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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劍浪人
그가 돌아왔다.
세월의 잔영(殘影)을 짓씹어 물고,
짓붉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떠나갔던...
그가 돌아왔다.
한 마리 늑대처럼 스스로의 상처를 혓바닥으로 핥아 가며,
구멍난 가슴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틀어막고 세월의 피안으로 사라져 간 그가...
차디차게 식어 버린 가슴을 부둥켜안고,
갈가리 찢긴 피의 영혼을 간직한 채 돌아왔다.
* * *
슈파악!
채- 앵-!
"크-악!"
새빨간 핏빛 검광(劍光)이 번뜩였다.
죽음의 붉은 바람이라고나 할까?
오송학은 일체무심의 눈으로 자신의 앞을 막는 흑의인들의 장막을 뚫으며
암흑평의회(暗黑評議會) 천남지부(天南支府)로 진입해 들고 있었다.
그의 신위는 실로 가공스런 것이었다.
그의 발은 아예 지면에 닿지도 않고 있었다.
스스...
마치, 한 무더기 붉은 안개가 밀려가듯 인(人)의 장막을 뚫고 들어서는 그의 전신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공포의 기세만이 암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칠 것 없이,
일체의 음향도 없이 죽음을 부르며 밀려드는 붉은 폭풍을 본적이 있는가?
오송학,
그가 바로 그 붉은 폭풍이었다.
수많은 기관매복들이 낙엽처럼 흩어지고
무수한 덧없는 육신(肉身)이 모래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렇게 삼십여 장쯤 전진했을까?
오송학의 전면으로 하나의 거대한 철문(鐵門)이 나타났다.
밤(夜)의 음영(陰影)을 몽땅 흡수한 듯 칙칙한 검은 철문이었다.
철문 양옆으로는 끔찍한 형상의 피발대제의 전신조각상이
철부(鐵斧)를 치켜들고 서 있었다.
오송학은 거침없이 혈혼검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고오오-
두 개의 피발대제상과 철문이 동시에 부서져 내렸다.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은 기이한 정적이 짧은 순간 감돌고...
슈파악-!
화룡(火龍)의 입에서 뿜어지듯 거대한 불기둥이
오송학을 향해 광폭하게 덮쳐 들었다.
"시시한 장난."
오송학은 오히려 불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쉬리릭!
그의 몸이 불길속에 휩싸였다.
허나, 그는 처음 그대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밤하늘을 충천하는 불길 속을...
한 마리 불사조(不死鳥)와도 같이
그의 몸은 난무하는 불길 속에서 춤을 추는 듯 보였다.
지옥겁화천(地獄劫火泉)의 열기 속에서 죽음의 공력을 얻은 그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정말이지 시시한 장난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저 자는 사람이 아니다!"
"막아라! 암흑마천의 명예를 걸고...!"
* * *
냉혼일색(冷魂一色) 요문웅(妖文雄),
그는 철혈(鐵血)의 사나이다. 그는 표정이 없는 사나이다.
그는 또한 색(色)의 사나이다.
그는 하룻밤에도 계집 다섯을 환락의 세계로 보내 버린다.
그는 정사(情事)를 하면서도 결코 표정을 떠올리지 않는다.
철혈과 색의 사나이,
그는 암흑평의회 천남지부주(天南支府主)라는 지고(至高)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제 오관(第五關)마저 돌파 당했습니다!
"뭐 별로 빠르지는 않군.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 있지."
그는 화려 거대한 침전(寢殿) 중앙의 여덟 평 짜리 침상 머리에 걸터앉으며
밖을 향해 짤막하게 소리쳤다.
"데려와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네 명의 흑의인이 새피랗게 질린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인은 아름다왔다.
이십세 전후쯤 되었을 여인...
유독 몸매의 굴곡이 완연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눈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혈(啞穴)이 제압되었는지 비명도 신음도 지르지 못한 채 질질 끌리듯 들어왔다.
네 명의 표정 없는 흑의사내는 요문웅이 무어라 지시하기도 전에
이미 늘 그래 왔다는 듯 여인을 침상 위에 눕혔다.
이어,
여인의 사지(四肢)를 침상 모서리에 붙잡아 매었다.
