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71~72- Scene 11. The River /강/ "뭐라고요? 비상령? 이건 전쟁이라구요! 개전 선포를 하고 전시체제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이제는 일레인으로 이름을 바꾼 스피드가 흥분한 듯 소리쳤다. "알바로아에는 전부 바보들만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일레인의 말에 대답한건 아이리스였다. 그녀는 조금 차가운 눈빛으로 일레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겁을 내고 있는 거예요. 눈치를 보고 있는 거죠. 정말 제국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하지만 벌써 도시가 몇 개나 불에 타버렸어요. 제국 독립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온 거리만 봐도 명백하잖아요. 이건 진짜 전쟁이라구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레인이 아이리스의 말에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 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이리스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바로 그 국가의 운명이 바로 제국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예요." 일레인이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아이리스를 쳐다보았다. "기르던 주인이 갑자기 매를 때린다면, 길리우던 짐승으로서는 그저 주인의 자비를 바랄 뿐이죠. 옆에 있는 동료들은 그저 안됐다는 눈빛 으로 쳐다볼 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어요. 아마도 최후까지 그 짐 승은 그저 불쌍한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 볼 뿐이겠죠. 주인이 그렇게 짐승을 길렀으니까 말이예요." 아이리스의 말은 차가왔다. 일레인은 물론 지호마저 흠칫 할 정도였 다. "다름아닌 제국이, 그들을 그렇게 길들여 왔어요. 거의 백년에 가까운 시간을 말이죠. 그렇지 않나요?" 아무도 아이리스의 말에 뭐라고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설마 그 정 도일까 하고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근거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특히 귀족사회를 경험해 보았던 일레인은 더 더욱. 그리고 그 것은 교육 꽤나 받았다는 지호와 엘런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침공을 받은 알바로아의 대응은 예상외로 대단히 소극적이었 다. 알바로아는 정식으로 개전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국에 비 상령을 내리고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제국과 교섭하고 있을 뿐이 었다. 그것은 마치 길들여진 가축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주인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의 실상이었다. 물론 알바로아가 느긋할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알 바로아를 둘로 가르는 거대한 강, '컨웨이'의 존재였다. 컨웨이는 험 한 강이었다. 이 강은 제국이 알바로아 수도를 공격하자면 반드시 넘 어야 하는 강이었지만, 지금 같은 우기(雨期)에 대 부대가 이 강을 무 사히 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을 건널만한 곳은 정해져 있었고, 강 건너편에서 활만 쏘아대도 적 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바로아는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제국의 침공은 아직도 '국경분쟁' 수 준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엘런과 덩치가 합류하고 나서, 그들은 알바로아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용병대 '이글아이'의 도움이 컸다. 자 신들의 상황을 간단히 엘런과 덩치에게 설명해 준 후, 지호와 아이리 스 일행은 곧장 말을 달렸다. 아무리 독립 기사단이 상식 외의 진군 속도를 보인다고 해도 그냥 말 을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기에 독립 기사단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수월했다. 게다가 대부분 평원으로 이루어진 대륙 동부의 지형은 그들이 말을 달리기에 최적의 조건이기도 했다. * * * 우기(雨期)에 접어들어 푸르게 덮인 알바로아의 초원 위로 한무리의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말들은 꽤 속도를 내며 땅을 박차고 있었지만, 초원은 말발굽 소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벌써 일주일째, 푸른 초원의 풍광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호와 아이 리스 일행은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대륙 동부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신비로운 산 '벨라'의 하얀 꼭대기가 마치 환상처럼 지평선 너머에서 굽어보고 있었다. 말들이 내뿜는 뜨거운 숨이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할 무렵, 푸른 초원 저편에 굴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다지 크지않은 숲과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회색의 성벽. 그곳은 컨웨이 강에 자리잡은 도시 들 중에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성채도시, 강의 이름이 그대로 그 도시 의 이름이 된 도시 '컨웨이' 였다. 따각. 따각. 일행은 천천히 말을 몰아 컨웨이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컨웨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혼잡했다. 