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덕에 위화도 회군이 다시 이야기되는 듯한 상황이군요. 사실 위화도 회군은 말이 많기는 합니다. 일단 회군이 우발적이었느냐 계획적이었느냐부터 해서 사불가론에... 여기서는 그런건 다 집어치우고 그냥 요동 정벌이 가능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제 의견은 불가능입니다. 이유는 명나라와 조선의 입장으로 나눠서 밑에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고려의 사정부터 보겠습니다.
ㄱ. 고려의 사정 (어째 모 순정만화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그냥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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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A : 원정군의 규모
일단 당시 위화도 원정군의 규모는 총 5만명이고 그 중 전투원은 대략 3만입니다. 그리고 출정 시기는 음력으로 5월입니다. 음력으로 5월이면 양력 기준으로는 6~7월이며 이는 곧 초여름, 찌는 듯한 더위와 함께 장마가 찾아올 시기입니다. 사실상 원정군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은 편입니다. 분명 적은 수는 아니지만 상대는 통일 중국인데 그들을 상대로 3만의 전투원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학계의 연구는 이게 거의 고려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인구 증가 등을 고려해야겠지만 200년후 조선이 전국에 17만의 군대를 확보했던 상태라는 걸 고려하면 당시 고려가 얼마나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뭐 애시당초 조선이어도 힘들 문제기도 합니다. 당장 조선 건국 후 요동에서 주원장에게 보낸 보고 중에 "조선이 30만 대군을 동원하면 요동은 못 지킵니다!"라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 30만 대군이면 요동을 도모할 수 있죠. 아니. 20만이어도 장수에 따라서는 해볼만한 도박입니다. 하지만 조선 자체도 30만 대군을 확보한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여말 선초 당시 그 개막장의 고려로는...
ㄱ-B : 계절
더군다나 또 다른 문제는 장마입니다. 4불가론에서도 언급된 사항이지만 당시는 여름에 장마철입니다. 여름이라는 건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농번기이므로 한창 장정들이 농사 생각만 할 때이면서 동시에 식량이 부족할 때이며, 또 하나는 더위가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까지 주구장창 오는 장마철입니다. 한민족의 특기는 각궁으로 상징되는 활, 특히 복합궁이나 합성궁 같은 것인데 이 활을 만들때 중요하게 사용되는 아교는 습기가 많고 온도가 높은 여름철에 아주 잘~ 녹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합성궁이나 복합궁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 자체가 기온과 습기때문이라는 걸 고려해보면 그보다는 상황이 좋은 한반도라 해도 그 여름 날씨에 믿을 수 있는 무기인 활이 아작이 난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당시 피폐한 고려의 상황이나 여름이라는 특성상 군량도 충분히 확보했을 지 의문입니다. 실제로 1차 요동 정벌도 군량 부족(사실 이건 요동성 군량 창고를 홀라당 태워먹는 사건 탓도 컸지만)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이성계 자신도 우왕의 요동 정벌을 어쩔 수 없이 찬동하게 될 때 계절을 가을로 미루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묵살당해버렸습니다.
ㄱ-C : 왜구
또 다른 문제는 왜구입니다. 1350년경부터 창궐했던 왜구는 1380년의 황산 대첩과 몇년 후의 관음포 전투, 그리고 일본 남북조의 내란이 점차 북조의 우위로 막을 내리는 상황 덕에 어느정도 기세가 꺾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왜구는 나름 활동적이었습니다. 실제로 4월 말 황해도 남부 연안에 왜구가 출몰했고, 원정군이 출발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는 80척이란 적지 않은 수의 왜구 함대가 진포에 나타나 근방을 노략질합니다.
물론 고려 조정도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후방 예비 부대를 어느정도 확보해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양광도의 40여개 고을이 털려버렸고 양광도쪽에서는 "병력이 취약해 답이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만 올릴 뿐이었습니다...
ㄴ : 명나라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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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A : 1차때와는 상대가 다르다.
사실 1차 원정은 꽤 괜찮았었습니다. 왜냐면 그 때의 상대는 다 망해가던 원나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원나라 잔당들 중 기철의 아들을 중심으로 한 진짜 잔당들 중에서도 일부라고도 볼 수 있는 세력이 상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군량 못 확보해서 허덕거리다 퇴각해야했습니다. 뭐 그 때야 요동지역을 일시적으로 점유하기나마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제 상대는 통일제국 명나라였습니다. 이미 명나라는 어느 정도 요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거니와 결정적으로 위화도 회군 전 해인 1387년 풍승을 사령관으로 한 군대를 요동으로 투입, 금산까지 진격시켰고 결국 요동을 통치하던 북원의 군벌 나하추를 항복시켰습니다. 금산은 위의 지도 붉은 동그라미 부분입니다. 이 곳까지 20만 대군을 출전시켰는데 요동 어느 지역이든 20만 대군 정도는 투입시킬 여력이 당시의 명나라에게는 이미 충분히 존재했습니다.
