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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31
4월15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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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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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1ODtQWJ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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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스런 유치원생들과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녀님을 모시고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 살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지에 대해서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깊이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 중에 제 가슴을 크게 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현재 지구는 생태 용량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후손들이 쓸 용량을 앞당겨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인간이 쓰기에 좋은 세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환경 위기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동식물들입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담대한 생활 양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합니다. 에너지 재생, 자원의 순환, 미니멀리즘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복음 3장 35~36절)
공생활 기간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 역시 몹시도 지구를 사랑하셨으며, 친환경적인 삶,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 하늘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당부, 전도 여행길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여벌옷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 등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노선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지속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소박하고 청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 기간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세상의 승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통한 예수님의 승리와 관련해서 늘 유념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 상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시종일관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은 결정적인 순간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또 다시 죽고, 부활하고, 승리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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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rTvKaqB5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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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리의 증언을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르는가?:진리와 능력은 하나다>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입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믿어야 하고 그러면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하느님 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진리 안에는 성령의 힘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지팡이의 능력도 함께 주셨습니다. 말과 능력이 합쳐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고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이 따르지 않는 증언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둘이 아니시듯, 진리는 능력과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육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7세 담임을 하던 시절 만난 재혁이(가명)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형과 사는 아이였습니다. 바쁜 아빠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비난과 훈계를 일삼았던 분이었습니다.
저희 원에 3세부터 다니던 재혁이는 집에서 채우지 못하는 욕구와 감정을 원에서 해결했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교사들을 괴롭히기 일쑤였죠. 당연히 교사들은 재혁이 담임이 되는 걸 두려워했고, 재혁이로 인해 많은 엄마의 불만이 차고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혁이 담임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첫날 다른 친구들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재혁이를 아이들 앞으로 세웠습니다.
‘얘들아, 사람은 모두 다른 장점이 있거든. 우리 재혁이는 튼튼한 몸이 있어서 1년 동안 우리 친구들과 선생님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보디가드가 될 거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재혁이에게 도움을 청하자. 재혁아 도와줄 수 있니?’
그리고 수시로 교실에서 재혁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재혁아, 선생님 좀 도와줄래?’
‘재혁이가 있어서 선생님은 너무 든든해.’
‘재혁아, 너는 참 괜찮은 친구야!’
‘그동안 재혁이 마음이 아팠던 건, 그래서 친구들을 괴롭혔던 건 재혁이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에겐 모두 사랑 창고가 하나씩 있는데 어른들이 우리 재혁이 사랑 창고를 채워주지 못해서 재혁이가 친구들에게 줄 사랑이 없었던 거야.’
‘오늘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재혁이 도움을 많이 받았네. 고마워.’
그렇게 재혁이는 달라졌습니다. 졸업식 날 재혁이 아버님께서 참 많이도 우셨습니다. 재혁이에게 미안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재혁이와 약속했습니다.
‘이제 아빠도 괜찮은 아빠가 될게.’ ”
[출처: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다음 카페, ‘광양 시립 진상 어린이집’]
이 보육 교사는 분명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고 그래서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진리이고 능력입니다. 위 교사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증언대로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진리 안에는 능력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그동안 아버지가 재혁이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진노가 따를 것입니다. 변화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기적보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듯 진리의 증언에는 능력도 함께 따르기에 믿지 않으면 고집을 부리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 무술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실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는 중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가짜 무술 헌터라고 불리는 쉬샤우둥입니다. 알리바바의 마윈까지도 쉬샤우둥을 이기는 중국 무술 고수가 있다면 수십억 원을 주겠다고 돈을 내걸었습니다. 이에 중국 무술 고수들이 도전했다가 번번이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는 김치가 중국 것이고 태권도도 중국 것이라는 주장에 김치도, 태권도도 한국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말이 옳아지려면 그에 따른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무술은 계속 시대에 뒤떨어져 그의 말대로 서커스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진리를 믿지 않는 데서 오는 진노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그분의 대를 이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감히 시작할 용기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능력이 있음에도 믿지 않는다면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왜 쉬샤우둥의 말을 믿지 않을까요? 그들이 하는 무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증언 앞에서 그러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능력과 함께 선포되는 진리는 믿지 않으면 남는 것은 진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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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31-38 :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 위에 계시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위에서 온 뿌리에서 나셨고, 당신 안에 본성적으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기 때문에 탁월한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분이 참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외아들로서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분 손에 모든 것을 내주셨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질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그러나 아드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고 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용기와 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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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지만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기에 당신께서 몸소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신 친교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늘 복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와 마치실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1요한 4,16 참조). 사랑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을 주시려면 이를 받으실 아드님께서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실 때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아드님 손에 내주십니다. 그러면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 드리십니다. 순수한 영이신 아버지와 아드님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고 또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일치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드님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거부하여 죽음의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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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에서 오시는 분>