비록 유의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편은 못되었다.
사내들은 문 양편에 두 명씩 도열해 섰다.
곧 일어날 유희의 한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인 듯...
요문웅은 차갑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부아악!
그녀의 대리석 같은 다리가 드러났다.
요문웅의 손이 그녀의 허리 아래를 가리고 있던 옷을
가위로 자르듯 끊어 버린 것이었다.
단지 평범한 일수(一手)에...
여인은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고의조각마저 완전히 제거당하고 말았다.
그때 다시 전음성으로 보고가 들려왔다.
제육관(第六關)이 뚫렸습니다!
"괜찮아! 아직 사관(四關)이나 남았다."
요문웅은 말을 하며 훌렁 옷을 벗어 내렸다.
일순 여인의 눈에 자욱한 공포가 깃들었다.
그가 여인을 향해 다가들었다.
색(色), 이것은 요문웅에게 있어 생명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결전 앞에서 이것은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색을 즐기고 나면 허탈감 속에 정신이 맑아오는 사나이,
가능한한 그는 최단 시간에 모든 것을 해소할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최고의 허탈감을 위해 일순간에 끝내 버릴 것이다.
서서히 그의 몸이 여체 위로 포개졌다.
바로 그때다.
와당탕!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한 명의 피투성이 흑의인이 굴러 들어왔다.
"제 칠... 칠관(第七關)이..."
그는 겨우 그 말을 마치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순간,
"꺼져 버렷!"
문 옆을 나누어 지키던 흑의인들이 피투성이 흑의인을 걷어차버렀다.
요문웅의 둥작이 다시 계속되려 했다.
헌데 또 그때였다.
우당탕!
"팔.. 팔관(八關)이 돌파..."
요문웅의 몸에 일순간 잔파동이 일었다.
'갑자기 빨라졌다! 그렇다면...?'
그는 일체의 동작을 멈추고 힐끗 고개를 돌렸다.
순간 어떤 경우에든 표정을 떠올리지 않던 그의 얼굴이
믿을 수 없도록 잔뜩 일그러졌다.
"이럴 수가..."
그의 시선의 끝에는 한 사내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문기둥에 아늑하게 등을 기댄 채...
문 옆을 지키던 네 명의 흑의인은 이미 시체로 변한지 오래였다.
"구관(九關)이 남았는데 어찌..."
"내가 오면 오는 것이고 머물면 머무는 것, 그것만이 현실이지."
요문웅의 전신으로 지독한 수치심이 치달렸다.
눈앞의 저 사내는 이곳 암흑평의회 천남지부와 자신의 존재를
한 마디의 말로써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번쩍!
요문웅의 손그림자가 어망(魚網)처럼 사내의 전신을 덮어씌웠다.
사내의 입술 사이를 뚫고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쐐- 액!
요문웅의 두 개의 팔이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너는 졌다."
"크으으...미...믿을 수 없어..."
요문웅은 바닥에 누운 채 불신의 빛을 띄웠다.
이렇게 허망하게 자신이 당한다는건 꿈속에서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일어서더니 등을 보이며 달아나려 했다.
순간 사내의 입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네 등을 보고 싶었다."
슈파악!
한 줄기 혈광(血光)이 요문웅의 등판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요문웅의 등 맨살에 새겨지는 글귀...
<오송학이 혈검낭인(血劍浪人)이 되어 돌아왔소. 당신은 이제 약속을 지키시오.>
"너의 천주(天主)에게 가서 그 등을 보여라.
만약 전하지 않는다면 너의 천주에게 불충을 저지리는 일이 될 것이다."
"우우...!"
요문웅은 상처입은 야수처럼 헐떡거렸다.
그는 넋나간 얼굴로 사내를 웅시하더니 이윽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윽고 요문웅이 발자국소리가 사라졌을 무렵이었다.
오송학은 몸을 돌리려다 말고 문득 침상위에 묶여 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 곤경에 처한 여인을 그냥 지나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여인의 옆으로 다가가 묶인 줄을 풀었다.
여인은 수치심 때문이었는지 고개를 외면한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오송학은 문득 그녀가 매우 낯이 익다고 느꼈다.
"가만...유낭자?"
