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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영화를 좋아하지만
유별나다시피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제게 인천상륙작전은 놓칠 수없는 작품이죠
전형적인 한국식(?) 전쟁영화입니다
나쁘다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썩 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딱 생각했던 정도의 영화였어요
담백한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래도 안 슬프니?"식의 억지 감정유도가 난무하였고
그만큼 격떨어지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성공적인 흥행을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들어서는 순간
다찌차 화물칸에서 처음 봤던 K-1전차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컸습니다
꽁무니에서 105mm포신 끝까지의 길이도 굉장했지만 두개차선을 꽉 채울듯한 폭에 의해 전체적인 크기는 "압도적"이었으며
그 거대함에 흠짓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26개월 동안 지겹도록 봤던 익숙한 크기인지라 일반적인 탱크의 사이즈가 그 정도로 알고 있던참에
전역 후 전쟁기념관에서 우연히 봤던 탱크는 "에~게!" 소리가 나도 모르게 터져나올 만큼 귀여(?)웠습니다
2차대전때 썼던 탱크라는데 당시에는 무관심해서 모델명이 무엇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2차대전때의 탱크는 현재보다 시시하단 생각이 들정도로 아담(티거제외)했죠
나치 3호전차
조립만 하고 1년넘게 방치중,,ㅡㅡ;;;
나찌동방군의 3호전차와 처음 맏닥드렸던 소련군은 아니었나봅니다
날카로운 엔진굉음과 귀청이 떨어질듯한 대포소리 빨래판 긁는 기관총소리와 함께 지축을 흔들며 다가오는 탱크의 위용에 위압감을 넘어 공포심을 느낀 소련보병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도리깨질에 나락 튀듯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이 나락(러시아군)들은 기갑부대를 뒤따르던 나치 보병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으며
적군보다 의무불이행(현위치 이탈 그러니까 후퇴)으로 받을 스탈린의 매서운 추궁(즉결총살)이 더 두려운 소련지휘관들은 벌벌떨며 경직된 상태에서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처(포위를 뚫고 후퇴한 후 전열을 다듬어 재타격)를 못했습니다
결국 휘하의 불쌍한 쫄병들은 포위된 상태에서 최후의 한발까지 소비한 후 운명을 기다를 수 밖에 없었으며
바로바로사 작전이 개시됬던 1941년을 비롯해 수년동안 (게르만 우월주의에 세뇌된)나찌동방군 병사들의 비인간적인 학대에 대부분의 운명은 처참했습니다
1941년 6월22일 작전명 "바로바로사"가 감행한 목표물은 3곳이였습니다
레닌그라드(레프 지휘 북부집단군) 모스크바(보크 지휘 중부집단군) 키예프(룬트슈테트 지휘 남부집단군)
히틀러는 바로바로사 작전 전날밤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넌 문짝만 걷어 차면 되~ 그러면 썩어문드러진 건물 전체가 폭싹 주저앉을 것이여"
이러한 히틀러의 지나친 자신감은 오만이긴 했지만 적어도 근자감은 아닙니다
무지막지한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대숙청기간에 총살된 유능한 장군들은 소련군 전력에 커다란 구멍을 냈고
그 정점은 소련기계화군단 편성을 선도한 " 미하일 투하쳅스키" 참모총장입니다
쇼스타코비치와도 친분이 깊었던 그는 전직제정군 출신이었다지만
흠없는 프로레타리성을 지닌 "예로고프" 참모총장까지 총살된 것은 혁명 후 내전기동안 쌓였던 스탈린의 개인적 원한과 얽혀있는 동맹의 결과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대숙청 후 빈자리엔 그(스탈린)와 함께한 내전동지들로 채워졌고 하나같이 무능했습니다
그 중 한명인 "쿨릭"은 1940년 12월 크레믈회의에서 동물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대규모 보병으로 되돌아 갈것을 주장했다가 "트랙터보다 나무쟁기를 더 좋아하는 농부"로 비유되어 스탈린의 비웃음을 샀고 보로실로프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는 투하쳅스키가 닦아놓은 기계화기반의 백지화를 실행했습니다