ㄴ-B : 동맹은 없다!
그래도 만약 희망을 가진다면 북원이 고려와 호응하는 일입니다. 실제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한 이유 중 하나는 고려 북부 변경지대에서 온 어떤 사람이 요동의 명군이 전부 북원과 싸우러 갔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명은 남옥을 지휘관으로 한 15만 대병을 몽골로 진격시켰습니다.
그리고 음력 4월 12일 포어아해라고 하는 지역에서 북원군과 격돌했습니다. 포어아해는 현재 몽골-만주 국경지대 쯔음으로 비정되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북원군은 말 그대로 괴멸당했고, 북원의 황제는 도주하다가 아리크부카의 후손 중 한명에게 살해당합니다. 남옥의 군대는 당당히 개선했고요.
이로써 북원은 사실상 망했습니다. 사실 뭐 나하추 항복 그 자체만으로도 북원은 망했습니다. 나하추 항복 이후 20만호가 명나라에 자진투항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포어아해 전투 이후로는 무려 60만호가 넘어갔습니다. 북원 잔당 자체는 약하게나마 남아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유의미한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ㄴ-C : 명나라의 동원능력.
사실 위의 경우를 봐도 만약 이 상황에서 고려군이 그냥 요동으로 갔다면? 당장이야 어느 정도 잘 나가겠지만 얼마 안 가서 북원군을 괴멸시키고 사기 충전한 남옥의 15만 대군과의 결전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당시 명의 동원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당장 나하추 항복시키겠다고 요동에 20만 대군을 들이밀고 1년후에는 바로 15만 대군을 들이밀었습니다. 더군다나 이후 벌어질 정난의 변에서는 명 조정 자체가 30~50만 대군을 연왕 주체를 때려잡겠다고 투입했습니다. 이런 나라한테 고려가 선빵을 날렸다.... 주원장 성격까지 고려하면 한 40만 대군이 서경으로 진격하는 것도 상상해볼만한 시나리오입니다. 이걸 고려가 막을 수 있을까요? 수나라 대군을 막아냈을 때의 고구려는 그래도 550년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름 내부 정비를 끝내 안정을 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났을 때지만 당시의 고려는... 이인임 숙청한지 반년도 안 됬고 왜구들의 깽판이 진정(제압도 아닙니다.)된 것도 몇 년 안 됬습니다. 민생은 개판이었고... 이런상황에서 40만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군요.
@우에스기 겐신 고려말에 보면 유민들도 많았지만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인구 부족에 기인한다기 보단 그 당시 세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안입니다.조선말에 삼정문란처럼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지 인구 자체가 부족해서 그랬던게 아닙니다.
@Draka 정확히 찌르셨습닼ㅋㅋㅋㅋㅋ
@[Total-Hot]아하스페르츠 자기 머릿속대로 역사를 고치는거죠
@우에스기 겐신 유망민이 많았고 노비가 많았다는 이야기는 기득권층의 수탈이 있었다는 뜻일겁니다.조선때 삼정문란처럼 그렇게 혼란한 사회에서 세금을 3번까지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하니 나라가 제대로 일 때는 농사를 지을만 하지만 고려말엔 농사를 짓기보단 남의 노비가 되는 것이 더 낳았다는 겁니다.지금 댓글로 달고 있는 부분 고려말 사회가 무너진 사회체계를 다시 세울 수 있었을 역량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전제이고 겐신님의 전제는 그런 역량이 없기때문에 안된다는거 같습니다.이인님,영흠방등 고려말 저런 사람들이 많았기에 세금이 누락되고 노비도 좋다.노비도 안되면 차라리 도망가자 이런거죠.
@우에스기 겐신 조선 태종때까지 평균적으료 고려때랑 산출량에 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는 산출량은 같은데 그것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것이냐를 따져야 할 문제같습니다.고려말은 기득권층이 많이 갖고 있는 것이고 조선때는 그나마 그것이 양민들에게 산출되는 양으로 환산되는 거니까.
산출량만 놓고 비교해보면 인구가 모자란다는 말은 안 맞는거 같습니다.
