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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하는 태양과 열정이 만들어낸 신화(神話)를 찾아서 * 2>
- 스페인 포르투갈 문학기행 - 세비아 편 고 산 지
리스본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버스는 안달루시아 주도 세비야를 향해 달렸다. 이베리야반도를 찾는 관광객은 년간 7,500만명(2016년)이 넘는다. 이들 중 50%는 햇볕을 즐기기 위해 다시 찾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이베리아반도는 작렬하는 태양이 매력적인 곳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는 북쪽은 시에라모레나산맥, 남쪽은 지중해와 대서양 그리고 서쪽은 포르투갈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페니키아(BC12세기)와 카르타고(BC 5세기)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 통치시대에는 세네카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AD 5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칩입한 반달족(族)은 뒤따라온 서고트족에게 이베리아 반도를 내주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 로마 제국의 최대 곡창 중 하나였던 북아프리카에 반달 왕국을 세웠다(429~533).
이베리아 반도에서 정착한 서고트족은 약 10만 명 정도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살고 있는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다. 서고트 족은 세고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한정된 지역에 거주했으며. 중요한 각 지방의 도시에는 군대와 관리들을 주둔시켰다. 서고트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갈리시아에 거주하던 수에보인들, 자연 지형에 의한 국경을 고집하고 있던 바스크인들, 그리고 반도의 남서부에 자리 잡은 비잔틴인들을 소탕해야 했다. 수에비인들이 정복되고, 비잔틴인들이 추방되자, 칸타브리아인들과 바스크인들은 피레네산 속에 은거하며 항거를 계속했다.
서고트 족 치하의 당시 스페인은 왕위 세습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질 때마다 유혈 투쟁이 뒤따랐다. 701년 서고트 왕국의 위티사 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킬라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또 다른 왕위 계승자였던 로드리고가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로드리고가 왕위에 오르자, 위티사의 아들 아킬라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세력이 로드리고 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킬라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통치자였던 무사(Muza)에게 용병을 요청하자, 무사는 자신의 부하 타리크(Tarik)를 보냈다. 타리크는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무어인)과 아랍 귀족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북부에서 바다 건너 이베리아 반도의 남단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란 높은 바위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영국령인 지브롤터(자발 타리크,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이다. 711년, 타리크의 군대는 스페인 남부 지역 과달레테 강가에서 서고트 족의 로드리고 왕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이것이 이슬람인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의 단초가 되었다.
서고트족 왕국이 급속하게 무너진 이유를 둘러싼 여려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중 하나는, 고대 스페인의 한 왕이 잠긴 방 안에 비밀을 봉인하고, 후계자 중 어느 누구도 방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겠다. 26명의 왕은 이 말을 순종했으나, 로드리고는 충고를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 벽에는 아랍 전사들이 그려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황금 탁자 위에 단지가 놓여 있었고, 단지 안에는 이렇게 씌어 있는 양피지가 있었다. "언제든 이 방이 더럽혀질 때, 그리고 단지에 담긴 주술이 깨질 때, 이 벽에 그려진 사람들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왕을 폐위하고 영토 전체를 정복하리라“.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는, 로드리고 왕이 톨레도의 타호 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아름다운 아가씨를 겁탈했다. 그녀는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세우타의 총독인 훌리안 경의 딸이었다. 훌리안 경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생각에 복수를 결심했다. 이슬람인들이 스페인을 침략하는 지리적 요충지를 책임지고 있던 훌리안 경은, 이베리아 반도를 손쉽게 침략하도록 타리크에게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이슬람은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북서쪽의 고산 지대를 제외한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정복이 쉽게 이루어졌던 것은 서고트 왕가의 내부적 분열과 원군을 요청한 위티사 측의 적극적인 동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사막에서 통일된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던 아랍인들에게 유일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611년에 신의 계시를 받은 그는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그의 가르침에 환호를 보낸 것은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귀족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622년에 메디나로 피신, 그곳을 포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것을 헤지라(Hegira, 성천(聖遷))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이다. 무함마드는 메디나를 장악한 후, 정치적·군사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630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하여 무혈 입성한 후, 아라비아 반도를 알라신의 이름하에 정치적·종교적으로 통일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시리아 원정길에 올랐다가 632년에 메디나에서 사망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북쪽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세력을 확창하고, 651년에는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정복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반달 족과 비잔틴 제국의 약탈로 경제적으로 매우 피폐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680년 이스람교도들은 북부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를 정복했다. 