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에게 예수님의 평안을 느끼게 하는 아리랑의 음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어떤 사건과 상황 앞에서는 동일한 공감대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즉 남북한 거민들이 평소에는 철천지 원수 같이 미워하고 적대하여도 '아리랑'이란 노래 가락이 들려 올 때에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다 함께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아리랑'이란 음률은 세상 어느 민족이나 국민들이 들어도 심히 친금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만민이 동일한 공감대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민족의 '아리랑' 같은 음률이나 미국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같은 음률은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이 같은 심정의 평안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세기적인 음률들이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게서 탄생되었다 하여 그 나라 그 민족이 자신들의 것이라 결코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민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언행들은 모두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발생된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느 개인이나 민족들에게 들려주고 일러 준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듣고 익혀 배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이라 하여 자랑하지 말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 주어 저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고 느끼게 하여야 합니다.
'아리랑'이란 말뜻은 '하나님이랑'이라는 말뜻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에만 참된 평안을 느끼고 누릴 수 있을 뿐, 그 이외의 천지만물의 그 어떤 것들과 함께 하여도 사람으로서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참된 평안은 가질 수 없고, 도리어 불안공포나 빼앗길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갖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만 비로소 온 천하 모든 것들의 시기 질투와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또한 자녀된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는 마치 천생연분의 동반자나 둘도 없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만난 것같이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부강하고 지혜로운 자들도 그를 괴롭히거나 짓밟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을 어느 누가 해하고자 할 때에는 곧바로 그를 자신을 괴롭히고 짓밟는 악행으로 간주하여 그에 상응한 형벌을 여지 없이 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어떤 부강하고 지혜롭고 유명한 피조물들이 꾀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8:33~36) 하심 같이, 사람이 마귀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환난과 고통과 질병의 근원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 노랫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겼습니다.
"하나님이랑 하나님이랑 함께 해요,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평안해요.
하나님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예수님이란 예수님이랑 함께 해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이 진리와 생명.
예수님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고 그 형용이 어떠하냐 하며 그의 실존적 존재가 물질로 조성된 육신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은 흙으로 조성된 인간 육신의 육감(肉感)으로는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주만물과 천하만민의 생성소멸과 생사화복을 관장하시며 저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상벌(償罰)을 시행하시는 유일무이한 법, 곧 영원불변의 거룩한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근본 실체는 그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근본 실체 또한 그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경우는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이며, 또 무슨 말과 일을 행할 때에도 그의 말씀을 기준 삼고 말하고 행동해야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이를려면, 자기 영혼의 뜻을 항상 무시하고 거역하고 반발하는 자기 육신의 생각부터 먼저 예수님처럼 정복해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영혼의 생각을 육신의 생각이 항상 거역하고 반목하여 지옥 불꽃에 떨어질 괴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내면의 심령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혼의 생각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부지간도 싸우며, 부자지간과 형제지간과 일가친척들과 민족지간끼리도 싸웁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9) 하셨고 또,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19)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내면의 영육간의 싸움 결과에 따라 자신의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영혼으로 하여금 흙으로 조성된 육신의 육감(肉感)을 항상 정복해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항상 영혼의 생각을 대적합니다. 이런 적대적인 삶에서 벗어나려고 어떤 이는 영과 육이 분리되는 자살의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자기 육신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하극상이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죗값을 치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셨을 때에는 영혼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반목하여 싸울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려 하나, 예수님의 육신은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길레 남들의 죗값을 짊어지고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느냐? 당신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분명 십자가의 고통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들을 구원할 방법이 있을 터이니 간구해 보라!"고 심히 예수님의 영에게 앙탈을 부렸습니다.
이런 육신의 앙탈 때문에 예수님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38) 하시고서는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기도하길,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아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때에 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건 참혹한 육신의 고통이 되지만, 육신의 생각을 따라 원수를 갚고 살게 되면 인류 최고의 영웅으로 영원히 존대받는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반역이기 때문에 사단과 함께 참담한 지옥 불꽃에 던져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그 무엇이든 믿음으로 다 지키고 따르는 아들의 길을 택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원무궁히 영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는 아들된 평안을 취하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셨습니다. 인간 육신 위주의 평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듣고 알면서도 본뜻을 불신해 거역하거나 수정하려는 범법자들의 불안한 평안이기 때문에 이 평안은 참담한 지옥형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혼 위주의 생각으로 육신 위주의 평안을 정복해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아들된 지위는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영원불변의 보배입니다. 육신 위주로 살게 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밀착하는 참된 평안의 삶을 살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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