대부분 주변의 마을들에서 강을 건너려고 찾아온 농민들이었고, 가끔씩 마차에 실려 있는 후송된 부상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현재 제국의 독립 기사단과 대치하고 있는 성에서 후방으로 후송되기 위해 실려온 병사들이었다. 제국의 군대와 맞서고 있는 최전선의 상황 은 조금 느긋한 수도의 분위기와 달랐다. 성으로 들어가려는 행렬에서 는 급박한 위기감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탄 일행이 다가가자 투덜거리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자 신의 등에 말의 뜨거운 숨결을 받는다는 건 누구나 움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사람과 시비가 붙을지도 모를 상황 을 그들 중 누구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봐! 쓸데없는 사람 붙들고 시간끌지 말고 빨리 통과시켜! 어이, 거 기 새치기 말라고! 부상자가 먼저야!" 병사 몇이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서 큰 소리를 치며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젊은 초 급 장교로 보이는 그는 땀을 흘려가며 혼잡한 성 입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하는거야! 줄을 서라고 했잖아!" 하지만 사람들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기엔 성 앞이 너무 혼잡했다. 덕분에 그는 계속 큰 소리를 쳐대야 했다. "젠장! 왜 이렇게 몰리는 거야! 아직 안전하다고 그렇게 말해도…… 응?" 그는 지호 일행을 발견하고는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용병이오? 리더는?" 그가 대뜸 묻자, 일행의 시선이 지호를 향했다. 난데없이 용병대의 리 더가 된 지호는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젊은 장교를 향해 고개를 끄덕 일 수 밖에 없었다. 장교는 의외라는 듯 말에 탄 지호를 올려다보았 다. "사람이 필요하오. 용병이라면 일단 경비대 사무실로 와 주시오." "컨웨이 강을 건너려고 합니다만……" 지호가 젊은 장교를 내려다 보며 조용히 말했지만 장교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삼일후까지 배는 뜨지 않소. 어차피 그동안은 여기 머물러야 할 테니 일단은 오시오. 경비대는 성안에 들어가서 물어보면 알려줄 거요." 장교는 재빨리 말을 끝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일레인이 그에게 말 을 걸었다. "배가 뜨지 않는다구요?" 그는 일레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성안에 들어가서 물어보시오." 젊은 장교는 다시 성 입구로 돌아가 그동안 엉망이 된 행렬을 바로잡 기 위해 소리를 쳐댔다. 일행은 서로 쳐다보며 의아해 했지만 일단 그 의 말대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알아보는 수 밖엔 없었다. 푸르럭 거리는 말들에게 길을 비켜준 사람들 덕에 일행은 금방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선 컨웨이 성 안은 그야말로 난 장판이 따로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관리는 일레인의 말에 그 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귀찮다는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대로요. 배는 3일뒤 까지는 뜨지 않소. 부두에 나가 봐도 소용 없 을거요. 성주님의 명으로 몽땅 징발되었으니까. 우기로 잔뜩 불어난 컨웨이 강을 헤엄쳐 건널 자신이 있으면 헤엄쳐보던가." "이봐요! 우리는……" 일레인이 화를 내었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여기서 그들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들이 누구건, 지금 배를 구할 순 없소. 배가 뜨는 건 삼일후요." "칫!" 아무리 일레인이라도 여기서 더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리스가 고개를 조용히 가로젓는 걸 보곤, 일레인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사무실을 나가는 일행들의 뒤로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병들이라면 경비대에 가보시오. 일이라도 도와주면 혹시 삼일후 배 에 자리를 내줄지도 모르니까.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이 배를 기다리고 있으니 실제로 당신들이 뱃전을 밟아보려면 한달도 더 걸릴꺼요." 관리는 그나마 선의에서 해 준 말이었겠지만, 일레인은 매서운 눈초리 로 한번 쏘아보아 주고는 거칠게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쾅- "이제 어떡하지?" 덩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행의 눈이 저 앞에 보이는 부두를 향했 지만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관리의 말대로 배는 한척도 없었다. 빈 부두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만 가득할 뿐. "일단 경비대 사무실이라는 곳에 가보자. 결국 그것 밖엔 답이 없을 것 같은데?" 엘런의 말에 일레인이 엄지손톱을 손가락으로 깨물며 말했다. "아니, 그것보다 이곳 성주를 만나보는게 좋겠어. 성주라면 얘기가 통 할지도 몰라." 그러나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요." "하지만……" 아이리스와 일레인이 서로 얘기하는 동안, 지호는 부두 앞 거리를 둘 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듯 부두쪽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고, 부두는 경비대로 보이는 군인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지 키고 서 있었다. 이런 때에 배를 전부 징발했다는 성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지호는 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커다란 바구니 하나를 들고 걷고 있는 짧은 갈색 머리 소년의 모습이 지호의 눈에 들어왔다. 응? 지저분한 외투로 몸을 두르고 있는 갈색머리의 소년이 지호의 관심을 끈 이유는 간단했다. 