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다리가 어찌 되어 가는지 안다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조금만 자신의 몸을 돌보면 되는 것이니까. 흐리운 모래폭풍사이로 이를 질끈 물고 손을 헤쳐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는 자신의 다리의 살점이 여기 저기 물어 뜯겨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허리에서 간간히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사내의 의식을 강타하며 그의 몸을 흔들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모래 폭풍의 너머에는 그 모습도 초라히 대지에 기대고 있는 체첸성의 성벽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대장!! 성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옵니다!!]
커다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온 휴릭은 미크로 왕국의 문장인 유니콘이 그려져 있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벌컥!
휴릭은 당장 문을 열어버렸고 책상에 조용히 다리를 올리고 있던 수리켈타우로를 바라보며 급하게 말했다.
[지금 거울로 보고 오는 길인데요. 누군가가 다가옵니다. 느리지만 아주 꾸준하던데요? 어떻게 할까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있던 수리켈타우로는 천천히 발을 책상 밑으로 내리며 책상 앞에 똑바로 앉아 휴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휴릭. 자네는 군인은 아니지만 군에 소속되어 있는 자네. 그리고 훈련도 받았으리라 믿고. 그렇다면 그대에게 상관에게 보고를 하러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시간 낭비가 되는 거겠지. 안 그런가? 소속과 계급부터 보고하라.]
[아…저… 주의하겠습니다.]
휴릭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경례를 붙였다.
[미크로 군, 체첸시 성곽수비대 소속 특별 화력담당 및 특별 정보담당 휴가울로 감버. 보고 드립니다. 지금 미확인 생명체가 아군의 성으로 접근 중 입니다. 지시를 기다립니다.]
수리켈타우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휴릭을 바라봤다.
[숫자는 얼마나 되지?]
휴릭도 또한 수리켈타우로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하나입니다.]
[흠… 쉬게나…]
휴릭은 씩 웃으며 바로 자세를 풀어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버렸다. 그런 휴릭은 수리켈타우로는 쓴웃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니 그 미확인 생명체가 오려면 시간이 있나 보군. 어때. 일은 할 만 한가?]
[수리켄 대장. 대장도 하루종일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게 일인지 놀이인지 분간도 안 갈 걸요. 뭐 나한테는 좋지. 편히 쉬고, 돈도 벌고. 오늘 같이 뭔가 잡혔을 때는 약간 흥분도 해보고.]
수리켄은 휴릭에게 다가와 앉으며 웃었다. 마치 아주 어린 막내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그에게는 자신의 앞에서 편히 앉아 친구처럼 자신에게 말하는 휴릭을 보며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도 늙어가는가…
[그래. 이쪽까지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지금 속도로 계속 온다면 한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뭐 모르지. 맘 바꿔서 죽어라 뛴다면 2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예상할 수가 없다는 얘기군. 크기는 어떻던가?]
[그건 모르겠던데… 그냥 점으로 밖에 표시 안 되는 것 보면 인간만한 크기일 겁니다. 인간일 수 도 있고. 확실하지는 않죠.]
수리켄은 조용히 턱을 쓰다듬었다. 미확인 생명체가 성밖에 나타났다면… 그리고 휴릭이 잡아냈다면 그건 분명히 북문으로 향해 오는 생명체일 것이다… 북문 밖에는… 로한 강을 덮고 있는 하날리아 숲과 끝없는 광야뿐인데… 그렇다고 저 먼 메테르 왕국에서 귀환하는 자가 있을 리도 없고… 수리켄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가늠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뚜렷한 가능성을 찾질 못했다.
[뭔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거라면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인간형 마물일 수도 있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데 큰일 나려 구요. 설마 우리 수비대가 오크나 고블린도 상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건 그렇군.]
수리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있던 조그만 수정구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수정구는 밝은 빛을 내며 소리를 흘렸다.
<말씀하십시오.>
약간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마치 은색의 고렘 같은 목소리를 가진 수정구는 수리켄의 지시를 기다렸다
[연결. 돌격 담당 자카드릭크 키르콕 십부장.]
<연결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무막대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하얀 연기를 뿜어내듯이 감싸고 있는 수정구를 바라보며 휴릭은 나직이 말했다.
[수정구 바꿔야 하지 않아요?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연기 뿜어내는 수정구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장밖에 없을걸요?]
[작동만 잘되면 아무 문제 없는데 무엇 하러 바꾸겠나?]
