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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황원갑 <역사소설가>
우리 고대사에는 세 사람의 유명한 공주가 있었다.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평강공주(平崗公主)와 선화공주(善花公主)가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앞선 시대의 여인이 바로 낙랑공주이다. 남편인 호동왕자(好童王子)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친정의 나라인 낙랑국을 배신하고 부왕에게 죽음을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 낙랑공주는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낙랑공주란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라 그저 '낙랑국 임금의 딸'이란 뜻이지 그녀의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 물론 성은 아버지가 낙랑 왕 최리(崔理)라고 했으니 최씨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지금의 대동강 유역인 평양 일대에는 낙랑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낙랑국은 부여 ․ 읍루 ․ 동예 ․ 동옥저 ․ 대방 ․ 고구려 ․ 백제 ․ 신라 같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열국(列國)의 하나였다. 낙랑이 우리 역사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까닭은 이 낙랑국과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을 혼동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관이 정설로 굳어지다시피 한 것이 우리 사학계의 실정이니 참으로 민족적 주체성을 망각한 한심스러운 작태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간단한 것이 왕은 엄연히 한 나라의 수장이지 한 지방의 수령이 아니며, 공주 또한 어디까지나 임금의 딸이지 일개 태수의 딸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북경 근처인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고, 최리 왕의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고조선연구>와 <한국열국사연구>의 저자인 윤내현(尹乃鉉)박사 같은 이들의 끈질기고 치밀한 연구 결과에 따라 밝혀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최리의 낙랑국이 중국 요서지방의 한사군과는 달리 고구려와 대방 남쪽, 백제와 신라와 가야 북쪽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도 분명히 확인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30년(서기전 28년) 조의 낙랑국군사의 침범 기사를 보면 낙랑의 건국이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등보다 앞서거나 비슷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20년(서기 37년) 조의 낙랑국 정복 기사와 더불어, ‘신라본기’에도 같은 해인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4년 조에 낙랑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투항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한 ‘백제본기’에도 시조 온조왕(溫祚王) 13년(서기전 6년) 조에 “우리나라는 동쪽에 낙랑, 북쪽에 말갈이 있어 영토를 번갈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는 온조왕의 말이 나온다. 이는 곧 낙랑의 위치가 고구려의 남쪽, 신라․백제․가야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반증이다.
이 낙랑국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신라 기림이사금(基臨理師今) 3년(서기 300년)이었다. 그해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서 망제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양국이 귀복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우두주는 우수두(牛首州)라고도 하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오늘의 강원도 지역이다. 그리고 한사군의 낙랑과 대방 등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때인 서기 302년부터 315년 사이에 공격했다는 기사가 나오니 요서지방의 낙랑 ․ 대방이 신라에 귀복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정략결혼에 따른 비련이벌어진 것은 서기 32년, 고구려 제3대 임금인 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이라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전한다.
대무신왕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한 명은 적자(嫡子)로서 제1왕비가 낳은 해우(解憂)요, 또 한 명은 제2왕비가 낳은 호동인데, 제2왕비는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이다. 그러나 태어나기는 호동이 먼저 태어났으므로 대무신왕에게는 그가 맏아들이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와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무렵이었다. 아마 낙랑공주도 호동왕자와 비슷한 또래였거나, 4~ 5세쯤 연상인 20세 전후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조와 대무신왕 조의 기록을 근거로 추산해보면 당시 호동왕자의 나이는 만 15세 미만이었음이 분명하다. 호동왕자의 부왕 대무신왕이 출생한 것은 도읍을 나라의 첫 서울 졸본성에서 국내성(위나암성)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유리왕 23년(서기 4년)이었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無恤). 본래 유리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인 태자 도절(都切)과 해명(解明)이 차례로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자살했으므로 유리왕 33년(14년) 11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4년 뒤 부왕이 재위 37년 만에 세상을 뜨자 불과 15세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15년 뒤인 대무신왕 15년(32년)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사건이 일어났으니, 어찌 제1왕비도 아니고 제2왕비 소생인 호동의 나이가 15세 이상이 될 수 있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게 수려했기에 호동이라고 했고, 자라면서는 성품이 착한데다, 고구려 사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미덕인 무술과 담력까지 뛰어나 부왕과 모후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호동왕자, 도성은 물론 나라 안의 만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던 호동왕자, 따라서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던 왕자 호동은 어찌하여 귀중한 한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려야만 했을까.
