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세월의 빠른 흐름과 변화하는 계절의 오묘함을 감지하는 능력이 좀
더 예민하게 발달해 간다는 것이다. 또 한해한해가 지나갈수록 더불
어 늘어가는 아내의 눈언저리 주름과 뚜렸했던 얼굴의 외곽선이 점
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 '더 세월이 가기전에....'
"일어나야지..!"
아내의 다그치는 목소리를 듣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5시 30분
엊저녁 내가 아내에게 아침 일찍 출발하자고 말한 것은 8시쯤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9시쯤 출발해도 늦지 않는다는 요지의 발언이었건만,
아내에게 일찍이라는 의미는 나와는 판이한 것이었나 보다.
하긴, 거의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도봉산을 휙하니 한바퀴 돈 다음,
남들 하나둘 깰 시간인 7시, 약수물 한 가방 짊어지고 집에 들어오는
여인네고 보면 사실 5시 30분이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아내는 오늘도 여지없이 새벽 4시쯤에 일어난 모양이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보니 벌써 여행가방을 두 개나 챙겨놓았는데 그
안을 보니 코펠, 버너, 컵라면, 밑반찬 등이 가지런히 챙겨져 있다.
게다가 이미 꽃단장까지 마치고 씨익~ 웃고 있지 않은가.
서두르지 않으면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아내에게 핀잔을 듣겠다 싶어
후다닥 욕실로 들어갔다.
출발
7시 정각, 도봉산 자락 아래 내 조그만 움막집을 박차고 여행길에 오
른 정확한 시각이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시각의 개념은 모두 대충이
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배낭에 넣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은
해시계에 맡기기로 한다.
우선 기름 가득, 4만 5천원. 휴~ 소형차이기 망정이지. 10년전만 해도
여행경비에서 기름값이 차지하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숙박비,
식비 등이 여행경비의 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기름값이 그 자리
를 대신하고 있다. 돌아 다니는 것이 취미인 나의 인생역정에 딴지를
걸어 적잖이 방해를 놓은 것이 있으니 바로 이 기름값 때문이다.
축석령 고개, 직동리 카페촌, 수목원, 광릉, 봉선사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가는 고개를 일러 축석령이라 한다. 축석령을
끝까지 올라 군경 합동 검문소에서 바로 우회전하면 세조의 능인 광
릉과 수목원으로 가는 길이다. 아내의 고향이 포천하고도 일동이라는
곳에 위치하므로 처가집을 갈 때면 축석령에서 곧바로 직진하여 갈
가수도 있으나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이 길로 돌아가곤 했었다. 그 만
큼 이길이 정겨움과 시골스러움을 간직한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전국의 카페화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이곳도 카페천국이다. 20여년 전 양수리를 기점으로 카페가 하나 둘
씩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 양평, 미사리, 장흥으로 번지고 다시
이곳 직동리까지 카페가 양산되면서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든 엄청난
규모의 카페를 흔히 볼 수 있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곳이 송추계곡 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교외선을
타고 자주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중에 장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장흥역에서 내려 조그만 역사를 나오면 그리 크지 않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 벤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벤치에 아내를
앉혀놓고 수선화라는 우리가곡을 불러주어 아내의 환심을 산 적이
있다. 아내와 결혼하고 꽤 오랜시간이 지나 옛 추억을 더듬어 그곳을
찾았을 때의 그 황당함이라니.... 장흥은 이제 벌건 불야성 속에서 한
적하고 고즈녁하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이섬
아뭇든 카페촌 직동리와 수목원, 광릉,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기거했
던 봉선사를 지나면 철원, 화천으로 가는 훤히 뚫린 47번 국도를 만
나게 된다. 한 걸음으로 달음쳐 가면 다시 사거리를 만나게 되고 현리,
가평 쪽을 가는 길로 우회전하면 37번 국도다. 그 길을 따라 내쳐 가
면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일명 경춘가도인 46번 국도를 다시 만나
게 된다. 가평에 다와서 남이섬을 둘렀다 갈 요량으로 갔더니 주차요
금이 거금 4,000원, 잠시 둘렀다 가기에는 주차요금이 아까워 바로
돌아 나왔다. 학생 때 MT가 생각나 들렀던 것인데 나오다 보니 지금
도 MT장소로 많이 애용되는 듯 학생들이 줄줄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강촌
다시 경춘가도(예전 길이 확장되기 전까지는 북한강 줄기를 옆으로
끼고 달리며 한껏 아름다운 북한강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경춘가도
라는 도로명이 이름값을 하였으나 확장된 지금은 강 위로 난 도로
때문에 정작 강변의 풍경을 볼 수 없다.)를 달리다 강촌 유원지를 들
렀다. 이곳도 역시 많이 변하기는 하였으나 북적대는 지역을 지나면
아직 농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논 밭 사이 좁은 소로와 강
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기에 그만이다.