숙청의 대학살을 마친 후 곧바로 벌인 겨울전쟁(소련과 핀란드전)에서의 참패(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음에도 핀란드군에 도륙)는 스탈린의 내전동지들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증명해 주었으니 히틀러가 묘사한 썩어문드러진 건물도 일정부분 사실입니다
그러한 무능한 장교의 지휘를 받는 소련군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습니다
공격엔 벼락같았고 수비는 완고했으며 포병들은 대포 주위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용맹했지만 운명은 비참했습니다
나치 중부집단군이 바로바로사 작전기간에 보여준 전격전은 무시무시했죠(쐐기와 함정)
대평원이라 천연 방어막이 없었고 스탈린의 탐욕으로 폴란드인근까지 부대가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어서 기갑부대로 가볍게 돌파한 후 빈틈없는 포위망 구축하기가 더없이 쉬웠습니다
항공대가 폭탄을 흠뻑 퍼부운 후 보병들의 살육이 이어지는 상황
얻어터진 소련군의 참상은 최고로 비정한 나치정복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처참했습니다
1941년 가을 남부전선의 나치기갑부대
중부집단군은 민스크(현재 벨로루시의 수도)와 스몰렌스크를 거쳐 순식간에 모스크바 근교까지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육군사령부와의 견해차로 귀중한 3주를 날려버리게 됩니다
할더의 주장은 거침없이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점령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으나 히틀러는 달랐습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로 진격한 중부집단군의 2개 기갑부대 중 한개(호트지휘)는 북부집단군으로 합류시켜 아직 완전히 함락못한 레닌그라드점령을 마무리하고 다른 한개(구데리안지휘)는 남부집단군에 합류시켜 키예프를 포위한 후 남쪽 캅카츠유전지대까지 가능한 많은 영토를 집어삼키는 것이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호트는 명령에 따랐으나 구데리안은 분노했습니다
구데리안은 명령에 따르는 척만 하고 미적대다가 히틀러에게 모스크바공략이 현명하다는 것을 침튀기며 주장했습니다
히틀러의 답변
"늬들은 전쟁의 경제적측면을 모르니? 키예프에서 하르코프까지 소련의 남부 경제지구를 점령 한 후 크림반도 캅카즈유전지대까지 점령하여 밀 망간 철 알루미늄을 확보해야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석유여"
히틀러 주위의 똘마니들이 그의 주장을 찬양하는 바람에 구데리안은 반대를 접을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신 구데리안은 남부집단군을 지원하여 키예프전투를 이기자마자 모스크바전선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양보를 얻어냅니다
모스크바 앞에서 의도적으로 귀중한 3주를 지연한 구데리안은 득달같이 진격하여 9월16일 키예프 동쪽 로흐비차에서 남부집단군 기갑부대인 "클라이스트"(남부집단군 기갑부대지휘관)의 전차부대와 합류합니다(키예프 포위성공)
소련군 탈출로를 물샐픔없이 메우는데 또 열흘을 소비합니다
그 동안 제2항공군과 제4항공군이 고립지대에 폭탄을 듬뿍 쏟아붓고
9월26일에 포위를 완료하여 그 안에서 생포된 소련군인의 수는 전무후무합니다
무려 66만5000명
하지만 모스크바진격이 한달이나 연기됬고 그들은 곧 대가를 치릅니다
9월하순에 임무를 완수하여 모스크바전선으로 돌아온 구데리안
어째 으슬으슬하게 춥고 제법 매서운바람이 살갖을 파고듭니다
게다가 차가운 가을장마로 인해 모스크바로 통하는 침공로가 진흙길이 되고 하천의 물살까지 불었습니다
소련의 겨울은 참 빨리오나보다..라고 느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게다가 극심한 전투를 치룬 병사들은 지쳐버렸습니다
전사와 부상으로 줄어든 병력이 50만이라서 왠지 비실비실해 보입니다
소련군의 무지막지한 피해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치군에서는 큰 피해죠
모스크바에는 독소전의 소련측 영웅 "쥬코프"가 도착했습니다
"노몬한전투"(마이웨이에서 묘사됨)에서 일본군을 쓸어버린 쥬코프는 지체없이 25만명의 모스크바시민(여자가 75%)을 동원해서 대전차호 지뢰 철조망..등 장애물을 설치합니다(레닌그라드에서 그랬던것처럼)
