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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影神府
어떻게 길을 잘못 들어 찾게 된 낙안사였다.
헌데 뜻밖에도 낙안사는 하나의 거대한 동굴과 연결된 사찰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낙안사 자체가 하나의 동굴이라고 표현해야 옳으리라.
마치 사막과 고원(高原)에서 고행(苦行)의 길을 자행하는
수도승(修道僧)들이 거처하는 곳과 다름없는..
오송학은 요난아의 손을 잡고 천천히 동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시주께선 어인 일로 본사(本寺)를 찾으셨는지요?"
안으로부터 낭랑항 여인의 음성이 들리며
한 명의 회색빛 가사(袈裟)를 걸친 여승(女僧)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승은 오송학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송학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소."
"찾으시는 분이 누구시온지..."
"중은 아니올시다."
"그렇다면 시주께선 잘못 찾아오신 듯 하군요.
아미타불...이곳엔 세 명의 여승만이 기거하고 있습니다.
시주께선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세 명의 여승 뿐이라고...?"
오송학의 몸이 굳어졌다.
유작은 분명 이곳에 와서 예사령을 찾아
환영신부의 위치를 물으라 하지 않았던가?
헌데 세 명의 여승 뿐이라니..
"이곳이 낙안사가 분명하오?"
말을 하는 오송학의 눈빛도 싸늘하게 굳어들었다.
그 서슬에 놀랐음인가?
여승은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돌연,
"혜령(慧靈), 그분 시주를 안으로 모시거라."
안으로부터 나이 먹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승의 얼굴에 잠시 주저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난아, 들어가자."
오송학은 여승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요난아의 손을 잡아끌고
여승의 곁을 스쳐 지나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은 깊지 않아 오후의 양광(陽光)이 비스듬히 비쳐 어둡지 않았다.
일반의 동굴처럼 습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건조한 공기 중엔 아련한 향(香) 내음이 배어 있었다.
높이 일 장 남짓의 천정은 어느 정도 인공(人工)이 가미된 흔적이 역력했다.
양측 벽에는 한 쪽에 두 개씩 화강암 석문(石門)이 위치해 있었다.
정면에는 탱화(幀畵)가 그려진 문이 하나 있었다.
뒤를 따라온 여승이 황망한 동작으로 그 문을 열어 주었다.
밝은 빛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미타불..드시지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송학은 이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면 삼장 넓이의 지하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면에는 세 개의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위치해 있고,
그 아래에 놓인 향로로부터 새파란 향연(香煙)이
세 속의 번뇌를 씻어주듯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여승,
그녀들은 불상을 마주하고 앉아 나직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한 명은 왜소한 체구로 파르라한 머리의 여승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약간 풍만해 보이는 몸매였는데
백발(白髮)을 깎은 듯 머리가 하야스름했다.
이때 하얀 머리의 여승이 천천히 합장을 풀며 돌아 앉았다.
"어서 오시게.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송구스럽네."
일견해 보기에도 푸근한 감을 느끼게 하는 온화한 미소의 백미여승(白眉女僧)이었다.
마치 이 낯선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오송학이오."
오송학은 무심히 말을 받으며
백미여승의 염주 걸린 손이 가리키는 곳에 천천히 자리했다.
"난.. 난아예요...요난아..."
요난아도 오송학을 따라하듯 쪼르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순간 요난아를 바라보던 백미여승의 두 눈에 한 줄기 빠른 이채가 스쳤다.
허나 그 변화는 나타날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탄식했다.
"유작..그 어르신이 이토록 빨리 세상을 떠날 줄이야..
그때가 되면 시주가 이곳에 찾아오리라는 말씀이 계셨네."
오송학은 의혹어린 눈으로 말을 받았다.
"나는 예사령이라는 여인을 찾아왔소."
"예사령이라는 이름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네."
백미여승의 말에 오송학의 신색이 멈칫 굳어졌다.
"그녀가...죽었다는 말이오?"
"아미타불..."
백미여승의 나직히 불호를 외우더니 문득 눈길을 옆의 여승에게로 던졌다.
등을 보인채 합장하고 있는 그 여인의 몸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킨건 거의 동시였다.
순간 오송학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이제보니..!'
그렇다.
놀랍게도 그 여승은 바로 예사령이었던 것이다.
유작에 의해서 자신이 소속된 암흑마천이
바로 부모를 죽인 흉수임을 알게 되었던 그녀다.
그리고 그녀는 암흑마천을 상대로 무서운 지모를 발휘하여
탈혼도를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었다.
허나 설마하니 그녀가 세상을 등지고 불가에 귀의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아미타불...! 업보로다!"
백미여승의 손에 들린 염주알이 빠르게 돌았다.
굵게 잡힌 주름살 하나하나엔 아직 해탈하지 못한 피안의 찌꺼기가 아롱져 매달린다.
이때 예사령, 아니 혜인의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오송학을 향해 돌아섰다.
몰라볼 만큼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오송학을 향해 합장하며 조용히 말했다.
"소승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마옵소서. 이미 소승은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천천히 불당을 나섰다.
오송학은 그녀의 어깨가 오늘따라 매우 가냘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강했던 그녀에게 저런 면이 숨어있었던가..?'
오송학은 나직이 탄식하며 백미여승을 돌아 보았다.
"사태(師太)께선 불호가 어찌 되시오?"
"불호같은건 없네
. 하나 정 거추장스러운 호칭이 필요하다면 무아사태(無我師太)라고 기억해두게."
"무아사태...?"
오송학은 백미여승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무어라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백미여승, 무아사태의 음성이 조용히 이어졌다.
"빈니는 예전에 주대인의 은혜를 입은 바 있어서
그 보답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십만대산 전체를 뒤졌다네."
"바로 이곳을 찾기 위해서였네."
무아사태는 품속에서 하나의 양피지를 꺼내 오송학의 앞에 펼펴 놓았다.
순간 오송학의 안색이 흠칫 변했다.
"이...이것은 천외기환록(天外奇幻錄)에 있는.."
놀랍게도 양피지엔 천외기환록의 마지막 장에 그려져 있던
바로 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산봉우리와 그 가운데 펼쳐진 자욱한 운무(雲霧)의 협곡(峽谷),
협곡 위로 다섯 마리의 기러기가 한가로이 열십자로 날고,
그림의 아래엔 너무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있는 한귀절의 싯귀...