여행지에서 자전거 타기가 본격적으로 붐을 일으킨 곳은 아마도 이곳
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경주와 제주가 유명하긴 하지만 경주는 아직
자전거 도로가 좁고 곳곳에 장애물이 있어서 위험스러운 곳이 많고,
제주도는 해안선 일주도로와 곳곳에 자전거 도로를 설치하여 자전거
여행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특히 바닷가에 바로 면한 이호와 애월
사이의 구엄이라는 곳은 자전거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넓은 바다와
빼어난 해안 경관을 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자전
거 도로가 자동차 길 옆에 있기 때문에 위험은 언제나 상존해 있다.
그렇지만 이곳 강촌은 북한강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어서 경관면에
서 다른 곳에 뒤떨어지지 않고, 위험이라는 면에서는 경주와 제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다. 자전거만 다니는 논 밭 사이로 난
길을 다닐 수 있으니 도시의 아이들이 농촌의 풍경과 시골스러움에
젖어들 수 있다는 면에서도 비교적 좋은 곳이다.
중앙고속도로 시발
지금까지 거친 곳은 모두 세월이 오래 지나긴 했지만 예전에 서너 번
씩 들렀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타게될 중앙고속도로는 생전 처음 가
는 곳이다. 춘천에서 대구까지 km 과연 어떤 고속도로일까.
처음 중앙고속도로를 착공할 당시 그 높은 산악지대에 어떻게 고속
도로를 뚫을 수 있을까 긴가민가했었다. 그러나 결국 해내고야 말았
다. 고속도로는 이내 높이 솟아 산악지대를 뻗어 가는데 마치 비행기
를 타는 기분이다. 저 멀리까지 산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모
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4월, 스치는 산마다 군
데군데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나고 이제 막 피어나는 연초록의
잎새들이 나무가지 끝에서 잔치를 하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이
런 고속도로가 있을 수 있을까. 고속도로가 거의 7부 능선상으로 계
속 이어지는 이런 고속도로가 또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외국여
행을 가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런 고속도로는 지금
달리고 있는 중앙고속도로가 유일하지 않을까. 차량도 많지 않아서
규정속도보다 느리게 달리며 주변경관을 볼 수 있었다.
홍천강 휴게소
어느 만큼을 달려오니 홍천강휴게소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휴
계소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휴게소는 상행선쪽에 있고 하
행선에는 휴게소가 없었다. 알고보니 차를 주차시키고 사람은 지하통
로를 통해서 건너편 휴게소를 가야 하는 것이었다. 속도를 내고 달리
다가는 깜빡 놓치고 다음 휴게소를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다행이 속
도를 많이 내지 않아서 50여미터 쯤 지나쳐 후진하였다. 마침 따라오
는 차가 없어 후진의 위험성은 없었다.
휴게소 이름은 말 그대로 홍천을 지나가는 강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휴게소 옆에 반짝반짝 빛이나는 건강한 소나무를 일렬로
식재하였고 조그만 정원도 조성해 놓았다. 조성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아직은 조금 썰렁한 감이 없지 않으나 후년 쯤부터는 아담한 정원으
로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주변의 경관은 아마도 전국 고속도로 휴게
소중 으뜸이 아닐까 싶다. 주차장 앞쪽으로 홍천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흘러가고 있고 강변 동쪽기슭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나온 수목원의 왕숙천이 가뭄으로
메말라 버린 것과 같이 이곳 홍천강도 수량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
다. 비가 와야 할텐데.....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담배 한 대를 피
워 물었다.