또한 낙랑공주는 무슨 까닭에 꽃다운 나이에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사랑의 포로가 되어 나라를 배신하고, 결국은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을까. 그 비극은 호동왕자가 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어느 날 도성을 떠나 남쪽 나라 낙랑국을 찾아감으로써 시작되었다. 호동왕자는 도성을 떠나기 전날 부왕의 부름을 받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동은 듣거라. 네 나이 이미 열다섯 살이 되었구나! 이 아비가 듣기에 너의 힘과 재주가 날이 갈수록 향상되고 있다니 참으로 대견하도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너는 낙랑국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고?“
“낙랑국이라면 우리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나라가 아니옵니까?”
“뭐 그렇게 멀다고 할 수도 없지. 말을 달리면 사나흘 거리에 불과하니까....”
“폐하,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다음 목표가 바로 낙랑이란 말씀이 아니시온지요?”
“참으로 우리 호동이 총명하구나! 과연 내 아들답도다! 내가 이미 개마국(蓋馬國)과 구다국(句茶國)을 정복했으나 부여(夫餘)를 아직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고, 한(漢)나라 오랑캐들 또한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니 미리 남쪽 변경을 안정시켜 후환거리를 없애려는 것이다. 내 너에게 내일 아침 무사 스무 명을 붙여줄 터이니 그들을 이끌고 낙랑의 허실을 잘 살펴보고 오너라. 내 듣기에 그 나라엔 적군이 침범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스스로 울리는 자명고(自鳴鼓)란 북과 자명각(自鳴角)이란 나팔이 있다고 하더구나! 내가 그 말을 듣고 세상에 어찌 그런 신통한 보물이 있으랴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다만, 혹시 정말로 그러한 신기(神器)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사실 여부를 잘 확인해보아라. 대체로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데에는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니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아직 어리고 부족한 소자에게 막중한 임무를 내려주시니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뿐이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그래, 내 너만 믿겠노라. 이 아비는 불과 열 살에 네 할아버님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나가 부여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느니라. ...그런데, 얘야, 그 나라 낙랑국의 공주가 매우 아름다운 처녀라고 하더구나. 너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처음 듣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 남행길에 어쩌면 그 공주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밤이 깊었으니 그만 물러가 쉬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도록 하거라”
시조 추모성왕(鄒慕聖王: 東明聖王)의 건국이념인 ‘다물’, 즉 조상의 나라인 조선과 부여의 광활한 영토를 되찾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이러한 부왕의 원대한 국가 경영 전략에 따라 호동왕자는 낙랑국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호동왕자는 이튿날 아침 무사들을 거느리고 낙랑국으로 향했다. 호동왕자의 수행원들은 모두가 숱한 전투를 치른 역전의 노병이요 일당백의 용사였지만 사냥 행차로 위장해야 했으므로 모두가 사냥꾼 차림이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호동왕자가 옥저(沃沮)를 유람하다가 낙랑 왕 최리를 만났다고 했는데, 이는 오로지 낙랑국의 국보(國寶)요 신물(神物)이라는 자명고와 자명각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적군이 국경을 넘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자명고와 자명각이 정말로 있어서 호동왕자 일행이 국경을 넘는 순간 경계경보를 발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까닭에 일부러 산세가 험하고 거주민이 적어 국경도 비교적 허술한 동옥저와 말갈 땅으로 우회하여 낙랑국으로 월경했던 것이다. 도성을 떠난 호동왕자 일행은 산야에서는 사냥을 하고 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으며 동옥저와 말갈 땅을 거쳐 낙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동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가 어느덧 낙랑의 도성 교외에 이르게 되었다.