스탈린은 전례없는 결연의 의지를 내뱉으며 불과 크레믈에서 40마일 밖에 보크의 기갑부대가 있는상태에서 대담하게도 10월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1월7일에 거행되는 전통적인 붉은군대 열병식을 거행합니다
그자리에서 스탈린은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며 슬라브의 영웅들의 대서사시를 들먹이고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깃발 아래서 열심히 싸우면 이긴다"며 열변을 토합니다
도망간다"
일반적으로 "도망"은 등을 보이며 뒤로 갑니다
그런데 1941년의 독일군은 안그랬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도망가야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망은 소련군을 상대해서 꽁무니를 빼는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무서운 "동장군"을 피해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치참전용사의 인터뷰(그는 키예프에서 모스크바전선으로 이동한 구데리안의 병사)
고무타이어와 볼베어링이 들어간 현대식 수레는 움푹움푹 패인 끔찍한 도로를 견디지 못해 소련제 농장수레로 대체되었다
멋진 독일산 말은 굶주림과 추위로 탈진하여 반수 이상이 죽어 왜소한 소련산 망아지로 대체됬다
그 망아지는 어느정도 무게는 끌고 갈 정도로 쓸모있으며 자작나무가지와 오두막 지붕 지푸라기를 먹고 살아남는다
수송수단이 없어서 탄약수톤을 비롯한 각종무기 면도기 치약 치솔과 같은 생활용품도 길가에 버려졌다
겨울이 오기전에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아무리 지저분하고 벌레가 들끓는 곳이라도 비바람 피할 곳을 찾는 아귀다툼이 매일 벌어졌다
그런곳을 못찾은 부대원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오고 춥고 쉬지못해 질명이 늘었다
그런 환자들도 하루 25마일 죽음의 행진에 빠질 수 없다
빨찌산이 출몰하는 곳에 그냥 두고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쇠못을 박은 구두 밑창땜시 겨울이 오기 전인데도 동상에 걸린 병사가 많다
모든 부대원은 지저분하고 수염이 덮수룩했으며 속옷에는 벌레가 생겼다
머지 않아 발진티푸스가 돌것이다
모스크바점령이라기 보담
모스크바의 깨끗한 건물로 도망가는 중부집단군의 여정은 이제까지와 달리 만만치 않습니다
구데리안은 얼마전 소련제 탱크인 T-34와 조우했습니다
나치의 4호 전차에 장착된 75MM포는 T-34를 뒤에서 맞출 경우에만 효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그것을 잡으려면 엔진을 덮는 쇠격자뚜껑을 맞춰야합니다
그걸 해내려면 대단한 솜씨가 필요했고 소련군은 이젠 탱크로 나치의 측면으로 투입하면서 보병으로 정면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배웠고 진화했죠
독일군은 최선을 다해 모스크바로 도망갔으나 진화한 소련군과 더욱 독한 소련제 추위에 막혀 완전히 탈진하여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정지합니다
과거에 나폴레옹이 감행했던 후퇴작전을(1812년) 재현하기 싫었던 히틀러는
"이 ㅆㅂ~ 30마일 후퇴하면 거기는 안춥니?"라며 노발대발했습니다
북부/중부집단군 사령관과 숱한 그 부하들이 해임됬으며
결국 바로바로사 작전의 성과는 키예프함락이라는 절반의 목표만을 이룹니다
레닌그라드의 경우 포위는 했으나 라도가호수라는 천연 장애물과 핀란드군의 미적미적한 협조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구축한 방어막으로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타이밍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장대한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결연히 공연합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민중을 고취시키는 힘찬 저항의 주제와 벅찬 조국애 언젠가는 나치를 쳐부수리라는 희망차고 찬란한 피날레가 있지만 8번은 절망뿐입니다
러시아의 봄은 휴전기
이것은 두 상대방간의 합의가 아닌 "라스푸티챠"로 인해 강요된 휴전입니다
봄이 되어 눈과 얼음이 녹으면 그 양이 엄청나서 흙길은 진창이 되고 초지대의 지표는 늪으로 변합니다
