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_백호를 잊지마라_
“…….”
“…….”
내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자 이호의 꼬리가 점점 쳐지고, 귀도 축 늘어졌다. 혹여나 내가 그런 자신의 반응을 보면 부담을 느낄까 애써 숨기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탁해져가는 눈을 보아, 내가 거절할꺼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골목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에 대한 정보를 주루룩 읊어대 길래 나에 대해 잘 아는 줄 알았더니. 저 이호라는 놈이 진정으로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내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거절 할 리가 없잖아?
“선택권은 너에게 있어. 강요하지 않아.”
참다 못한 이호가 푹 잠긴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말이랑 행동이랑 다르다, 너?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런 말 하면 누가 믿냐? 바보 같은 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이 이호라는 놈이 내 가족처럼 느껴졌다.
“잘 생각해봐. 너의 미래가 180도 바뀌는 거니까.”
성질도 급하지. 그의 목소리가 이젠 조금씩 떨려온다. 말을 하기 싫어서 안하는 거 아냐. 그저, 차오르는 희망과 행복에 말이 나오지 않는 거지. 사나울 정도로 몰아치던 감정이 조금 진정되고 나자, 그제 서야 목소리가 나왔다.
“좋아. 어차피 나는 잃을게 없으니까. 설마 더 끔찍한 삶이 있으려고.”
내 말에 이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꼬리와 귀가 번쩍 치켜 올라가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분명 그는 무서운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꼬리가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럼 가자.”
“어디?”
“아버지 만나러 가야지.”
스윽. 그의 긴 꼬리가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았고, 순간 어둠이 덮쳐왔다. 하지만 그 어둠은 내가 놀라기도 전에 왔던 것 만큼이나 빨리 물러갔다. 아, 왜 이렇게 눈이 부시지. 어둠 뒤의 빛.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다. 잠을 방해하는 아침 햇살이 달갑지 않듯이. 내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두리번거리자 곳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말이야, 여기 사는 사람들은 원래 다들 목소리가 아름다운거야? 아니면 내 목소리가 투박한 건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이호의 꼬리가 사뿐히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환희에 가득 찬 그의 말이 방 안을 울렸다.
“저의 반쪽이자 새로운 자매, 이래연입니다.”
도대체 전등이 몇 개나 있는 거지? 다섯 개? 열 개? 스무 개? 아무리 빛을 사랑하는 천사, 아니 백호사들이라고 해도…
드디어 빛에 적응한 내 눈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내 생각은 거기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데리고 온거냐?”
“네, 형. 어제 왔어요.”
“뭐야, 그럼 만 하루를 더 기다리게 했다는 소리야? 쪼잔한 새끼.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뻔히 알면서.”
“에이, 미안해. 래연이가 공간이동 후유증으로 누워있었거든.”
“그래도 부르지!”
“의식도 없는데 누가 누나 보러 오면 좋겠어요?”
“그래 미안하다 짜샤. 그래도 무사히 왔으니 다행이지, 뭐.”
이호처럼 순백색의 머리와 은색 눈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내 생각을 끊게 한 건 그들의 아름다움과 다정함이지만. 그들은 이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에게 웃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방 안에는 조명 장치가 전혀 없었다. 내가 느꼈던 눈부신 빛은 전부 이 사람들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후광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건 뭐 전구맨들도 아니고. 그래도 전기 값은 절약 되겠네. 그냥 친구 한 명 불러서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아주 환하겠네. 그들의 아름다움과 후광에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돌아왔구나.”
“예, 아버지.”
웅성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양 쪽으로 갈라져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조폭들 처럼.
“그 아이의 의견도 물어본 것이냐.”
“예.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허락이라. 내 뜻은 잘 알고 있질 않느냐, 이호야.”
이호보다, 우리를 둘러싼 저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아버지’라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은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려고 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아버지’가 백호님이라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알았냐고? 당연하잖아. 저렇게 빛나는 존재가 신 말고 또 있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백호님의 나지막한 말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이야, 진정으로 이호와, 나의 다른 아이들과, 그리고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싶은 것이냐.”
“네.”
