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 이었다. 그 사소한 일 하나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것이다. 사람에게 겪어보는 아픔, 그로인한 슬픔. 이건-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감정이다. 잠이 들 때 차라리 이대로 깨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이슬픔을, 당신은 이해하는가?
"안녕."
"어- 안녕."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예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새록새록 피어나려는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걸음했다. 아니, 사실 그리 꾹꾹 누를 필요는 없었다. 그 상처가 있고 난 후 '시간' 이라는게 딱지처럼 덮여져 건들여도 아프지 않을만큼 성숙됐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상처로 너무 아파 '그따위 상처'는 감각마저 느껴지지 않는 조그마한 것이 되어버린 것 일까.
"어디 갔다 왔어?"
"아, 그냥. 화장실."
책상 가득 공책들을 펼쳐놓고 정신없이 손이 바쁜 주현에 옆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소란스런 복도와 달리 왠일인지 조용하다 싶었던 교실의 이유가 숙제 때문이라는 것이 아, 정말 얘네들도 학생이구나 싶다.
"다 했으면 나 좀 도와주라. 진짜 싫다, 뭐 이래."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빼곡이 문제가 적힌 갱지를 내 쪽으로 보내는 행동에 주현의 필통에서 샤프하나를 찾아 쥐었다. 분명 어제 푼 문제인데 너무도 새롭게 다가온다.
"바보야, 시간도 없는데 풀려고?"
"내꺼 가지러가기 귀찮아."
뚝 하고 샤프심이 부러져 날아왔다. 꽁다리를 눌러 적당히 샤프심을 빼내고 다시 쓰려하니 또 부러져 버렸다. 다시 꽁다리를 눌러 쓰려하니 또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가만히 샤프 끝을 바라보았다.
"그거 눈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됐다, 그냥 놀아라."
[여자애가 힘은 오질나게도 쌔 아무튼. 됐다, 그냥 가라 가.]
순간적으로 주현의 음성과 누군가의 음성이 겹쳐 들려왔다. 그 음성에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었다는걸 기억해내었고, 필사적으로 그 과거에 말려들지 않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시험지와 샤프를 빼앗아 제 자리에 놓곤 다시 할 일에 열중하는 주현의 옆모습을 보았다. 침이 떨어져도 모를 만큼 집중 해 있는 모습에 언제부터 이 아이가 학교생활에 이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했었던건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거다. 머리를 쓰담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 가만히, 낙인처럼 찍힌 주름이 얽혀있는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주은아."
시선을 올려 주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은 종이 위에 글씨를 옮겨 적느냐 바쁘다. 언제 저걸 다 끝내고 갱지 위의 문제에 답을 달까. 시계는 점심시간을 끝내는 숫자위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 도와줘?"
"아니∼"
재빠르게 대답을 하고 힐끔 시계를 쳐다보더니 자기 자신을 자책하려는 듯이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어제 잘 때 뭔가 찜찜하다 했어. 이렇게 숙제 많은 줄 몰랐다."
"전화 해줄 걸 그랬나."
"아냐, 그래봤자 안했을 텐데 뭐."
머리만 바쁘고 손은 안 따라 주는 듯 '지우개, 지우개'를 연발하는 다급한 모습에 갱지 시험지를 집어들었다. 대강 답이 생각 날 듯도 하다. 이 선생님도 참 독하지 찍지도 못하게 주관식으로만 문제를 만들었다. 언젠가 누구의 것에 지금 상황처럼 답을 달아 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구 것이었더라, 굉장히 힘들었는데..
"김주은."
"응."
"화장실 갈 때 같이 가자."
"지금?"
"아니, 그게아니라. 아까처럼 혼자가지 말라고."
뭔가 느낀건가. 아니, 난 아무일도 없었는데 느낄 것도 없지. 잠시 멈추었던 손을 더 빨리 움직였다.