수리켄은 허허 웃었다. 참… 나이가 먹어가면 다 저렇게 되나? 새로운 걸 전혀 받아들이기 싫어하니… 약간은 불만이 섞인 불평을 뇌까리고 있는 휴릭을 뒤로 하고 수정구로 눈을 돌린 수리켄은 하얀 연기사이로 떠오르는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연결되었습니다.>
[미크로 군, 체첸시 수비대 십부장 자카드릭크 키르콕이 명을 기다립니다.]
[부장. 지금 북문으로 향하는 미확인 생물체가 발견되었네. 자네가 가서 확인을 하고 와줘야겠어. 인간정도의 크기인걸로 봐선 오크나 고블린 같은 마물일 가능성이 있으니 가능하다면 생포하도록.]
[알겠습니다.]
[성문을 열겠으니 빠른 시간 내로 임무를 완료하도록. 그렇다면 수고해 주게.]
[예.알겠습니다.]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다시 한번 그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고 수리켄은 수정구를 향하여 다시 한번 말했다.
[동작. 북문. 개방]
<동작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정구는 이번에는 파란 기체를 흩뿌렸다. 휴릭은 그런 수정구를 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라가 작아서 좋은 점도 있죠. 수정구가 각 성마다 있는 나라는 이 렝스 대륙에서도 우리나라 밖에는 없을걸?]
[후 훗. 무엇이 말하고 싶은 겐가?]
수리켄은 조용히 물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군대로 센티미나 메테르 정도는 쉽게 정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별들의 쉼터가 있는 곳도 우리 나란데 기껏해야 수비만 강화하는 폐하의 저의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메마른 목소리를 흘리는 수정구를 뒤로 하고 휴릭의 옆에 앉은 수리켄은 자 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을 하고 싶은 겐가?]
휴릭은 흠칫 거리는 자신을 숨기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수리켄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웃 나라들에게 받은 괄시와 모욕을 그냥 잊자는 겁니까? 전쟁을 하고 싶다는 얘기냐고 물으신다면, 예. 전쟁이라도 해서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마법의 힘이 있고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막강한 군대도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모욕을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
수리켄은 근엄했던 얼굴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허. 젊음이란 좋은 것이군. 하지만 잊지 말게나 마물들과의 전쟁이 끝난 지가 어언 1000년이 지났어도 그 아픔은 아직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변방에 있는 우리 체첸시의 시민들마저도 그 전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네. 그깟 멸시와 모욕을 좀 당했다고 해서 전쟁을 일으키자는데 동의 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걸세.]
휴릭은 의자에 몸을 푹 담갔다.
[에고… 늙은이 같은 소리만 하는 거 보면 대장도 다 늙은 거 같아요. 젊음이 어쩌고 저쩌고. 완전 80세먹은 노인네라니까…]
[허허허.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것이지.]
수리켄은 다시 책상 앞에 자신을 앉히며 다리를 책상위로 가져갔다.
[저는 그럼 거울로 가서 자카드릭크 십부장이 어찌하고 있는지 보고 오죠. 그 분, 메를은 가지고 있죠?]
[흠… 잘 모르겠네. 그 사람, 마법도구라는 것을 워낙에 싫어해서.]
[휴… 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 곳에도 없는가… 미크로 군, 체첸시 성곽수비대 소속 특별 화력담당 및 특별 정보담당 휴가울로 감버. 물러갑니다.]
[알았네. 가보게나. 그리고 특별한 소식이 있거든 수정구로 연락하게. 직접 달려오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휴릭은 경례를 붙이고 물러났다.
전쟁이라… 그 아픔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지만… 세상이라는 것은 평화로운 것을 가만히 놔두지 못한다. 무언가 깨어지고 그리고 다시 지으면서 돌아가는 것. 그 어두운 기운이 다시 대륙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애써 잊으려 하는 자신이 너무 야속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손으로 지켜낸 평화니 인간의 손으로 다시 절망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법. 수리켄은 올렸던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의자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봤다. 모래 폭풍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첫댓글 잘읽었어요!^^ 다음편두빨리보고싶어요^^
옙! 빨리빨리 올리도록 할께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저 또왔어요~! 역시 기대에 부흥하셨습니다. 잘쓰세요!! 아, 세시간이면 출혈로 죽을지도 몰라...-ㅁ-;;
기대에 부응을 했다니 감격입니다ㅠ.ㅠ 생명체는 설마 안 죽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