<광명(光明)이 잦아들고 암흑(暗黑)이 다가올 때,
한 줄기 빛을 품고 동봉(東峯)에 오르니 만월(滿月)이 웃더라.
한 송이 낙화(落花)로 화한들 어찌 혈혼(血魂)을 떨치지 않으랴.
아아..
암흑은 물러가고 다시 광명이 찾아 들더라.>
무아사태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주대인께서 삼십여 년 전 이 그림을 주시며 이곳을 찾아달라 하셨네.
물론 시주도 이것을 보았을 것이네.
깊이 생각지 않아 이 글귀의 뜻은 잘 풀어보지 않았을 것으로 믿네."
"빈니 역시 이 글의 뜻은 모르네.
단지 그림에 그려진 기러기를 보고...
그림의 형상을 따라 십만대산을 뒤졌네.
천외기환인께선 기문(奇門)의 조사(祖師)이셨으니
분명 십만대산 어디엔가 그 위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네."
무아사태는 음성은 너무나 담담해서 마치 염불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사실 이는 주대인의 고견을 따른 것이지만...
헌데 얼마전, 주대인께서 혜인을 데리고 오셔서
혜인의 출가(出家)를 부탁함과 동시에
백 년 동안 고심 끝에 풀어낸 글귀의 뜻을 주고 떠나셨네."
무아사태는 한 장의 서찰(書札)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순간 오송학은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옴을 느꼈다.
'오오.. 대사부!'
서찰에는 일말의 사연도 없이 단지 글귀와 그림의 해설만이 쓰여져 있었다.
<산수화는 지형(地形)을 나타냄이요,
기러기의 나는 자세로 보아 그 지형은 낙안곡(落鮟谷)이 아니면
낙안봉(落鮟峯)일 것이다.>
<광명(光明)이라 함은 평화요, 암흑(暗黑)이라 함은 암흑마천이다
. 즉, 천외기환인께선
당신의 유물이 암흑마천이 천하를 피로 덮을 때 열리리라는 것을 예견하신 듯 하다.>
<한 줄기 빛이라 함은 환영경(幻影鏡)을 암시함이요,
만월(滿月)은 뜻 그대로 보름달을 의미함이다
. 환영경을 가지고 보름달 동봉(東峯)으로 오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한 송이 낙화(落花).. 이 부분만큼은 도저히 추측을 할수 없었다.>
'으음...한 송이 낙화라..'
오송학은 그 구절을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너무도 막연했다.
유작이 고심 끝에도 풀지 못한 만큼 그 의미는 실로 모호하기 이를데 없었다.
<혈혼(血魂)이라 함은 아마도 네가 혈부(血府)에서 얻은
고혼유찰의 혈혼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혼유찰의 혈혼검이라고..? 그
렇다면 천외기환인과 고혼유찰 사이엔 어떤 밀접한 관계라도..'
오송학은 의아심을 떠올리며 서찰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지막 구절은 천외기환인께서 당신의 유물에 대한 자부심을 표한 듯 싶다.
이로 보아환영신부의 무학은 암흑마천을 저지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부르르..
오송학의 전신이 세차게 떨렸다.
오송학,
그가 지금껏 스스로 고행과 자학의 길을 자초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암흑마천을 저지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자 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헌데 마침내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는가.
'찾아야 한다! 어떠한 난관(亂關)이 가로막는다 해도
환영신부만은 기필코 찾아야 한다!'
* * *
밤(夜),
휘영청 밝은 달이 까마득히 치솟은 낙안봉의 정상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만월(滿月)이었다.
보름달은 여인의 둔부처럼 풍염하고 새하얗게 떠올라
휘황한 금가루를 십만대산 전체에 도도히 흩뿌리고 있었다.
무아사태는 동굴 앞까지 오송학을 배웅하며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시주, 부디 큰 성취를 비네. 아미타불.."
합장한 손 끝에 가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오송학은 만월이 걸린 낙안봉 정상을 올려다 본 후 무아사태를 향해 돌아섰다.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사태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내 기필코 환영신부를 열겠소이다."
말을 하는 그의 눈에 비장한 결의의 빛이 일렁였다.
자학과 비탄에 빠졌던 세월의 찌꺼기를 말끔히 걸려낸 모습이었다.
무아사태는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오송학은 동굴 쪽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사태, 지난 십여 일 동안 혜인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요.
한마디 격려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아미타불..개념치 마시게. 아직 그 아이의 불심(佛心)이 얕으니 오히려 짐이 될걸세.
그보다."
무아사태는 문득 오송학에게 매달리다시피 서 있는 요난아를 바라보며 침중하게 물었다.
"그 아이를 빈니에게 맡겨주지 않겠는가?"
오송학은 흠칫하지 않을수 없었다.
무아사태의 말인즉 요난아를 불가에 귀의시키라는 뜻이 아닌가?
그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요난아의 조악한 입술 사이로 앙칼진 반발성이 터져 나왔다.
"싫어! 난 오빠와 함께 갈 거야! 이 세상 어떤 것도 오빠와 날 떼어 놓을 수 없어!"
요난아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가 잡을 세라 낙안봉 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아사태의 얼굴에 한 줄기 불안한 그늘이 드리워진건 그때였다.
"시주..저 여시주의 몸엔 살(煞)의 기운이 끼어있네."
"눈치 채고 계셨군요."
"그럼 시주도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 왔습니다."
오송학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일에 대해선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으니 사태께선 심려치 마십시오."
"아미타불..."
"그리고 만약을 위해서 한 가지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오송학은 품에서 한 장의 봉서(封書)를 꺼내 무아사태에게 내밀었다.
"만일 제가 반 년 후 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이것을 묘강과 중원의 접경지인 성무진의 입로(入路)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전해 주십시오."
말을 하는 그의 뇌리엔 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바로 냉무강이었다.
삼 년 후, 진정한 승부를 가리자!
그 약속을 지킬 날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냉무강은 이제 사신도혼(死神刀魂)이란 별호를 지닌채
암흑마천의 여섯째 제자로 거두어진 상황이다.