호동왕자가 낙랑 왕 최리를 처음 만난 것은 고구려를 떠난 지 보름쯤 지난 뒤였다. 어느 날 수백 명의 친위병과 근신을 거느리고 도성 인근을 순시하던 낙랑 왕과 강변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수상한 사내 수십 명을 발견한 낙랑의 군사들이 호동왕자 일행을 엄중히 포위한 가운데 낙랑 왕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일행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호동왕자의 앞에서 말을 멈추고 이렇게 물었다.
"혹시 그대는 북쪽 나라 고구려의 호동왕자가 아니오?"
호동왕자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니, 어떻게 처음 만난 저를 알아보십니까? 귀공은 누구신지요?“
“나는 낙랑 왕 최리라고 하오. 왕자의 풍모가 소문에 듣던 바와 같이 미목이 수려하니 어찌 몰라보리오! 고구려의 호동왕자가 천하의 미장부요 호남아라는 소문이 이미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있거늘, 내 비록 궁벽한 소국을 다스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몰라볼 수 있겠소? 그건 그렇고..., 그런데 고구려의 왕자가 무슨 까닭에 이처럼 갑자기 우리나라를 찾아온 거요? 사전에 한 마디 통보라도 있었다면 미리 접대 준비도 하고 멀리 마중도 나갔을 것을 말이오.”
“소생이 호동이 맞사옵니다. 그리고 미리 허락도 없이 귀국을 방문한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라옵니다. 봄 날씨가 하도 화창하여 수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겸해 유람을 나선 길이었는데, 귀국의 너무나 아름다운 산천경개에 취한 나머지 그만 우리도 모르게 국경을 넘 어선 것이옵니다. 이제 대왕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신다면 이 길로 돌아갈까 하옵니다.”
그러자 낙랑 왕이 두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만류했다.
“아니오! 이대로 돌아가면 서운해서 안 되지요! 누추하지만 나의 궁궐로 모실 터이니 여독도 풀 겸해서 며칠 쉬었다가 가구려. 귀국과 우리 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는 사이가 아니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했는데 그냥 돌아간다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소이까?”
그렇게 해서 호동왕자는 최리 왕의 초대를 받아들여 부하들과 함께 낙랑의 도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낙랑국 정탐이라는 막중한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몰래 성벽을 타넘어서라도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는데 이런 행운이 저절로 찾아오다니, 하고 호동왕자는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동상이몽이라고 최리 왕 역시 호동왕자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가며 매우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오늘 실물을 보니 과연 고구려의 왕자가 듣던 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미목이 수려한데다 행동거지까지 의젓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우리 공주의 배필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내 어떻게 해서든 궁궐로 데려가면 사위로 삼고 말리라. 그렇게 하여 요즘 한창 사방으로 기세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 왕실과 사돈만 맺게 된다면, 우리 낙랑국의 운명은 절대로 구다국이나 개마국 신세는 되지 않을 터.....
최리가 무단 월경한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호동왕자를 환대한 데에는 그와 같은 속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낙랑 관계가 험악한 사이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호동왕자가 용모와 재주가 빼어나 더없이 훌륭한 사윗감이요, 고구려와 사돈 관계를 맺어 국가안보를 도모할 저의가 없었다면 어찌 수십 명의 무리를 이끌고 국경을 몰래 넘어온 죄를 용서했겠는가.
그리고 최리는 자명고와 자명각의 경고를 받아 호동 일행의 월경(越境)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에서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에 관해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필자는 <삼국사기>가 전하는 대로 적군이 국경을 넘으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이 정말로 있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필자 나름대로 추리해본 결과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가 실은 낙랑국의 왕실 주술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주술사 부부의 점괘를 보고받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낙랑 왕은 며칠 전부터 순행(巡行)을 구실로 신하들을 거느린 채 강변을 오르내리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호동왕자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호동왕자가 어찌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가 이름과 같이 단순한 북과 나팔이 아니라 비상한 능력을 지닌 신통한 주술사라는 비밀을 알 수 있었으랴. 더군다나 자명고 부부의 정체는 낙랑국 왕실과 극소수 대신만 알고 있는 국가의 일급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궐로 돌아간 최리 왕은 호동왕자를 위해 푸짐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귀여운 외동딸을 불러내 호동왕자에게 인사를 시켰으니 그녀가 곧 오늘날 이름이 전해지지 않지만 낙랑공주로 알려진 바로 그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낙랑국의 공주가 고구려의 태자를 처음 뵙나이다. 소녀의 인사를 받으소서!”
