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는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만주와 중국북부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이다 몽고족은 여러개의
부로 분산되어 요와 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 그 몽고족에 영웅이 탄생한다 - 테 무 친 鐵木眞 - ...,
그는 부족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쯤 아버지가 독살당하자 그는 당시 최고 권력자의 군대에
들어가고 그리고 그후 피비린내나는 전투의 나날을 겪은지 약30년 만인 1206년 ..., 그는 몽고에서
징기스칸으로 불리게 된다
여러나라를 두루 정복하고 , 대제국을 건설하며 125년에는 북경을 점령하고 1223년에는 러시아
군대를 궤멸시킨다 여기서 서진은 끝나지만 동진을 개시하고 그러면서 1227년에 그가 사망하였을때
남긴제국은 동쪽태평양에서 서쪽 흑해까지 그리고 북쪽 시베리아에서 동남아시아까지 ..., 그때까지
역사상 최대의 영토이다
징기스칸이 이 방대한 제국을 단시간에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군대가 조직과 전술
그리고 기동성까지 상대방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 아니 , 그정도가 아니다 . 제국이 형성된 속도로
보아 군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가 무력일변도의 인물은 아니다 그는 글을 쓸
줄은 몰랐지만 방대한 법체계를 남겼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자질도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 그이 거대한 제국은 아들들에 으해 나뉘어졌다 ...,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었던 까닭
이었을까 ...? 그러나 손자대에 이르면 징기스칸 못지않은 영웅이 탄생한다 ..., 쿠빌라이칸 ..., 그는 더
광대한제국을 건설했다 ..., 그리고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화려한
궁전이 바로 쿠빌라이칸의 궁전이다
그는 매우 중국지향적이었고 스스로 유학자들에 가르침을 받았다 . 그러나 완전히 중국화될 수는 없었고
불교를 택했다 그리고 그 불교에 몽고 샤머니즘이 뒤섞여 있었고 그가 후손에게 물려 준 종교가 바로
(몽고) 라마교인 것이다
원은 중국전체를 지배한 최초의 이민족왕조로써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하였고 폭 넓은 대외접촉이 개시
되었다 ...,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숱한 외국인들이 흘러 들어왔고 , 원의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이중적이었다 . 쿠빌라이칸이 그랬듯이 중국을 동경했지만 동시에 했다
몽고와 고려 - 경제난으로 시작된 반란이 원왕조를 내내 괴롭혔다 유목민 출신인 몽고족은 정복에는 능했지만 거대한 나라를 안정되게 꾸려 갈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 원은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졌다 - 몽고제국 전체가 그렇다 - 14세기에 페르시아 터키 칸국은 대체로 티무르에게 정복당하고 ..., 티무르는 스스로를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자처하렸지만 실제로는 터키족인 것이다 몽고족과 터키가 구분이 별 의미는 없긴 하지만 ...,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들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 이름만 남을 뿐이었고 몽고제국 자체는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월동안 몽고가 " 세계 " 에 뻗친 , 미친 영향력은 막강하고 무자비 하였다 어떻게 , 어느정도로 !!!
그 전모를 알아내기 위해 몽고제국의 전 영역과 역사를 모두 더듬을 필요는 없다 몽고의 고려 침략사史 .