이제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오송학은
과거의 삼년지약(三年之約)을 잊지 않고
이렇듯 무아사태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서히..
그의 모습은 무아사태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아미타불..."
* * *
이제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것은 나의 능력 여하.
득도(得道)한 고승처럼 일체의 나를 무(無)와 공(空)으로 비우고,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다.
새로운 운명,
아니 새로운 천하를 위해서...
월광수려(月光秀麗)한 낙안봉 정상,
초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이라도 얼 듯 싸늘한 한풍(寒風)이 몰아치고 있었다.
휘류류류-
칼날같은 날카로운 예풍(銳風)이 바닥을 낮게 기는 키작은 잡목림(雜木林) 사이로 휘몰아친다.
넓이는 삼십여 장의 정상,
삼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한 면은 희뿌연 운무(雲霧)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만장단애(萬丈斷崖)였다.
휘이익!
그때 한 줄기 백영(白影)이 월광(月光)을 가르고 정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로 오송학이었다.
그는 정봉(頂峯)에 우뚝 서서 사위를 둘러 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만장단애의 끝,
그곳엔 한 명의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땅을 후벼파고 있었다.
요난아였다.
팍! 팍! 팍!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오송학은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의 다가섬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요난아는 돌아 보지도 않았다.
파바박!
그저 나무 꼬챙이로 바위 밑을 후벼파고만 있을 뿐..
헌데,
'음...?'
점차 파헤쳐지는 땅 속으로부터 어느 한 순간
오색찬란한 보광(寶光)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팍! 팍!
요난아의 손 끝에 피가 맺혔다.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드러난 물체...
그것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길이 세치 정도의 집없는 비수였다.
손잡이가 한 치 반, 검신(劍身)도 한 치 반,
지극히 작은 비수였다.
허나 그것은 한 사람을 죽이기엔 충분한 무기였다.
"아.. 곤오신비(崑烏神匕)야...!"
요난아는 자신이 발견한 물건에 대해 스스로 놀람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순간 오송학의 눈가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난아가 어찌 곤오신비(崑烏神匕)를 안단 말인가?'
곤오신비-
그 이름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 전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평생 병기(兵器)만 만들어온 나 곤오신자(崑烏神子)는
여기 천상(天上)의 신기(神器)를 남기노라.
곤오신비(崑烏神匕)를 두고 병기(兵器)를 논하지 말 것이며,
곤오신비 앞에선 무기도 빼지 말라!
그렇다.
못베는 것이 없고 못꺾는 병기가 없는 절대의 신병(神兵),
바로 그 천고(千古)의 기병(奇兵)이 지금 요안아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었다.
요난아는 곤오신비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광에 황홀한 듯 탄성을 지르며 손을 치켜들었다.
"오빠, 이것 봐! 여기 손잡이에 곤오신비라고 쓰여져 있어."
요난아는 오송학을 향해 돌아섰다.
'아아..그랬던가?'
오송학은 그제서야 내심 안도하며 곤오신비를 향해 몸을 숙였다.
휘이잉!
한 줄기 강맹한 바람이 단애 끝에서 불어 그의 백포자락을 사납게 휘날렸다
. 그에 따라 유작이 물려준 천잠보의가 드러났다.
곤오신비는 그의 눈앞에서 오색(烏色)으로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 그순간 요난아의 입가에 요사로운 미소가 스치는 것을.
번쩍!
곤오신비가 천삼보의를 종이처럼 뚫고 오송학의 몸에 틀어박힌 것은 그 직후였다.
피하고 자시고할 틈도 없었다.
오송학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순간 요난아는 유령처럼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고통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오송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난아, 참으로 멋진 암습이었다. 도저히 피할수 없을 만큼..."
"알고 계셨군요."
오송학을 직시하던 요난아의 입에서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그래요. 난 난아가 아니예요.
원래는 난아였지만 그 이름은 이미 내가 암흑마천의 특급 살수로 거두어질 때 죽었어요.
난 요랑(妖粮)이예요, 요랑!"
오송학의 신형이 휘청였다.
막장단애를 휘몰아쳐 부는 바람에 꺾일 듯 날아갈 듯...
그의 입가로는 한 줄기 선혈이 배어 오르고 있었다.
"요랑...? 아니다. 내게 있어 너는 단아일 뿐이다.
귀여운 동생이자 고행의 동반자 난아..."
"아니야!"
"난아.. 너는 자책하고 있구나.."
"난아가 아니란 말야! 나는 살수 요랑이야!"
그녀는 악을 써대고 있었다. 한 줄기 눈물이 앳된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송학은 몸의 고통도 잊어버린채 툴툴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천하에 너의 암습을 피해낼 상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아!
난 당신이 천잠보의를 입은걸 보고 때를 기다려왔을 뿐이야!
이곳에서 곤오신비를 발견한건 당신의 목숨이 다했기 때문이야!"
"아니다...너는 진정으로 내게 정을 느꼈던...
지금도 느끼고 있는 인간 요난아일 뿐이다.. 우욱...!"
한 모금의 선혈이 오송학의 앞섶 가득히 쏟아져 내렸다.
그의 얼굴은 이미 화색을 빼앗기고...
이내 밀납처럼 창백하게 굳어져 갔으며...
이윽고는 숯덩이처럼 푸석푸석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죽음(死). 이제 그는 서서히 죽음의 실체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그때였다.
우르르릉-
오송학의 뒤 만장단에 아래의 운무 속을 뚫고
한 줄기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단애의 저 밑바닥 칠흑의 어둠속으로부터
미증유의 대폭발이 일어난 듯했다.
요난아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오송학은 초연했다.
죽음앞에선 천지개벽(天地開闢)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난아...어서 돌아가거라...그동안 애썼다.
나는 한 송이 낙화(落花)가 되어 저 아래로 뛰어내리면 되는 것..."
무심코 중얼거리던 오송학의 표정이 문득 기이하게 흔들렸다.
섬광처럼 뇌리에 떠오르는 한 귀절의 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화(落花)...한 송이의 낙화.. 오오..그렇다...낙화..그것을 뜻하는 것이었어..!'
그는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을 되씹었다.
한 송이 낙화(落花)...