낙랑공주가 부왕의 지시에 따라 호동왕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곱기 그지없었다. 호동왕자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하며 이렇게 응답했다.
“호동이라고 하옵니다. 오래 전부터 공주가 천하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참으로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과연 공주님은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답구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와 인사를 나누고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숨조차 금세 멎는 듯했다. 더구나 그에게 최상의 찬사를 받자 기쁨과 수줍음이 겹쳐 그녀의 얼굴은 이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동서고금 연령다소를 불문하고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기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너무나 짜릿한 충격이었다. 오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멋있는 사내가 다 있었던가! 준수한 용모에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의젓한 태도, 매끈한 말솜씨가 참으로 요즘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내가 아닌가!
호동왕자도 낙랑공주를 처음 만난 순간 공주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에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만남이었지만 두 젊은이는 마치 전생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던 것이다.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맛있는 술이 가득했고 선녀처럼 아리따운 무희들이 악공들의 간드러진 음악에 맞춰 잘록한 허리와 탐스러운 엉덩이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대며 요염하게 춤추며 돌아갔다. 낙랑왕 부부와 나란히 앉아 먹고 마시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만나자 마자 정분이 샘솟듯하는 모습을 보자 최리 왕의 기분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자 최리 왕은 마침내 감추고 있던 속셈을 털어놓았다.
“아, 참으로 오늘은 기쁜 날이로다! 자, 모두들 보라! 그 누가 이 두 사람을 보고 감히 하늘이 점지해준 한 쌍의 아름다운 짝이라고 아니하랴! 내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니 공주를 기꺼이 북국의 왕자에게 시집보내고자 하노라! 과인의 생각이 어떠한고?”
잔치판의 대신과 장수 모두가 낙랑왕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와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그것은 호동왕자가 거느리고 온 고구려의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잔치가 끝난 그날 밤 깊은 시간에 낙랑공주는 부왕의 명령에 따라 호동왕자의 침소로 찾아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꿈같이 황홀하고 꿀맛같이 달콤한 첫날밤을 보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이처럼 파격적이고 전격적이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한 탓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략결혼이 된 셈이었다. 며칠 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최리 왕의 궁궐에서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호동왕자가 예정에도 없던 혼례식을 치르고 아내가 된 낙랑공주를 데리고 낙랑국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은 신혼의 단꿈에서 채 깨어나기 전이었다. 최리 왕은 딸과 사위가 가는 편에 졸지(?)에 사돈이 된 대무신왕에게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는 국서와 더불어 따로 문안의 편지를 보냈고,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입수한 수많은 진귀한 보물을 선물로 딸려보냈다.