수없이 많은 터널
고속도로는 계속 산악지대를 지난다. 저 멀리 아스라하게 시골 농가
가 보인다. 산과 산 사이의 높은 곳은 아마도 엄청 긴 교각을 세워
놓았으리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속도로는 아마도 지상으로 가는
길보다 산 밑으로 가는 길이 더 많으리라. 그렇게 높은 곳으로 만
가는데도 홍천강휴게소에서 섬강 호저대교를 지나 치악휴게소까지
모르긴 해도 10개 이상의 터널을 지나갔을 것이다. 외국인이 이 고
속도로를 타게 된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젖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중앙고속도로가 외국인에게 관광코스로 자리매김할 때가 오리라. 지
나친 환상일까.
아름다운 경관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중간중간 잘도 존다. 수시로 깨
워 이것봐라 저것봐라 주문을 해 보지만 역부족. 아무리 좋은 것도
아내의 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나 역시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운전을 하면서 졸음이 온다. 치악휴게소에 이르러 잠시 눈을 붙였다.
단양휴게소
북단양을 지나자 단양휴게소가 나타난다. 이곳은 도로에서 한참을
돌아 들어가야 나타난다. 얼핏 처음 가는 운전자는 길을 잘못 들었
나 싶을 정도로 돌아 들어간다. 한참을 돌아들어가면 거기 단양휴게
소가 아담하게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도로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주행차량의 소음이 들리지 않고 사방은 산이 둘러쳐저 있다.
휴게소 왼편에는 산책로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오른 편으로
는 몇몇 놀이기구를 갖춘 아이들의 놀이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장
애인만을 위한 특별 화장실도 설치해 놓았다. 또하나 단양휴게소의
특징이라면 화장실 안쪽 벽면에 큰 유리창을 설치하여 화장실이 자
연 채광으로 밝게 보인다는데 있다. 화장실은 보통 입구를 통해 들
어가면 안쪽은 폐쇄되어 있고 정전이라도 된다면 암흑으로 변하
기 쉽상이었고, 또한 휴게소의 개념에 화장실은 항시 소외되는 것이
상례였다. 근래들어 화장실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비단
고속도로 휴게소 뿐만이 아니라 전철 화장실, 공공 건물의 화장실
이 깨끗하고 아늑하게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처럼 화장
실 안쪽에서 밝게 빛이 들어오는 곳은 처음이다. 단양이라는 이름의
지명에서 오는 깨끗하고 단아한 이미지는 아마도 이곳 단양휴게소에
서부터 풍겨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처음의 이미지가 줄곧 어떤
이미지의 반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지 않던가.
단양역
단양 인처테인지에서 빠져나와 단양 신시가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단양역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보통 여행객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상인 곳이지만 이곳을 꼭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벚꽃나무 몇 그루에는 한참 벚꽃이 무르익었
고 역 마당 한 켠에는 기차를 개조하여 카페를 만들어 놓았다. 정원
에는 단양을 대표하는 기암괴석의 모형을 만들어 놓아 단양을 찾는
여행객에게 귀중한 여행정보를 안내하고 있다. 작은 역사로 들어서면
한 쪽에 조그만 모형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탑승대기자를 지루하지
않도록 하려는 작은 배려가 엿보인다. 개찰구는 개방해 놓아서 누구
나 안쪽으로 들어가 저 멀리 이어지는 철로의 아스라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고 물레방아를 설치해 놓아 그 옛날 물레방아 찢던 고향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일본영화 철도원에서 보았던 아담한 역사
를 바로 단양역에서 볼 수 있었다.
단양 신 시가지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 바로 우회전하면 단양 신 시가지이다.
남한강을 오른편으로 끼고 들어가면 남한강을 볼 수 있도록 정자가
지어져 있고 예외없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산책코스로 적격이다.