차량이나 탱크는 수렁에 빠져 차축까지 잠겨버리며 소련산 망아지는 허우적댑니다
이것이 라스푸티차이며 휴전기동안 두진영은 전열을 정비합니다
가까운 소련이 병력이나 장비를 보충하는데 독일보다 유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털옷과 털장화를 신은 소련군은 겨울동안 꼼짝못한 나치군을 공격했으며 그 성과가 있어 나치군은 모스크바밖으로 후퇴해 버립니다
스탈린은 곧 나치군이 모스크바로 재침공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히틀러는 수렁이 말라 다시 길이 열린후 펼쳐지는 여름공세를 "청색작전"이라 명명했습니다
그작전의 요지는 러시아 남부에 있는 자원입니다
작년에 미적미적했던 원인을 불러온 딜레마를 정리했죠
영도자 지령 41호로 4월 5일에 알렸던 작전은
"크림에서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11군이 케르치반도에 있는 러시아군을 섬멸한 다음 세바스토플을 포격으로 제압한다
보크는 이쥼고립지대를 불태워 없애버린 후 기갑부대로 이루어진 집개발로 돈 강의 보로네즈를 애워싼다
그 후 B집단군이 돈 강을 따라 내려와 볼가강의 스탈린그라드로 와서 하르코프에서 전진한 보조부대와 합류한다
마자막으로 A집단군의 선봉부대가 돌격해서 캅카즈안으로 들어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산맥을 꿰뚫어 소련석유공업의 중심지인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한다
마무리로 적이 침입할 수 없도록 동부방벽을 세운다
그러면 러시아와의 관계는 영국과 인도의 관계와 같게 될 것이다"
더나아가 여유병력을 레닌그라드로 올려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히틀러가 청색작전으로 노린것은 어디까지나 석유였습니다
이 작전은 탱크가 지나갈 만큼 땅이 굳자마자(5월8일) 전격 감행합니다
역시나 나치의 전격전은 명불허전 작전은 거침없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곧 재앙이 다가옵니다
돈-도네츠 회랑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다가 돈 강 측면 보로네즈시에서 공격받을 것을 걱정한 보크는 호트의 제4기갑군에게 그 도시를 공격 점령하라고 합니다
결국 파울루스의 제6군은 탱크지원없이 단독으로 스탈린그라드가 있는 볼가강으로 이르게됩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는 제6군의 목적은 독일군 A집단군이 캅카즈를 꿰뚫기 위해 스탈린그라드 옆을 지나칠때 소련군이 옆구리를 치지 못하도록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쓸데없이 보로네즈공방전에 말려들어 시간과 전차를 낭비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보크에게 너무 말려들지 말고 얼렁 나오라고 했지만 파울루스의 제6군에 합류해야할 제4기갑군은 보로네즈 공방전에 끌려들어가 버려서 앞으로 얼마간 교전을 치르게 될 터입니다
열받은 히틀러는 보크를 해임하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바익스를 임명합니다
이제까지의 비교적 성공적인 진격으로 작년의 대포위를 재현할 있으리라는 히틀러의 희망은 티모센코가 지휘하는 붉은군대앞에 무너졌습니다
붉은군대는 이젠 전격전을 이해하고 더 영리해졌습니다
쉽게 포위되지 않았으며 잡힌포로의 숫자도 9만명뿐이었습니다(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작년에 비하면 새발의 피)
드디어 보로네즈 공방전을 끝낸 제4기갑군이 6군에 접근해오자 6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공격을 준비합니다
볼가강 서쪽 기슭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는 길게 위치한 현대식공장 주위에 수많은 목조건물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시가지끝에서 볼가강 건너편까지의 길이는 1마일
제 4기갑군이 접근해오자 제 6군은 8월19일까지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이제 나치동방군은 붉은군대를 볼가강으로 처박아 넣기 위해 밀어붙일 태세
먼저 루프트바페(나치공군)의 8항공군단이 시가지를 폭탄으로 날려버립니다
폭격으로 인한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치 제 6군이 저승사자처럼 몰려옵니다