모리타니아라는 단어에서 무어(moor, 스페인어로 모로인이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무어인은 아랍인, 스페인인, 베르베르인의 혼혈인 '스페인계 이슬람교도'를 의미하지만, 이슬람교도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모리타니아라는 말은 라틴어의 마우리(Mauri)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로마인들이 알제리 서부 지역과 모로코 북동부 지역으로 이루어진 로마의 속주(屬州) 모리타니아 주민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그들에게는 지중해 건너 이베리아 반도 남부는 '맑은 물이 넘치고 푸른 숲이 우거진 지상 낙원'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물 한 모금 얻기 힘든 황량한 모래 벌판에서 살던 무어인들에게는 이베리아반도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있을 때, 아랍 본토에서는 다마스쿠스의 옴미아드 왕조와 바그다드의 아바스 족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승리한 아바스 족은 아바스 왕조를 열고 옴미아드 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를 피한 옴미아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의 손자 압데라만 1세는 시리아 총독의 도움을 받아 안달루시아에 새로운 이슬람 왕국을 세우고, 국호를 알 안달루스(Al-Andalus)라고 했다. 이 왕국의 수도가 된 곳이 코르도바였다. 1085년에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던 톨레도가 가톨릭교도의 수중에 떨어지자, 코르도바 왕국은 북아프리카의 광신적인 알모라비데 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침내 알모라비데 족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가톨릭교도 들을 물리치지만, 동시에 코르도바 왕국도 정복하는 바람에 '알 안달루스의 신부(新婦)' 코르도바의 영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코르도바의 옴미아드 왕조가 멸망한 후 수십 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는 소규모 이슬람 왕국이 난립하는 전국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중 가장 번영을 누린 왕조가 세비야에서 3대째 계속된 아바스 왕조였다. 세비야는 1010년에서 1248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코르도바 왕국에 이어 200여 년 이상 이슬람의 문화를 꽃피웠던 세비야에는 군주와 노예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바스 왕조의 최후의 군주인 알 무타미드는 신하들과 과달키비르 강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일진광풍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알 무타미드는 시정(詩情)을 자극받아 시 한 수를 읊었다. 시의 다음 구를 누군가가 붙이길 원했으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때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가씨가 일어나 응답했다. 알 무타미드는 아가씨의 재기와 젊음,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주인으로부터 이 노예 신분의 아가씨를 사들이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그녀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를 지었다. 알 무타미드는 그 후 모로코로 납치되어 5년 동안 갇혀서 고생하다 옥사했다. 1248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격으로 세비야는 함락되었다. 안달루시아는 그라나다가 가톨릭의 카스티야 정권에게 항복할 때까지 스페인 땅에 이슬람 문화를 심어 유럽의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카스티야에게 점령당한 후 무슬림들은 아르곤의 왕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여왕의 가혹한 인종청소와 극심한 동화정책으로 이슬람의 전통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학살을 피한 무슬림들은 튀니지와 모로코로 이주했으며, 일부는 서인도 제도와 멕시코에서 그들의 농경, 관개기술을 발휘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안달루시아는 건축과 의상 등에 독특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코르도바의 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723년-1323년에 세워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문화의 최대유산이다
세비야의 옛 이름은 히스팔리스(Hispalis)이다. 과달키비르강(江) 어귀에서 87km 상류 연안에 있다. 로마 시대에는 지방 중심지로 번창하고, 그 뒤 서(西)고트(5~8세기)·무어(8~13세기)의 지배를 받았고, 12세기에는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모은 알카사르 궁전, 히랄다의 탑 등이 건축되었다. 1248년 페르난도 3세에 의해 다시 에스파냐에 속했고 15세기 말에는 신대륙무역의 기지로서 전성기를 맞아 에스파냐 최대의 성당과 대학 등이 설치되었다.
스페인어는 스페인 및 중남미 20여 개 국에서 약 4억의 인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유엔의 5대 공용어(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의 하나이며, 사용자 수에 있어서도 중국어와 영어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언어다. 카스티야(Castilla)란 스페인 중심부 카스티야 왕국의 이름으로서, 이 말은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카스티요(castillo, 성)에서 유래됐다. 카스티야 왕국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카스테야노(castellano)라고 불렀다. 이 카스테야노가 지금의 스페인어이다. 1492년 1월 2일, 가톨릭 왕들(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이슬람교도들을 축출, 이베리아 반도를 가톨릭으로 통일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스페인어 문법서가 탄생했다. 이 문법서를 쓴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1444년 세비야 근교에서 태어났다. 살라망카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한 후, 19살에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으로 유학, 10년 동안 공부한 뒤 1470년에 귀국하여 살라망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대학 교수를 그만둔 그는 연구에 몰두하여 1492년 라틴어가 아닌 최초의 스페인어 문법서인 《카스티야어 문법서(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를 펴냈다. 이 책은 대중의 체계적인 언어 교육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고, 카스티야어를 세계적인 보편의 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씌어졌다. 하지만 이 역작은 초판만 출판되었을 뿐 후학들에게는 인기가 없어서 2판이 나오기까지 무려 2세기가 걸렸다. 1517년, 네브리하는 《카스티야어 정자법》을 집필하여 스페인어의 정자법 체계 확립에도 큰 공헌을 남겠다.