4월 15일의 복음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믿음’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일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위에서(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만물의(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위에서(하늘에서) 오셨다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는 뜻과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마태 28,18) ‘모든 것’은 이 세상 만물과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연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신 분’이 가지고 계시는 ‘권한’은 ‘생살여탈권’입니다. 이 권한은 사람들을 살리거나 죽일 권한, 즉 구원하거나 멸망시킬 권한입니다. 바로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살고 싶다면’(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그런데 인간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구원의 진리’ 라고 주장하는 이론도 많습니다. (종교와 거리를 두거나 종교를 부정하는 과학 이론들과 철학 이론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준으로는 그것들은 모두 ‘땅에서 난’ 것들이고,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땅에서 났다는 말은, 그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라는 뜻이고, 땅에 속해 있다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을 적대시하면 안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우리의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사람들과 논쟁을 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2-34)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는 말은, 뒤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증언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요한 10,30)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느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도 구원받는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많고), 그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의지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증언인데, 이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이 하나로 일치되어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분이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일이고, ‘하느님은 구원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전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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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의 예수회가 노예제도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1억 달러를 배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예수회는 100여명의 노예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이는 신앙의 길에 위배되는 결정이었다고 성찰하였습니다. 노예들의 후손을 찾아보니 5,000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회는 1억 달러를 모금해서 절반은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일부는 흑인들의 교육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일부는 지금 살고 있는 노예들의 후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위배되지 않았지만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사과와 더불어 배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으로 예수회의 정신과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회의 근본정신인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은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계약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라고 합니다. 국제사회가 위안부의 문제는 여성의 인권에 대한 탄압과 모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친일본적인 학자들을 통해서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논문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하버드 대학의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그렇습니다.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망각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이와 같은 행동은 법적인 문제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규모와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독일과 같이 일본이 피해 당사국과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였다면 일본은 도덕적으로도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비록 박해와 고통이 따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예수회의 결정은 비록 비난을 받고, 비용이 들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교황님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식민지의 백성들은 제국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국이 식민지에 길을 내 주었고,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길과 공장을 통해서 수탈이 이루어졌음은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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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이며,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옵니다.
더러운 악령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피하시고, 악령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3,12)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알리지 말라는 명령은 여기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후 병자들에게 자기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1,34)
또 마르코 1,40절 이하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이도록 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하려 하시고 또 악령들에게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 온 나라에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알리지 말 것을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싶은 병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지려고 들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많은 군중들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
또 수없는 기적을 목격한 바리사이 사람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하시고는 그들을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백성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빵에만 매달릴 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여러 기적을 목격했지만 기적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기대로 시작한 접근은 끝까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망하여 흩어져 버립니다. 이러한 한계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고, 성령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을 처음 찾을 때는 하느님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심으로 출발해서 차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적인 호기심과 기대는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것에 실망하거나 게을러져서 냉담을 하게 되지요.
때로 믿음보다 인간적인 것만을 좇아 바리사이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보다도 더 무섭게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서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인간적인 것보다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이나 어리석은 유다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함구령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기대나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분은 본당 신부도, 수녀도, 사목위원도 아니고 또 직책이나 재력, 신분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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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동원 요셉 신부님]
싱그럽게 피어올랐던 새 생명들도 어느덧 제 모습을 갖추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뽐내기라도 한 듯 생명을 키워나가고 있는 계절입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주신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확실한 희망을 주는 사건임에 틀림없나 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과 어리석음에서 부활하시어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마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신앙인들처럼 부활사건의 증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난주 우리들은 사도 토마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내 눈으로 그분의 못자국을 직접 보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시며,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었지만 나를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일에 있어서 확실한 증거와 뚜렷한 원인과 결과를 통해 얻어진 사건만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직접 경험하였거나 비록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 전해준 것만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만이 과연 우리의 삶에 있어 모두 믿을만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친히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 보여주시며, 나를 믿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직접 듣지 못하였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또한 얻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새 생명의 시작이며, 새로운 세상, 새로운 희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의 산증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하시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함께 새로운 세상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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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코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코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코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코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코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코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그리스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코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이며, 가정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8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새 번역 성경 - 영)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대목의 '성령'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서의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코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코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코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코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코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저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저희는'이라는 표현과 니코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7절)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코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 (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과 질료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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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오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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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주님!