그것은 유작도 풀지 못했던 마지막 의문이었다.
-한 송이 낙화로 화한들 어찌 혈혼(血魂)을 떨치지 않으랴.
주춤... 주춤...
오송학은 마비되기 시작한 발을 들어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순간 요난아가 안색이 창백해진채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허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슈우욱!
그녀는 막 절벽의 한 모서리를 박차고 떠오르는 오송학을 잡지도 못한 채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한순간 오송학의 음성이 환청인듯 그녀의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난아...내년 봄에는 손잡고 봄꽃을 꺾으러 가자꾸나.."
"아...!"
요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허물어져 내렸다.
"엉엉.당신은 멍청이야..정말 못났어..
한낱 정(情) 따위에 사로잡혀 내 정체를 짐작했으면서도 그냥 방관하다니.."
휘우웅..
무심한 바람이 오열하는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 그 바람이 요난아에게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난아,
울지 말아라.
나는 알고 있단다.
네가 운다 해서 네가 지금껏 보내온 어둠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난아,
슬퍼하지도 말아라.
네가 남을 위해 슬퍼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단다.
가엾고 슬픈 것은 바로 너 자신이란다.
세월에 버림받고 암흑에 조롱당한 운명을 지닌 너 난아..
난아,
저 꽃을 보아라.
너를 향해 웃고 있는 저 꽃을..
그래..
이 오빠는 저 꽃처럼 그렇게 웃으며 네 앞에 나타날 거란다.
* * *
쿠쿠쿠쿠쿠-
만장단애의 밑,
그곳은 천지(天地)의 종막(終幕)이었다.
고오오오-
땅이 갈라진다.
거대한 물기둥이 물거품을 뿜어 물고 미친 듯이 솟구친다.
광풍폭우(狂風暴雨)와 뇌전(雷電)이 머리를 헤쳐 풀고 갈가리 날뛴다.
광란의 회오리...
찬란한 보광을 가슴에 꽂은 한 줄기 혈백색의 인영이
그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촤아악!
갈라진 땅속으로부터 솟구친 물기둥이 그의 몸을 허공에서 몇차례 퉁기고는
주인을 맞듯 인영을 빨아들였다.
고오오오!
그 뿐이엇다.
희뿌연 운무 속에 정적이 다시 찾아들고...
낙안봉 너머로는 만월이 기울어 들고 있었다.
* * *
지하(地下),
빛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억겁(億劫)의 세월을 두고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암흑만이 존재하는 곳...
그 어둠 속 한 귀퉁이에 시퍼런 벽수(碧水)가 일렁이는 웅덩이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벽수가 찰랑이는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하나의 시신이 있었다.
점점이 선혈자국이 물과 함께 번져 있는 백색유삼을 걸친 미장부였다.
바로 오송학이 아닌가?
그의 얼굴은 밀납처럼 창백하였으며
, 전신은 흡사 시체를 보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또한 그의 가슴 정중앙에는 요랑 요난아가 꽂은 곤오신비가
아직껏 찬연한 보광을 발하며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녕 죽었단 말인가?
스스스...
억겁같기도 하고 일수유같기도한 시간이 암흑속에 묻혀 지나갔다.
헌데, 언제부터였을까?
오송학의 몸에 미세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 위로 은은한 홍조가 어리고,
가슴에 박힌 곤오신비가 저절로 뽑혀져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오오..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르르..
오송학의 눈꺼풀이 저절로 위로 말려 올라갔다.
동시에,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던 곤오신비가 저절로 빠져나오는 것이었으니..
회혼불사대법(廻魂不死大法)!
그렇다.
그것은 바로 회혼불사대법의 위력이었다.
기문칠로(奇門七老)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낸
사중생(死中生)의 회혼대법(廻魂大法)이 효력을 발동한 것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
오송학은 심장에 비수가 꽃히고도 살아난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석중허는 눈을 뜬 채 그대로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빛은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나 자신에 대한 실험은 끝났다. 고행(苦行)은 이것으로써 끝이다!'
고행(苦行)의 끝!
스스로의 나약함을..
자신이라는 한 사람을 바라보며 아낌없이 천년전통을 무너뜨린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그것들로 인해 시작된 비탄의 세월은
이제 새로운 도약(跳躍)의 발판으로 승화(昇華)되려는 것이다.
'이곳은 분명 환영신부의 안일 것이다.
낙화라 함은 스스로의 몸을 던지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지극히 정교한 천문지리(天門地理)와 기관진학(機關.陣學)에 의한 안배(按排)였다.
만월이 떠오르는 날마다 이곳은 열렸던 것이다!'
오송학의 머리는 매우 민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설사 이곳이 환영신부가 아닐지라 해도 나는 이제 녹슨 검을 닦겠다.
더 이상 그늘로 숨어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검을 거꾸로 물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해도..'
번쩍!
그의 눈에서 한 줄기 정광(精光)이 이는가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십장여 밖 어둠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 암동(暗洞)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으음... 이곳은 역시 환영신부였다."
오송학의 입에서 미미한 떨림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푸른 이끼가 가득 낀 흑오석(黑烏石)으로 만들어진
석문(石門) 앞이었다.
석문의 한복판엔 한 줄기 글귀가
금강지력(金剛指力)의 수법으로 웅휘하게 쓰여 있었다.
<환영경(幻影鏡)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리라.>
석문 아래에는 족적(足跡)이 깊숙이 파여 있었고,
글귀 아래로는 조그만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오송학은 선뜻 족적 위에 자신의 발을 맞추고
환영경을 하나로 합쳐 구멍속에 밀어 넣었다.
찰칵!
경쾌한 소성과 함께 환영경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번-쩍!
구멍 속으로부터 한 줄기 백광(白光)이 번뜩이며 석문이 가볍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지이잉...
그와 함께 서서히 석문이 열렸다.
석문이 완전히 열리자 나타난 것은 하나의 통로였다.
일장 여의 좁은 통로...
천정엔 일정한 간격으로 백색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환상적인 광휘를 뿌려 내고 있었다.
통로는 오 장여를 이어지다 돌연 급격하게 커지며 원형석실(圓形石室)을 형성했다.
헌데,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썰렁한 바람이라도 일 듯 텅빈 공간일 뿐이었다.
