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4월 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14,19-28
제2독서 : 요한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어떠하십니까? 이 마법의 주문이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고 또 누군가와 맞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의 힘든 마음을 생각하면 이 마법의 주문은 꼭 알고 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마법의 주문을 이렇게 외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3번만 외치면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옳다고 강하게 믿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마음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되뇐다면,
우리는 분명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겸손으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바로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그 겸손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겸손이 곧 평화였던 것입니다.
원한을 잠재우고 용서함으로써 치유를 얻는 길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마법의 주문을 누군가와의 갈등에서 또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점령하려 할 때
반드시 외워보면 어떨까요? 겸손의 주님께서 평화를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해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다릅니다.
주님의 평화는 겸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
욕심을 멈추고 지금 가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 등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각자의 겸손에서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평화도 오게 됩니다.
평화를 갈망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시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를 언급하며
“전쟁 보복의 논리에 굴복하지 말고” 대화와 외교적 해법을 우선하여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셨습니다.
“협상을 통한 평화가 끝없는 전쟁보다 낫습니다.”
“장벽과 적대감이 가득한 세상, 대화와 형제애로 타파합시다.”
“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 때 이뤄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1,20).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평화를 수확하게 되는 것은 자비로움을 뿌리내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내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폭력을 낳지만, 단순한 ‘고마워요’가 평화를 되찾게 합니다.”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의 두 단어가 있습니다.
‘팍스’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주도 아래
주변 국가들이 수동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로,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
곧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막강한 구력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 실현을 목표로 국제질서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불러오면서 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또 하나는 ‘샬롬’이 있는데,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하는 ‘샬롬’을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많이 먹었던 찐빵에는 ‘팥과 야채’가 들어 있습니다.
팥과 야채가 없는 찐빵은 아무래도 맛이 덜할 것입니다.
추석에 먹는 송편에도 송편 안에 ‘밤, 콩, 깨, 팥’과 같은 것을 넣습니다.
송편에 이런 속이 없으면 송편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맛집이 있지만, 현지인들이 찾아가는 맛집과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도, 현지에 사는 신부님들은 제주도 도민들이 가는 맛집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도 매일 바뀌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론’입니다.
강론이 없는 미사는 어쩌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제는 그날 전례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우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시대의 징표를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해 줍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길을 설명해 줍니다.
사제는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시대의 징표를 찾고, 교우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속 빈 강정’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무 실속도 없이 겉만 그럴듯한 것을 비유하여, 우리는 속 빈 강정이라 합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보면 속 빈 강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대는 강정이란 음식을 보았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누에만 하게 잘라서 기름에 튀기면 그 모습이 누에고치처럼 된다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먹어도 배를 부르게 하기는 어렵지.
또한 잘 부서져서 입으로 불면 눈처럼 휘날린다네.”
저는 파티마에 5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4번에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가 멀기도 했고,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고, 바쁘기도 했습니다.
이번 5번째 순례에서는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를 하였고, 사제와 교우들은 성모상을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기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동은 같았습니다.
마치 사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성령의 감도로 각 나라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했던 것 같았습니다.
성모상을 따라서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파티마 순례를 가면 묵주기도와 행렬에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각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끝내는 부분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안수받고 선교를 떠난 그들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마지막까지 부지런히 여러 곳을 방문하고, 마지막까지 큰 환난을 겪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순회 공동체라는 것을 처음에 시도하게 된 것과
지금도 그 순회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물론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분들의 선교 열성이 저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것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그래서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생면부지 목포 북교동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교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는 곳에 보내달라고 하고,
무작정 자은도라는 섬에 갔으며, 비록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낮에는 같이 일하고 밤에는 신앙을 나누는 삶을 아주 보람되게 하였고
그런 시도가 10여 년 계속되어
마침내 저희 수도회의 순회 공동체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순회 선교는 장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내용 면에서도 그랬습니다.