레닌의 후계자로 선정됬을만큼의 막강한 혁명가 트로츠키를 몰아내고(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게 암살 당할 때 읊조렸던 유명한 한마디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기념비적인 도시가 스탈린그라드입니다
그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중에서 가장 컷으며 상징적인 의미가 각별했기에 스탈린은 8월내내 유능한 지휘관들과 붉은군대병사들을 꾸역꾸역 밀어넣으며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이 엄격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얼마 안되서 스탈린그라드는 일명 "쥐잡이전투"가 끊이지 않은 지옥이 됩니다
전장은 가옥,공장,작업장,공원,저수탑,철도,제방,하수도...할것 없이 시에있는 모든 구조물이며 끄트머리에 있는 붉은10월공장,바리게이트공장,트랙터공장은 최후의 요새입니다
굴뚝과 고층건물엔 저격수가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고 하수도 시궁창안에서까지 아비규환의 절규가 끊이지 않습니다
독일영화 "스탈린그리드"에 쥐잡이전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글부글 끊는 솥으로 불리우는 스탈린그라드전투가 절정에 이른 10월에 작성한 나치 제24기갑사단 소속장교의 증언
"우리는 집한채를 차지하려고 박격포와 수류탄 기관총과 총검으로 보름간 싸웠다
세째날에 이미 독일군인의 주검 54구가 지하실안과 층계참과 계단위에 널부러져있다
전선은 불타버린 방 사이의 복도이며 두 층 사이의 얇은 천장이다
도움은 비상탈출용 계단과 굴뚝 옆에 있는 이웃집에서 온다
한낮부터 밤까지 싸움이 끊기지 않는다
층마다 얼굴이 땀으로 새까멓게 된 채 폭발과 먼지구름 한가운데서 수류탄을 들고 서로를 날려버렸다
스탈린그라드는 더이상 도시가 아니다
낮에는 시야를 가리는 불타는 연기의 구름이며 화염의 반사광으로 훤히 빛나는 거대한 용광로다
그리고 타는듯 뜨겁고 음울하고 끔찍한 밤들가운데 하나가 오면 개들이 볼가강에 뛰어들어 저편 강가에 닿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헤엄친다
개들에게도 스탈린그라드의 밤은 공포다
짐승은 이 지옥에서 도망간다
가장 맹렬한 폭풍도 이 지옥을 오랫동안 견뎌낼 수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버틴다"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는 붉은군대의 입장
이번엔 방어를 담당했던 소련 제 62군 사령관 츄이코프의 증언
이 독종들 역시 전투는 지옥이었습니다
"나치군대가 10월14일 쳐들어왔다
그날은 모든 전투가운데에서도 피비린내나기로 으뜸이었다
4-5키로미터의 좁은 간격으로 독일군이 수많은 대포와 비행기의 지원을 받는 5개 보병사단과 2개 전차사단을 투입했다
독일공군이 낮동안 2000회 넘게 출격 해서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 날은 개개의 총성이나 폭발음을 들을 수 없었다
전체가 하나로 합쳐져서 귀가 멍멍해지는 가공할 굉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5야드에서 그 무엇도 분간할 수 없었다
먼지가 너무 짙은 탓이었다
그날 나의 본부에서 61명이 죽었다
넋을 빼는 이 일제포격이 네뎃시간 쉼없이 이어지다 잠시 끊어진 찰나
독일군이 탱크와 보병으로 공격하기 시작해서 1.5키로미터를 전진해 마침내 트랙터공장까지 돌파해 들어왔다
트랙터공장안에서 두 군대는 서로를 꽉 끌어안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전선은 사실상 고착되었다
이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전투의 목적(캅카츠를 장악한다는 전략)까지 망각할 정도로 광분했습니다
소련군의 측면공격에 맞서는 완강한 저항요새를 구축하는것이라기보담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를 점령하고픈 개인적 집착에만 정신이 팔려 군 대신 소대에 집착하는 바람에 전체를 보는 통찰력을 송두리채 잃어버렸습니다
소련군사령관 쥬코프는 달랐습니다
그는 강력한 독일6군의 주력이 밀집한 공격군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는 약해빠진 껍질(루마니아군 이탈리아군)을 깨뜨려 볼가강 거의 끝까지 진격한 독일의 제6군 전체와 외곽에 있던 4기갑군 일부를 순식간에 포위해 버립니다
히틀러는 포위된 제6군전체에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물러서지 말고 방어하여 끝까지 스탈린그라드사수하란 명령을 내립니다