놀랍게도 그녀는 냉모모의 딸이며 오송학에게 감사의 표시로
취록신환을 준 유벽군이 아닌가?
천남독문(天南毒門)을 재건하겠다고
천남으로 떠났던 그녀를 이렇게 만날줄이야..
진정 예기치 못한 재회였다.
"후훗... ㅍ 그리 수줍게 생각하시오?"
오송학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놀란 볼에 입을 맞추었다.
"어멋!"
유벽군은 화들짝 놀라며 한쌍 봉복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는 더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수 있게 되었다.
* * *
우르릉-쾅-!
"으아악-!"
암흑이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륙의 남단(南端) 천남으로부터 시작해...
광서(廣西), 귀주(貴州), 호남(湖南) 등등..
천하를 독패(獨覇)한 암흑의 신화(神話)가 깨어지고 있었다.
이제 암흑 대신 깃들기 시작한 것은 암흑이 흘린 피였다.
그리고 또 하나 붉은 안개!
암흑이 천하를 지배했다면, 붉은 안개는 그 암흑을 지배해 가고 있었다.
혈검낭인(血劍浪人)!
붉은 안개가 스스로를 혈검낭인이라 칭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의 손에 궤멸된 암흑마천의 암흑평의회는 무려 팔십여 곳,
붉은 안개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단신으로 암흑을 피로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붉은 안개에 의해 궤멸된 암흑평의회의 책임자였던 인물들,
그들은 한결같이 두 팔을 잃고 등판에 현흔(血痕)을 새긴 채
미친 듯 어느 곳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이었다.
<약속을 지키시오- 혈검낭인->
하늘이 내린 기적인가?
천하엔 한줄기 광명(光明)이 비쳐 들고 있었다.
암흑마천의 패도극당(覇道極强)의 통치와
환우대마녀(桓宇大魔女)의 살인광풍(殺人狂風)에
암울함으로 찌든 사람들 마음속에
찬란한 희망의 광채가 솟은 것이다.
혈검낭인!
그는 이제 정도무림의 신(神)이었다.
서천목산(西天目山),
절강성(浙江省) 서북단에 위치한 이 산은..
천하명산(天下名山)의 서열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그 지세(地勢)의 험준함은 북악(北嶽)이라 일컬어지는
섬서(陝西)의 항산(恒山)과 더불어 최고로 꼽히는 산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세인들은 그 산을 몸서리치게 기억해야 했다.
-암흑마궁(暗黑魔宮)!
모든 악(惡)과 죽음(死)의 근원인 암흑마궁이
바로 이 산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항상 흑운(黑雲)이 스멀스멀 서려 있었고,
까마귀마저 피해 가는 마(魔)의 집단지-
헌데 돌연,
칠흑같은 밤 속으로 수천 마리의 특급전령조(特急傳令鳥)가 떠올랐다.
파드득... 파닥...!
파다닥...!
거대한 성곽과 수많은 전각,
그리고 누각(樓閣)들로 이루어진 암흑마궁 전체가 은빛으로 뒤덮여 버렸다.
암흑마천(暗黑魔天)의 특급전령(特急傳令)!
<붉은 안개, 혈검낭인을 찾아라!>
혈검낭인의 소재는 이내 확인되었다.
그가 일부러 몸을 숨긴 것도 아니었고,
설혹 그가 몸을 감췄다 해서 못 찾을 암흑마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번 시월초하루(十月一日),
본궁(本宮) 앞에서 본 암흑마천주는 약속을 지키겠으니
용기 있으면 스스로 찾아오라. >
* * *
오송학은 어느 싸구려 반점에서 암흑마천주의 서찰을 읽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유벽군이 얼굴을 찡그리며
가장 싸구려 음식답게 맛이 없는 소백면을 억지로 먹고 있었다.
그녀는 왜 오송학이 하필이면 소백면을 주문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백면...
그녀가 그 소백면에 얽힌 오송학의 추억을 어찌 알랴.
* * *
사람들,
그 수는 무려 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거대한 대전(大殿) 안에 위치한 탁자는 열 개,
그 주위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승도속(僧道俗)의 각기 다른 신분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야명주(夜明珠)의 불빛은 밝았지만 분위기는 어두웠다.