저희는 당신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않는 것을 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을 내어주시기에 진정,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5).
“위에서 오신 당신”(요한 3,31)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살기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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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3,35)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건네받으신 분', 곧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런 사람들은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십니다. 때문에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그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점점 곤경에 처하게 되는 사도들의 모습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데, 그런 곤경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오늘 독서(사도5,27-33)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곤경 속에서도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힘차게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5,29-32)
이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한 사도들의 멋진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자녀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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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찰>
요한 3,31-36 (하늘에서 오시는 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성찰>
하늘은
하늘만의
하늘이 아니라
땅의 하늘이라
하늘에
계신 분은
늘 그렇게
땅으로 오시는데
땅은
땅만의
땅이 아니라
하늘의 땅이거늘
땅에
있는 나는
늘 그렇게
하늘로 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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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돼서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요즘 자녀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제 형제는 자그마치 여섯이나 됩니다. 동물이야 두세 달이면 스스로 독립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거의 이십 년 이상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요즘에는 이 보호 기간이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저희 형제를 부모님께서는 자그마치 여섯이나 키운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 이 점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여섯이나 낳고 키우셨어요?” 그때 어머니께서는 “글쎄, 지금은 못 키우겠지. 그런데 그때는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제 성격만 봐도 이런 저 하나만 키우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와 비슷한 형제를 여섯이나 키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힘들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분명히 힘드셨을 것입니다. 지난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지나고 보니 힘들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통과 시련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힘들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땅에 속해 있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를 때 사람들의 반대를 부딪치곤 합니다. 이 순간이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믿고 따를 때, 고통과 시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분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땅에 속해 있는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이를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늘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로 이 순간, 주님께서 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또 주님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찰을 통해 지금을 이겨낼 수 있으며,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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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치유 받았다’라는 것은 병이 낫더라도 죄는 남아서 또 다른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치유된 다음에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또 예물을 바치는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런 과정을 생략하십니다. 용서되어 깨끗해졌기 때문에, 굳이 사제에게 갈 필요도 없고 예물을 봉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가난과 연결된 병자를 예물이란 짐에서 자유롭게 해줄 뿐 아니라, 이런 의식을 재생산시키는 예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치유 너머까지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결과가 ‘병’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동은 새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기성 종교의 반발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기성 종교의 반발을 누르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사랑의 길을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원리원칙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길을 지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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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
"인생은 정직과 거짓, 충직과 불충, 이기심과 이타심, 선과 악이라는 두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다르며 대치되는 논리로 이루어진 두 길 사이에서 오고갈 수는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야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 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루카16,13)
집회서를 보면“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적혀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사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깨우침을 주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받아들여야 더 큰 것을 알게 되고 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위인 중 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 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고 좋은 일을 해 공로를 많이 쌓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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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종의 여정>
-순종을 사랑하십시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도생활을 사랑하듯이 순종을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답입니다. 비단 순종뿐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듯 정결, 청빈, 기도, 공부, 노동, 겸손, 침묵, 경청, 마음의 순수등 모든 수행 덕목을 사랑하십시오.
이제 오늘 피정이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는 제 수도원 집으로 돌아가고 수녀님들은 각자 소임지로 떠날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큰 은총은, 아름답고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다면 참 보기 민망할 것입니다.
인생피정 끝나고 마지막 떠날 때의 죽음의 은총도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순종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한 것 뿐이겠습니다. 어제 양 베네딕타 총원장 수녀님의 짧은 한 말씀도 저에겐 평생화두처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여전如前하시네요!”
역시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여전한 한결같은 삶이겠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의 여정에 충실해야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하여 하느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순종의 여정의 중심에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고 순종을 통해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음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겸손과 비움이 순종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여정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또한 순종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니 그대로 순종의 여정은 예수님 닮기,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 앞에 갔을 때도 마음의 얼굴 검사로 하느님 나라 입장이 결정될 것입니다. 순종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얼마나 예수님 얼굴을 닮았느냐가 통과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을 믿어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구원에 결정적인지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위에 머무른다.”