하지만 낙랑왕은 사위 호동왕자가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중한 결혼선물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고구려로 돌아갈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선물은 바로 낙랑국의 안보를 좌우하는 최고의 국가기밀인 자명고 부부의 정체였다. 호동왕자는 그 특급비밀을 신혼초의 잠자리에서 공주의 입을 통해 알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일설에는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하여 낙랑에게 청혼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삼은 뒤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자명고와 자명각을 파괴시켰다고 덧붙여 두 사람의 혼인이 결과적으로는 정략결혼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였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데리고 귀국하자마자 부왕을 알현하여 그 동안 낙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고한 뒤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혼인한 사실에 대해 죄를 청하면서 신부를 소개했다. 낙랑공주는 시아버지 대무신왕과 왕비들에게 차례로 절을 올리며 앞으로 고구려 왕실의 며느리로서 충성과 효도를 다 바치겠노라고 다짐했다. 대왕과 호동왕자의 모후는 공주의 빼어난 자태며 왕녀답게 우아한 기품을 칭찬하며 두 젊은이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단지 제1왕비만이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한바탕 요란한 신고식이 끝나고 궁궐 내에 신혼부부의 거처도 마련된 다음, 호동왕자는 밤이 깊은 뒤에 홀로 부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낙랑으로 떠나기 전에 부왕이 내린 밀명, 즉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맏아들 호동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난 대왕은 매우 만족스러워 호동의 노고를 거듭 칭찬했다. 낙랑국의 최고 기밀을 탐지해온 데다가 낙랑공주까지 아내로 맞아 데리고 온 아들의 활약이 그지없이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대무신왕이 호동왕자에게 낙랑국 정복작전의 총수를 맡긴 것도 그의 이러한 크나큰 공로에 대한 보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에는 또 다른 큰 의미가 있었으니, 만일 호동이 출전하여 낙랑국 평정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비록 적장자는 아니지만 왕위계승의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복동생 해우가 비록 적자라고 하지만 아직도 젖비린내나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말이다.
물론 고구려 조정에서 낙랑국에 대해 군사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회유작전을 펼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승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결혼을 계기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합병을 권고한 것이었다. 이제 사돈의 나라도 되었고, 그 일이 아니라도 본시 우리 고구려와 낙랑은 다 같은 조상의 나라 대조선의 후예요, 똑같이 한나라 오랑캐의 핍박을 받아 여러 차례 나라의 기업을 옮긴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양국이 나라를 합쳐 더욱 강한 국력으로 한나라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자는 것이 고구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하고 회유해도 낙랑왕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우리 낙랑은 한나라와 아무 원한이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해상을 통한 활발한 무역으로 나라가 점점 부강해지고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고구려에게 흡수당해 나라의 명맥을 스스로 끊을 것이냐고 펄펄 뛰었던 것이다. 귀여운 공주를 고구려에 며느리로 준 것도 두 나라가 평화공존하자는 뜻이었거늘, 그런 호의를 무시하고 되레 나라를 거저 삼키려 들다니, 이야말로 불한당이나 날강도같은 심뽀가 아니고 뭐냐면서 노발대발했던 것이다.
호동왕자도 낙랑공주를 시켜 친정아버지에게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게 했지만 돌아온 것은 딸을 꾸짖는 답장뿐이었다. 그따위 불충 불효한 편지질이나 한다면 부녀간의 인연을 영영 끊어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고구려가 마침내 설득을 단념하고 사신을 보내 그렇다면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하자 최리 왕은 천둥처럼 노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런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들을 봤나! 정 그렇게 나온다면 사돈이고 뭐고 이젠 끝장이다! 너희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쳐들어오려면 얼마든지 와봐라! 그리고 가서 전하라! 전에 했던 결혼은 무효다! 그러니까 우리 공주를 당장 돌려보내라고 전하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양국은 마침내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부왕으로부터 원정군 총수로 임명된 호동왕자는 출전에 앞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자명고와 자명각 부부 점쟁이의 제거였다. 비록 자명고와 자명각이 이름처럼 북과 나팔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비밀은 알아냈다고 하지만, 신통한 점괘로 적군의 침범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그들 점쟁이 부부를 미리 없애지 않는다면 큰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전에 앞서 호동왕자는 아내에게 이렇게 간절히 부탁했다.
“사랑하는 공주! 그동안 낙랑국이 당신의 친정이기에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두 나라를 합치고자 부왕과 내가 애썼던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거요. 게다가 당신까지 나서서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건만 장인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은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구려. 내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터이니 꼭 들어주기 바라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저는 당신의 아내인데 부탁은 무슨 부탁이어요? 무엇이든 분부만 내리시면 제가 어찌 왕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사오리까?”