내가 시험지 마지막 문제를, 주현이 옮겨적던 글씨에 마침점을 찍을 때 선생님이 들어왔다. 아니, 아까 반장이 먼저 들어와 새로운 선생님이니 뭐니 호들갑을 떨어 댔던 것도 같다. 자리 주인이 자리를 비켜달라고 얼쩡거림에 내 자리로 옮겨 갔다. 너무 햇빛이 쨍쨍하게 비쳐오는 자리. 창가도 아닌데 내 자리까지 햇빛이 침범하는 것으로 계절이 바뀌었다는게 실감이 난다. 겨울은 한참 전에 지난 것이다. 새로운 계절을 맞기 위해 지난 계절은 잊어야 한다 -
"예전 김지연 선생님이 출산하러 가셔서 당분간 여러분과 제가 수업을 하게 되었어요. 짧은 시간 일 테지만 잘해 봅시다."
교실에 누군가가 펜을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무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반응이 없는 학생들에 놀랐는지 한동안 아무말도 없이 쭉 반 아이들을 훑어보다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선생님 자리는 김지연 선생님이 쓰시던 그 자리이니까, 자주자주 찾아와요."
학생들의 반응 따윈 상관없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보이신 선생님은 출석을 불러보자고 출석부를 펼치신다. 선생님의 부름에 학생들이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을 하고, 남자애들의 출석이 막 끝날 참이었다.
"음.. 다음, 한재영."
펜을 똑딱이던 소리마저 멈춘 교실은 적막을 유지했다. 한 두명씩 아이들이 서로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책상위로 꽃은 시선을 돌려 주현을 마주했다. 피하지 않고 눈빛을 마주치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재영이 안왔니?"
선생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주현이도, 반 아이들도. 겨울을 잊기엔 그 향기가 너무 짙어 아직은.. 무리인가보다.
"시간 있어?"
"아니."
헛기침 하나 새어나가지 않았던 냉랭한 수업이 지속되다 끝나고, 바로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제법 뜨거워진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또 그러는 거야?"
"그런가."
"양호실 갈래?"
"그 정도는 아닌 거 같다. 괜찮아 질거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따뜻한 공기가 폐 안에 가득 차옴을 느낌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왜."
"어?"
"시간 있냐고 왜 물어 봤냐구."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칠판에 쓰인 바뀐 시간표를 보고 사물함을 열려 열쇠를 찾았다.
"그냥-"
같이 사물함을 열어 책을 꺼내고, 돌아서려는 주현을 붙잡았다.
"말해, 찝찝하잖아."
"그냥이라니까 뭘. 종쳤어, 선생님 들어오시겠다."
자리로 돌아가는 주현을 보고 있다 선생님의 등장에 자리로 들어갔다. 시간 있냐는 주현의 말에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니, 별 일은 없다. 왠지 오늘은 집에 있어야만 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뿐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더 힘이 든다,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힘이 드는 건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압박감임을 알고있으니까…
차가운 책상에 볼을 가져다 대었다.
"ㄴ..아. 주은아. 야, 김주은."
주현의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벌써 수업이 다 끝난 모양인지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눈만 감은 것인데 잠이 들었었나.
"불러도 안 일어나길래 쇼크 먹어서 자빠진줄 알았다."
"오바한다 또. 빨리 끝났네?"
"담임 출장 갔거든."
가방을 챙겨들고, 열어 두었었던 창문을 닫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자율학습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 듯 불이 켜진 교실들이 많았다.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폈다. 이렇게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좋다.
"하늘 봐. 무섭지."
주현의 말에 저기 멀리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가라앉는 해를 품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나까지 파고들 듯 너무도 광대한 모습에 두려움이 든다. 주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응, 무섭다. 그래도 난 바다가 더 무서운데."
"바다 본지 되게 오래됐다∼"
기억을 더듬어 작년인가 더 전인가에 가 봤던 바다를 찾아내었다. 비가 와서 파도가 엄청나게 컸던 바다. 바다의 마지막 모습이 그래서인지 바다를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린다.
"하늘은 조용한데 바다는 소리가 크잖아. 널 삼켜서 네가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듣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소리치는 만큼 바다도 소리 칠 테니까."
내 말에 주현이 크게 웃는다. 따라 웃고 싶은데 그럴 기력이 없다. 난 그게 정말 현실로 다가왔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 바다가 무섭다..
