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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13,44-52
복 음 : 요한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병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병실을 돌며 병실 청소를 합니다.
그가 맡은 병실 중에는 싸움에 휘말려서 몇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지요.
그날도 이 병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년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하게 청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른 병실 청소로 옮기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에서 이 청년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자기 아들 병실을 왜 청소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소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금 전에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청년 병실에 들어가 청소했습니다.
다시 청소한다는 것에 어떤 불평이나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동안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픔에 쉽게 감정이 동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상황 자체보다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불가능할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보인 세 번째 반응으로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하는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 내가 ~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 (요한 14,9-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 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랫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엄쳐 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
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분과 하나 되어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요한 1장1절이하를 보면,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1,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신 모습들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라2,20-21).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주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챙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공허한 만족보다는
예수님을 차지해서 누리는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라도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건설과 관련된 것인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여 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보다 늦게 응답하시거나 오히려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8명이 함께 한 성지순례였습니다.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본당 교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순례 중에 함께한 분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교우들을 아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기억력이 있어서인지, 하루 지나니 모두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도 제가 세례명을 기억하고, 불러드리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순례 중에 들려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말 대신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날씨가 흐릴 수도 있고, 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비행기의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고, 샤워기가 고장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순례의 여정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원망이 되고,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순례의 여정이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좋은 향기가 주변에 퍼지면 기분이 좋기 마련입니다.
좋은 기운이 주변에 퍼지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마련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안내하는 분이 두 가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하나는 지나친 걱정 때문에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산에 오를 때도 바위가 뾰족하니 절대로 맨발로 오르지 말라고 합니다.
늘 조심하라고 합니다. 예전에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다친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길 잃어버린 사람을 찾느라고 3시간씩 기다렸다고 합니다.
소매치기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가방을 뒤로 매면 남의 것이고, 옆으로 매년 반만 나의 것이고, 앞으로 매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조심하라고 하는 이야기지만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
성지순례가 은총과 축복의 시간이 아니라, 긴장과 걱정의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즐거웠던, 은혜로웠던 시간을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이웃들의 도움으로 아무 걱정 없이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방을 다시 찾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억지로 따라온 남편이 성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즐거웠던 시간, 감사했던 시간, 치유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
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아들은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
그래서 당신을 본 사람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절)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는 인간이 되신 아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뵌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의 눈이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 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계속 아버지를 보여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상이시다. 아들은 진리와 하느님의 권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절)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라고 하신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더 큰 일도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3절)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도 하느님께 참된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발언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 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우리의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평생 죽을 고생을 다 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 가운데,
고통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또 무엇인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이라는 것,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라는 것,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愚問은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빵을 받아먹은 유다가 고별식장을 떠나 스승을 넘겨주기 위한 작업을 실행에 옮기고,
수제자 베드로까지 스승을 배반할 것이 예고 됨으로써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공포와 불안에 싸여 있는 가운데,
어제 복음에서 토마는 예수께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라는 대답으로써
토마 사도의 無知를 拂拭시키셨다. 무지의 불식은 동시에 불안과 걱정을 제거한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고별의 저녁 시간이 깊어 간다.
이 틈을 놓칠세라 지칠 줄 모르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된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7절)
예수께서는 문법상 미래형(알게 될 것이다.)과 현재완료형(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완료형(이미 뵈었다)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敎授하신다.
예수님은 작별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피부로 느끼시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는 전제 아래 速成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속성법의 의도가 빗나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필립보 사도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엉뚱한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람이다.
즉, 토마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 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7절)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 번 더 확실하게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 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차원을 벗어나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나 필립보 사도의 愚問 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난감 해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필립보 사도의 소망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법도 하다.(8절)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視聽되었으며 감지되었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視覺的 차원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인간은 오직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다시금 예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으며(12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며(13절),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14절)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기 여호수아 수녀
연말 시상식을 보면 많은 연예인들이 소감을 말하기 전에
"우선,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받칩니다."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없는 건 아닐텐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하는
이런 멘트는 듣기 어렵더라구요..
어쨌든 하느님, 하나님이 중요한 건 아니고
"GOD"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이었습니다.
말씀으로 행적으로.. 그렇게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모든 일들 안에서 얼마나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나요?
저도 수도 생활 안에서 간간이 칭찬도 받고 잘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겸연쩍어하기만 했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라는
말이나 생각을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연말 시상식을 보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저런 멘트를 잘하는데
왜 천주교 신자들은 안 하지 하고 아쉬워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도 그러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생각하고 그렇게 사셨듯이
우리의 모든 일상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기쁨의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 57,9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