“그렇게 이해해주니 고맙구려! 알다시피 이번 전쟁은 내가 총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오. 그런데 걱정은 당신네 나라의 자명고와 자명각 두 점쟁이요. 그들이 있는 한 우리 군사는 고전을 면치 못할 터이고, 어쩌면 나도 전사하여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라오! 아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오, 내 사랑 왕자님! 무엇이든 시켜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가리겠어요! 그 대신 꼭 살아서 제게 돌아오셔야만 해요, 아시겠죠 네?”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오! 어쩌면 당신의 목숨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오. 그래도 이 일을 하겠다면 내 말하리라. 이 길로 낙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 점쟁이 부부를 없애버리시오. 당신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겠소?”
이미 짐작하고 있던 말이었지만 호동왕자의 말을 들은 공주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조국이냐 사랑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운명의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여인이 어디 낙랑공주가 처음이던가. 공주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낭군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어찌 낭군의 뜻을 거역하리오! 그렇게 시키시는 일을 어찌 마다하리오! 다만, 소녀를 버리지만 않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아껴주신다면 반드시 그 주술사 부부를 처치하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낙랑공주는 호동왕자가 이끄는 고구려의 특공대보다 며칠 앞서서 낙랑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귀국하기 전에 남편 호동왕자와 미리 약조하기를, 낙랑국으로 돌아가면 최리 왕이 고구려의 청을 거절했으며, 그들의 혼인이 원인무효라면서 딸을 돌려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호동왕자에게 소박맞고 고구려 왕실에서도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왔노라고 둘러대기로 했다. 작별하기 전에 호동왕자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무 달 아무 날 새벽에 국경을 넘어 진격할 터이니 그 전날에 꼭 주술사 부부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작별을 했는데 그것이 이승에서는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두 사람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뭐라구! 고구려 놈들이 쳐들어왔다구?“
“대왕마마, 빨리 피신하셔야 하옵니다! 적군이 이미 도성을 포위하고 북문을 공격하고 있나이다! 일각이 급하옵니다!”
낙랑왕 최리는 급보를 받자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고 놀랐다. 고구려군이 언제 국경을 넘었으며, 어느새 수백 리 길을 무인지경을 가듯 달려와 도성 앞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자명고와 자명각 부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자 최리는 이내 대소 신하들을 버려둔 채 대궐 뒤쪽 깊숙이 자리잡은 신당(神堂)으로 달려갔다. 노한 얼굴로 신당 문을 열어본 낙랑왕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두 부부 주술사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고, 그들이 비상시에 두드리고 불던 북과나팔은 아무렇게나 찢겨지고 부서져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혹시 고구려의 첩자가 이 내밀한 곳까지 잠입했단 말인가.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설 정도로 분노한 최리가 시위대장에게 소리쳤다.
“너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시급히 조사해 보고하라!”
그 결과 진상은 이내 밝혀졌다. 범인은 바로 사랑하는 낙랑공주였다. 얼마 전에 돌아와서 호동왕자에게 소박맞아 친정으로 쫓겨왔다며 울고불고 하소연하던 낙랑공주가 바로 자명고 부부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이었다. 노발대발한 낙랑왕은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위무사들을 시켜 공주를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잡혀온 공주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천하에 몹쓸 년아! 사내에게 눈멀어 나라를 팔아먹다니,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랄 터이냐? 넌 이미 내 딸도 아니고 낙랑국의 백성도 아니니 내 손에 죽어 마땅하리라! 예라, 이 천하에 죽일 년아!”
그리고 분에 못 이겨 보검을 빼어들고 공주의 목을 힘껏 쳐버렸다.
호동왕자와 직속 무장들이 성문을 돌파하여 궁궐로 뛰어든 것은 공주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궐내를 뒤지고 다니며 공주를 찾아 헤매던 호동왕자는 마침내 낙랑 왕과 신하들이 몰려 서 있는 후원에 다다랐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낙랑공주가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져 뒹구는 참혹한 모습을 발견했다. 살기등등한 고구려 군사들을 보자 낙랑의 대신과 친위대 모두가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을 했다.