“행복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아프고 슬프고 힘든 일도 있을게야. 그래도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네.”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이호의 수염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너도 기쁜거지? 그래서 그렇게 그르렁대고 있는 거지? 희미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내 손을 이호의 머리 위에 얹었다.
“네가 그 길을 선택했다면 나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구나. 래연이가 나의 전당에 머무르며 나를 돕는 것을 허락하겠다.”
백호님의 말이 끝나자 이호가 이빨로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뜻에 따라 순순히 자세를 낮춰 주자 그는 한 발짝 다가와 내 이마에 코를 살짝 가져다댔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모르리라. 내 힘을 묶어 놓고 있던 줄이 툭, 하고 끊어질 때의 기분을. 결박되어있던 내 영혼이 자유롭게 풀려날 때의 기분을.
다시 눈을 떴을 땐 더 이상 그들의 빛이 내 눈을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백호님의 그 존엄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있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향긋한 향들이 내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규칙적인 심장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환영한다, 나의 딸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누가 땅, 하고 신호를 보낸 것 마냥 빛의 속도로 달려온 나의 새로운 형제, 자매들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반가워 동생. 나는 지은이야.”
“언니, 저는 유인이라고 해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백래연, 같은 가족이 되서 진짜 기쁘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형은 저리 좀 비켜봐요. 누나, 저는 은준인데요, 저 형 원래 말투가 요상해요.”
“뭐? 말 다했나 백은준?”
앞 다투어 내 손을 덥썩 쥐고 힘차게 흔드는 이들을, 나는 앞으로 많이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이래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백래연으로 다시 태어나서 처음 느낀 감정은 행복이었다. 나에게 가족이라는 것이 다시 생겼구나. 나는 내 새로운 가족의 열광적인 환영이 좋았지만, 두 번 다시 환영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아졌다.
그 날 나는 10시간이 넘도록 활기찬 내 형제, 자매들의 자기소개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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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생각보다 많이 달려서 행복에 젖어있는 유니쿠입니다~!
솔직히, 소설은 5편 넘겨봐야 알 수 있는거라서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스토리 스타트! 입니다. 제가 워낙 질질 끄는 스타일이라 이제야 첫부분이 좀 정리가 됬네요~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초보 새내기 작가한테는 여러분이 주시는 댓글 하나하나가 가장 기쁘고 큰 선물입니다♡
첫댓글 오오 백호를 잊지마라! 어떻게 잊었겠습니까. 드디어 래연이가 백호의 딸이되는겁니다!!?
예에엡!! 드디어 되는겁니다- 푸하하 앞으로 래연이와 이호의 활약상을 기대해주세요 아하하하
호오?! 이호의 반려이면서 딸이라는거죵???????????????후후후후후후후후 사.랑.해.요.로.맨.스♡
악. 시르엘린님 정말 죄송합니다만................반쪽이라는 말은 그렇게 해석하시면 아니되옵니다...........ㅠㅠ 다음편에 반쪽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이 나와요......... 그래도 로맨스는 있으니 걱정하지마시길(찡긋)
우후후후후후흐흐흐흐흐흐(실성한듯.)드뎌 백호딸되는거임?흐흐흐(아!) 기대할게요~~~
에헤헤헤헤헤헤 드디어 래연이가 자리를 잡았답니다! 기대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물방울 키스님. 다음편 최대한 빨리 들고 올게요~
호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군요. 유니쿠님 열심히 다음편 쓰시길 바라며..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이제야 본론입니다.에휴, 질질끄는거 진짜 고쳐야할텐데.. 아, 다음편 미친듯이 써서 얼른 4편 갖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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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3편 돌파! 다음 목표는 5편이랄까요.. 차차차, 저도 래연이가 부럽답니다! 하지만 저는 전지전능한 작가이기에...후후후...(음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 저도 래연이와 함께 하고 싶어요오 저도 막막 요로코롬.....................쿨럭. 아아 너무 부러운걸요ㅜㅜ
어쩌면 다음에 번외편 할때 가상으로라도 잠시 출연.....악, 이런 소리 할 때가 아닌데! 쨋건 레나님 또 찾아와주신거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