포위된 곳으로의 보급은 항공기로 하면 될 것이며 곧 만슈타인의 기갑군이 합류하면 상황이 끝날것이라는 헛된믿음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곧 외곽 비행장도 붉은군대에 점령당해버려 가뜩이나 모자란 보급품도 공중투하되었고 부상병을 더이상 옮길 수 없었습니다
무덤에 갇힌 제 6군의 병사들은 바깥기온 영하 30도의 뼈까지 관통하는 칼바람에 온몸이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다음해(1943년) 1월 보로노프가 파울루스에게 옷과 음식지원을 약속하며 항복권고문을 보냅니다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경고문구는 당근 포함입니다
스탈린그라드 배경의 또다른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급히 구축한 돈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선봉부대인 호트의 기갑부대가 강펀치로 포위망을 깨뜨린 기갑돌파 후 스탈린그라드에서 빠져나오란 호소를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영도자의 심기를 거슬릴까봐 구원의 손길을 아예 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항복이란 불복종은 상상조차 불가능했으며 격렬한 쥐잡이전투는 지겹도록 지속됬습니다
한 때 볼가강 선착장까지 거의 함락했었던 6군
하지만 좀비처럼 달라붙는 붉은군대에게(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오프닝에서는 동쪽 우랄산맥 출신의 신삥들이 볼가강을 건너지 못하고 폭격을 맞거나 빨갱이 선전부원들에게 떠밀려 독일군의 MG-42에 도륙을 당한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결국 1월17일 트랙터공장 붉은10월공장 바리게이트공장지대에서 쫓겨나며 시 안쪽 목조건물로 밀려났고 1월24일엔 제6군이 쪼개져 두동강이 납니다
다음날에는 동쪽 강변의 러시아군이 볼가강을 건너 츄이코프 예하 62군의 독종들에게 가세했습니다
히틀러는 영예로운 저항의 제스쳐를 기대하며 1월30일 파울루스를 육군원수계급으로 올려줍니다
독일군 육군원수는 이제까지 적에게 항복한 적이 한번도 없었죠
하지만 파울루스는 "죽어라" 강요하는 마지막 권위부과엔 격하게 반발합니다
1월30일 본부가 점령당하자 드디어 그는 참모진과 함께 붉은군대에 항복했습니다
부상을 입지 않은 군인 9만명과 부상병 2만명이 포로가 됬으나 발진티푸스로 인한 떼죽음으로 전후 귀환한 병사는 극소수입니다
1943년 1월 포로수용소로 가는 독일 제6군의 생존자들
스탈린그라드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캅카츠깊숙히 전진했던 클라이스트 예하 A집단군 역시 포위당할 운명이었으나 만슈타인의 분전과 히틀러의 양보(?)로 그들은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아스트라한까지 진격한 후 스탈린그라드를 요새화 삼아 동부방벽을 구축해 풍부한 석유를 마음대로 뽑아쓰려한 히틀러의 계획은 산산조각납니다
더불어 예하 병력으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려는 계획도 박살납니다
그 해 스탈린그라드의 승전을 발판삼아 소련은 키예프까지 탈환하고 쿠르스크 대전차전에서 독일군의 전력을 참기름짜듯 뽑아내버려 나치는 회생불능이 되버립니다
동시다발로 서부의 프랑스에서 펼쳐진 대규모 상륙작전인 노르망디작전으로 말미암아 서부전선도 붕괴됩니다
히틀러의 허리는 구부정해졌으며 불같은 성격은 예전보다 급해졌고 두눈은 광채를 잃고 쾡~해졌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재앙후 독일 국영라디오의 정규방송이 사흘동안 중단되고 대신 브루크너의 7번교향곡만 엄숙하게 주구장창 흘러나왔습니다
히틀러는 나치선전부장 괴벨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제 6군과 예하 22개 사단의 궤멸에서 대국민서사시를 날조합니다
소련은 서사시를 날조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파울루스가 항복하자마자 크렘린궁의 종을 울려서 소련이 처음으로 거둔 완승을 축하했습니다
영웅적인 방어전을 수행한 츄이코프예하 62군의 독종들은 제8근위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음달에 도네츠강으로 향하는 열차에 태워졌습니다
그들은 베를린을 점령한 영예로운 선봉부대가 됩니다
