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의 꿈 3 (3)
"미카엘 신부의 세속 이름이 김형곤이었나?" "예, 경주 김씨였죠." "그건 어떻게 알았나?" "윤찬준에게 들었습니다." "기도원에는 오래 있었나?" "6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그 후엔?" "생계를 위해서 직업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겠죠." "취직을 했나?" "취직이 아니라 일거리를 맡아다가 하는 번역 같은 일이었죠. 신부들이 환속을 하면 제일 애를 먹는 것이 생계이죠."
그는 마치 자기가 당한 듯이 술술 이야기했다. 가톨릭에 대한 사정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책과 연관된 일을 했단 말인가?" "그렇죠. 당장 할 일이 따로 없었으니까요. 주로 종교 계통의 출판사에서 만드는 교리책 같은 것을 번역했죠." "일거리가 많았나?" "생계는 그대로 되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찌꺼기는 남아 있었겠죠." 탁현총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즐기고 있듯이 서슴없이 이야기 했다. 때로는 자기의 의견을 주입시키기도 했고 가정법, 주로 그랬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로 일관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및 가지 허점 같은 것을 발견했으나 그의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진지했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것 을 지적할 틈이 없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생각났다는 듯이 말꼬리의 방향을 틀었다. "김형곤 씨, 즉 미카엘 신부가 친구의 기도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기도원 옆에 누가 파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얼른 보면 창고 같은 문에 나무 판자대기를 대고 거기에 열쇠를 붙여 놓았는데, 그 열쇠를 따면 길게 이어지는 동굴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기도원이 생기기 전에 무당이나 잡신을 믿는 사람들이 파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토굴을 김형곤 씨가 우연 한 기회에 들어가 보게 된 것이죠." "토굴?" "예"
그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촛불을 켜고 1백 미터쯤 들어갔을 때 김형곤 씨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토굴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두 개의 형체를 보았습니다. 그 형체는 벽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말에 관심을 갖고 물었다. "형체라니?" 마치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를 그는 거침없이 했다. "형체였죠. 공중에 떠 있는 그 형체의 얼굴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부처님의 얼굴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예수님은 공중 십자가에 달린 채 그를 보며 슬픈 듯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뛰쳐나왔습니다." "부처님은 웃고 예수님은 울었단 말인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가 예수를 배반한 데 대한 슬픔 같은 것이 예수님에게 배여 있었겠죠. 자기를 믿다가 떠난 사람에 대한 실망 같은 것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도 살아 있을 때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술에 많이 취한 듯 몸을 비틀댔다. 어딘가 그의 이야기에 작위적인 냄새가 풍겼다. "예수님도 사람이었으니까요. 한편 그 옆에 있던 부처님은,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내게 오라. '예수님에게 가졌던 실망 같은 걸 내가 채워 주겠다.' 하는 의미겠죠." 내가 말했다. "아마 환상을 보았던 것이겠지." "물론 그랬겠죠. 인간에게는 가끔 환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탁현총은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동시에 나타났단 말씀인가?" 내가 묻자 이번에 그는 확신에 찬 듯, "부처님은 왼편에, 예수님은 오른편에 나타났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모두 성인일 텐데 성인의 머리 뒤에 나타난다는 후광(後光)은 없나?" "빛 말입니까?" "그렇지," "아마 있었겠죠."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술에 취해선지 처음의 이야기완 달리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어느 소설책에 등장하는 기적 같은 이야기 같았다. 사람들이란 때로는 일상적인 이야기보다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비행접시가 자기 집 마당까지 날아왔는데, 나만 목격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도 보았다든지, 검은 염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는 하얗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었다. 나는 탁현총이 한 동굴 속의 부처와 예수 이야기가 혹시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져보았다. 자기 이야기에 취해서 엉뚱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까지 합리화시켜 믿게 하는 것, 그림으로써 어떤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얻으려 하는 의도 같은 것이 배여 있지 않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제까지 한 모든 이야기를 구태여 확인할 필요 는 없었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남겨놓으면 되니까, 그가'거짓말을 했다고 어떤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그는 윤찬준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윤찬준은 그가 직접 만났고 한동안 생활을 했다고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빈성이 있었다. "윤찬준은 말입니다. 천재 화가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하며 그는 윤찬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찬준은 캔버스 하나에 문방구점에서 산 싸구려 화선지 몇 장, 그리고 붓과 물감을 갖고 전국을 방랑했다. 그림 그릴 소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림 그릴 소재는 많이 있었지만, 무엇인가 자신과 남들에게 전달할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소재가 필요했다. 그가 마지막 간 곳은 충남 아산, 방파제가 바닷물을 가로막고 있는 곳이었다. 넓게 트인 바다와 강, 그리고 바닷가에는 돛단배 가 몇 척 그림같이 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아산만까지 흘러갔는지 윤찬준이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동지섣달이었다. 살을 깎는 바람이 몰아치는 저녁, 그때 서산에 태양이 붉은빛을 발하며 막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산위에 붉디붉은, 그러나 살을 에는 차가운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태양은 동그란 원이란 걸 그는 보았다. 그리고 태양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친어머니 엘레나 수녀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의 얼굴이 어째서 태양 안에 그려져 있었는지 그는 몰랐다. 겨울의 태양은 인정머리 없이 쌀쌀맞기만 했다. 황혼은 아름다웠지만 육신의 추위와는 무관했다. 그는 며칠씩 굶었기 때문에 거의 기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캔버스를 보는 그의 눈만은 힘이 들어'있었다. 그는 물감을 개었다. 그러나 추위 때문에 물감이 얼어서 잘 개어지질 않았다.