또한 그 분위기 속으로 떠오르는 기운은 장중하면서도 극강했다.
태산(泰山)의 위엄과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도도함을 능가할 듯...
그 기세는 모여 있는 백여 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에 기이한 것이었다.
소림장문(少林掌門) 철목신승(鐵目神僧),
무당장문(武當掌門) 현천일진자(玄天一盡子),
아미장문(蛾嵋掌門) 화도선승(華道仙僧),
화산장문(華山掌門) 운룡무영(雲龍無影),
곤륜(崑崙)의 제룡신자(制龍神子),
종남(終南)의 종남제일신룡(終南第一神龍) ..
그렇다.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영수들이거나
아니면 영수 대행자격으로 참석한 수뇌고수들이
첫 번째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두 번째 탁자,
그곳엔 삼장사보(三莊四堡)로 일컬어져 온
강호칠방(江湖七幇)의 영수들이 앉아 있었다.
세 번째 탁자에는 일견해 보기에도
이국적인 생김새의 삼인(三人)이 자리해 있었다.
변방삼대세력(邊方三大勢力),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암흑마천에 의해 멸겁(滅劫)을 당한
변황삼대세력(邊荒三大勢力)의 후인(後人)들이었다.
서장(西藏) 천륭대사원(天隆大寺院)의 철마륵(鐵麻勒),
새북십삼천(塞北十三天)의 공동후인 새북천일랑(塞北天一郞),
대막(大漠) 광풍사(狂風沙)의 사풍사신(沙風死神).....
네 번째 탁자에 중원(中原)에서 천년전통(千年傳統)을 자랑해 온
각 세가(世家)의 세가주(世家主)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궁(南宮), 북궁(北宮), 황보(皇甫), 단목(端木), 단리(丹里),
헌원(軒猿)가의 가주들..
헌데 황보세가의 가주 자리,
그곳엔 너무나도 낯익은 인물이 자리해 있었다.
대하전장(大河錢莊)의 황보노태야의 아들로서,
잔심부름 하나에도 심부름 값을 요구하던 황보진평..
그가 지금 당당히 황보세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탁자들에 앉아있는 인물들도
풍기는 기도로 보아 결코 범상치 않은 신분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전부 처음에는 스스로 자문파(自門派)를
암흑마천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봉문(封門)을 하더니,
그것조차 별무소용이 되자,
스스로 암흑마천에 투항하거나
문파를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벽라천군 이후로 욕을 가장 많이 먹은 사람들은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한 자리에 모였다.
그것도 비장한 각오와 결의의 표정으로...
지금 그들의 눈, 표정 하나 하나엔
그 동안 보여왔던 비굴한 웃음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계속 대전 정면에 위치한
일 장 높이의 석대(石坮)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라도 하듯..
짤랑!
석대 뒤로부터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
그는 석대 위로 오른 것이 아니라 석대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순간 중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깊숙이 허리를 굽히지 않는가?
"삼가 성승(聖僧)을 뵈옵니다."
놀랍게도 나타난 사람은 한 손엔 술호로를
, 또 한 손엔 살 없는 닭다리를 뜯고 있는 주육광승(酒肉狂僧)이 아닌가?
"크윽...성승은 무슨...주정군이지.. 다들 자리에 앉거라."
주육광승은 벌컥 술호로를 들이키더니 품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철목, 이리 오너라."
맙소사!
주육광승, 그는 소림 장문인 철목신승을 마치 아이 부르듯 부르지 않는가!
허나, 좌중에선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철목신승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백조(師伯祖), 부르셨습니까?"
오오.. 사백조라 했는가.
주육광승은 한껏 점잖을 빼며 헛기침을 했다.
"험..그래 불렀다."
"하명하실 말씀은...?"
"이 사백조는 너무 늙은 나머지 힘이 딸리는구나. 이걸 저 석대에 붙이거라"
주육광승은 두루마리를 철목신승에게 내밀었다.
철목신승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공손히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석대 앞으로 다가섰다.
중인들의 시선이 의아롭게 빛났다.
그때 주육광승의 입이 열렸다.
"허헛..미안하게 되었소
. 내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꼴 같지 않은 놈의 코빼기를
여러분께 보여주려 했는데.."