소련군 원수가 되는 츄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를 떠나면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잘있거라 볼가강이여
잘있거라 괴로움과 고통을 겪은 도시여
우리가 너희를 언제나 보게 될런지
보게되면 그때엔 네가 어떤모습일런지
인민의 피를 머금은 땅에 남은 전우들아 잘있거라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
너희를 위해 복수를 하는것이 우리의 임무다"
안톤 브루크너 7번교향곡
나치가 패망하는 순간 베를린의 라디오방송에서 마지막으로 울리던 이 교향곡은 나치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이 앨범은 레코딩기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의 악기 베를린필이 아닌 빈필과 녹음한 그의 백조의노래
카라얀골드로 발매되어 있습니다
나치군악대장이라는 카라얀안티들은 이 앨범을 보고 "그것봐라"며 비난의 강도를 높일까요?
우연치고는 절묘한 아이러니라며 요상한 기분이 들까요?
의도적이라 생각할까요?
어쨋든 나치의 최후를 장식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나치군악대장인 카라얀 역시 최후로 남겼습니다
2악장 아다지오의 회한과 슬픔 추억..
깔아진 히틀러의 기분에 딱!이었으리라생각됩니다
히틀러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격하게 아꼈다고 합니다
독일의 3B에 브람스를 빼고 브루크너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긴..
인종의 쓰레기에 불과한 짚시들의 경박하고 타락한 소음(헝가리무곡)이 히틀러에 입맛에 맞았을리는 없었을것 같기도합니다
유대인들에 가려 상대적으로 가볍게 알려졌지만 인종청소엔 유대인은 물론 러시아인들과 유럽을 떠도는 짚시들도 포함됬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수많은 교향곡음반중 강렬한 커버가 가장 인상적인 앨범
게르기에프의 교향곡 북렛이나 CD에 새겨진 장면도 만만치 않지만
솔티경의 8번교향곡 커버는 곡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더욱 노골적(?)입니다
대략 영하 20도는 너끈히 되어보이는 눈덮힌 어느 전장
전쟁에 굶주린 인민들이 먹을것을 찾는 이 한장의 처참한 사진은 백마디 천마디의 잡소리보다 전쟁의 참상을 더욱 피부에 와닫게 해줍니다
쇼스타코비치의 8번 교향곡도 그렇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공포를 리얼하게 느끼고 싶다면 쇼스타코비치교향곡 8번을 들어보면됩니다
끔찍한 1악장만으로도 간접체험은 충분합니다
이 교향곡은 베토벤의 6번 "전원"과 흡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체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4,5악장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더 흡사합니다
마찬가지로 5악장이며 적절하게 배분된 라이트모티브는 곡의 짜임새를 빛내줍니다
오싹한 인트로에 구슬픈 모티브가 연주되며
잠시의 비통함 후 벌레가 기어가는듯한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옵니다
극도의 공포감에 지쳐 신경쇄약 일보직전에서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섬짓한 북소리
사악한 선전대원들에 의해 피튀는 전장에 정신없이 처박혀 버리는 붉은군대병사들의 참상을 드러내는 굉음
폭풍 같은 공격 모티브가 사그라들자마자 펼쳐지는 전율스런 떨림
극심한전투 후 숨막히는 침묵속에 덛칠해진 서정적 목관
8번교향곡에 희망은 없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인생의 즐거움을 표현했다는데 역설적인것 같습니다
7번교향곡의 장대한 찬란하고 희망찬 피날레하곤 비교불가지만 마지막 악장은 그나마 밝으니 1-4악장까지의 묵직한 절망감을 고려하면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스탈린치하의 공포정치에서 끔찍한 고문과 약식재판 후 총살을 피하려면 모호한 대답이 현명한 대답이니
초연 후 소비에트정부는 이 교향곡을 스탈린그라드교향곡이라고도 했습니다
전쟁 후 낙관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사실입니다) 매서운 비판을 당합니다(팬티에 오줌이나 지리는 겁쟁이음악)
8번 교향곡의 골이 깊은 만큼 이어지는 9번교향곡의 드리마틱하고 찬란한 승리의 찬가를 기대했던 당고위간부들에게 들이덴 9번교향곡?
