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는 미국에서 뉴욕(850만 명)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390만 명)다. 면적은 1290.6㎢로 서울(605.25㎢. 인구 990만 명)의 두 배가 넘는 할락한 도시다. 200만 명 내외의 재미교포 중 절반 이상이 LA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코리아타운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재미교포 가운데는 불법 거주자가 많은데다 캘리포니아 洲정부의 별도 통계가 없어 정확한 교민 수는 밝혀져 있지 않다. 왜정시대 때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국민들이 많이 건너갔기 때문에 일찍이 권성희의 <나성에 가면>이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가사도, 곡도, 젊은 시절 가수 권성희의 외모도 아련하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즐거운 날도 외로운 날도 생각해주세요.
나와 둘이서 지낸 날들을 잊지 말아줘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안녕, 안녕 내 사랑
LA에 백인이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독립(1776년)한 이후였다. 1781년 9월 4일, 스페인領 멕시코 총독 펠리페 데 네베가 캘리포니아 지역을 조사할 목적으로 44명의 스페인 탐험가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이 텐트를 치고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 LA였던 것이다. LA의 인구는 점차 불어나 1800년에는 315명에 이르렀다. 1821년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멕시코의 한 洲로 편입시켰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는 그 대가로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양도했으며, 미국은 1850년 9월 캘리포니아를 연방의 일개 洲로 편입했다. 편입 직후의 LA 인구는 1610명이었다. 이때부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1900년 LA시의 ‘인구주택조사’에 의하면 10만 2479명에 이르렀다. 우리말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로 번안된 노래 <클레멘타인. 원제 Oh My Darling, Clementine>의 원곡 가사는 ‘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 Dwelt a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ne’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Forty-niner’는 1849년 이른바 ‘Gold rush’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Gold rush’ 또한 LA 인구 증가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각중에 영화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뉴욕에 집중되어 있던 영화사들이 좀 더 촬영환경이 좋은 서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구 500명에 불과한 농촌마을 할리우드에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옮겨오면서 할리우드는 미국 영화 및 TV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할리우드는 1910년 LA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및 TV 프로그램 제작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및 TV 프로그램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80%를 웃돌고 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이른 바 ‘Big Six’는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스튜디오, 컬럼비아,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월트 디즈니 등이다. 중학교 영어시간에 전복호 선생님이 ‘2001년이 되면 20세기 폭스社 이름이 21세기 폭스社로 바뀔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는데, 상굿도 바뀌지 않았다. 잘 계시는지…
1941년 11월 23일 왜놈들이 미국 하와이洲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은 LA 항구에 항공기 생산기지를 건설하여 대대적으로 전투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LA의 인구 증가에 탄력이 붙어 1950년에는 197만 357명에 이르렀다. 이후 LA-샌프란시스코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개설되면서 인구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여 단독주택이 다세대주택으로, 다세대주택이 저층아파트로, 저층아파트가 고층아파트로 변신했다. 2016년 현재 LA의 인구는 403만 904명이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세계의 여러 도시 가운데 LA에 가장 많은 노선을 운용하고 있다.
蛇足 ;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6일 동안 발생한 흑인폭동은 LA의 黑역사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과속운전을 한 흑인 로드니 글렌 킹을 집단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데 대한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 재미교포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백인들의 교묘한 이간책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폭동이 일어나자 백인들이 운용하는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1991년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수퍼마켓 주인인 재미교포가 물건을 훔친 흑인 소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가뜩이나 재미교포들에게 상권을 잠식당하여 울분을 품고 있던 흑인들은 언론 보도에 자극을 받아 코리아타운을 집중 공격했고, 출동한 경찰과 캘리포니아洲 방위군은 백인 거주지만 보호하며 코리아타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흑인들의 폭동을 방치했다. 결국 교포들은 自警團을 조직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폭동을 진압했다. 이 폭동으로 2300여 개의 재미교포 소유 사업장과 점빵들이 불타거나 파괴되었으며, 총 피해액은 4억 달러를 넘어섰다.
첫댓글 궁금해었는데 여행이라도 갔는가 하고 어제 밤늦게 전화하니 안 받기에 더 궁금했다네
친구의 글을 안보니 뭐가 빠진 느낌이네
더위에 조심하고 건강 챙기게
10년 전으로 거슬러, 미국 서부여행을 했을 때 그때
미식 추쿠팀 포티 나이너스에 대한 유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또 듣네.
그때의 추억이 또 생생하게 떠오르네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