곧 한 가지 선교 활동을 줄곧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던 것을 두고 떠나는 것에 별 미련이 없었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실패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겪게 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초주검이 될 정도로 돌팔매질 당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다시 일어나 다음 고장으로 간 것도
이런 마음 자세 때문이고 환난 각오 때문이라고 이해해야겠지요.
환난 각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을 전해주고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권고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아주 힘이 있고,
듣는 제자들도 그런 환난 각오를 했을 텐데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로만 하지 않고
엄청난 환난을 몸소 먼저 겪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의 저를 반성하게 되는 것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겪게 되는 환난,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환난은
각오도 되어 있고 아직 힘이 있어 비교적 잘 견뎌낸 편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나이 먹으면서 힘도 없어지고 병약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제 인생
말년의 환난은 두렵고 각오가 덜 되어 있고 그래서 피하고 싶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점점 힘이 없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폐를 끼치는 그 어려움,
그 환난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리고 저를 위해 겪어야 할 환난임을 각오하는 오늘 저입니다.
평화라는 안전망 없이 다리를 건설하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홀로 방치되어 기계어로 말하는 6세 아들’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금쪽이는 울면서도 컴퓨터 게임기에서 말하는 기계어로 엄마는 물론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계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게임기를 거의 엄마처럼 여기고 게임기와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엄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까지 혼자 술을 마십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게임을 합니다. 오전 내내 그럽니다.
아이는 불안합니다. 불안을 해소해 주는 이는 엄마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평화를 주지 못하고 게임기만이 불안을 잠재워 주니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게임기를 엄마처럼 여기게 된 것이고
게임기의 목소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기가 게임기라고 여기는 이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외톨이가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고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맺어주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기 절제,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능력들입니다.
엄마는 먼저 이처럼 성령을 받아서 내 안에 평화의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문제는 사랑도 기쁨도 평화도 자기 안에서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떨어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먼저 평화를 얻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평화를 해치는 것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아입니다. 자기를 믿으면 불안해집니다.
엄마를 믿지 않고 자기만 믿는 아이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엄마와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순종입니다.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문도 안 열고 그냥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하들은 그것보다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아마 했을 것이라며 자존심을 좀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몸을 씻었더니 나병이 나았습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평화가 옵니다. 나를 믿으며 동시에 엄마를 믿을 수 없습니다.
엄마를 믿으면 나를 맡겨야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로부터 평화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에게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까지 가면서 소경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씻고도 눈이 생기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순종은 자존심을 없애고 겸손해진 이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지원을 한없이 받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먼저 평화를 갖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성령의 평화를 가지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평화를 얻는 법을 모르면 아기를 낳으면 안 됩니다. 엄마의 자격입니다.
금문교를 지을 때 안전망이 없을 때 많은 인부가 떨어져 죽어서
그물망을 하고서는 진척이 잘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평화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불안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매일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조욱현 토마 신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절)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우리의 평화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28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신다.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세상의 우두머리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 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 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 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 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 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 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 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平和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戰爭이나 紛爭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작⋅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前者에 해당 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後者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 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 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再臨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不信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優勢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 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오늘 복음으로 요한복음서 14장의 가르침이 마무리됩니다.
공포와 불안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평화를 주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구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내가 주는 평화”는 상대가 다시 싸움을 걸어와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절대적 평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샬롬’은 ‘전체적이고 충만하여 결핍이 없는 상태’를,
부족하거나 손상된 부분이 없어서 서로 싸우거나 다툴 필요가 없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평화는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어도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어떠한 악이 방해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성찬 전례 가운데 사제는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데
우리가 나누어야 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견고한 평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룩하여 나가셨습니다.
신앙은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주님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면 이내 위태로워질 ‘마음의 평화’를 찾기보다,
그 어떠한 악도 방해하거나 붕괴시키지 못하는 ‘주님의 평화’를 서로 빌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체 예식 가운데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엄격한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