@백운청산 경기도에 집중되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전국적인 현상이었어요.
실제 임견미, 염흥방, 이인임 등은 전국의 좋은 토지를 가진 인물에게 수하를 보내 덮어놓고 그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인정한 토지문서가 있어도 물푸레나무로 두들겨팼다해서 '물푸레나무 공문'이라는 말도 돌았으니까요.
토지문제는 국가의 조세로 이어지고, 국가의 조세는 정병의 양성으로 이어집니다. 국내의 방어전도 아니고 해외의 원정이라면 필수적으로 짚어야할 부분인데,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거나, '너무 많이 나갔다',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다'고 혼자 결론내시는게 오히려 제 쪽에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백운청산 아무튼 그래서 일단 저질러 놓으면 주원장이 외교적으로 받아줄거라는 근거는 언제 제시해주실건가요?
@백운청산 고려가 무너진 사회를 다시 세울 역량이 있었을거라는게 백운님의 말씀인데, 실제로 고려도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고종때는 급전도감을 세워서 개혁을 시도했고, 충선왕때는 전민추쇄도감, 공민왕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합니다. 그런데 성과는 전혀 없었죠. 모조리 실패했어요. 완전히 다 엎고 과전법을 시행하면서 비로소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과전법 시행 전까지는? 악화 일로였어요. 애당초 고려의 국정을 쥐고 있던게 권문세족인데, 그들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혁파할 의지가 있었을까요? 공민왕이 암살되고 신돈이 축출되는 판이었는데, 대체 뭘 근거로 다시 세울 역량이 있었을거라고 단언하십니까?
@Draka 염흥방이 밀직부사를 지낸 조반의 땅을 뺏아으려다.그게 나중에 들통이 나서 이인임,영흥방,임견미를 제거하게 되는 것이지만 물론 사회현상이라는 것이 일부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닐겁니다.하지만 그것이 모든 백성에 일정부분은 영향을 주겟지만 전체 백성에게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좋은 땅 대토지의 소유자가 좋은 땅을 원하고 그 기득권층이 이색과 같은 사람이냐 또는 영흥방이냐 차이겠지만 기득권층이 모두 땅을 뺏는 것이였다면 고려말 사회가 붕괴하지 않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붕괴된 것을 보면 그렇데 단정할 수는 없느거 같습니다.원정의 조세는 충분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Draka 아무튼 그래서 일단 저질러 놓으면 주원장이 외교적으로 받아줄거라는 근거는 언제 제시해주실건가요? <--그러니까 의미있는 결과의 도출이 안되다는 거잖습니까?
@우에스기 겐신 겐신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하지만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 당시 요동으로 일단 출발하는 것이 내부모순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됬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고려사회전체를 묶는 일종에 상징성도 존재하고 저들은 저렇게 고생하는데 이 정도도 못 받아들이냐라고 얼마든지 개혁을 밀어붙이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이루어지지 않은 행위를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따질수는 없지만 이성계와 정동전이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있었다면 최영이나 정몽주처럼 반대편의 사람들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에스기 겐신 아사자가 나올정도면 위화도가기전에 이미 탈영병이 엄청 많았을 겁니다.탈영병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 쓰여진거겠죠.
@백운청산 근거를 대지 못하시면 외교적 모색을 찾는다는게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얘기 아닙니까.
'쳐들어갔어야한다'고 주장하셨다가, '쳐들어가면 질 확률이 높고, 그건 너무 도박이다'는 반박이 나오니
'몇 번 전투하고 외교적인 모색을 찾으면 된다'고 주장을 바꾸셨죠.
그래서 제가 '주원장이 외교적으로 받아줄 근거나 정황이 있는가'고 여쭙자 거기에 대한 답은 회피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이전부터 해오셨던 if놀이의 연장에 불과한겁니다. 의미있는 결과의 도출도 못하시면서 왜 쓸데없는 주장을 무리하게 전개하신건지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백운청산 백운님이 카페 회원분들과 충돌하는 이유가, '이성계와 정도전은 나쁜놈'이라는 개인 감정을 공감할만한 근거 없이 설파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다른 분들의 반론만 잔뜩 얻는 중이죠.
오히려 전 이성계였기에 고려의 개혁이 성공했다고 봅니다. 이성계는 거칠게 말하면 용병이었고, 기득권이 없어 개혁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니까요. 당장 내 밥그릇 줄이는 개혁을 하라고 하면 누가 찬성하겠습니까?
