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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 시집『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천년의 시작, 2008) ...........................................................................................
이 시는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울타리 나무판자에서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는’ 아이를 통해 가난했던 골목을 거쳐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보는’ 중년 여성 시인의 매력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자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치밀한 구도 위에 사소하고 범상한 것들을 통찰하여 배치하는 시인의 솜씨에 새삼 감탄한다.
옹이는 나무 가지끼리 서로 치대며 자라는 동안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가지가 제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지 못해 결국 쇠약해져 죽은 그루터기를 말한다. 나무 전체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도태한 결과일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죽은 옹이가 나무 몸속으로 들어가 박혀 나무를 자를 때 단면으로 흔적이 나타난다. 하지만 옹이부분은 나무향이 가장 깊은 곳이고, 나무의 가장 단단한 부분이기도 하다.
고난 뒤에 생긴 상처의 아문 흔적이 옹이인 셈이니,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단단해졌을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생의 가장 깊은 향이 배어든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이 절망 쪽으로 기우뚱할 때 얼른 희망의 방향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옹이 같은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과 자아의 극력한 싸움 끝에,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을 그 참담의 자리가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서야 무욕의 맑은 눈으로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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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말들이 줄줄이 시인들은 모르는 것 없어야 .........
잘 읽었습니다 아프다 소리지르던 그 시절이 제 삶을 단단히 만들었다는 것 아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