정자에 올라가 강 건너편 비교적 높은 산의 꼭대기에 둥그런 집이 있
기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저곳이 무엇하는 곳이냐 물으니 목장이
라는 사람도 있고 기상대라는 사람도 있고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
고 천양지차다. 단양사람이라면 늘상 보던 것일텐데 왜 모르는 것일
까 의아심이 든다. 그러나 실상 어떤 곳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제주도 사람들이 의외로
한라산을 올라가 보지 않았고 그 아름답고 신기하기만한 오름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나도 역시 어릴 적 관악산을 내집처럼 오
르내리고 지금 서울대 입구에 있던 개천에서 멱 감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늘상 내 곁에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았지 그것이
소중한 무엇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연은 그
자체로 거기 있을 뿐 뽐내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아름답다하고 이쁘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만큼 오늘날 현대
인들은 오염된 도시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오염
된 세계속에서 잠시 나와 자연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아름답느니 장관이니 경탄해 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석회동굴군
단양은 단양팔경과 돌 이외에 동굴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고수동굴,
노동동굴, 천동동굴, 온달동굴이 그것이다. 고수동굴은 예전에 보았던
터라 오늘은 노동동굴과 천동동굴을 관람하기로 했다. 고수동굴에서
국립공원 소백산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천동동굴이 나온다. 천동동굴
은 동굴이 좁아서 머리가 부딪치고 수시로 머리와 허리를 굽혀 통행을
해야만 한다. 특히나 초입에서 좁은 통로를 기어들어갈 때는 어릴 적
물없는 하수구를 드나들며 가졌던 그런 두려움이 업습해 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좁은 곳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더구나
깜깜해지기까지 하면 그런 곳에서 과연 나는 얼마만큼이나 버틸 수 있
을까. 굴을 지나가면서 괜한 생각을 해 보았는데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자유를 포박당하고는 절대로 살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이미 나는 6개월
이라는 기간동안 자유를 포박당한 경험이 있고 지금 하는 일은 또 남의
자유를 포박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아니러니가 아닌가.
예전 고수동굴에서 보았던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회암 생성물과는 다르
게 천동동굴과 노동동굴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또한 고수
동굴에 대한 이미지가 나의 뇌리속에 벗겨지지 않아서 생긴 고식적인
사고방식의 전형임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산속에 그런 굴이 생성될 수
있었던 자연의 오묘한 조화 그 자체가 얼마나 신비한 것이냐.
양방산 정상
노동동굴을 관람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가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 들었
더니 의외로 길은 아까 강건너 편 정자에서 보았던 강가의 좁은 소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산 정상에 둥그렇게 지어진 집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소로를 따라 가다보니 과연 거기 산으로 오르는 좁은 콘크
리트 길이 나 있었다. 급경사를 따라 계속 올라가 정상에 도착할 수 있
었다. 저 아래편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큰 둥그렇고 견고하게 생긴 3층
집이 떡허니 버티고 있었다. 정상은 의외로 썰렁하고 바람까지 거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양방산 정상 662미터'라고 쓴 표지판과 정
상을 편평하게 고른 것이며 정상에서 아랫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가파
른 것으로 보아 필시 행글라이딩이나 패러글라이딩 등 스카이 스포츠를
하는 곳이 분명했다. 건물 1층에는 아무도 없고 2층에도 아무도 없고 3
층을 기웃거리고 있으려니 얼굴이 새까만 젊은이가 나왔다.
"구경좀 하다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양방산 정상,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건물 3층에서 내려다 보는 단양지역
과 그 주변의 산세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단양 신시가지를 U자형으로
감싸고 도는 남한강 줄기며 거뭇거뭇하게 비추이는 수많은 산들. 그 산
들은 거뭇거뭇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곳 3층집은 패러글라
이딩 강습소였다. 젊은이는 패러글라이딩을 가르치는 강사이고 건물을
관리하면서 이곳에서 산다고 자신을 소개해 주었다. 우뚝우뚝 솟은 산들
을 가리키면서 저 곳이 영월, 저 곳이 제천이라면서 패러글라이딩을 타
고 그런 곳까지 다녀온다는 말을 했다. 1800미터 상공까지 날아올라 저
아래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개미같다고나 할까, 그는 패러글라이딩
의 묘미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운무가 낀 날 구름위를 활강할 때의 기
분은 뭐라 표현키 어렵다고.... 벽에 걸어둔 그의 사진을 보니 마치 탤런
트 이병헌처럼 잘 생겼다. 얼굴이 햇빛에 탄 검은 얼굴 때문에 다소 인
상이 강하게 보일 뿐 타지만 않았다면 이병헌보다 더 미남이리라. 초보
자를 태우고 2인승으로 비행이 가능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얼른 아
내를 좀 태워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한 번 시승에 5만원이라고 했지
만 저 높은 곳에서 새처럼 날아다니는 짜릿함을 맛보기에 결코 아깝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날은 바람이 너무 심하고 기류가
복잡해서 비행할 수 없는 날이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나에게 선생님이냐고 물어왔다. 여행다닐 때 음식점 아주머니와 시골길
에서 태운 학생들로부터 선생이냐는 질문을 많아 받아 왔던 터, 이제는
그런 질문이 낯설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왜 나에게 선생이냐는 질문을
자주하는 것일까. 그럴 때마다 나는 참 난처한 입장에 처하곤 한다. 그
냥 선생이라고 대답하면 넘어갈 수 있으련만 선생이라고 답하지는 못하
고 그렇다고 직업을 솔직히 말하자니 그것도 영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와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오면서 벽에 걸린 강사자격증을 보니 '함
영민'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얼마
전에 자신이 TV에 나왔고 또 얼마후에는 방송국에서 촬영하려 올 것이
라 한다. TV를 영판 보지 않으니 그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
다.