고트족은 로마를 멸망케 한 게르만족 대이동의 주역이다. 고트(Goth)족의 문명이 로마에 들어왔다. 낯설고 이질적인 고트족의 문화를 ‘고딕(Gothic)’이라 한다. 르네상스 발흥 전까지 1000여 년 동안의 중세 유럽은 고딕문화가 주도했다. 로마양식(Romenesque)이 병행되었지만 고딕양식(Gothicque)은 중세의 독특한 문예사조 중 하나였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자형 직선으로 뾰족하게 올린 성당, 은혜의 빛을 받아 실내를 부드럽게 밝힌 스테인드 글라스, 급경사와 괴물 모양의 물받이, 길고 뻣뻣한 인물상 등을 특징으로 하는 고딕건축은 익숙했던 고전적인 형태가 아니기에 이질적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어인들의 영향을 받은 세비야 대성당은 안달루시아 기독교 문명과 알모하드 문명을 동시에 보여 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백미 중 하나이다. 1248년 스페인이 무어인들부터 세비야를 수복한 후, 알모하드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교회를 건축하기로 한다. 스페인의 부와 힘을 상징하는 대규모 성당 건립을 기획하면서 이 모스크는 헐리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스크의 흔적이라고는 연못과 히랄다 종탑이 딸린 현관의 안뜰(Patio de los Naranjos)뿐이다. 세비야의 상징인 히랄다탑은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족이 만든 미나렛 - 모스크의 첨탑으로 아랍어로 ‘빛을 두는 곳, 등대’를 의미하는 '마나라'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에서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각에 예배당을 지키는 무아딘이 올라가 아잔의 시구를 낭송한다. 기원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직접 해방시킨 흑인 노예 빌랄에게 명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을 하게 한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 이었다. 1566년에서 1568년 사이 바르톨로메 모렐(건축가)은 여기에 플라테스코 양식 - 금은 세공사에 의한 화려하고 정교한 부조 기법 -의 종루를 만들고, 28개의 종과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 이 후 탑의 이름을 풍향계를 뜻하는 히랄다라고 불렀다. 종루에서 바라보는 세비야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걸어서 종탑까지 오른 집사람의 무릎에 도배된 동전파스, 문학기행에서 쟁취한 세비아의 훈장임에 틀림이 없다. 1402년부터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오랜 시기에 건축된만큼 고딕·신고딕·르네상스양식이 섞여 있다. 이곳에는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은 산 페르난도 왕을 비롯하여 에스파냐 중세기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남쪽 문 근처에는 콜럼버스 묘가 있는데, 에스파냐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관을 메고 있다. 이 관에는 콜럼버스 유골분이 안치되어 있다.
오페라 카르멘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고 있지만 실제 그녀의 이야기를 아는 이는 뜻밖에 드물다. 1820년 세비야에서 있었던 이 요란한 연애담에서 카르멘이 돈 호세를 만나는 곳은 담배공장 앞이다. 그는 선량한 약혼자 미카엘라가 있는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하여, 담배공장 내에서 일으킨 트러블로 연행당하던 자신을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돈 호세는 그녀를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두달동안 영창에서 지내게 된다. 그동안 미남 투우사 에스카밀로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고 돈 호세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카르멘은 돈 호세와 밀매업자들이 사는 산으로 들어간다. 비극은 카르멘의 변심에서 시작된다. 돈 호세에게 싫증을 느낀 그녀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며, 투우사 에스카밀로에게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눈물로 호소하는 카르멘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돈 호세는 훗날을 기약하며 병든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죽음의 장소가 될 투우장이었다. 에스카밀로의 투우가 있던 날, 그의 팔짱을 끼고 나타난 카르멘을 돈 호세는 결국 칼로 찔러 죽이고 그 또한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격정과 질투와 사랑이 소용돌이치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소설을 바탕으로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왕립담배공장은 현재 세비야 대학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19세기, 유럽 전체 담배의 4분의3을 생산하던 이곳은 담배를 만드는 여공들만 무려 1만명에 달했다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카사노바’와 함께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돈 후안. 1630년 작품인 티르소 데 몰리나의 희곡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에 처음 그 이름을 드러내기 전에도, 돈 후안의 이름은 민간에 구전된 유명인사다. 그러나 돈후안이 좇는 것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정복. 직업과 외모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버린 난봉꾼이었다. 수많은 작품에 나온 만큼, 그의 성격도 작품마다 천태만별하다. 몰리에르의 “돈 후안”,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바이런의 “돈 주앙”, 슈트라우스의 “돈 후앙” 등 그의 이름을 제목에 걸고 있는 작품들 외에도, 호프만, 메리메, 키르케고르 등도 돈 후안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존 조반니의 하인 레포렐로의 입을 빌어 그를 이렇게 말한다. "저희 주인님이 '작업'한 미인들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 230명,프랑스 100명,터키에서 91명이고 스페인에서는 무려 1003명입니다. 