"고집이 어찌나 황고집인지... 제기랄...
뭐? 자신은 죄인이라 여러분을 뵈올 면목이 없다나.. 아미주육타불.."
"음!"
"으음..."
좌중에서 일제히 무거운 침음성이 터졌다.
"허파 꺼지는 소리는 그만하고 저걸 보시오."
주육광승은 철목신승이 막 붙인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그동안 대의정천맹도(大意正天盟徒) 전원(全員)이 보여주신
협력과 열혈(熱血)에 먼저 감사드리오.
그대들이 피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본좌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 다닌 죄인이라.
감히 얼굴을 들고 여러분 앞에 나설 수 없기에 글로서 대신함을 송구하게 생각하는 바이오.
...(중략)...
이제 본좌는 그 죄과를 씻고 싶소.
부디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 드리는 바이오.
이제 본좌는 죽음으로써 대의정천맹과 본좌를 낳아 준 천하에 사죄를 하겠소.
앞으로 그대들에게 전달되는 본좌의 지시를 착오 없이 시행해 주시길 바라오.
지시에 대한 거사일(巨事日십)은 공히 십일월 초하루(十日月一日)이오.
혈검낭인(血劍浪人) 오송학(石中軒) 친서(親書).>
오오...
대의정천맹!
오송학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를 죽였던 중원천하(中原天下)의 잠재 세력인데..
그렇다.
대전 안의 인물들이야 말로 대의정천맹의 실체였다.
그들은 이제 서서히 잠을 깨고 있는 것이었다.
한 마리 붉은 늑대로 화해 돌아온 오송학이라는 절대자에 의해서..
이때 한 명의 소녀가 열 개의 탁자 사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엔 하나의 커다란 옥반(玉盤)이 들려 있고..
사람들은 소녀가 다가올 때마다 차례대로 옥반 위의 밀봉된 서찰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묘한 침묵이 한동안 장내를 휘감았다.
이때만은 주육광승의 표정도 침중해 있었다.
각자의 손에 들린 서찰이 개봉되기 시작했다.
"헉...이...이것은?"
"이...이런 무모한.."
"오오..."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모두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무당장문인 활검 현천일진자,
그의 손에 잡힌 백지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부릅떠져 글자 하나 하나에 못박혀 있었다.
<무당장문인 전,
십일월 초하루를 기해 무당에 상주한 암흑평의회의 세력은 칠할의 감소가 있을 것이오.
본인이 칠할을 감소시키는 것이오.
장문인께선 무당의 세력을 최대로 동원해 잃은 문파를 복구하시오.
그리고 일이 끝나는 즉시 새북십삼천의 잔여 세력과 합류해 곧바로 새북으로 진군하시오.>
대막 광풍사의 사풍사신,
그의 손에도 한 장의 명령서가 들려 떨리고 있었다.
<대막 광풍사 사풍사신 전,
십일월 초하루(十一月一日) 오시(午時) 전에
서장의 천륭대사원과 합세해 서천목산(西天目山)의 암흑마궁을 궤멸시켜 주시오.
그때 암흑마궁의 주요세력은 본인에 의해서 팔할 이상이 감소된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오.
암흑마궁 궤멸 후,
소림(少林)과 삼장(三莊) 중 비검(飛劍)과 예검(藝劍)이 그대를 도울 것이오.
그들이면 광풍사를 찾는데는 충분할 것이오.>
<소림장문인 전,
새북십삼천과 합세해 벽라천궁을 궤멸시키시오.
...(中略)..
화산, 곤륜, 아미와 사보(四堡)가 그대를 따를 것이오
...(後略)...>
십일월 초하루(十一月一日),
그 서찰들은 모두가 그날에 이루어질 폭풍의 예고장이었다.
헌데 왜 십일월 초하루인가?
암흑마천주가 제시한 날짜는 분명 시월 초하루(十月 一日)이었거늘...
주육광승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돌아가서 서둘러들 주시오."
문득, 철목신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사백조, 이렇게 되면 그분께선..."
"죽겠지."
"그래, 그놈은 죽는다
. 하지만 그런 놈 하나 죽어 천하가 평화로우면
하나가 아니라 백이라도 죽여야 하지 않겠나."
