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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15,1-6
제2독서 : 요한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옛날 사냥을 너무 좋아하는 어느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이 어느 날 사냥 갔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게 되어, 곧바로 동행했던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임금이 “어떤가?”라고 묻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 후, 임금의 상처가 덧나서 다시 주치의를 불러서 괜찮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주치의는 정성껏 치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결국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서, 이 돌팔이 주치의를 감옥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그
런데 주치의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주 후, 임금은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곳에 사는 미개한 원주민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임금을 자기들 신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사장이 임금의 손가락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가만, 저 사람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신께 바칠 제물이 불경하구나. 그냥 풀어줘라.”
풀려나면서 임금은 생각했습니다.
잘려진 손가락을 하나의 불행이고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치의를 풀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느냐는 너의 말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대가 옳았다. 미안하다.”
의사는 “무슨 말씀입니까? 감옥에 가두신 것이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냥에 따라갔다면 제가 제물이 되었을 테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결과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주님께 더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새기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리고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처럼 참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계획에 함께하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곁을 떠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 안에서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사랑의 관계’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성숙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
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 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 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 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 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자는 예수님께 ‘붙어 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 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 내주 혹은 상호 공유의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 되어 있고,
참으로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바로 이 ‘공동 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요,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그리고 그는 공동 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를,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곧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주님!
오늘도 십자 나무에 붙어 당신 사랑을 수혈받게 하소서.
제 삶에 사랑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사랑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처럼 십자 나무에 붙어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은 골고타 언덕에 심어진 참 포도나무.
당신만이 저의 혈관, 저의 숨통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96년 스페인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말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자유시간을 보내고, 말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그곳에는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말 동상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옆의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샌디에고 꼼뽀스텔라’엘 갔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자유시간을 보내고 광장에서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되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광장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앞의 광장이 아니라, 성당 아래에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광장이 서로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학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는 ‘천동설’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니 당연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도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우주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지구에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오 갈릴래이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우주는 훨씬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먼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만큼 크고, 장대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할례’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할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초대교회는 할례가 신앙인이 되는 필수조건인지 고민했습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도 몰랐고,
할례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문제로 ‘음식’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고, 음식에 대한 규정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초대교회는 고민을 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교회는 ‘할례’와 ‘음식’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광장이 모임 장소가 아니었듯이,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었듯이,
할례와 음식은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유대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제도와 관습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와 관습을 뛰어넘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이런저런 육체노동을 자주 하면서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일이라는 것,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가끔 왜 사나? 싶을 때, 우울감에 젖어들 때,
만사 제쳐놓고 육체노동에 한 번 뛰어들어 보십시오.
일을 설렁설렁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몰입할 때, 완전히 헌신할 때,
거기서 오는 상쾌함이 얼마나 큰지요?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치료제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몰입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 노동, 근로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눈만 뜨면 매일, 그리고 평생토록 되풀이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정말 가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며, 더불어 동료 인간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또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일을 통해 한 존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로 인해 한 존재가 활짝 꽃 피어나며 충만한 인생을 엮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노동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암담하다 못해 참담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안에서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
그로 인한 극도의 차별 대우와 상실감! 틈만 나면 자행되는 해고! 살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러 측면의 계측에서 불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국가별 노동시간을 따지면 최상위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이 우리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더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취직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면접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벼랑길의 끝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슬픔은 취직하고 나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직장,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받는 직장을 꿈꿨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근로자들은 경영인들의 부속품처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 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내 청을 위해 먼저 그분의 청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다 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가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아야 청을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기 전에 그분의 청이 무엇인지 묻고 내 안에서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떤 청년을 제가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 청년은 점점 거짓말과 핑계로 일관하며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작지 않은 액수를 청하기에 그 사실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제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이번에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잘못하기는 하였지만,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핑계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나아지기 싫다는 표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고 그 사람은 교만함에 더 큰 사기를 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야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절대 거짓말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께 붙어 있으라고 하시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고 하십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청한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절대 거짓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거짓이나 핑계를 절대 대지 말고 무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자기 마음에 담아 놓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며 계속 자신이 원하는 것만 청합니다. 다급한 처지만 제시하면서.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니
먼저 기름 두 방울이 든 숟가락을 들고 성을 한 바퀴 구경하고 오라고 합니다.
기름을 흘리지 않았다면 행복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성을 돌다가 아름다운 정원과 조각품에 정신이 팔려 그만 기름을 흘려버립니다.
성주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줍니다. 그때는 이 사람이 기름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성주는 행복의 비밀은 기름 두 방울을 흘리지 않으며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먼저 나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행복이 복권처럼 한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하여지려면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매일 행복하려면 매일 꾸준히 감사일기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감사일기를 쓸 사람인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을 주어도 쓸모없게 됩니다. 은총을 그렇게 소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고 나서부터는 돈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내가 그 청을 위해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분 안에 머무는 방법을 알아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위해 주님도 원하는 게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청하는 것을 위해 주님께서 나에게 청하는 게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먼저 하십시오.
그러면 내 청원이 무엇이든 이뤄질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죽고 당신의 모습으로 조금만 변화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면
당신 은총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조욱현 토마 신부
“나는 참포도나무요.”(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 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고,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가지는 자신의 생명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우리는 나약하므로 우리가 선행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아드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다.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엄포가 아닌 진실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결론처럼 얘기하면 아무리 주님 안에 머물러도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 안에 있어도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은 싫건 좋건 주님 안에 머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는 않지요.
그것은 공기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공기 안에 있으면서도 공기를 들이켜지는 않는.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이 싫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이 내 안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죽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는 것부터.
세상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사실은 세상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도.
이것들을 깨달았어도 그다음 모셔 들이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도 주님을 모셔 들이기 싫다면,
앞서 봤듯이 그것은 공기 속에 있어도 공기가 싫은 것과 같고
바닷속을 휘젓고 다녀도 그 물을 들이켜기 싫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죽어도 하기 싫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진정 죽어도 싫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죽어도 하기 싫다는 말은 과장법이고,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셔 들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아도 당장 죽지 않기에
주님이 내 안에 아니 계셔도 살 수 있고
젊었을 때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얘기하면 생명 연장이고 시간 유예입니다.
잘린 가지나 수액 공급이 끊긴 가지도
가지 안에 아직 남은 수액으로 생명 유지를 얼마간 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실은 주님의 시간 유예에 의한 생명 연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이 농부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농부가 한해만 시간을 더 주면 자기가 열매 맺게 해보겠노라고 청한다는 비유 말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시고 농부는 주님 당신 자신이시지요.
이 비유 말씀처럼 농부이신 주님은 우리를 깨우치려고 애쓰십니다.
온갖 비유와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당신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주님 말씀을,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 말씀을,
그저 엄포라고 무시하지 않고 정말 그런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주님과 함께 주님 말씀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주님 말씀은 엄포가 아니라 진실이고 진리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모시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요한 13-17장)의 한 부분입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써, 당신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이어 나오는 ‘깨끗하게’ 또는 ‘깨끗이 하다’라는 낱말입니다.
2절의 “깨끗이 손질하시어”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카타이로’는
3절의 “깨끗하게”(‘카타로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지를 쳐 내어 깨끗이 손질할 필요가 있듯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내면의 가지치기로 깨끗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작업이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이 선언은 유다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제시하는
중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구원됨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독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초대 교회가 정리하여야 하였던 ‘구원관 논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독서가 보여 주듯 유다인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외적인 표식(할례)이나 율법의 준수가 한 인간의 삶과 생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신 “참포도나무”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실행함으로써 깨끗해지고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