그리고 고려를 너무 고평가하시는데,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외침, 안으로는 권문세족과 부원배의 난장판, 주체적으로 개혁의지를 보였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은 암살.. 이 꼬라지에서 부활한 국가가 있긴 했습니까?
협상도 서로 손안에 유효한 카드가 있어야 하는거지(....)
요동성벽에 쉬야싸고 기념사진 찍고 돌아오는것도 아니고, 점령-통치를 전제로 한 이상
고려군이 10만을 투사하기도 힘든판에 명군은 사이즈가 낙낙하면 20만에서 무리하면 35만 까지 편성해서 요동에 어택땅 할 수 있는데
뭐하러 "이건 너먹고 저건 나 먹자."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습니까. 주원장이 무슨 자선사업가입니까(....)
북원처럼 지도에서 증발시켜버리지.
출근 전 들어와보니 ㄷ ㄷ ㄷ 백운청산님 댓글은 결국 본인의 관점에서 볼 때 러이러하니 이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임 이 범주를 넘어서진 않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딱히 객관적 근거도 아닐 뿐 더러 그걸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하네여.
염흥방 가노 사건으로 숙청계획이 1월(태조실록 정월) 회군이 5월(음력) 이 기간동안 한 창 농번기일 때 에다 자국내에서 행군 중에도 군량 보급이 원활치 않고 비로 장기간 길이 묶이는 등
말 그대로 원정을 강제 다이어트와 지친 군대로 해야하는 데 이건 자살행위일 뿐이죠
한니발의 부하들이야 그의 최정예들였지만(결국은...) 당시 다이어트 고려군은
징집병에 단기간에 싸워 혹시 승리하더라도 유지 점령은 둘째치고 당시 북원을 지도에서 지울 수준의 명의 국력과 물량공세는 감당키아 했을런지요
고구려는 미칠 듯 한 방어라인이라도 구축되기나 했지 당시 고려는 그럴 여력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ㅡㅡ;;;
이런 경우는 그냥 전쟁은 미친 짓일 뿐입니다
사람이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을 하고 배워야 하는데 그걸 모르니 자기 흉한지도 모르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도다.
아앗 지테씨 말대로면 우리카페사람들 다 사대주의자였습니까?ㅋㅋㅋㅋㅋ 존심세우고자 맛깔나게 후려치고(후려치는 가능유뮤 떠나서) 나라 망하면 그거 참 멋지겠습니다
앗. 맛깔나게 싸대기를 날리면 화의를 신청하겠지 전술은 웬지 눈에 익다...
이게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었넿. ㅎㅎㅎㅎㅎ;;;
그나저나 백운청산님과 지테님 논리가 대륙백제설 주장하는 분들과 흡사한부분이 많은듯 하네요.
공격측이 힘드니 방어측도 힘들거라는 참 단순한 생각만 봐도...;;; 단순히 전쟁이 다 같은 전쟁인줄 아시는것 같습니다. 방어전이 다르고 원정이 다르고 회전이 다르고 수성정이 다 다릅니다. 유목민족의 군대와 농사짓는 민족의 군대 모두 다릅니다. ;;; 열명과 다섯명이 서로 싸우면 열명쪽이 다섯명만 살아남고 이길거라고 주장하시는것과 같은 수준의 주장이십니다. 토탈워겜은 커녕 코에이 삼국지라도 해보셨는지 묻고싶네요.
삼국지 초창기편 3편부터엿나요?그때 아스키코드 255로 수정해서 날을 세우고 했죠..ㅎㅎ 저는 조조를 좋아해서 다 255로 고쳐서 했습니다...
음 강한 선빵은 그 발상은 옆동네 병신들이 써먹었다 존내 캐관광을 ㄷ ㄷ ㄷ
@백운청산 말씀 잘하셨습니다.요동정벌은 삼국지가 아닙니다.
아마 진짜 잘해봐야 한니발 시즌2가 됐을겁니다...
전투에는 이겼지만...전쟁에는 지고 나라도 망하는..
좋은 떡밥 덕분에 내공만 주섬주섬...
어떤분들 자꾸 전쟁으로 망해야 아름답다?
핵을 맞아봐야지 정신좀 차리려나?