"성...성승...!"
중인들이 입을 모으며 격정에 찬 눈빛을 띄웠다.
순간 주육광승이 황망하게 몸을 돌렸다.
흐르는 눈물, 그것을 중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허헛...심려치 마시오. 나 십방(十方)이 책임지겠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누가 잡을세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헌데,
오오.. 십방이라니!
십방대선사(十方大禪師)!
소림이 낳은 최대의 기승(奇僧),
백팔마녀대의 혈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시 무림맹주를 맡은 바 있던 그,
헌데 그는 죽지 않았던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를 파문(破門)시켰던 것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을 꾸몄고..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보며 파계(破戒)를 당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닥쳐올 혈겁을 홀로 고심하던 유작이 꾸며낸 일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
십방대선사는 그때부터 주육광승으로 변신하여 유작을 도와 대의정천맹을 창건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오송학의 준비는 이제 완벽하게 끝난 셈이었다.
* * *
"벽군, 오늘이 며칠이지?"
"당신은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있군요."
유벽군은 깎던 사과의 끝을 동그랗게 잘라내며 입을 열었다.
"구월이십팔일(九月二十八日)이예요. 이제 이틀 남았어요."
"이틀이면 식사를 여섯번은 더 할수 있는 날짜로군."
"참 태평하시군요. 자, 드세요."
"생각없어."
"어머..! 깎는 사람 성의도 생각해야죠."
"안 먹어."
"먹어요."
유벽군은 사과 한쪽을 오송학의 입에 넣어 주며 교태롭게 웃었다.
오송학은 마지못한 듯 그것을 받아먹었다.
감미로왔다.
불현듯, 오송학은 이런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잊고..
아니, 이 순간만큼이라도..
두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도 큰 탓인가?
이때, 유벽군이 사과의 그 맛인 양 감미로운 미소를 떠올렸다.
"앞으로 어찌될 것 같아요?"
"무엇이...?"
"당신과 저 말이예요."
"너무 어렵게 얘기하는군. 그냥 우리라고 하면 될 것을..."
"우리..?"
그 말을 뇌까리던 유벽군의 얼굴에 온갖 행복과 기쁨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란다. 당신과 내가 아닌 우리...
유벽군은 가슴이 벅차 터져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아울러,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동안 내심 사모해 온 사내를 향하여 그녀의 온 몸이,
온 영혼이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고 있음을 그녀는 느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그녀는 스스로 부르짖으며 오송학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아 주세요."
음성엔 꽃향기가 실려 있었다.
그윽한 단내가 깃들인 꽃향기...
오송학은 전신이 뜨겁게 팽만해 옴을 느꼈다.
그 역시 피끓는 청년이 아닌가?
더구나 이 방엔 그들 두 사람 뿐..
"안아 주세요."
유벽군의 이성을 잃은 듯 흘러나오는 달뜬 음성이 더욱 오송학을 자극시켰다.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덥썩 휘감았다.
'그래...이 순간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싶다!'
오송학의 손길은 무서운 불덩이로 변해 갔다.
유벽군은 얼굴을 사르르 붉히고 있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 주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부끄러움은 포용이라는 거대한 장막이 가려주니까.
입술이 마주 닿았고...
오송학의 손길이 나락을 훑듯이 유벽군의 몸을 어루만졌다.
오랜 갈망이 폭발하듯 뜨거운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여기는 너무 더워요."
"온몸이 끈적거려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아요."
유벽군은 달뜬 음성을 발하며 백옥처럼 흰 팔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넓게 공기를 대하고 싶은 듯..
그러나, 그 모습은 오송학의 몸을 무섭게 끓게 했다.
다소 난폭한 손이 유벽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손은 이내 뜨거운 화염으로 화했다.
마치 숯불이 달구어진 것처럼...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구겨진 옷자락이 반듯이 펴지듯
손길이 닿은 부분마다 유벽군의 움츠렸던 부분이 퍼졌다.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한꺼번에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벽군은 목구멍으로 터져나오려는
외마디 비명 소리를 겨우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유벽군은 파르르 교구를 떨며 눈을 감았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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