이 중에는 시골처녀,하녀,창부,백작부인,공작부인 등 지위 계급 스타일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여인들이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세비아의 산타크루즈 거리에 있는 작은 호텔 '호스텔 델 로렐'은, 돈 후안이 귀부인을 유혹했던 무대로 알려지면서 1년간의 예약이 꽉 차있을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세기의 극작가인 호세 소릴로가 돈 후안의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무대로 삼았던 이 호텔이 돈 후안의 밀회처로 소문나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세비야는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무역항이자 아메리카 여행지의 출발점이다. 콜럼버스의 무덤과 기념탑이 세비아에 있다. 세비야의 발전은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를 향해 떠났다. 식민지의 모든 생산물들은 세비야로 집중되었다. 이후 세비아는 카스티야 왕국의 유일한 독점무역항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한 번영은 16세기 초 카디스항이 개항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비야 대성당의 제단 정면에 있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 1.5톤으로 만든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은 당시의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비야에서 모험을 시작한 사람은 콜럼버스 외에 마젤란이 있다. 그도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계일주를 떠났다. 마젤란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탐험대는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향료를 손에 넣고 돌아온 마젤란 탐험대 덕분에 스페인의 식민지는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러한 탐험가들이 항해를 위한 자금을 원조받기 위해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였다. 알카사르에는 식민지 사업을 총괄하던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 즉 무역관의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식민지 개척에 관한 중요한 회합과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메리카 발견을 거의 최초로 묘사한 작품인 알레 호 페르난데스의 “항해자들의 성처녀“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정열적인 춤과 음악인 플라멩코 춤에는 소외와 박해를 당해온 집시의 한(恨)이 서려있다. 플라멩코는 자신이 생겨난 곳, 안달루시아의 수많은 민속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안달루시아의 정서와 집시들의 감각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이 장르에는 수많은 피가 섞여있다. 인도에 기원을 두고 유럽을 떠돌다가 안달루시아에 들어온 집시들의 피와 안달루시아의 피가 혼재되어 있다 세비야는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다. 마에스뜨란사 공연장(Teatro de la Maestranza)에서 2년마다 플라멩코 예술 비엔날레가 열린다. 이곳에서는 도시 전역의 다채로운 장소에서 플라멩코를 만날 수 있다. 산타크루스 거리를 중심으로 타블라오스, 즉 플라멩코 클럽들이 포진해 있는데 전문적인 공연은 식사와 함께 즐기는 '로스 가요스(Los Gallos)' 같은 타블라오스나, 좀더 저렴하게 공연 위주로 진행되는 아우디토리오 알바레스(Auditorio Alvarez Quintero) 등이 있다. 플라멩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일레 플라멩코(춤) 뿐 아니다. 칸테 플라멩코(노래)와 토케 플라멩코(기타)를 포함한다. 화려한 춤보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에 먼저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은 관람방법이다. 칸테와 바일레, 토케를 맡은 예술가들을 각각 칸타오르, 바일라오르, 토카오르라 부른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은 산텔모 궁전(Palacio de San Telmo)의 정원이었으나 궁전 소유주였던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다(María Luisa Fernanda) 공작부인이 1893년 세비야시에 기증하면서 시 소유가 되었다. 세비야시는 1929년 이베로 아메리칸 박람회(Ibero-American Exposition) 개최를 앞두고 공원을 재단장해 현재의 아름다운 공원이 탄생했다. 세비야를 대표하는 공원이자 에스파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광대한 면적의 이 공원은 전체적인 평면이 부등변 사각형 구조이며, 에르난코르테스(Hernán Cortés)와 피사로(Pizarro)라는 넓은 2개의 가로수길이 십자형으로 교차하며 공원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아름다운 가로수 길은 세비야 시민들이 산책 코스로 즐겨 이용하는 장소로, 길을 따라 뛰어난 솜씨로 제작된 많은 조각상과 여러 모양의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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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비야 성당에서 한글로 표기된 안내문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든지, 새록새록 생각이 납니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에서
일행 한명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혼비백산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벌써
오래된 추억처럼
되새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