"주은아."
"응."
"..괜찮은 거지, 이제?"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주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응, 괜찮아.' 라고 대답하기엔 아직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거짓말하지 말라며 쿡쿡 쑤셔올 것 같다.
주현과 나. 둘은 각자만의 세계에 빠져 갈림길이 나와 헤어질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잠겨진 문을 보고 알았지만 버릇적으로 내가 왔단 소리를 냈다. 역시나 아무도 없는 듯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꼬리를 치며 다가오는 로즈의 머리를 쓰담아 주고 신발을 벗었다.
"엄마 안왔니, 로즈야? 잤구나."
촉촉하지 못한 로즈의 까만 코를 느끼고, 안겨오는 로즈에 힘껏 안아주고 놓았다. 제법 털이 길어 통통해 보인다. TV를 틀고 쇼파에 들어 누웠다. 어제 보았던 쇼 프로그램이 재방송 한다. 무거워진 눈꺼풀에 잠시 눈을 감았다.
삐뚤삐뚤한 글씨. 뭐라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날 빼고 49명인 아이들에게 내 정성을 주고 싶었다. 밤을 꼬박 새서 편지를 완성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학교에 갈 때 까지의 설레이던 마음과 함께 내 정성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성취감에 빠져 혼자 기뻐했다. 내 앞에서 내 정성을 찢는다. 내 성취감도, 순수함도 찢어버린다. 화장실 바닥에 내 글씨가 날렸다. 그 위에 눈물이 흘렀다. 내 가슴 속 깊이 패인 흔적. 사람과 지내는 건 쉽지 않은 것이라 일깨워 주었던 사건. 눈물이 추억이 되던 그 해에..
TV방청객들의 웃음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꼭 날 비웃는 것 같아 TV를 껐다. 나가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로즈를 끌어안고 교복차림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밤이라 서늘해진 공기가 다리를 감싸온다.
"봉지값까지 2170원입니다."
3000원을 내주고, 아이스크림이 들린 묵직한 봉지를 들었다. 하나를 꺼내 먹으며 집으로 걸음했다. 아이스크림의 단 맛에 침이 고인다.
"안돼. 이거 먹으면 너 배탈난다."
아이스크림을 향해 달려드는 로즈를 더 꾹 안고, 신호등의 빨간 불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위로 젖혀지고, 초승달이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의 도움을 받아 빛나는 달. 해가 사라져도 달은 그 자리에 있는데 빛을 내지 않아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달의 존재를 잊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달은 해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질투를 느낄까.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밟아갔다.
어두워진 통로에 콧노래를 흘리며 집에 다 달았다. 집 앞에 누군가가 있는 듯 검은 형체가 움직임에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누구야?"
꾹 아이스크림 봉지와 로즈를 잡아들고, 그 형체를 향해 걸음 했다. 서서히 불빛에 얼굴이 들어난다. 누구지,
"어? 너."
"주은아."
"이성연?"
안도의 한숨과, 중학교때의 기억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감정에 휩쓸릴 것만 같아 머리를 흔들었다. '들어갈래?'란 내 제안에 고개를 흔들고 놀이터로 걸음 하는 성연에 뒤를 따랐다. 놀이터의 두 개의 그네가 정겹게 느껴진다.
"어떻게 지낸 거야, 진짜 오랜만이다."
중3. 연달아 3번씩이나 같은 반이 되었다고 둘이 좋아라 했는데 2학기초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성연이 내 기억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기쁘기도, 반갑기고 하고. 한편으로는 '왜 이제.' 라는 생각도 든다. 한동안 말이 없는 성연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설레임으로 가득 찬다. 예전의 기억들이 필름처럼 스친다. 마음 한 켠에 추억으로 굳어져 버린 딱딱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보았다. '이성연' 이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가 없다. 로즈의 털을 쓰다듬었다.
"주은아, 잘 지냈지?"
내 생에 처음으로 '진정한 우정' 이라는 것이 뭔지 깨닫게 해 준 친구.