영주 부석사
왔던 길을 되돌아 단양 인터체인지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탓다. 어디
서 또 빠져 나갈까 궁리하던 차에 부석사에 가기로 했다. 풍기를 지나
영주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왔다. 빠져나오고 보니 아뿔싸 부석사는 영주
에서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오히려 풍기에서 빠졌어야 했다. 부석사는
그 고유명사앞에 항시 영주라는 지명이 따라 다녀 부석사는 당연히 영
주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중앙고속도로에서 가려면 풍
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단양도 마찬가지로 북단양에서 빠져나와와 더
빠르다.
부석사는 아내가 좀더 젊은 시절에 같이 여행왔던 곳이고 내 혼자서도
두어 번은 더 왔던 곳이다. 아내와 처음 부석사를 찾아 왔을 때 길을
잘못들어 비포장도로를 밤새 달렸던 기억이 있고 깜깜한 밤중이 되어
서야 부석사 입구에 도착, 지금의 종점식당에서 민박을 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아직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안개 교교한
부석사 길을 걸어오를 때, 그때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부석사 입구
민가에서부터 매표소를 지나 경내 양편에 이르기까지 새빨간 사과가
무수히 달려 있었다. 나는 일주문 옆 잔디밭에서 아내의 사진을 찍어
주었었다. 지금 그때의 사진을 보면 안개가 연기처럼 가시지 않은 모
습이 보이고 그 안에 마치 중국 경극속의 여인네 처럼 하얗게 분장한
아리따운 아내가 거기 서 있다. 안개가 아내의 얼굴을 하얗게 분장해
준 것이고 아내는 덕분에 사진발 끝내 주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만 해도 부석사가 왜 좋은 절인지를 잘 몰랐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부석사에 있다는 것을 배운 것
이외에 부석사에 대해서 알고 있던 상식이 없던 터였다. 부석사를 몇
번 더 찾고서야 부석사가 여느 절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부석사는 층층이 계단을 통해서 본전인 무량수전까지 닿
을 수 있고 범종루와 안양루의 높은 누각 아래로 사람이 통행하도록
하였고 무량수전에 모시는 부처님은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라는 점, 부처님이 남향을 하고 있지 않고 서향을 하고 있다는 점, 의상
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의 종찰이라는 점 등, 학술적인 것은 차치하고서
도 본전인 무량수전의 전통 불교가옥으로서의 단아함은 우리나라의
목조건물중 최고(最古)라는 칭호를 봉정사의 극락전에게 넘겨주고서도
최고(最高)라는 점에서는 역시 그 명칭에 걸맞는 것이다. 또한 국보급
문화재를 많이 보유한 귀한 절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뜸해 어느 절
보다 조용하고 고요하다는 점에서는 단연 으뜸이었다. 이러한 부석사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불과 몇 년 전에 왔을 때에도 입구쪽에 약간의 변화
가 있을 뿐 그리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런 부석사에 대한 나의 기대는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저녁 6시가 다 되었는데도 관광객은 북적거렸고 주차장을 넓히려 부산
히 공사차량이 웅웅거렸고, 절 입구의 사과밭은 완전히 파 헤쳐져 무슨
연못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부석사 안내도에는 텔레비젼 드
라마 왕건을 찍었다는 커다란 사진을 붙여놓지를 않았나, 더더욱 가관
인 것은 저녁 6시 30분 예불시간에 목어와 운판, 큰 북을 두두리고, 범
종을 타종하는 4물의 예식이 벌어지는 있는 중에 관광객이 떼지어 몰
려와 사진을 찍질 않나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지를 않나 부석사는
완전히 돋떼기 시장판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모두 중앙고속도로 덕분이었다. 나 역시 그 고속도로를 타고
이곳까지 쉽게 오지 않았던가. 허허~ 웃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절
은 이제 주차비와 관광객 입장요금으로 점점 더 부자가 될 터인데 그러
면 절 주지스님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지으실까 아니면 짐을 싸고
다른 절로 정처없는 피난길에 오르실까. 부석사에서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것은 아내와 처음 왔을 때 민박을 했던 조그만 '종점식당'이 그 상
호를 여지껏 버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 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절을 나오는데 절 집 흰 강아지가 관광객이 버리고 간 프라스틱 콜라통
을 연신 빨아 대면서 달작지근한 맛에 도취되어 있었다.