우측으로 주사빛 문이 하나 위치해 있고
, 전면에 두 자 높이의 조그만 청강석(天剛石) 석대(石臺)가 놓여져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헌데, 석대 위에 하나의 벽옥궤(碧玉机)가 놓여져 있었다.
길이 한 자, 높이 반 자쯤 되어 보이는 조그만 상자였다.
오송학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석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의 동공으로 석대 전면에 쓰여진 한 줄기 글귀가 투영되었다.
<아무나 익힐 수 있는 다섯 초의 무학을 남기노라.
그러나, 그대의 능력에 따라 평생이 걸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혀 두노라.
대성을 이룰 수 없다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고 나가기 바라노라.>
서명(書名)도 없는 글이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이렇듯 광기(狂氣) 넘치는 글을 남겨 놓았단 말인가?'
오송학은 그의 내용이 광오와 오만이 극치에 이르고 있음을 느끼며
서슴없이 벽옥궤의 뚜껑을 열었다.
덜컹!
상자는 의외로 쉽게 열렸다.
순간,
팔랑...
하나의 지편(紙片)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오송학은 떠오르는 지편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상자속을 들여다보았다.
"응...?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
상자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손에 잡힌 지편을 펴보았다.
<기문(奇門)의 이십오대(二十五代) 문주(門主) 망아존자(忘我尊子),
환영(幻影)의 실체도 보지 못하고 물러간다.>
'기문의 문주...망아존자 그분이..?'
망아존자,
중원이 낳은 무림사 최고의 의혈남아(義血男兒)!
유작이하 오작으로 하여금 대계(大計)를 꾸미게 한 장본인.
지편의 내용은 그가 기문의 문주였으며,
이곳 환영신부에 들었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곳에 남겨졌던 무학이라는 것이 혹시..'
<분광환영신공(分光幻影神功)은 본인(本人)이 회수해 간다.
본인 이후에 이곳에 드는 후인이여,
그대는 분명 분광환영신공을 익혔을 터..
그것은 이미 노부가 천기(天機)로 헤아린 바이고,
이곳을 창설하신 천외기환인, 그분의 뜻이기도 하다.
부디 환영의 실체를 풀어 난세(亂世)를 평정해 주길 바라노라.
건원(建元) 일백이년(一百二年)
망아존자(忘我尊子) 서(書).>
'이분께서도 이미 통천(通天)의 신인(神人)이셨군...
그는 자신의 유서가 지금에 와서 풀릴 것까지 예측한 것이 분명하다!'
오송학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천외기환인이라는 사람이 큰소리를 칠만도 하군.
아무나 익힐 수 있다는 무공이 현천하 제일신공이라는 분광환영신공이라니..
그렇다면 환영의 실체라는 것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진정 소름이 끼칠만큼 가공하겠군!'
정말로 그는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문(門)이 아닌 문(門).
후인이여, 스스로 열어라.
그러면 그대에게 환영의 실체를 주겠노라.>
원형석실 우측에 위치한 주사빛 문 위에 쓰여진 글이었다.
오송학은 글귀를 읽고 세심하게 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홍광(紅光)을 발하는 주사빛 문에는 티끌 만한 흠집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만년오금석 보다 백배 강한 재질이로군.
혹시 전설로나 전해오는 석정홍(石精紅)이 아닐까?"
석정홍은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물상(物象)들 중 가장 단단하다고 전해지는
극강(極强)의 금강석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송학은 언제부터인지 석정홍 문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문은 분광환영신공을 대성(大成)해야 열린다.
나는 이미 그것을 극상의 경지까지 익히고 있다.
낙화로 화한들 어찌 혈혼을 떨치지 않으랴!
내가 지닌 혈혼검과 싯귀가 부합되는지는 미지수이다.
만약 부합된다면 이곳은 고혼유찰의 혈부(血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혈부는 지옥겁화천의 극양진기에 의해 열렸다.
앞의 생각이 맞는다면 혈혼에 극양신공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다.
저 글귀를 따라 극양신공을 운용해 혈혼으로 분광환영검을 펼쳐 보는 것이다.
제발... 열려다오!
생각은 조리 있게 오랜 시간 동안 정리되었으나, 행동은 빨랐다.
번쩍!
카카캉!
시뻘겋게 달아오른 검신으로부터 새파란 검광(劍光)이 작렬하며
청홍의 불똥이 폭죽처럼 터져올랐다.
혈혼검이 석정홍 문위의 글귀를 따라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 문의 색깔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적색(赤色)에서 흑색(黑色)으로, 흑색에서 푸른색(靑色)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번의 색의 교차가 이어지더니
그것은 투명한 물색(水色)으로 고정되었다.
오송학은 슬며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그의 손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문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오오...
문이 열린 것이다.
오송학의 얼굴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몸은 문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책,
그곳은 책의 숲이었다.
방원 십오 장 둘레의 원형석실,
원형선반은 천정까지 무려 십팔층이었고,
선반위엔 일촌의 틈도 없이 서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족히 오만 여권은 됨직한 서책,
아련한 지향(紙香)과 묵향(墨香)이 피어오르는 책의 숲속에서
오송학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서고의 정중앙,
지극히 좁은 공간에는
하나의 오향목(烏香木) 탁자가 바자나무 의자와 함께 위치해 있었다.
새까만 옻칠이 된 탁자위엔 하나의 서찰이 놓여져 있었다.
<환영신부의 모든 것을 다 갖길 원한다면 이곳의 서책을 모조리 읽어라.>
'미...미쳤군...평생 걸려도 못 읽겠다!'
오송학은 아예 어이가 없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취할 만큼만 취하고 이곳을 물러가라.>
'완전히 엄포로군...'
그렇다.
글의 내용은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내용이 아닌가?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탁자 위를 보라.>
'탁자위를 보라고...?'
오송학의 시선이 서찰을 집어든 탁자 중앙으로 떨어졌다.
<幻影神府入者不出 左三右四卽入府,
환영신부에 들어가는 자는 못나온다.
좌로 세 번, 우로 네 번이면 신부(神府)에 들 수 있다.>
진정한 환영신부...
그곳에 드는 문은 바로 이 오향목 탁자였다.