나 탈퇴 할게요. 무조건 안된다 ㅋㅋ 말씀 잘들었어요. 면전에서 얘기점 하고 싶네요. 발상자체도 문제라니 님들의 그런 생각들 잘 청취합니다만 뭔가 착각들 하시는게 요동의 지리적 중요성을 간과 하시는거 같네요. 선점하는 위치의 선제적 효과를 무조건 방어나 수성의 입장에서 지켜낸게 가능하겠냐 이런 의문밖에들 없으니 사고의 확장이 이뤄지지 않는거죠. ㅋ 다시한번설명드리자면 요동을 기점으로 요나 금이 제국으로 발전 했구요. 고구려또한 그랬져. 왜 거란이 고구려의 후계자인양 고려와 담판지으려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암튼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토탈워룰 안해봤다구요? ㅋㅋ 미디블 정식 구매자입니다. ㅋㅋ ㅎ
고려가 요동의 중요성을 몰랐을리가 없죠.
그러나 이건 아시나요? 원이 쇠락하던 1371년, 요동에 있던 요양행성의 책임자 유익이 고려에 귀부하려는 의사를 보였을때 고려 정부 스스로가 거부했습니다. '지금 먹어도 소화 못 시킨다'와 '명과 쓸데없이 마찰 일으킬 필요가 없다'가 그 이유였습니다. 덕분에 유익은 명에 항복했고, 명은 요동에 발판을 마련할 수가 있었죠. 고려가 정말 요동을 도모했다면 유익의 귀부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따라서 깔거면 이성계가 아니라 공민왕을 까야죠. 위화도 회군 시점의 이성계는 1차 요동정벌을 실행해본 경험자로서 제반사항을 따져봤을때 '불가'라는 판단을 내린겁니다.
결국 요는 위화도 회군 시점에서 공격했을때 승산이 얼마나 있었겠냐는 점입니다. 가장 유력한 기회였다면 1차 요동정벌인데, 당시 요동성의 군량고가 소실되지 않았다면 고려군은 안정적으로 요동을 접수할 수 있었겠지요. 유지를 제대로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남부지방을 휩쓸던 왜군에 대응하기 위해 성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북으로 나하추, 서로 명, 남으로 왜구라는 이중전선을 형성할만큼 고려의 국력이 받쳐주질 못했으니까요.
거듭해서 말하지만 당시의 고려는 내정이 박살나서 추스르는 중이었습니다. 개혁이 성공해 안정적인 조세 수입과 양인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병력을 양성한 연후에야 외정도 도모할 수 있는겁니다. 아무리 요지라고 해도 소화시킬 능력이 없으면 선제적 효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테님은 사고의 확장 이전에 그 사고를 받쳐줄 수 있는 체질이 있는가를 짚어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 체질을 간과하고 병력을 밀어넣었다 참사가 난 전형적인 예가 임팔작전입니다.
사고의 확장은 어디까지나 사고의 확장일 뿐이고, 그 사고가 구체적인 역사이론으로 성립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많은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런게 없으니까 까는거지, 여기 계신 분들이 '사고의 확장( = 뇌내망상)' 할 줄 몰라서 까는거라고 착각하지 좀 마슈
중요한거 누가모릅니까?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근거들이 있으니 다들 안된다고 하는거잖아요. 지테씨의견이 가능하다는 근거부터 가져오세요. 말이 안통하는 거 탓하지마시고 반대편 입장의 사람들이 납득할만근거 좀 가져오세요.
지금 지테씨 의견은 지나친 낙관론에 근거도 없어요. 마치 지금 평양공습해서 북괴수괴들을 날리면 통일될거고 대마도 점령해서 일본에게 한방먹여 닥치게 만든다는 것과 같은 뇌내망상수준입니다.
이 양반은 걍 남의 말 들을 태도가 없음요. 어차피 IF놀음은 쪽박과도 같지라
같은 춘천사람으로써 아쉽군요
지테님 흥분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생각하십시요.어차피 댓글로 서로 글을 쓰면 뜻과 의미가 완전히 전달하기란 어려운 겁니다.서로 주관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하셔야지 탈퇴는 좋은 방법이 아닌거 같습니다.
지테님 홧이팅~
요동은 전국시대 연나라때부터 광개토왕 접수때까지 중국영토였는데 저게 우리의 고토라니 말도 안됨;;
정작 탈퇴한다고 하고 탈퇴는 안했네..?
그래...입으로는 뭔들 못하겠소...ㅋ
@돌머리 벌써 2년이 흘렀네요. 어찌하다보니 이리 됬네요. 맘에 안드시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세요. 인격이나 덕이 부족한 사람이다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2년지나 제 글을 보니 웃음이 나오네요. 아직도 많이 부족한거 같으니 더 배우고 깨달아야할게 많네요. 좋은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