안동의 어느 모텔안 풍경
또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풍기인터체인지를 통하여 중앙고속도로를 진
입 내쳐 안동으로 달렸다. 안동으로 빠져나가려면 서안동, 남안동 두 곳
이 있다. 가고자 하는 곳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그리고 하회마을이다.
망설인 끝에 남안동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왠걸, 또 잘못 나왔다. 병
산서원과 하회마을은 서안동에서 나와서도 더 서쪽으로 가야 하거늘 남
안동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일단 도산서원쪽으로 가서 숙박을 정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해장국으로 저녁식사를 한 다음 주유소에 가서 물으니
도산서원쪽에는 숙박할 장소가 없단다. 날은 저물고 다시 안동시내로 돌
아와 모텔을 잡았다. 모텔 주인은 우리가 무슨 심상치 않은 관계로 알았
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침대방은 없단다. 요상한 짓거리 하는 사람
들은 주로 침대를 이용하나 보다. 하지만 우리 부부 모두 침대를 집어치
운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방은 널찍했다. 내가 먼저 옷벗고 씻고 그리고
이어서 아내가 옷벗고 씻고 그다음은? 그동안 아내와 여행을 다니며 여
관에 들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건만 이번은 왜 그리 어색하던지. 하
긴 아이가 없이 단 둘이 여관방에 들어온 것은 결혼전 그 짓하러 몇 번
들어간 이후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요즘도 그 짓 할 때면 불을
끄라고 한다. 불을 껏더니 너무 깜깜하다. 도시 뵈는 게 없다. 커튼을 젖
혔더니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그런대로 분위기 삼삼하다. 드디어 대망
의 그 짓거리는 시작되고.... 아내는 그 짓거리를 매냥 요구하는 타입도
아니고 식사하듯이 정기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터이나 일단 짓거리가
시작되면 절대 토끼같은 짓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차라리 처음부
터 시작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으기 신
경이 쓰인다. 일단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아랫도리에 힘을 뺀 다음
요가하듯이 마음을 조절해야 한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짓거리는 시작되고.........
드디어 아내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손으로 허리를 감아 잡아당기는데 어
떻게나 힘이 센지 허리가 분질러 질 것 같다. 그리고 이내 예의 그 뻐꾸
기 소리 뻐꾹뻐꾹.... 그러나 나까지 그 소리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정신
을 가다듬고 다시 아랫도리의 힘을 빼야한다. 아내의 뻐꾸기 소리는 점
점 더 도를 더해가고 나는 옆방에서 누가 들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부부의 정당한 관계를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나는 아내가 스스로 그칠
때까지 쳐다만 봤다. 일을 마치자 마치 폭풍이 지나친 것 같다. 부부
관계는 역시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나만이 아닌 상대의 기분도 맞추어
가며 진행해야 하므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 다시금 생각하
게하는 밤이다.
"좋았어?"
"..........."
"좋았냐구?"
"드르렁 헐헐~"
정말이지 아내에게 졌다 졌어. 내 기술의 완벽성을 확인할 요량으로
어렵게 질문을 던졌더니 그새 떨어져 코고는 소리로 화답을 하는 것이
다. 으하하~ 위대한 나의 아내여.