그때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의 비밀경찰(엔카베데)의 즉결총살을 면한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의 명성덕분이겠죠
차후 그는 스탈린의 정책을 찬양한 오라토리오(광적 카톨릭교도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춰질만한 용어) "숲의노래"를 발표해서 스탈린상을 받습니다
"스탈린그라드시민은 전진한다"라는 곡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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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엄청 길어요~^^:
처음 shostakovich의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어떤 곡인지 기억에 없지만)
전반적으로 난해하고 어렵다였지요~ㅎㅎ
그런데 니콜 키드먼과 탐크루즈가 나오는' eyes wide shut' ,그리고 이병헌, 고 이은주 주연의 '번지 점프를 하다'에 쓰인
왈츠곡이 있었는데...세상에나 그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jazz suit 2번 중 waltz였다는...
제가 아는 쇼스타코비치가 아녔습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쬐끔 관심을 갖게되면서 다른 곡들도 듣게 되었죠~
(실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자꾸 들어서 익숙해지는건지, 아니면 그 곡들에 담긴 사연들을 알게되어 애착이 생긴건지)
몇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현대카드 광고에 쓰인 음악이 놀랍게도 교향곡 7번, 4악장
물론 원곡을 쓰지는 않았고 편곡해서 사용되었다는데
원곡이 궁금해지면서 찾아 듣게 되고 관심이 생기게 되는 패턴~ㅎㅎ
만기님은 잘 아실테지만 , 현악 4중주 8번도 들으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폭격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알고보니 드레스덴 폭격과 관련된 곡이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또 다시 음악의 위대함을 실감하며...ㅎㅎㅎ
간만에 음악 얘기 올려주시니 반가워서 주절주절, 나불나불 거리네요~ㅎㅎ
덕분에 즐거웠네요~ 고맙습니다^^*
Bruckner 교향곡 7번은 오늘 퇴근해서 집에서 차분히 감상해볼게요~
별명부터 폭격기"인 영국의 아더 해리스의 동상을 본 독일인이 울부짖었데죠
드레스덴 폭격에 사용된 폭탄은 소이탄"이라고 불리는 네이팜탄의 초기버전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끈적이는 휘발류를 소이제라고 하는데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의해 아름답던 드레스덴의 문화유적까지 홀랑 타버립니다
인명피해는 말할것도 없구요
랭커스터폭격기로 무자비 하게 투하된 폭탄의 별명이 현재엔 영화판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블록버스터"입니다
"모뉴먼츠맨"이란 영화도 있는데 문화유적을 고려한 작전이 배경이에요
왈츠는 원래도 동독영화 제6여단을 위해 쇼선생이 작곡한 곡이에요
7번교향곡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서 8장 갖고있죠^^
모뉴먼츠맨~ 봤죠~ㅎㅎ 맷데이먼만 기억이 나네요~
ㅎㅎ 저랑 약간 비슷한 취미를 가지신 듯요~
저도 좋아하는 곡은 지휘자나 연주자 별로 비교해서 듣는거 좋아하는데~
그래도 8장까지는 아니고 4장 정도?ㅎㅎㅎ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그냥 음원 사이트에서 듣기도 하지요~
빨간 안경이 그려진 앨범은 정말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인가요?
넵!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껀데 러시아에서 발매된것 맞아요
애정님 댓글을 보고 사실 놀랬어요 ㅎㅎ
신나네요!! 쑈선생 교향곡 다~ 올려봐야지!!
@만기 재미있겠네요~ㅎㅎㅎㅎ
수정
키릴 콘드라신전집을 말씀하시는듯
그것도 러시아에서 발매된 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