이렇게 아내의 희생을 발판삼아 낙랑국의 도성을 점령하고 승리를 거둔 호동왕자는 최리 왕과 대신들, 수천 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위나암성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또 다른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동왕자가 낙랑국 정벌이라는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자신의 아들 해우가 왕위 계승은커녕 목숨마저 위태롭게 됐다는 생각에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 제1왕비가 호동왕자를 제거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루도 쉴 새 없이 대왕에게 호동왕자를 모함했다. 호동이 전공을 세운 것을 기화로 기고만장하여 정비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회만 있으면 적자인 해우를 해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대왕이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않자 더욱 애가 탄 제1왕비는 이번에는 호동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소리까지 지어내 대왕에게 울고불고 하소연했다. 참을 수 없게 된 대무신왕이 마침내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다 하오? 황후의 체통을 지키시오! 호동은 결코 그럴 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시오!”
대무신왕은 그렇게 호동을 감싸주었다. 하지만 듣기 싫은 노래도 여러 차례 들으면 화가 나는 법이 아닌가. 또 예나 이제나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도 하지 않던가.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그만 하라고 무시하고 화까지 냈건만 매일 밤 울며불며 호동을 모함해대니 마침내 대왕도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날 호동을 불러 제1왕비의 말을 전하며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호동이 울면서 부왕에게 고했다.
“부왕께서는 이제 소자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후께서 비록 저를 낳아주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어머니인데, 소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머니의 허물을 들어 헐뜯는 짓이 될 터이고, 그렇데 되면 대왕께서 걱정을 하실 터이니 소자가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 있사오리까?”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들 호동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여 대무신왕도 더 이상 추궁을 못 하고 그만 물러가라고 일렀다. 그때 대무신왕이 끝내 호동왕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결국 왕실의 평화를 위해 적자 해우의 후계권을 인정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한 호동왕자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므로 부왕의 앞을 물러나 어머니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올렸다.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어머니는 그저 비오듯 눈물만 흘릴뿐이었다.
호동왕자는 평소에 가장 아끼던 노복 하나를 데리고 성문을 나서서 강변으로 향했다. 호젓한 강변에 이르자 호동왕자는 노복에게 자신의 장검을 빼어서 쥐어주며 칼끝을 꼿꼿이 세운 채 들고 있으라고 시켰다. 그리고 몇 걸음 물러났다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그 칼에 스스로 가슴을 박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호동왕자는 먼저 간 낙랑공주의 뒤를 따라 이승살이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사랑하던 낙랑공주를 잃은 뒤 호동은 왕자의 신분도 싫었고 대고구려의 왕위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추악한 현실에 진한 환멸을 맛본 까닭에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호동의 자살사건이 대무신왕 15년(32년) 11월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달에는 해우를 태자로 책봉했다고 했다. 또한 그로부터 5년 뒤에는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러니까 낙랑은 그때 호동왕자가 이끈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은 한바탕 비극으로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가인박명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랑공주와 적장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난 비운의 사나이 호동왕자의 구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사연은 2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함없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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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어도 후한 시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숱하게 나온 낙랑 유물은 뭐로 설명해야 할까요? 낙랑국은 옥저 지역이거나 아니면 낙랑군이 흔들릴 때 잠시 독립한 세력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는 백제는 낙랑군의 태수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태수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신라로 낙랑 대방이 귀부한 것은.. 낙랑 대방의 유민이 넘어온 것을 신라가 과장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는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국왕의 딸이 공주지 태수의 딸이 공주입니까? 낙랑공주 설화에 낙랑태수란 말이 어디 있습니까?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낙랑이 옥저 지역에 있었다거나 잠시 독립한 세력 정도로 추정한 근거가 있습니까? 자기 추정은 맞고 남의 설은 틀렸다는 건 무지와 오만입니다.