단비가 내리고
여행중에도 역시 아내의 기상 시간은 장난이 아니다. 아내가 창문을
열고 "비가 온다"고 외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깨고 말았다. "비가
온다구?"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밖에 손을 내어 보았다. 분명
비가 오고 있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여행을 다니던 중 가장 기쁜
순간이다. 이런 걸 일러 단비라고 하는가 보다. 얼마나 기다렸던 비
님이신가. 아내는 이내 버너를 꺼내더니 어제 부석사입구에서 시골
아낙에게 샀던 고구마를 찐다. 방안에 고구마 냄새가 진동한다. 구수
한 냄새다. 방안에서는 고구마 냄새가 나고 밖에서는 단비가 주룩주
룩 내리는 아침. 아내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 찌는 그릇을 연신
들었다 놨다한다. 방안과 방밖의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는 나는 어찌
아니 행복할 것인가. 아침은 고구마로 간단히 해결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을 가기전에 도산서원을 다녀오리라 했지만 도산서원은 일단
일정에서 빼기로 했다. 두 서원이 안동의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고
일정상 어쩔 수 없이 두 서원중에서 한 개를 선택하라 한다면 오늘
만큼은 망설임없이 병산서원을 고를 것이다. 왜냐하면 학술적으로야
퇴계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이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보다야
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미란 어디까지나 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오늘은 아내와 같이 왔고 아내는 학술적인 것 보다 경치를 더 우선으
로 칠 터이니 그렇다면 병산서원보다 더 아름다운 서원이 어디 있으랴.
병산서원은 하회마을 넘어가는 조그만 고갯길을 넘기전에 좌회전하여
비포장도로를 따라 낙동강을 좌로 끼고 10여리 이상 가야한다. 그러나
그 십리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너른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쉬엄쉬엄
가도 어느새 병산서원에 닿는 것이다. 병산서원에 도착하자 나의 기대
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내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얼마나 다행스러
운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미적 감각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런 곳에 데
려다 놓았는데도 그져 무덤덤하기만 하다면 그런 낭만도 없는 여자와
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나는 비가 내리는 병산서원의 이모저
모를 아내에게 설명해 주었다. 비록 아내가 서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배려를 보여주기 위한
설명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귀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다. 그러더니
아내는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그 물줄기를 따라 깍아
지른 듯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서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연신 내 팔을 꼭 붙잡는다. 나는 안다. 그것은 자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해 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리라. 나는 아내를 병
산서원 주변 구석구석까지 보여주었고 비오는 넓은 낙동강 모래사장
위를 우산을 나누어 쓰고 한참동안 걸어 다녔다. 아내는 내 팔을 자신
의 가슴으로 감싸안고 떨어질 줄을 모른다. 엊저녁 일을 멋드러지게
치루었건만 괜스리 아랫도리가 일렁거린다.
하회마을
나는 안동을 올 때마다 하회마을을 그냥 지나치곤 했다. 사람들이 말
하기를 하회마을은 볼 게 전혀 없다는 말을 나는 곧이 곧대로 알아
들었던 때문이다. 충청도 외암리 민속마을이 그렇고 제주도 민속마을
이 또한 그러함으로 안동 하회마을 또한 별반 차이가 없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회마을을 들어가 보니 그렇지 않았다. 초가와
기와집이 어울어져 우리 옛 조상들의 가옥구조를 세심히 관찰할 수
있고 비교적 상업적인 냄새가 덜 나서 좋았다. 더구나 마을 뒷편에는
경작이 가능한 논과 밭이 있어서 보여만 주기위한 마을이 아니라 사
람들이 직접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었다.
또한 마을 자체가 정말 복받은 사람들이나 살 수 있는 좋은 곳에 위
치해 있었다.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감아 돌아 나가고 저편 강변으
로 병산서원에서와 같은 바위산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만송정이라는
곳에는 건강한 소나무가 높게높게 자라 비 맞아 더욱 푸르름을 자
랑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같이 하회마을을 싸고 흐르는 낙동강
뚝방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하회마을에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은
마을 밖에 모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편 산위로 늘씬한 새
한 마리가 두둥실 떠 있더니 넓은 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내 머리 위
쪽을 지나 반대편 방향으로 유유히 날아가고 있다. 하늘에서는 빗방
울이 계속 떨어지는데 저 새는 비를 맞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
까. 아내는 뚝방길에 나있는 달래나물을 캐느라 쭈그리고 앉아 있고
나는 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들어 날아간 새의 궤적을 오랫
동안 찾고 있었다.