새삼 순종의 믿음이요, 순종의 생명이요, 순종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순종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침묵, 경청, 겸손도 결국은 순종으로 완성됨을 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야 말로 참된 영성의 잣대요, 참된 성덕의 표지입니다. 이런 순종이 우리를 진정 자유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대로 순종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여 복음적 권고중 하나가 정결, 청빈에 이어 순종이고, 분도회의 3대 서원 역시 정주와 수도자다운 생활에 이어 순종이 마지막에 자리잡습니다. 공동체 일치의 결정적 덕목이 바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믿음의 용사들인 베드로와 사도들, 정말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담대할 수 있음은 순전히 순종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순종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성령이 사도들을 담대한 믿음의 용사들로 만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신에 찬 고백이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진리입니다. 순종의 축복이요 순종하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성령입니다. 순종하는 사도들이 이처럼 담대할 수 있음은 순전히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 회개과 용서의 표징, 순종의 표징이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닮아 우리 역시 순종의 사람이 될 것이며 우리 영적 삶의 유일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더불어 생각나는 영국의 토마스 모어 성인의 순교일화도 생각납니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헨리 8세 왕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의 성인의 고백입니다.
“저는 왕의 훌륭한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우선적 종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자신의 생명을 잃게 하는 믿음의 타협을 거부한 토마스 모어입니다. 믿음의 사람 토마스 모어에게는 왕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는 길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 성인뿐 아니라 무수한 신자들이 하느님께 애오라지 순종의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으니 말 그대로 순종의 순교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순종은 살아 있는 순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발적 사랑의 순종의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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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과 땅에서 난 사람의 차이를 보여 주십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요한 3,31)
땅에서 난 사람은 육에 매여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의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기에 그에게 아무리 영적인 사정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들 먹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즉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외에는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나이시고, 또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완전히 결속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진리와 선, 아름다움이 하느님의 반영임을 관상하며, 성삼위 하느님의 참됨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제1독서는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 사이의 식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대사제의 지시를 어겼다고 사도들이 다시 끌려가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당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주눅들지 않고 이렇게 진리로써 응답하지요.
사도들의 응답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이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도 응당 고백해야 하는 진리지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관상하며 그 안에 함께 머무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사람의 말, 육의 관심사, 땅에 속한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겠습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화답송)
땅에서 태어난 일차적 생명을 넘어서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 하늘의 일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입은 주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가 끊이지 않지요.
그렇다고 그의 삶이 늘 태평무사하고 승승장구하며, 부귀영화만 누리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에 머물러 하늘의 일을 관상하는 이는 세상에서 피해갈 수 없는 거센 고통과 슬픔이 덮쳐도, 그조차도 찬미로 승화하는 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탄식 중에서도 찬미와 감사가 새어나오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 점령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생각과, 입에서 나가는 말이 주로 어디에 속하는 말인지, 영의 관심사와 육의 관심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깨어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위치가 어디 쯤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진리가 어느 쪽인지 조금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하느님과 우리를 결속시켜 주시고 그분 생각을 알게 해 주시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의 유혹과 과대포장된 거짓 위안의 허울을 넘어서, 영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발돋움하려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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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부활은 ‘공포와 체념의 무덤’에서 ‘일어남’과 관계가 있다.
부활은 일어남과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체념, 실망과 상처로 점철된 무덤에 " 그냥 머물러 있으려 한다. 사람이 두려워 적당히 무덤에 적응하며 산다. 일어나면 삶과 대면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누워 있고 싶어 한다. ‘일어나다’ 라는 예수의 부활에도 사용되었지만 예수님이 환자들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명하는 여러 치유 사화에도 사용되었다. 이들 치유 사화에도 부활이 있다.
♣부활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사슬에서 풀려나 "더 이상 억압과 장애 때문에 침상에 매이는 일 없이,"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을 용기를 얻는다.(요한 5, 1-10)" 우리는 신앙생활에 간절함과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어리석고 아둔하고, 굼뜸, 게을러진 마음을 예수님이 탓하시듯이 지금 우리를 탓하고 있지 않으실까요?.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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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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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SrhRuSOS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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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3, 36)
아드님 자체가
믿음이고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하느님의
영원성을
다시
만나게 되는
부활이다.
우리의
생명이란
수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순종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맞아들이게
된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의 뜻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준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믿음과 순종
순종과
영원한 생명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허약한
믿음조차
사랑으로
성장시키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구원의
여정 속에
수난이 있고
순종이 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간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수난과 순종의
삶을 우리도
살겠다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으로
모든 여정은
은총이 되고
사랑이 된다.
하느님의
생명은 수난과
순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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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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