왠지 그의 걸음걸이가 위태했기 때문이다. 들고 있는 바구니가 그렇게 무거운 것 같진 않았는데, 왠지 멍한 듯한 시선이 마치 걸으면서 졸고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불안하게 쳐 다보는 지호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그 소년의 입에서 기어이 짧은 비 명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꺅!" 무엇엔가 발이 걸렸는지 소년의 몸이 휘청하더니 균형을 잃었다. 바구 니가 소년의 손을 벗어났고, 그 안에 있던 야채들이 땅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소년은 땅에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어느새 지호가 그를 잡 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지호는 뒤로 넘어가던 소년을 거의 안다시피 부축하고 있었다. 지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호의 품에 안긴 소년은 웬지 멍한 눈빛을 하고 있다가 지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 네. 괘, 괜찮……" 소년은 대답을 하다 말고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저기. 이, 이것 좀……" 지호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 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늘었기 때문이다. "에? 여, 여자분?" 지호의 목소리엔 놀랍다는 느낌보다는 '설마'라는 느낌이 더 짙었다. 그러나 지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사람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 그보다 이거……" 지호는 그제야 자기가 그 사람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호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앗! 죄, 죄송합니다. 전 남자분이신줄 알고……" 더듬거리며 사과를 한다는게 지호는 그만 더 큰 실례를 하고 말았다. 남자인줄 착각했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화끈 붉어졌다. "아니요. 제가 오히려……" "아, 도와드리죠." 지호는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바닥을 뒹굴고 있는 야 채들을 바구니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조금 떨어져 있던 지호 의 일행이 다가왔다. 굴러다니던 야채들이 대부분 제자리를 찾게되자, 바구니를 들고 가던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호에게 고개를 숙 였다. "감사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아무리 봐도 소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체형과 암만 잘 봐줘도 미인 이라곤 할 수 없는 약간 가무잡잡한 그녀의 얼굴. 자세히 살펴보면 그 녀의 여린 선을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치마도 아닌 커다란 낡은 외 투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충분히 자그마한 시골 소년으로 오해 할 만 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지호의 주의를 끈 것은 약간 멍한듯 보 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는 정도일까. "그럼……" 일행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한 쪽 손을 입으로 가져간 채 무언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일행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아이리스가 먼저 말을 걸었 다. "저희에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물쭈물하던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 체념한 듯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는…… 처음이신가요?" "네. 오늘 들어왔답니다. 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이런 형편이네요." 아이리스의 대답에, 그녀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우기인데다 사람들이 많아 숙소를 잡기 힘드실 거예요. 그저 비를 피할 정도지만 괜찮으시다면……" "아니요. 됐어요. 고마워요." 옆에 있던 일레인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다른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 다. "자, 일단 경비대 사무실로 가보도록 해요. 빨리 가지 않으면 어두워 지겠어요." "경비대는 아까 문을 닫았어요. 저녁시간이 지났거든요." 조금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일레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 공은 바구니를 들고 있던 여자였다. "어쨌든 필요 없으시다니, 저는 이만."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요!" 아이리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바구니를 들고있던 여자는 고개를 돌 렸고, 아이리스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호의를 베푸시려던 건데, 저희가 조금 성급했군요. 사과드 리죠. 아무래도 우기에 바깥에서 밤을 지낸다는 건 조금 무리일 듯 싶 은데요. 괜찮으시다면 아까의 제의를 받아들여도 될까요?" 아이리스의 부드러운 말에 바구니를 들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살짝 풀 리는 것 같더니,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기껏 초라한 숙소 정도 로 이렇게…… 저는 견습사제 에반제린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소개하자 일행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 다. 