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 인간의 참된 안식.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30) 하심 같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자식된 분수와 도리, 곧 자식은 아버지께 대해 주관적인 생각과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말씀)대로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 상태하에서만 사람이 평안할 수 있디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뜻과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거짓과 허위와 불법불의와 음란방탕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자기 육신의 생각 위주로 세상 만사를 평가합니다.
그런데다 사람들의 대인관계 또한 장삿속 이해관계나 아니면 약육강식하려는 적대적 관계로만 대하기 때문에 아무리 절친한 친구지간이나 부부지간이나 부자지간이라도 시종 일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장삿속(적대적) 대인관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돈과 권력과 지위 같은 세력의 힘으로 상대방의 마음, 곧 생각을 제압하고 자신의 의사만 듣고 따르도록 한 것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 횡행하는 종북 반역 세력들의 악행입니다. 그래서 주권을 빼앗긴 국민들이 이처럼 살벌한 장삿속(적대적) 대인관계로만 국민을 대하는 불법불의한 가짜 정권으로부터 잠시라도 안정감을 가질 수 없는 전시체제와 같은 긴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시체제와 같은 완전 군장을 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 곧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자식된 분수와 도리만 갖추는 순수한 생각과 마음으로 살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마치 갓난 아이 같은 사람들을 맹수들이 들끓는 밀림 오지에서 살게 한 것과 같고 또 군병이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서 적과 싸우게 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물정에 밝은 자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거나 또 그를 위해 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적지에서 예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또 모든 이웃들과 항상 상생협력할 수 있는 천국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만 달랑 믿고 따르는 멍에를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멍에가 세상에서 가장 짊어지기 쉽고 편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지키는 일이 가장 안전한 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웃들과 싸우기 위해 강력한 갑옷만 걸치면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진리의 활시위에서 떠난 의의 화살은 그 어떤 범죄한 철갑도 다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입은 갑옷의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지키는 가벼운 깃털이지만, 이웃을 모함에 죽이려는 악인들의 무기는 천근 만근 같은 철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 지키는 멍에만 짊어지고 전선에 임하지만, 세상 군인들은 상관이 떠맡긴 군장(軍裝)만 해도 4~50kg 안팎이고 또 싸움에 필요한 무기들과 탄환들을 또다시 밀고 당기며 험난한 고지를 오르내려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 적들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인 돈과 권력과 지위와 무력 같은 것들을 갖추느라 일평생 수고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부강한 자들은 적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여 왕 같은 행세를 하며 쾌락을 즐기지만, 이런 능력들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한시적으로 제압당하여 본의 아니게 남의 종이 되어 굴종하게 되면 서러워 하거나 억울하게 여겨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이판사판의 심사로 돌변해 미쳐 날뛰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은 적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기득권자가 되느냐, 그런 기득권자의 지위에 못미쳐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연속입니다.
어느 때에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기득권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돈과 권력과 지위와 총검의 위력에 짓눌려 적들의 비위를 맞추는 종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가 되든 기득권자의 종이 되든 저들에게는 눈깜짝할 사이라도 참된 평안은 없고, 오직 기득권자의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밤낮으로 전쟁 준비를 위해 수고하여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악인들은 무고하게 남들을 침공하여야 하기 때문에 중무장을 하고 높은 고지를 올라가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악인이 무고한 자를 이기려는 생각과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철옹성 같은 높은 산성을 침공하는 일이기 때문에 참담한 수고이고 무거운 짐입니다.
돈과 권력과 지위와 총검의 힘으로 남들을 지배장악할 수 있는 기득권자가 되어야만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는 건, 곧 자신들 자체가 약육강식하는 투쟁의 방법으로만 평안히 생존할 수 있는 짐승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결코 그 같은 투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생존할 수 있는 맹수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들을 많이 낳고 양육해 서로 싸워 이기도록 하겠습니까? 즉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서로 싸우는 일을 즐겨 관전하는 맹수는 오직 하나님을 반역한 사단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모님의 유산 문제로 형제자매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웁니다. 이런 짓은 자식들이 하나님(부모님)으로부터 인성 교육은 받지 않고, 다만 자신들을 왕으로 꼬드기는 이간자, 곧 육신의 생각을 장악한 사단의 사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아 그만이 사용하는 약육강식의 수법으로 기득권자가 되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본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도록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할 때가 바로 사람의 본분을 회복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자기 육신의 주관적인 뜻을 대적해 죽였기 때문에 이게 바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입니다.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자기 육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마음을 죽여야만 비로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없이 하나님께 무얼 맡긴 것이라도 있는 것인 냥 지분을 요구하는 자기 육신의 생각과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까닭 없이 미워하는 악행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육신이 하나님께 무얼 맡겨 둔 것이 없고 오로지 받은 것 뿐이라고 생각는 빚진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무얼 아는 체 하거나 또 무얼 투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 지분을 요청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사람 취급해 만나 뵐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신앙인들 대부분이 신학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로새서 2:18~19) 하셨습니다.
신학 위주의 믿음으로 행한 모든 공적과 또 신학을 통해 역사하는 영들의 능력으로 무슨 역사를 이룬 것과 또 보고 듣는 이적기사와 방언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증거인 줄 착각하고 머리로부터 온 믿음과 지식들을 무자비하게 멸시천대합니다. 자신들이 배워 알고 있는 신학 이외의 믿음과 지식들은 한낱 개별적이고 토속적인 믿음과 지식으로 하대하는 걸 보면 참으로 그 교만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저 또한 이런 믿음과 지식들에 둘러 쌓여 심한 고통을 겪으며 수십년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저들의 믿음이 정통이길 바라고 저의 믿음과 지식은 한낱 개별적이고 토속적인 믿음이길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다수이고 저는 한 사람 뿐이기 때문에 나 한 사람만 그릇되고 저들이 건전한 것이 민족과 사회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 예상은 빗나가고 제가 염려하였던 일들만 연속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학 출신의 신앙인들이 북한의 살인마들을 지지하는 대통령들을 우러러보나 저는 그들을 이 나라에서 근절되어야 할 질병들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럴 때 저들은 또 자신들의 처자들에게까지 저를 이단자로 취급해 가까히 대하지 못하도록 단속합니다. 그래도 제가 참은 것은 저들의 수효는 많고 저는 단 한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믿음이 파선되어 부부지간끼리도 원수가 되고 부자지간도 소원하게 되어 불신앙인들보다 더 사회적인 문제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기독교인들간의 사사로운 신앙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신앙문제가 바로 교회적인 문제이며 교회적인 문제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의 근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펼쳐보였습니다.
40여 년 전부터 저들의 이런 종점을 예견하고 충언하였으나 저들은 사울 같은 분노로 저를 응징하려 하였고, 지금까지도 조언해 드려도 입에 거품을 머금고 육적인 유명세로 제 말을 짓밟으려 합니다. 신앙인들간에도 이러한데 하물며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유명인들이 어찌 제 말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믿음의 후손된 자기 나라에 이 같은 출중한 믿음이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시기 질투해 제재하려 하며, 이 땅에서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믿음이 태어난 것을 감사치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만 염려해 이단시하려 합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한국적 민주주의를 가르쳐 주었어도 그 한국적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독재정권에다 악용합니다. 이 모든 신앙적 파행은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시급히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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