돌파되고 곤제봉을 놓고 무려 15회의 역습이 진행되면서 제17연대는 7차례의 뺏고 뺏기는 쟁탈전 속ㅇ에 제2대대의 경우 2번이나 대대장이 교체되는 등 대부분의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하면서 현지임관으로 그 손실을 보충하였다.
제3사단은 지원부대인 제10연대가 제8사단으로 원복되는 과정에 부대교대가 되기 전에 병력을 철수하여 정면의 적 제5사단이 형산강을 도하하여 후방으로 침투함으로서 포항을 적에게 넘겨줌. 형산강을 도하하여 적 1,600여 명이 운제산까지 침투함으로서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24사단에게 적 퇴로차단과 소탕작전을명하게 된다.
이에 9월 10일 미 제24ㅅ단은 전차로 증강된 1개 연대를 영일 비행장 남쪽에 집결시키고 경주로의 진출을 차단하도록 하고, 제1군단은 군단예비 제18연대를 투입하여 운제산을 공격하고, 제22연대로 옥녀봉을 공격하게 하여 탈환하였다.
결국 제3-18연대는 12일 오후에 형산을 탈환하면서 강변 방어진지를 회복하게 되고, 수도사단은 제17연대로 곤제봉을 탈환하도록 하여 적의 진출을 차단하게 된다.
이로써 적 제12사단과 제5사단의 경주로의 돌파는 저지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