한옥식 교회
하회마을 집단 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옥식 교회가 보였다. 신
기하기도 하여 마을을 나오는 길에 교회를 들러 보았다. 부인 한
분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내가 교회안을 기웃거리며 들어가도 되
냐고 물으니 부인은 흔쾌히 승낙하신다. 부인은 바로 그 교회 목사
님의 부인이었다.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길다란 벤취가 2열
종대로 8열 정도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꽉 찬다해도
겨우 80여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교회다. 옛날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신림동 봉신교회라는 개척교회를 연상케 한다. 그 교회
는 나중에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로 변신을 하였지만 나는 결국 교인
이 되지 못했다. 교회내부를 잠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목사님의 설교대가 있고 그 양옆에 난초를 심은 화분이 놓여 있다.
설교대 아래 왼편에는 찬송가를 큰 글씨로 적은 송가대가 놓여있고
오른 편에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다. 송가대는 찬송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도 교회에 송
가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회는 자그마 하지만 잘 정돈되어
있고 옛날의 교회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교회가 좀 작지 않은가요. 비좁을 텐데요" 내가 묻자
"좁기는 하지만 이것도 신도수에 비하면 넓은 편이지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회마을 자체가 유교적 신앙을 중심으로 집성된
촌이고 병산서원에서는 하회마을의 큰 어른인 유성룡을 배향하고
있으니 교회에 신도가 많을 리 만무한 것이다. 부인은 하회마을에
교회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관심거리라고 하면서, 처음에 교회
를 설립할 당시에 우려했던 유교사회의 반대와 불만은 생각보다 덜
하다고 하신다. 나는 부인에게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렸다. 부인은 재미있는 듯 귀를 기울이신다. 부인은 내
게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지만 집이 좀 멀어 안타깝다고 하신다.
부인에게서 풍기오는 온화하고 안정적인 모습은 종교인들이 혹 빠
질지 모를 고집과 아집이 아닌 포용과 관용의 모습이었다. 교회를
나서는데 부인은 나에게 선생님이 아니냐, 종교는 무엇이냐고 물
으신다. 선생님도 아니요 기독교인도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왠지 난
처하다는 느낌을 순간 받았다. 더더욱 불교에 관심이 많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었다. 부인과 헤어지려는데 나중에라도 꼭 종교를 가
저보라고 당부하신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신을 너무 잘 안다. 나
는 내 자신을 내가 스스로 다스려야할 사람인 것을...
돌아오는 길
교회를 나섬으로서 이번 여행 목적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아직 중
앙고속도로를 끝까지 다 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시 서안동 인터
체인지를 거쳐 군위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대구까지 내쳐
달렸다. 비가 그치자 중앙고속도로 옆을 스치는 산 마다에 물안개
가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미이
후부터는 이어지는 산들이 이미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구시내
를 들어서자 나뭇잎들은 더욱 완연하게 자라나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경부고속도로를 탓다.
중간에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그리 막히지 않는 도로를 열심히
달렸다. 아내는 지나가는 경치를 구경하다가 어느 새 졸다가 또 어
느새 일어나 수다를 떨다가 또 졸다가를 반복했고 나는 그런 아내
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포만감으로 다가오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틀동안 그리 많지 않은 곳을 다녔지만 산이면 산, 들이면 들, 집이
면 집에서 피어난 꽃들. 파랗게 노랗게 피어나는 꽃과 잎새, 하이얀
꽃을 다닥다닥 달고 있는 조팝나무와 대추나무, 연분홍 꽃을 피워
수줍게 서있던 복사꽃, 보라색 꽃과 흰 꽃을 나란히 피우고 있던
목련. 비오고 바람부는 가로에 흩뿌리는 지던 벚꽃, 아직도 꽃잎이
지지않은 매화꽃. 가는 곳곳마다 보았던 수많은 꽃들은 봄의 향연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세상은 생동하고 있었고 그 안에 내가 있고
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절은 이제 곧 여름
을 향해서 부단히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