성연이의 그 한 마디에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참으려고 애를 썼는데 성연의 목소리에 다 무너져 버렸다. 다 안다는 것 마냥 등을 쓸어내려주는 성연의 행동에 더 눈물이 나온다. 이제껏 참아왔던 모든 감정들이 눈물로 승화되어 빠져 나오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 짐을 느낀다. 손안에서 꿈틀대는 로즈를 놓고 성연을 끌어안았다.
"눈이 왜그래, 울었어?"
어제 나 혼자만 끅끅대다 겨우 진정을 하고 '내일 우리집 올래?'란 성연의 제안에 흔쾌히 승낙을 하고 헤어졌다.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던 성연이었는데 너무 내 감정만 앞세운 것이 아닌지 마음에 걸린다.
"운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눈물이 나오더라."
내 말과 함께 수업 종이 울리고, 주현은 고개를 기웃이다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바랬다.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마지막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교문으로 뛰었다. 아까 주현도 날 이해하는 듯 '다행이다.'라는 말을 하고 웃었었다. 그때, 숨이 막혀올 때 폐 안이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 있어 주현도, 성연도 모두가 소중하다. 성연은 과거에서, 주현은 현재에서 소중하다. 지금은 과거의 소중함을 되찾기 위해 가는거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 오기 위해..
"주은아∼"
성연이 교문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옴에 나도 똑같이 흔들어 주었다. 성연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예전과 똑같은 성연이- 달라진 것은 조금 더 말랐다는 것과 키가 컸다는 것, 난 과거를 대화하고 싶어하고 성연이는 현재과 미래를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엄마, 주은이 왔어요."
"왔니? 어머, 이게 주은이야? 아가씨 다 됐네∼"
아줌마도 그대로 이셨다.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심에 내가 이 집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 하나가 왔다는 것에 분주해진 집 안은 활기로 넘쳤다.
정말, 오랜만이야.
"짠, 예쁘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날 방으로 끌어당기더니 잠에 빠진 한 갓난아기에게 손짓해 보였다. [통통하다, 하얗다.] 딱 그 아이를 보고 느낀 것이다. 입을 웅얼이며 잠든 아기는 정말 '천사'였다.
"너랑 많이 닮았다. 둘째야?"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기가 숨을 쉴 때마다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이불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뜨거운 생명이 느껴진다.
"몇살이야? 너무 이뻐, 이름은?"
"이제 막 돌 지났고, 이름은 연우야."
"와, 진짜 너랑 많이 닮았다."
부엌에서 아줌마가 자신을 부름에 '여기 있어' 라고 조그맣게 속삭이곤 나가는 성연이다.
성연과 18살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인가.. 연우. 이름이 참 예쁘다. 내가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는지 아기가 눈을 떴다. 탄성을 지를 뻔했다.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너무 투명해서, 아이의 눈에서 날 발견했다. 정말. 눈동자까지 성연과 똑 닮았다.
:안녕. 누나는.. 네 누나 친구 주은이라고 해."
연우의 조그만 손에 내 손을 대 보았다. 연우가 방긋 웃어오는 것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별 다른 일은 없었다. 그렇게 몇 일간을 성연이네 집에 출퇴근 하는 것 마냥 오갔다. 조용하고, 평온하고, 그럼에도 폭풍전야처럼 불안한.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음 좋겠다고 몇 번이고 바랬던 시간이었다.
"어, 로즈. 일루와,"
요새 집에 있는 시간이 적다보니 로즈가 외로웠었나보다, 칭얼거리며 안겨오는 횟수가 늘었다. 그러고 보니 주현이와도 제대로 얘길 나누어 보지 못했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주현이를 잃고 싶지는 않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왔으니 지금의 현재와 적절히 끼어 맞추어야 겠다는 생각은 너무 큰 욕심인가.
"주은아, 자니?"
오랜만에 듣는 아빠의 음성에 로즈를 꾹 끌어안고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곧 있어 침대 한 쪽이 기울어지는 걸 느끼고, 이불을 내려 아빠와 눈을 마주했다. 깜깜한데도 아빠의 지침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아빠가 얘기 좀 해도 되겠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번도 아니고. 엄마가 외박하는거 알고있니?"
"..글쎄요."
