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것은 언젠가 멈춘다
누군가가 속도, 그리고 자동차에 관해 말한다면 조동범(42)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시적으로 말해보자. 자동차는 눈앞에 존재하는 실체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왜? 자동차를 구성하는 플라스틱과 금속 프레임만으로는 자동차를 설명할 수 없어서다. 자동차라는 하드웨어는 인간의 꿈과 추억과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지이기도 하다.
자동차 전문지에 시승기와 자동차 관련 고정칼럼을 쓰기도 했던 조동범의 속도 탐닉엔 성장 과정이 개입돼 있다.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가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건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다. 부모가 목재소 운영을 위해 구입했던 일명 ‘쩜사’(1.4t) 트럭과 ‘복사’(4t) 트럭은 고단했던 부모의 노동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버지가 초창기 모델인 ‘각(角) 그랜저’를 산 건 그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였다. 20대의 눈에 ‘각 그랜저’는 선망의 대상이기에 중고차로 팔려갈 때 눈물 글썽이던 청년이 조동범이었다.
입대해서는 운전병이었다. 제대 후 그의 첫 차는 티뷰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자동차를 보며 자란 아이는 자신의 자동차를 가지게 되면서 아버지를 넘어서고 아이의 아이는 또다시 아버지를 넘어설 준비를 한다. 운전을 생업으로 하는 누군가는 운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동차란 창을 활짝 열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바람을 맞는 오랜 욕망의 구조물이자 일종의 성취다.
“주유원의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장갑은 바닥을 움켜쥐고/ 앙상하게 잠든 주유원을 바라보고 있다/ 경쾌한 음악 사이로/ 주유원의 시선이 툭, 툭 끊어진다/ 속도를 담기 위해 멈추는 곳/ 주유소는 휘발유의/ 적막한 속도로 가득하다// (중략)// 휘발유의 경쾌한 출렁임이/ 속도를 만드는 곳/ 주유원의 손금 위로/ 빙하기의 죽음이 느리게 지나간다”(‘주유소’ 부분)
석유의 주요 매장지층이자 공룡의 활동 무대는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이다. 하지만 휘발유를 가득 담고 출발하는 자동차의 뒷모습에서 조동범은 공룡을 멸종시킨 빙하기의 죽음을 떠올린다. 달리는 것은 언젠가 멈추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2008)를 국도와 고속도로, 길 위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해 폐차장에 대한 단상으로 끝맺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동차엔 인간 삶이 담긴다. 담배꽁초와 빛바랜 볼펜과 라이터와 톨게이트 영수증과 누군가의 머리카락과 출생을 위한 초조한 기쁨의 질주와 죽음을 목전에 둔 슬픔이 있다. 자동차 그 자체가 죽음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정지. 그것이야말로 내연 기관을 가진 모든 생물체의 죽음과 일치한다.
“가판 가득 펼쳐진 신문이 바람을 맞는다. 신문은 날을 세워 바람을 가르고, 바람은 신문을 들춰 몇 개의 부음을 읽는다. 가판에 세상을 펼쳐 놓은, 버스정류장의 고요한 매점. 신문 가득 죽음을 담고, 한낮의 지루한 폭염을 견디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가 길을 건너다 납작한 무늬가 되는 쓸쓸한 공휴일. 바닥을 향해 한없이 납작해지는 폭염 위로 떠나지 못한 죽음이 서성댄다. 바닥을 향해 한없이 납작해지는 고양이. 어디로 가려는지, 고양이는 다리를 들어 하늘을 움켜쥐고 있다.”(‘정류하다’ 부분)
조동범의 시는 속도의 명상일 때 가장 아름답다. 속도는 우리 모두의 조건이기도 하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한신대 문예창작과,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물론 13번에 걸친 낙방을 딛고 등단한 아주 느린 속도의 시인. 고교 1학년 때 안양의 독서모임이었던 ‘수리시 동인’에서 시인 기형도(1960∼1989)를 만나 시를 배웠던 그가 ‘속도의 시인’이 돼 있다. 죽은 기형도와 살아있는 조동범. 죽음과 삶을 실어 나르는 자동차. 우리는 모두 속도라는 자동차를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