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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16,22-34
복 음 : 요한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면 알거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비가 내렸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는 농사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얘기하는 것보다, 다른 이가 얘기하면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은 모든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잘 되던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전원을 끄고 다시 켜보았지만 그래도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연결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은 회사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염불이든 참선이든, 밀교든 현교든, 간화선이든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해 주면 그 수행은 정법(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로 걸어서 서울로 갈 때 목적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나중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내가 체득한 경지가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나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고성제,
그런 고통의 원인은 내 마음속의 탐욕, 분노, 우치(愚癡)와 같은 번뇌라는 집성제,
이들 번뇌를 모두 제거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이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인 도성제입니다.
즉, 불교 수행의 길에서 최종 목표는 번뇌가 소멸한 열반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그 어떤 수행법을 선택했어도
나에게 열반을 증득하게 해 주면 그 수행법은 정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그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 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인터넷을 가지고 씨름했으면 인터넷 연결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히 스마트폰 연결이라는 방법을 알았기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라는 공간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원을 ‘협조자.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부서졌을 때, 바오로 사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행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은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욕망은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은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욕망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분명히 드러낸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죄는 단죄받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 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 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가다’와 ‘오다’입니다.
예수님의 ‘가심’에 제자들은 ‘근심에 가득차게’ 됩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스승님의 부재가 커다란 상실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단순한 공허가 아님을 성령의 ‘오심’으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전에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가심’이 성령의 ‘오심’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겨받듯,
성자의 시대가 성령의 시대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삼위일체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빈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선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중개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더욱 돈독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오시면
“잘못 생각하는 것”(9.10.11절, 세 번 나옴)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은 계절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겨울 속에 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깊고 견고하게 만드는 연속된 단계요 이어짐입니다.
이 초대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깊은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성령 강림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은총입니다.
첫댓글 요즘 컴이 자주 멈춰 올리지 못했습니다.
시간들여 구슬려? 가며 작업해 올립니다.
너무 혹사시키나 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