불안한 기분이 든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건지. 예전, 우편물에서 보았던 엄마의 사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남자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던- 누군가 의도적으로 보내 온 사진.
"가게는 무슨, 쥐뿔도 못 벌면서 나다니기만 하고."
내렸던 이불을 끌어당겨 눈을 가렸다. 나마저 엄마의 잘못을 긍정한다면 엄마가 너무 불쌍해 진다.
"만약,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면 엄마에게 갈거니?"
어린아이에게 아빠가 좋니, 엄마가 좋니 하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유치한 질문. 하지만 지금 이사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질문 일 것이다.
"모르겠어요."
"아빠가 싫으니?"
"아뇨."
얼굴 옆으로 의미 모를 눈물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아빤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한참을 날 바라보는가 싶더니, 깊은숨을 내쉬며 방에서 나가셨다.
엄마와 아빠를 개개인의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시기를 겪어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강한 사람이 필요했다.' 라고 하는 것은 내 이기심인가. 그 시기에는 나와 같은 상황을 겪어 보아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 것 보다 그 시기를 능동적으로 넘길 수 있는 강한 본보기가 필요 했다.
어쩌면 한재영도 그 중의 하나였을지도.
책상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온다.
"무거워, 저리가."
눈 앞 바로 쬐어오는 노란빛에 신경질적 이게 잠에서 깨었다. 다리를 베고 있는 로즈를 쳐내고, 어제 밤새도록 째깍이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쩐일인지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쬐어 오는게 심상치가 않다.
"아, 이런."
역시나 싶게 8시를 넘어 유유히 9시를 가르키는 시계에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명 잠이 들기 전 까진 알람을 몇 개 더 맞추고 자야 한다는 생각이 있긴 했었는데 그새 잠들었나- 쉬엄쉬엄 준비를 시작했다.
집 안에서 느낀 것과 같이 밖은 햇빛이 한창이었다. 시간은 9:31분. 사람들 없이 한산한 거리에 학교에 간다는 게 더 싫어진다.
"주은아∼"
누군가 등뒤에서 내 이름을 불러왔고, 즉시 그게 주현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타이밍이 좋은걸."
'엄마가 안 깨웠어' 라고 주현이 투정을 부려왔고, 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엄마가 집에 없었다. 주현은 모를거다. 내가 자신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 평범한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뼈 속 깊이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이혼 할지도 모른데."
"뭐?"
막 빨간 불로 바뀌어 버린 신호등 앞에 섰다. 차가 오지 않는데도 발은 멈췄다.
"어제 아빠가 그러더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노랗다. 해의 빛에 눈이 시려온다.
"원래 다 그렇잖아∼ 그러다 말아."
시선을 내려 앞을 보니 신호등의 빨간 불빛도, 아직 셔터가 내려 진 길가의 가게들도 모두 색깔이 번져 보인다. 눈을 감았다.
"아니. 그냥 헤어지는게 나을 것 같아."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굉음이 귀에 울린다.
늦장을 부려 학교에 도착한게 11시가 다 되어서 였다. 출석부에 체크가 된 건 예상했었던 일이고, 담임에게 불려간 건 당연지사였다.
"담임 봤어?"
"뭘?"
뭔가 기분이 오묘하다. 애들은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복도를 걷고 있다는게. 어서 무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든다. 이건, 지금 만나고 온 담임 선생님 탓도 있다.
"놀랬나 보더라, 손까지 떠는게."
"우릴 너무 과잉보호 해."
"불쌍하더라."
"똑같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가능성은 우리가 제일 많이 갖고 있는 거니까."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주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그 날 '그것'을 본 상황과 같이 심장이 뛴다.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여기가 현실이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아플 정도로 꾹 쥐었다.
"설마. 아직도 네 탓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주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 말에 외면하고 있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조금씩 속이 답답해져 온다.
"그건 아닌데. 후회는 들어."
"그게 그거지-"
"너는 몰라. 진짜 그 상황이 되기 전 까진 이해하지 못 할 거야."
떨리는 입술을 힘을 주어 다물었다.
"너무 자만하는거 아냐?"
"뭐?"
