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마력(魔力)
돈이 개입되면 인간관계망이 헝클어진다. 금융업에 종사했던 난, 돈거래를 많이 했다. 한 번도 좋았던 기억이 없다. 돈과 엮이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미묘한 감정 기류가 형성된다. 신뢰 관계가 무너지면서 갑을관계도 바뀐다. 그로 인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해(誤解)의 씨앗이 싹튼다. 그게 바로 거짓말쟁이 돈이다.
친척이나 친구가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한 달만 쓰고 주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야박하게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다. “매일 돈을 만지는 사람이 그것도 못 해주냐”는 원성이 들려올 땐, 일상이 힘들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원하는 금액은 못 해줘도 마이너스 통장이나 카드론으로 그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다면 상생이지만, 상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돈거래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정이 딱해서 빌려줘야 한다면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감당할 만큼의 범위를 벗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돈거래를 잘 못하면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상환 날짜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반복되면 갈등과 오해가 마음 한쪽에 똬리를 튼다. 마음은 자갈밭으로 변해가고 사회가 사막처럼 느껴진다. 정서가 흔들리고 매사가 불편하다. 혼자 저지른 일이 한계를 견디지 못해 아내에게 보따리를 풀었다. 평온한 가정엔 파도가 출렁인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법성포를 찾아갔더니 도와줘야 할 형편이라 돈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왔다는 아내의 목소리가 공허하다. 혼자 견뎌야 할 일을 아내까지 힘들게 하고 상처받게 했으니 미안하다.
성실한 직장 동료 K가 주식 투자로 퇴직금도 없이 옷을 벗었다. H 지점에서 독촉장이 날아와 그가 퇴직했다는 걸 알았다. 말없이 떠나버린 그가 섭섭했다. 춘천에서 근무할 때 대출 보증을 서준 일이 핵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연체이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상환하고 서류를 갖춰 지급명령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채무명의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발신인 주소도 없이 미안하다는 짤막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게 전부다. 그 이후엔 소식이 감감하다. 감정이 흔들리고 거칠어진다. 분노를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면 피해는 결국 내 몫으로 남는다. 밥맛이 없고 기력이 떨어지니 일상이 힘들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다.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 앞에 왔으니 잠깐 만나자는 내용이다. “친구가 빚 갚으려고 왔나 보다.” “그 친구는 그럴 거라 믿었어?” 당당하게 아내에게 말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친구 부부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안내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묻고 또 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만나면서도 편지를 써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자, 학창 시절 옥과 교실과 설산으로 소풍 갔던 정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친구는 옥과 이야기에도 반응이 별로다. 뭔가 초조한 몰골이다. 옆에 있던 부인도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그의 표정은 어둡고 목소리엔 힘이 없다.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빌려 달라”는 애원의 목소리가 초라하게 들렸다. 빌려준 돈은 생에 첫 집 마련 계약을 하고 잔금 지급 기일이 두 달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잔금이라고 말해줬지만, 지급 기일에 연락도 없이 실망을 안겨준 친구가 5년 만에 나타나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했다. 이게 그와 나의 관계인가 싶어 안타까웠다.
기대에 어긋난 섭섭한 마음이 잔금 지급 기일 때보다 더 아프다. 역지사지로 돌아가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내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자신 있게 돈을 돌려받을 거라고 했던 말은 나의 소망에 그쳤다. 밖으로 나와 동네 한 바퀴를 걸었지만, 여전히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는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로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공무원 길을 접고 힘겹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들을수록 물음표만 그려졌다. 보증인과 구비서류를 갖춰 D 지점에 오면 대출해 주기로 했다. 단칼에 거절하고 싶은 생각과는 달리 나는 또 인정이라는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미국 속담에 “처남에게 100달러를 빌려주면 두 번 다시 그를 볼 일이 없어진다.” 는 말이 있다. 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돈거래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이게 바로 돈의 마력이자 환각제다. 돈거래 이후 소식이 끊긴 여덟 명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는 이유가 섭섭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리움 때문일까? 그들은 선·후배, 직장동료, 친구, 친지, 동네 주민, 교인 등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다. 옛정이 그리워 안부를 전하고 싶어도 빚 독촉 때문에 연락하는 것 같아 주저하며 기다린 세월이 수십 년이다. “돈은 잃었어도 사람은 잃지 말자”고 말한 아내가 고맙다.
아직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품었던 오해는 이미 공중으로 날려 보낸 지 오래다. 그들을 만나면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냐?’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사람의 관계란 회복이 빠를수록 보약이 된다. 우리네 삶은 윤택해지는 데 비해 행복지수는 낮아지는 요즈음 ‘보약’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와 돈거래를 했던 여덟 명 중 A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슬픈 소식이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