헌데, 들어가면 못나온다니...?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
오송학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질서없이 꽂힌 책을 그저 순서대로 뽑아 읽었다.
처음에는 하루의 시간에 몇권도 힘들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몇권은 스무권으로, 스무권은 마흔권으로 변해갔다.
기하급수적으로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무학기서(武學奇書)가 있는가 하면 하오(下午)의 잡학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살(箭)같이 흘러갔다.
* * *
빙글!
원탁이 좌로 세 바퀴 빠르게 돌려졌다.
빙글!
이번엔 우로 네 바퀴,
순간 한소리 격한 소성이 원형석실의 정적을 깨며 울려퍼졌다.
"이럴 수가.. 이토록 정교한 기관의 안배가 있었다니.."
그렇다.
원형석실을 따라 원형으로 둘러쳐진 십 팔층 선반,
그것은 이 순간 천천히 지하로 스며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천정의 가장자리로부터 주름살 하나 없고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포자락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시선이 닿으면 닿는 대로 퉁겨질 듯 희디흰 백포였다.
오송학은 눈이 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상상불허의 장관을 지켜보기 위함이었고
,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또 다른 안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백포자락이 바닥에 겹겹이 쌓이며 내려오는 동작을 멈췄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릉!
불현듯 그의 뒤로부터 한 줄기 기음(奇音)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기음은 문이 위치한 곳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저...저것은..?"
오송학은 신형을 돌려 바라보다가 한 줄기 경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그가 들어온 문.
그곳의 바닥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른 문과 똑같은 크기의 물체,
그것은 투명한 수정관(水晶棺)이었다.
수정관 속엔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인이 잠들어 있었다.
노인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만큼 홍안(紅顔)이었는데
두 눈은 반개(半開)한 상태로 관속에 꼿꼿이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이군...'
오송학은 이내 노인이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저토록 물처럼 고요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다니..'
노인을 바라보는 오송학의 눈가로 언뜻 기광(奇光)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고혼유찰(孤魂幽刹)의 유체(遺體)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렇다.
고혼유찰에서 느꼈던 기운이 뼈속까지 에이는 한 살지기(寒殺之氣)였다면,
이 노인의 몸에서 풍기고 있는 기운은 만인을 포용하는 만상지기(萬象之氣)였다.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수정관을 향해 다가섰다.
무엇인지 모를 강한 힘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과 수정관의 사이가 불과 두 자 정도로 좁혀든 순간이었다.
스스스...
수정관 위로 한 줄기 담담한 청연(靑煙)이 피어오르는 듯 하더니
그것은 이내 한 줄기 글귀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 천외기환인(天外奇幻人), 환영신부의 진정한 주인을 환영하노라.>
청연(靑煙)의 글귀는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놀랍게도 수정관 속에서 영면(永眠)에 들어 있는 노인은 바로 천외기환인이었던 것이다.
글귀는 계속 청연으로 형성되어 이어졌다.
오송학은 나타나는 글귀들을 읽기에 정신이 없었다.
글귀는 나타나는가 싶으면 빠르게 지위지고 있었으니..
<하늘(天)이 열리고 땅(地)이 생성(生成)되니, 그것이 곧 천지창조(天地創造)이다.
수많은 생물이 생성되고 그중 인간이 만들어지니 그것이 곧 인간사(人間史)의 시초였다.
또한 그것은 투쟁의 시작이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
그 속에서 하나의 무엇이 잉태되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지배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武.
바로 그것의 잉태였다.
무(武)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발전을 거듭했다.
신승(神僧), 달마(達摩)!
그에 이르러 땅 위에 공존하는 모든 무(武)는 집대성 되었다.
달마는 지배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배자였다.
무(武)의 지배자,
누구도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
<전무후무(前無後無)의 초인(超人),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헌데, 그 전설과도 같은 믿음은 신화(神話) 속에 묻혀야만 했다.
삼인(三人),
달마의 신화를 깬 것은 이 땅이 배출한 세 명의 절대 초인이다.
천외기환인(天外奇幻人).
고혼유찰(孤魂幽刹).
암흑마왕(暗黑魔王).
하늘과 땅의 조화(造化)를 헤아려 비와 바람을 부를 수 있었다는
조화(造化)의 신인 천외기환인,
고독한 살수(殺手)로 독보진천하(獨步震天下)한 살인의 신인 고혼유살,
이땅에 존재하는 십팔만 마도지학(魔道之學)
이십사만종(二十四萬種)의 패도절공(覇道絶功)을 집대성시킨 마도(魔道)의 신인 암흑마왕,
이 삼 인에 의해 달마의 전설은 깨어진 것이다.>
<허나 그들은 지배자가 될 수 없었다.
달마가 이룬 무의 지배자는 될 수 있었지만 인간 본능인 천하 지배는 불가능했다.
일산삼호(一山三虎)!
한 산에 세 마리의 호랑이가 군림하니
누가 누구를 꺾고 최후의 지배자로 떠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섣불리 일어서면 둘이 가로막는다.
결과는 무참한 패배만이 기다릴 것이다.
허나, 누구도 모르는 삼 인만의 비밀이 있었다.
-셋 중 가장 강한 자는 암흑마왕이다.
천외기환인과 고혼유찰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 둘이 합치면 암흑마왕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암흑마왕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여, 그는 하나의 대계(大計)를 꾸미기 시작했다.
기필코, 후대(後代)에는 두 사람 모두의 무학을 꺾어 나 암흑마왕의 실체를 보여 주리라.>
<허나 그 대계를 이미 간파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진한 우정의 끈에 묶여 있던 숙명의 친우(親友)들, 바로 천외기환인과 고혼유찰이었다.
본래, 그들은 천애고아였고,
태어나서부터 검을 잡기 까진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이어진 우정의 질긴 끈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질긴 것이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단 암흑마왕만은 알고 있었다.
그가 경동하지 않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였다.>
<천외기환인은 고혼유착에게 말했다.
천하를 위해 너는 악인(惡人)이 되라고.
그로부터 죽음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니...
불멸의 살수, 고혼유찰!
그는 닥치는 대로 훔치고 빼앗았다.