"걔가 너 하나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하는 거잖아. 누가 너 탓이라 그래? 자기 멋대로 그렇게 단정지어 놓곤 혼자 끙끙대고. 그런거 한재영에 대해 너무 자만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자만. 절대 한번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드는 이 기분은- 지나가던 할머니 짐을 들어 드리려다 도둑으로 오해받는 더러운 기분. 가만히 주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주현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주현이니까.
"먼저 들어갈래? 난 나중에 들어갈게."
멈추었던 발길을 돌려 주현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했다. 왠지 이래야 할 것 같다.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보단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운동장이 해의 빛에 물들어 노랗게 빛난다. 어디로 가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는다. 여전히 푸르른 하늘이 야속해진다.
"ㅇ..ㅈ....!!"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 오는 게 보였다. 내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하고..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게 곧 성연이라는걸 알았다. 숨이 턱 까지 찬 듯 얼굴이 시뻘게졌는데도 계속 뛰어옴에 나도 성연의 앞으로 뛰어가 주었다.
"왠일이야, 이시간에- 학교는?"
"주은아,"
"응, 왜그래. 무슨 일 있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무작정 손목을 잡아 날 끌어당긴다. 항상 차분하던 아이여서 이렇게 다급한 모습을 보일 때는 불안함이 든다. 학교를 나가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너 버스 정류장에 멈춰섰다. 빨갰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음에 물음조차 할 수 없었다. 버스를 잡아타고, 카드를 찍는 성연의 손이 떨리는 걸 보았다. 이젠 불안보다 걱정이 앞선다.
"연우가 없어졌어."
자리에 앉아 한동안 진정하지 못하고 몸을 떨던 성연이 꺼낸 첫 마디였다. 내 손을 잡아오는 성연의 손이 너무 차다.
"엄마가 다른데 보낸 것 같아. 그래서 찾으러 가는거야."
"어딘지는 알아?"
"아니. 근데, 알 것 같아. 연우가 내가 자기를 찾는 걸 느끼고 내가 가는 곳에 있을 거야, 분명."
횡설수설하는 성연의 행동이.. 이상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성연의 떨림이 느껴져 온다.
여러군데를 돌아 다녔다. 친척집에도, 아줌마네 친구 집에도, 가까운 할머니 댁에도. 예상대로 허탕이었지만 아무 말도 없이 따라가 주었다. 버스 안에서 잡았던 손을 한번도 놓질 않아 땀이 고인다. 이제 4번째로 타는 버스엔 제법 사람이 차 있다.
버스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했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 한 곳. 왜 맨날 내가 오는 날은 이렇게 날씨가 궃은건지. 파도소리와 바다 비릿내가 역겹다.
"없네. 연우가, 연우가 없어. 분명 여기 있을 것 같았는데."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성연이 더 꾹 손을 죄어온다.
"다른데 가보자."
"성연아."
뒤를 도는 성연의 손을 끌었다.
"어디를 가도 연우 없을거란거 알잖아."
"어디엔 있을거야, 얼른가자, 응?"
"이성연. 아줌마가 왜 그러셨는지도 몰라도 나중에 찾아오실거야. 아줌마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러신 거겠지."
"아냐, 아니야. 그러면 너무 늦어. 나중에 데려오면 너무 늦는다구."
고집을 피우는 성연이 낯설다.
"너도 누나로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엄마이신 아줌마는 얼마나 힘드시겠냐. 너가 이러면 안되지."
"..주은아.. 연우 말야."
..뭐?
가만히 돌아서서 내 눈을 본다. 감정이 최정상에 달한 듯 성연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다. 손을 놓고, 내 어깨를 잡는다.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옴에 눈을 감았다.
"얘기하려고 했었어. 근데 너가 말했던 '둘째' 냐는 물음에 그럴 수가 없더라."
성연의 몸이 떨린다. 아니, 내 몸이 떨리는 것인가.
"그래서 중학교때 자퇴했어, 그 후로 나 학교 안 다녀. 엄마가 낳지 말라 하셨는데도 낳은 거야. 연우, 버릴 수가 없었어."