당시 평양에는 한이 설립한 낙랑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낙랑군이 케어하는 범위가 생각보다 큽니다. 당장 백제가 충돌하고 있으니까요. 옥저 지역에 있었다는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전한이 망하고 왕망의 신이 들어설 때 낙랑군 역시 일시 본국의 혼란상을 등에 업고 독립합니다. 물론 정신을 차린 본국이 재수습하는데.. 이 때 동부도위 지역을 본국인 한이 포기합니다. 이 동부도위 지역이 옥저 지역이고... 이 동부도위가 낙랑국이었다 보는 것입니다. 실제 삼국사기에도 호동이 옥저를 순행하다 낙랑왕을 만났다고 하지요. 이 점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지요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단정하시는데, 한나라 무제가 북한 평양에서 전쟁해서 땅을 차지했다는 이야기인데 위만의 손자 우거정권이 북한 평양에 있엇다는 증거있나요?
이게 아니라면 그저 낙랑군 일부 지역이 잠시 독립했는데 그 때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닏나. 요는 평양 지역에 낙랑이라는 중국 군현이 있었다는 증거가 너무 명확하니 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민담에서 지방 유력가의 딸이 공주로 둔갑되는 것은 꽤 흔한 일입니다. 낙랑의 공주와 호동왕자 역시 민담 형식의 구전을 거쳐 문서로 정리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백제가 시달리는 낙랑은 낙랑군입니다. 분명히 낙랑의 태수라고 언급이 되어 있거든요.
한사군은 요서지역에 있었지 한반도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일제식민사관입니다. 평양에 있었던 것은 최리 왕의 낙랑국입니다. 윤내현 선생의 한국열국사연구를 읽어보시오! 이름이 일본사람 같군요!
@평해거사 그럼 평양에서 발굴되는 유물은요? 낙랑군 문제와 식민사관은 전혀 상관 없습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낙랑국 위치는 좀 엇갈립니다
@노하라신노스케 참 웃긴 게 저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툭 하면 식민사학으로 몰고가지요.
(마치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너 빨갱이지? 너 반동분자지? 하면서 몰고가는 것처럼.)
게다가 토론을 벗어나서 이상한 꼬투리를 잡기도 하고...
노하라님이 꼬투리 잡힌 닉네임의 경우 일본 만화 캐릭터 이름을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국이든 서양이든 얼마나 많은데...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친일파 내지 의심스러운 사람인가 봅니다.
무엇보다 낙랑군 평양설은 정약용, 한백겸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주장한 내용이니 저 주장대로라면 실학자들도 식민사학에 물들었다는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되지요.
@노하라신노스케 저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제 중딩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저도 환단고기, 규원사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광활하고 웅장한 대륙백제니 드넓은 최강대국 고구려니 강단학계는 식민사학이니 하면서 대륙적인 환상을 신봉했었거든요.
뭐, 지금은 과거의 흑역사지만요.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군데라 신뢰하긴 이릅니다.중국땅에도 평양이 많이 나오니까요.옥저가 중국 강소성 동해에 위치하니 그 근방 쯤 낙랑이 있지 않나요?
옥저가 중국 강소성...
너무 어이없어서 할 말을 잃었슴돠.
저는 평해거사님에 한표!! 평양이란 지명은 아사달과 같습니다 그것을 한자식으로 표현 했을뿐입니다
지금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유물이 나왔다고 거기가 낙랑이 될수는 없지요
하기사 경주에도 흉노 아띨라 칼과 비슷한것이 발견 되었는데 그렇다면 아띨라가 경죽까지 지배 했다는 말인가?
공주에도 양나라식 문물이 발견 되엇다면 양나라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진니라 한나라 시절 중국에서 전쟁을 피해 이주를 많이했고 그들 후예가 교역을 통해 얼마든지 반입할수 있습니다 윤내현 교수님 논문도 요동에 낙랑과 평양에 낙랑은 다르다고 하는 논문이 있던데
거기서 나온 유물이 단순 문화 교류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니까 문제입니다. 낙랑군 유물은 지배했다 정도의 수준입니다
@노하라신노스케 그게 구체적으로 뭔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