천외기환인은 첫째로 한옥비차(寒玉飛叉)를 만들고,
형산 혈무봉의 혈지 속에 일차 안배를 마쳤다.
그곳에 지옥겁화천(地獄劫火泉)이라는 앙화(殃火)의 막(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둘째로 낙안봉에 환영신부(幻影神府)를 만들고,
그곳을 찾아 들어올 수 잇는 열쇠를 남겼다.
그리고 한편 고혼유찰이 보내 오는 비급들을 환영신부내에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천수(天壽)를 다니며 그 동안 준비한 한옥비차와 환영경,
천외기환록을 강호로 소문과 함께 유출시켰다.
그리고 고혼유찰은 혈지의 혈부 속에서,
천외기환인은 환영신부에게서 영면에 든 것이었다.
진정 천하를 위한 대의협심(大意俠心)이요, 의혈(義血)들이었다.>
<한편, 암흑마왕은 그 나름대로 가공의 극치인 마도, 패도지학들을 재정립시켜
천년마왕동(千年魔王洞)을 열고..
암흑마천이라는 피의 집단을 만들어 지키게 했다.>
스스스...
글자를 만드는 푸른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아...!"
오송학은 이 혈사의 기록을 보며 숙연한 가운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 전대의 혈사가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수정관 위로는 아직도 쉴새없이 청연의 글귀가 명멸하고 있었다.
<암흑마왕의 마도지공을 꺾을 무학은 존재치 않는다.
만약 천년마왕동이 열렸다면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천년마왕동! 냉무강과 도남강이 들어갔다 하지 않았던가?'
오송학은 언젠가 엿들은 백안귀재와 백빈영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사생양극(死生兩剋)이라.
비록 노부는 못 이루었지만 그대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이곳에 든 그대의 숙명인 것이다.
그대는 이미 고혼유착의 모아온 오만권의 기서를 읽었을진저,
그것을 기초로 깨달음의 무학을 연성해야 한다.
지금 그대의 주위에는 눈 보다 흰 백색의 천지일 것이다.>
'깨달음의 무공이라..'
오송학은 주위에 쳐진 백포자락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희어서 흰 공간. 마치 설원(說原)속에 홀로 미아(迷兒)되어 버린 듯하다.
<백(白)은 허(虛)요, 공(空)이며, 무(無)다.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백이다.
그대는 이제부터 마음(心)이 이는 대로 마음(心)이 시키는 대로...
허와 공과, 무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창조의 백색..'
오송학은 무엇엔가 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글귀는 이제 마지막인 듯 뿌옇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대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때만이 이곳을 나갈 수 있다.
그전에 나가려 한다면 노부가 그대를 가로막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가로막는다고..?
그렇다면 자신의 유체에까지 기관을 설치했단 말인가?'
오송학의 얼굴에 은은한 경악이 차 올랐다.
<그대가 나가려면 수정관을 깨는 길뿐이다.
그 순간 노부는 그대에게 죽음의 일초를 펼친다.
단 일초,
그대는 그것을 맞받아 노부를 영원히 잠재우기 전엔 결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으음...'
오송학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분광환영신공 따위는
노부에게 있어 무학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글은 비로서 모두 끝났음인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오송학의 눈에 형형한 신광이 작렬했다.
"하리라. 천년을 고심 속에 잠들지 못한 당신을 열원히 쉬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빙글!
그는 몸을 돌려 석실의 정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걸친 백의가 새까맣게 백색의 공간이다.
백색(白色)..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無)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곳엔 모든 것이 있다.
천하의 모든 물상(物象)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오송학은 잠자코 있고 모든 것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깨워야 하는 것이다.
목상(木像)은 단순히 나무를 깎는다 해서 명품이 될 수 없다.
나무 속에 내재된 혼(魂)을 그대로 불어넣어야 한다.
오송학도 이제 저 백포 위에 그의 모든 것을 몰입시켜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 * *
바람,
검은 바람...
그 바람은 지난 일 년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 혈풍(血風)으로 불었다.
거대한 천년고목(千年古木)이 뿌리 채 뽑혀 나뒹굴었다.
고목은 허연 뿌리를 거꾸로 세우고 처박혔다.
그리고 신음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갔다.
광풍노도처럼 휘몰아치던 바람이 이제는 서서히 그 기세를 죽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부술 벽도, 나무도 남아 있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기나 한 듯이..
그 즈음,
세상에는 하나의 혈지백서(血紙白書) 포고문(布告文)이 내 걸렸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대도(大都)는 물론이거니와,
십인 만 넘으면 산간벽지(山間僻地)의 흙담벽에까지...
<암흑율법(暗黑律法) 오개조(五個條)-
제일조(第一條) : 앞으로 개인이나 문파(門波)의 사사로운 분규는 일체 금(禁)한다.
제이조(第二條) : 정파(正波)니 사파(邪波)니 하는 따위의 말은 일체 사용은 금한다.
제삼조(第三條) : 오십 인 이상의 각 천하문파(天下門波)엔
적당한 수(數)의 암흑평의회(暗黑評議會)를 상주(常住) 시킨다.
별조(別條)-
제일항(第一項) : 암흑평의회의 권한은 개인이나 문파의 장교(掌敎)에 우선한다.
제이항(第二項) : 암흑평의회는 상주하는 문파의 모든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갖는다.
제삼항(第三項) : 암흑평의회에서 대항함은 곧 암흑마천에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제사조(第四條) : 암흑마천주(暗黑魔天主)는 무림황제(武林皇帝)로 군림한다.
제오조(第五條) : 상기(上記) 사개조(四個條)를 어길 시 삼족구친(三族九親)을 멸(滅)한다.
암흑마천주 백(白).>
***
오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
명실공히 마도진천하(魔道震天下)라!
천하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호호...할아버지, 바깥 세상은 참 아름다워요."
꽃밭이다.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연못까지 갖춰진 꽃밭이다.
각종의 벌과 나비가 분주하게 날고
따사로운 오후의 양광(陽光)이 꽃밭 전체를 포근히 감싸는 시각..
그 속에서 짤랑짤랑 소녀의 티없이 맑은 교소가
조롱박 속의 청수(淸水)처럼 울려 퍼졌다.