떨리는 성연의 손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낀다. 너무 많이 닮았다 했어. 정말로 .. ..
성연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성연의 떨림이 온 몸으로 느껴지고. -애달프다.
"아빠는. 연우 아빠는 어디에 있는데?"
'..주은아.. 연우말야. 연우, 우리 연우. 내 아이야.. 내가 낳았어 연우.'
자꾸만 귓 속에서 되풀이되는 성연의 말.
되도록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 했다. 다른 사람들도 성연의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랬을 텐데 나마저 놀래는 티를 내면 성연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죽었어. 연락 안 하다가 연우 낳고 연락했는데- 그 다음에 죽어버렸다는 소리 들리드라."
꾹, 성연의 몸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너한테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서럽더라."
다리로 느껴져 오는 바닷바람이 따갑다. 하나하나, 빗방울이 점이 되어 내려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성연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라 날 위로했다. 성연을 위로 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잘 한거야' 라고 하기에도, '왜 그랬어. 아무리 죽이기 싫었더라도 연우 낳지 말았어야지.' 라고 하기에도 성연은 너무 여리다. 아니, 어쩌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나보다 강할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을 하기엔 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성연이 스스로 울음을 멈추고. 바다 가까이로 다가갔다. 신발 안으로 차가운 바닷물이 스며 들어온다. 역시, 가슴이 뛴다. 내 머리는 그 날을 잊지 않았기에 반응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너 중학교때 한재영- 기억해?"
성연이 날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걔가 예전에 뭔 짓 한지 알아? 내 눈앞에서,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고 저기에 뛰어 들었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정말 죽는줄 알았다. 파도가 자꾸만 재영을 삼키고.밷어내고.삼키고.뱉어내고. 그 광경에 미친 듯이 재영의 이름을 불렀었다. 그러니깐 재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씨익 웃으며 바다의 품안에서 빠져 나왔었다. 해를 등지고 바다에서 걸어나오던 재영이 사람이 아닌,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었다.
"하도 또라이짓을 많이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근데 있지. 그땐 죽지 않았는데, 그 병신 같은게."
생일파티를 준비했었다. 재영의 탄생일을 위해- 반 아이들과 단합하여 일주일간 재영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고 화난 것 마냥 행동하기로 했다. '어제 밤에 재영이가 할말 있다고 나오라 했는데 씹었다. 아, 진짜 의리 찔려 죽겠다야.' 재영과 친했던 김지성의 그 말을 웃어 넘기고 그렇게 일주일을 넘겼다. 우린, 거기서 멈췄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이 되던 재영의 생일날, 옥상으로 재영을 불러내었다. 내가 먼저 재영과 옥상에 도착했고, 2분 후면 애들이 생일 케잌을 가지고 문을 열도록 준비가 되어있었다. '요즘 나한테 왜이래?' 라는 재영의 말에 '몰라서 묻니?' 라고 대답했던 것도 다 예상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그런데.갑자기- 재영이 우리들의 각본엔 없었던 '마지막인데 대답 좀 해주지 그랬냐.' 라고 말을 내뱉곤 말리기도 전에, 하늘을 날았다. 재영의 등뒤에서는 지는 해가 빨갛게 번졌고, 재영이 떠오르던 그 한순간이, 영화의 한 컷처럼 멈췄었다.
옥상에서 떨어지던 재영의 모습, 하나하나 생생히 기억한다. 마지막에 미소짓던 그 모습도, 날개짓을 하는 것 마냥 허공을 휘저었던 그 여유도, 다 기억한다. 한없이 자유롭고. 부럽도록 예쁘고. 소름끼쳤다.
'Happy birthday!! 생일 축하한..' 재영이 떠오르던 순간에 옥상문이 열리고 반 애들이 모습을 들어내었다. 시끌벅적하게 재영의 생일을 축하하던 아이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비명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려 준비하고 있을 때, 그 장본인은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재영의 장례식 때에도, 죽은 재영을 회상하면서도. 그렇게 잘 참아왔는데. 성연의 등장으로 그것이 터져버렸던 것이다.