태양이 서산에 동그랗게; 마치 달력의 그림처럼 걸려 있다고 생각 들었을 때 그는 이것을 그리기로 했다. 황혼 빛에 물든 아름다운 빛깔의 노을은 숨겨진 어머니의 고통스런 마음 같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어떤 이유로든 고통 받고 있는 모든 평범한 여자들의 얼굴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바로 이 태양에 어떤 형상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는 태양의 붉은 형태를 그렸다. 붉은 물감을 듬뿍 찍어 화선지에 묻혔다. 그리고 여기에 여자의 얼굴을 얹어 넣기로 했다. 방파제의 바람이 거침없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따금 바닷모래가 그의 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파제에 앉아서 작업을 계속했다. 몸에 부딪치는 죽음보다 더 차가운 한기를 이기기 위해 소주를 마셔댔다. 그러나 소주가 그의 몸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가방에 든 소주를 여러 병 꺼내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물감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붓을 꽉 움켜잡았다. 밑그림이 그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물감을 몇 번씩 듬뿍 찍어 화선지에 바르고부터 작업은 시작되었다. 윤찬준이 그림을 어느 정도 완성할 때쯤 태양은 빠른 속도로 서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잔상이 사위를 물들이고 있을 때, 서서히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노곤함 같은 것 을 느꼈다. 그것은 죽음의 시작이었다. 그는 깜박 졸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자신의 살을 꼬집었다. 졸다가 잠이 들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을 그리고, 태양의 주위에 그는 바람의 움직임을 묘사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묘사하기란 힘들었다. 바람에 떠밀린 갈매기 네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 갈매기 네 마리에 이름을 붙였다. 미카엘 신부, 엘레나 수녀, 창녀가 된 동생 박영숙, 그리고 자신, 그 네 마리의 갈매기는 태양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태양은 아름답고 따뜻했지만, 그들에게 더 공허만을 안겨 주었지 안식처를 마련해 주지 못했다. 네 마리의 갈매기는 끊임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는 갈매기 네 마리를 그려 놓고 한참 동안 그것을 응시했다. 제각기 날아 다니 는 갈매기, 갈매기에는 행렬이 없었다. 그는 추위와 배고픔과, 체력의 소모 때문에 점차 의식이 가물가물 해져 갔다. 그러나 붓대를 잡은 손은 결코 화선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 붓을 그었다. 마치 부처님의 눈에 점안을 하듯이 가법지만 힘 있게, 그리고 그 자리 에 쓰러졌다.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태양은 벌써 제 갈 길로 가 버리고, 그 태양은 잔상마저 거두어 갔다. 사위는 캄캄했다. 멀리 낚시꾼들의 간드레 불빛만이 요란 했다. 파도 소리가 거칠게 들려 왔다. 아무도 그가 여기 앉아 있다가 쓰러진 줄 몰랐다. 방파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횟집에서 간혹 술꾼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 아가씨 아롱 젖은 옷자락에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사랑
쓰러진 그는 일어날 줄 몰랐다. 밤은 그대로 깊어 가기만 했다. 밤은 죽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깊어 가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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