상대가 여사제인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저는 아이리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지호님, 일레인님, 그리고 덩치님 과 엘런님." 자신을 에반제린이라고 밝힌 여사제는 아이리스의 소개에 일일이 고개 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조금 쑥쓰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은 조금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보였다.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한결 얼굴이 밝아진 그녀에게 아이리스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그 커다란 바구니도 저희가 들죠." 아이리스의 말에 여사제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저, 저기 그렇게까진……" 아이리스가 살짝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아이리스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덩치님?" 아이리스가 부르기 전에 이미 덩치는 여사제의 곁에 다가서서 바구니 를 뺏아들고 있었다. "이거 뭐 한 짐도 안되는구만." 덩치는 어깨에 커다란 바구니를 얹고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여차하면 여사제라도 어깨에 업고 갈 기세였다.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여사제의 모습과 싱글거리며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덩치를 보며, 지호는 말들을 끌고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둥거리고 있는 여사제의 뒷 모습을 보던 지호는 처음 보았던 그녀의 멍한 눈빛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일레인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리스가 눈치를 줬지만, 이미 말 은 일레인의 입 밖으로 나온 다음이었다. 그들을 안내한 여사제의 얼 굴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뭐라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일레인의 반응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사제 에반제린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부두 근처에 있는 허름하고 냄 새나는 작은 창고였다. 안은 어두컴컴했고, 그나마 지붕은 제대로 붙 어있는 듯 했지만 나무판자로 만든 벽은 여기저기 비바람에 삭아 바람 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이 잘 만한 곳으로 보이는 것은, 짚더미 위에 허름한 침대보를 덮 은 침대같지 않은 침대 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찌보면 마구간 만도 못한 창고였다. "아니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노숙보다는 훨씬 낫죠. 그것도 우기 라면 더더욱." 아이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여사제에게 말했다. 하지만 일레인의 찌 푸린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환자들을 돌봐야 하거든요." 여사제의 목소리는 약간 굳어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허탈한 듯 한 목소리랄까. "환자요?" 아이리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여사제의 시선이 옆에 있는 큰 창고로 향 했다. 일행이 있던 창고 옆에는 커다란 창고가 몇 개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에 환자들이 십여명이나 넘게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곳은 일행이 있던 곳보다 더 형편이 나빴다. 냄새는 조금 덜했지만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보다못한 덩치가 대 충 나무를 구해다가 막아줄 정도였다. 그나마 다른 커다란 창고들 보 다는 나은 형편이었다. 일행이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자 에반제린이 라는 여사제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원래 이곳은 부두에서 내린 짐을 보관하는 창고지역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여사제가 사용 허락을 받아 다친 사람들을 수용한 것이다. 환자들 대부분은 연고가 없이 후송된 병사들이나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든 농민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몇몇 부녀자들이 여사제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견습사제 에게 호의를 보여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이 창고지역은 컨 웨이 성에서도 버려진 지역처럼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일행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온 것은 결코 무리가 아 니었다. 여사제의 처지를 동정해서든, 혹은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하 룻밤을 묵어야 할 창고 때문이든. 일행은 여사제 에반제린이 작은 창고를 내어준 것이 그녀가 할 수 있 는 최선의 호의를 보인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여자들은 여사제가 안내해 준 창고에서 묵기로 했고, 남자들은 비어있 는 다른 커다란 창고에서 불을 피우고 노숙 아닌 노숙을 하기로 했다. 그나마 여사제는 환자들 틈에서 새우잠을 잔다는 것을 아이리스가 부 득불 고집을 부려 함께 묵게 되었다. "그럼 저는 환자분들에게……" 여사제 에반제린은 작은 창고로 돌아온 일행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 사를 했다. 그녀의 얼굴은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호가 불러세웠다. "저, 사제님." "견습, 사제랍니다. 