한재영. 그 이름 세 글자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는데, 나마저 울어버리면 재영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깐, 걔 사정이 많더라고. 집안 가정사도 그렇고, 복잡하더라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 재영의 죽음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 이 눈물은, 몇 년을 알아왔는데도 재영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너.. 주은아, 너. 연우 아빠가 누군지 알아?"
성연이 다시 손을 잡아왔다. 파도가 점점 더 밀려온다. 빗방울은 굵어져 바다 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한재영이다, 연우 아빠."
한순간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조그맣게 성연이 뭐라 그러는게 들리기는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 가슴 저 밑부터 답답하게 숨이 막혀온다. 빗물에 젖어들어가 몸은 몸대로 무거워 졌고, 엄마와 빠가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그 충격보다 몇 배 더 큰 충격으로 정신은 하얘지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거부하려 했던 진실이 과거의 기억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가까웠던 재영과 나. 거기에, 중학생이 되어 만난 성연이가 합세했다. '친구'란 이름으로 뭉친 우리 셋은 다른 애들이 보기에 질투가 날 정도로 너무나 잘 지내 왔다. '친구'..'친구'란 틀은 겉보기에 불과 했었나- 재영과 성연은 그 틀을 깨 버린 지 오래 였었나..
'걔가 너 하나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하는 거잖아.. ..그런거 한재영에 대해 너무 자만하는 거다 너.'
갑자기, 아까 주은이 내게 했던 말들이 다시 귀속을 파고들었다.
주은아, 네 말이 맞았다. 내가 한재영에 대해 너무 자만했었나 보다.
성연이 잡아온 손을 내가 더 꾹 쥐었다. 과거는 과거에 둘 것을, 내 욕심이 너무 컸었나보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끝을 따라 위로, 위로 고개를 올렸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눈이 빗물에 의해 자꾸만 감긴다.
'주은아, 하늘 참 조용하지.'
'그렇네.'
'너 옛날에 천둥, 번개 칠 때 무섭다고 막 나한테 전화했었는데, 기억해?'
'그땐 어렸잖아. 진짜 그 큰소리가 왜 그렇게 무섭던지.'
'하늘이 화가 나서 그런거야. 평소에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비행기를 띄우던, 헬리콥터를 띄우던 잘 참고 있다가. 그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화가나서 소리치는거다.'
'아직도 애구나 넌.'
'진짠데∼ 그리고. 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지 알아?'
'이번엔 또 어떤 뻥을 치려고.'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간데잖아. 거기서 가만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슬퍼하면 같이 슬퍼져서 눈물을 흘린데. 그게 비가 되어서 내리는거고-'
'바보 아니야? 과학시간에 배웠으면서도 그런 얘길 하냐.'
'정말이라니깐.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에는 사람들이 우울해 하잖아. 직감적으로 슬픔을 느끼고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거라고. 그러니깐, 너도 비오는 날에는 좀 숙연해 지고 하늘에 있는 사람과 같이 슬퍼해 줘라,'
'진짜 또라이네, 진짜..'
재영과 나눴던 대화가 영상처럼 내 머리 속을 훑고- 검은 구름이 일렁이는 하늘에서 눈을떼어 성연을 바라보았다. 바다 수평선 저 끝 너머를 눈에 담고 있던 성연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날 보고는, 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나도 다시 성연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온 세상에 내려앉는 빗방울. 병신.머저리.개만도못한놈. 힘들면.. 나한테 라도 귀뜸해 주지 그랬냐.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거야? 아님.. 내가 그럴 여유를 만들어 주지 못 했던 거냐? 그만 좀 슬퍼해. 네 눈물 보는 사람들도 이렇게 슬퍼하고 있으니까, 네 말처럼 같이 슬퍼해 주고 있으니까..
그만 눈물 좀 그쳐라.
첫댓글 이번에도 역시나 잘 봤어요^^하하...근데 한줄정도 띄워주시면 안 될까요?ㅎ^^;눈이 쪼끔 아파서ㅎ;; 아무튼 예쁜 문체 너무 잘 보구 가요^^
좋은충고 정말 감사드려요^-^ 매번 이렇게 제 소설 읽어주셔서 얼마나 감사드리는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