연못의 한켠,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서로 손을 잡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인 양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소녀,
아름답다.
차라리 사악할 만큼 요염하게 아름답다.
이제 불과 십 오륙 세쯤 되었을까?
소녀의 몸엔 비취색 궁장이 걸쳐 있었고,
머리를 댕기를 틀어 양쪽으로 묶여 있었다.
유난히 흰 얼굴에 웃을 때마다 옴폭옴폭 패이는 볼우물이 앙증맞다.
또한 오똑한 콧날과 항상 호기심에 차 있는 듯한 두 눈의 청순무구함이라니..
전신이 요악한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애물단지라고나 할까?
헌데 그녀의 모습,
너무나도 낯익은 모습이다.
앳된 음성까지도..
그렇다.
그녀는 바로 오송학을 따라다니던 그 귀염둥이 꼬마 녹상아가 아닌가?
이제는 어엿한 소녀의 티가 물씬 풍기는 늘씬한 몸매의 여인으로 성장한 그녀,
벌써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예전의 순진무구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헌데 그녀의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단아한 백포차림의 노인,
그는 뜻밖에도 천기신수(天機神手)가 아닌가?
그가 어찌 녹상아와 저렇듯 조손지간인 양 다정히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모를 일인데...
"할아버지.. 점 좀 쳐봐. 우리 오빠 살았는지 죽었는지..."
"허헛...녀석, 벌서 천번도 더 쳐봤다."
오오...녹상아는 아직도 오송학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안 죽은 거지...?"
"그렇데도..허헛..."
"만약 죽었으면 난 제일 먼저 할아버지를 죽일 꺼야."
"험..."
녹상아의 눈에서 사악한 냉기가 흐르자
, 천기신수는 헛기침을 토하며 녹상아의 눈빛을 외면했다.
'어허..언젠가 한 번 터져도 되게 터질텐데..
마살지운의 운명은 읽히지 않으니..알 수가 없군..'
"할아버지..옛날에..."
"떽...너 같이 어린것이 옛날은 무슨 옛날인고..."
"치...흘러갔으니까 옛날이지..."
"허허..."
"할아버지가 오빠를 죽었다고 했으면 상아도 죽었을 거야."
천기신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허헛..천주께선 괜히 헛고생을 하셨군. 이 아이는 그 놈에게 돌아가 버리고 말거야..'
"할아버지..우리 저리로 가자.
내일부터는 이렇게 할아버지랑 놀 시간도 없어..빨랑 와.."
그녀는 나풀나풀 꽃잎 사이로 뛰어갔다.
천기신수도 지극히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였다.
녹상아의 머리속으로 돌연 번개가 작렬하는듯한 고통이 일어났다.
동시 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듯한 현기증을 느끼매 휘청거렸다.
"할아버지..나 왜 이러지..갑자기 어지러워.."
천기신수의 안색이 일순 무슨 연유인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그순간 녹상아가 전신을 푸들푸들 떨며 두눈에서 붉은빛 광채를 발했다.
"하..할아버지..소리가 들려..누군가가 숫자를 세고 있어..
십만 칠천 구백 구십 일곱..십만 칠천 구백 구십 여덟..."
십만 칠천 구백 구십 아홉...
천기신수의 얼굴이 온통 경악으로 물들었다.
"헉.. 마살지운이 폭발하려 한다."
오오..
녹상아의 눈동자가 완전히 흰자위만 남긴채 돌아가고 있었다.
동시 그녀의 머리위로 한줄기 혈광(血光)이 은은히 자리잡았다.
천기신수는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쳤다.
오호호..! 백팔마녀대 십만 팔천 번째의 저주를 받아라.. 오호호호호호..
"오홋홋홋...오홋홋홋..!"
요악(妖惡)이 극에 달한 교소!
녹상아의 몸은 이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오.형체는 그대로인데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저 핏빛 아수라의 마기(魔氣)라니!
휘이잉-휘이잉-
꽃잎이 바람도 없는데 찢기고 흩어져 눈송이처럼 하늘로 휘날려 올라갔다.
온갖 기화이초가 뿌리째 뽑혀 마구 나뒹굴었다.
아름드리 수목(樹木)들도 태풍을 만난 듯 중간에서 허리를 뚝뚝 꺾는다.
땅가죽도 새빨갛게 들끓으며 일어선다.
우두-둑-파라라락-
마녀(魔女),
드디어 백팔마녀대의 십만 팔천번 저주가 끝났는가?
"으으...저...저럴 수가.."
천기신수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털썩!
돌부리에 걸렸음인가?
그의 몸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으으.."
핏빛 마녀가 다가든다.
그녀의 발이 닿은 지면이 푹푹 파헤쳐진다.
한순간 섬뜩한 혈광이 튀어 올랐다.
천기신수는 눈, 코, 귀, 입에서 동시에 피분부수를 뿜어내며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으아아악!"
"오호호호.."
녹상아는 어느새 시체로 변한 천기신수의 몸을 허공에 들어올리고 있었다.
꽃밭 속에 때아닌 혈향(血香)이 진동했다.
돌연한 비명소리에 놀랐음인가.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쏜살같이 화원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헉...저...저...저게..."
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녹상아를 발견하는 순간,
혼백마저 앗겨 버린 듯 꼼짝도 못하고 서 버렸다.
"오호호호...죽엇!"
고오오오-
한줄기 굉폭한 혈광이 불덩이처럼 화원 전체를 뒤덮었다.
"크아악!"
"카악!"
허공에 뿌려지는 피(血),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녹상아의 신형이 허공 중에 떠올랐다.
"오호호호호.."
그녀는 화원을 벗어나기까지 이미 백여 명을 제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잔살스런 모습은 그대로가 악귀의 형상이었다.
* * *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죽였다.
눈에 띄는 사람마다 죽였다.
하루가 되기 전에 천하는 또 하나의 살성(殺星)으로 인해
피가 강(江)을 이루고 시신이 산(山)처럼 쌓여 갔다.
열흘이 가기 전에 그녀는 혈풍을 몰고 십만 팔천 리 대륙을 횡단했다.
가는 곳마다 피(血)요,
지나는 곳마다 시신뿐이었다.
-환우대마녀(桓宇大魔女)!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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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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