지호님." 여사제 에반제린은 갑자기 지호가 말을 걸자 약간 놀란 듯 했지만 곧 지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 네. 견습사제님. 죄송하지만 잠시 손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눈매가 살짝 찌푸러졌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미소지으며 부드 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견습사제님. 이 분은 의술을 조금 아시거든요." "아, 네……" 여전히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호 때문은 아닌 듯 했다. 결국 그녀는 살짝 손을 내밀었다. 지호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살짝 짚었다. "으음." 지호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군요. 맥박(脈搏)이 상당히 약해졌어요." 분명히 지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도, 여사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여사제 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일이 모두 끝나시면,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여사제의 얼굴이 눈에 확 띄게 굳어졌다.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지호 를 쏘아보듯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치유력이 없어요. 혹시 치유를 바라신다면… …" 일행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쳐갔다. 견습이라도 분명히 사제다. 사제가 되려면 자신의 신앙으로 나타나는 신성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러한 신성력의 가장 첫째 증거가 신의 사랑의 증거라는 치유의 권능이 었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치유력이야말로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치유력이 없 는 사제라니. 아무리 견습이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일행의 반응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 여사제 에반제린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지호는 얼른 말을 받았다. "아, 아니예요. 제가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여사제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무나 작은 소리 라서 채 입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듯 했다. "소용없을 거예요." 들은 사람은 가까이 있던 지호 뿐이었다. 그나마 지호가 아니었다면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리스 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감사의 뜻이랍니다. 아마, 도움이 되실거예요." "그럼 이따가……" 그녀는 살짝 말을 흐리고는 급히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그녀의 탁 탁거리는 발소리는 '꺅'하는 소리를 한번 거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 다. 아마 또 어디엔가 걸려 넘어질 뻔 한 모양이다. 그녀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일레인이 투덜거렸다. "뭐야? 무슨 사제가 치유력도 없이……" 여사제 에반제린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그녀의 입이 삐죽 나왔다. 아이 리스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좋은 분이잖아요." "글쎄요. 뭐, 환자들을 위해 고생하는 것 같긴 하지만 사제라면서 성 격까지 저렇게 톡톡 쏘아대서야…… 덩치! 엘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일레인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성격 가지고 뭐 라 한다는 것이 조금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덩치와 엘런이 '남 얘기 하네?'하는 표정으로 일레인을 쳐다보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지호는 일레인의 말에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톡톡 쏘는 듯 하 다는 말은 분명히 맞았지만, 왠지 첫인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 기 때문이다. "지호, 왜 저분을 오라고 했죠?" 아이리스가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는 지호에게 물었다. "아, 저 분. 눈이 꽤나 충혈되어 있었어요. 조금 신경이 쓰여서 맥을 짚어본 건데,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그래요?" 아이리스의 눈에 이채가 살짝 도는데, 일레인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크게 말했다. "자, 자. 일단 남자분들은 모두 나가주세요. 너무 피곤해요. 며칠동안 계속 말을 탔더니, 아직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아 정말." 일레인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바였기에, 남자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이미 해는 저문지 오래였고, 지금은 잠자리에 들더라도 그리 이 른 시간은 아니었다. 물론 늦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자,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탁- 일레인은 한쪽 눈까지 찡긋하며 손을 흔들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덩치 가 어깨를 으쓱하자 엘런이 말했다. "정말 피곤해. 어서 가서 불이라도 피우자고."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