그것이야 말로 그 모든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이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받은것은 징기스칸과
쿠빌라이칸의 사이였다 ..., 그 수난과 영광의 고려사 ......, 세계사가 몽고에 의해 쓰여졌는 시대가 이때 ,
이시대쯤인가 한다
송은 중국의 초기 근대를 알리는 신호였다 ..., 유교 윤리학과 불교의 형이상학이 통합 된 신新 유교가 정교로
채택되었다 . 이 정책은 20세기까지 이어진다 .., 그러나 농민과 여성의 신분적인 처지는 악화되었다
고려는 물론 송의 영향을 받았다 ..., 송은 군사적으로 약하여 나라 존립에 어려움을 겪었고 , 금나라때문에
남송으로 위축되었다가 ..., 몽고에게 망한다 ! 고려는 물론 송보다 오래 살았다 !!! 고려는 금나라 뿐 아니라
원나라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 그러나 고려는 자기생명보다 더 오래 산 송宋이다 ..., 그리고 그 기나긴
여생의 고통을 톡톡히 맛보게 된다
원제국은 아시아 대륙에 평화를 강요했다 ( 오늘날의 미국과 비슷하긴 하지만 ...,!!!) 그리하여 중국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수월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방과 폭넓은 외교접촉이 이뤄지면서 세계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몽고인은 외국자본의 투자를 격려했고 , 네스토리아 기독교와 이슬람같은 외국종교도 환영했다 그리고
사람의 등용도 허락했다 ...,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배제시켰다 ..., 나가있어 !!!??? 하지만 중국인들이
받았던 법적인 제약은 ....... 그러나 , 그것은 약소국의 고려가 받았던 수모와 제약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수준인 것이다 ..., 그렇다 , 그렇다는 것이다 ..., 고려가 겪은 "몽고난"은 땅이 좁을수록 더 지독
해지는 " 세계를 위한 대리전 " 양상을 띠었고 ... 마치 ... 6 , 25 처럼 ..., 그리고 그 수난의 크기가 향후
한반도 역사의 심성을 매우 강하게 규정짓는다
지금 무인시대는 이제 정권을 잡은 최충헌이지만 그는 1219년에 죽고 , 비록 그는 죽었지만 최씨의
정권은 그의 아들에 의해 승계가 되었다 징기스칸이 죽기 8년전의 일이다그 징기스칸이 127년에 죽고 ...,
그 사후문제가 정리되자마자 금에 공격을 가하였고 , 1231년에는 드디어 !!! 몽고의 대군은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인질의 몸에서 짜낸 기름으로 벼섶을 적시어 ... 그것을 산더미처럼 샇고는
그기에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는 아주 지독한 방법을 섰던 것이다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는 그의 아버지가 죽자 금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들은 왕에게 바쳤고 , 아버지가 빼았
었던 공사전민公私田民 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 더 많은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술수였음에 ... -
그리고 아우를 귀향에 처하였고 선비들을 대거 선발 , 등용 했다 아버지가 죽은지 6년후에는 자기집에 정방
( 청와대 ..., 정부종합청사 ...,???!!!>를 설치하고 문무백관들의 인사 행정 ( 청탁 ...,등 ) 을 처리한다 그리고
경호실도 이분화하여 자기집을 지키는 한 쪽과 자신의 친척과 외부를 호위케하는 두 부류로 나누었다
무력집단을 요하는 것 , 그 무력집단들이 전횡을 일삼는 것 ..., 그리고 그 전횡에 휘말리는 것 그리고
죽는 일 , 죽이는 일까지 !!! ... 이것은 최씨정권의 아니면 모든 무신정권의 운명일까 ....????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벌여지고 있으며 ..., 먼훗날에 추억거리가 될 지도 ...!!!
최우의 강화천도는 필사의 대몽항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 왕실을 볼모로 잡고 최씨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한 구차한 농성작전인 면이 짙다 , 이 작전에 고려의 전 백성들과 토지와 경제 , 문화 등 모든것을 몽고에게
내맡긴 것이다 ..., 나라야 어떻게 되든 우리네 정권만 유지케 해 주세요 ...
그렇지만 이 몽고군 또한 우악스럽게 , 몽고의 본질보다 더 극악무도하게 고려를 덮쳐버린 것이다
고려는 ...., 무능하고 몰지각하며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치달리는 정권에 반기를 든 이 땅의 백성들이
있었다 !!! 노예 ,초적草賊 ,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 이 난들이 대몽항쟁의 노선으로 나는 것이다 .
몽고와 전쟁을 치른것은 고려의 조정이나 무(武)신정권이 아니라 바로 농민과 천민 그리고 도둑들인 것이다
노비들이 몽고군을 격파하는 일과 관노들이 양반들의 비겁한 행동과 그리고 보복에 대한 반발이
난을 일으키는 사건이 비일비재 발생하였는 것이다
애국심이 포함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 아마 그것은 양반들의 전유물일지 모르지만 ..., " 그 것은
아니다 " 하지만 몽고군들의 만행에 그 잔혹의 도가 극에 달하였기에 야기 된 육체와의 전쟁이었다
죽기 살기로 육체를 내맡기고 사투를 벌인 이 "항쟁"이 ..., 이 민심의 항쟁은 왜 국력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일까 ..., 왜 그랬던 것일까 ..., 지금도 여전히 아픔이다 오늘날에도 국력의
강화는 물론이려니와 내일의 장래까지 불분명한 쇠락의 길로 스며드는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로 인하여 ...,
국민들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불건전한 세력들 때문이다
고려의 그들만의 항쟁은 ...., 바로 정권 !!! 정권때문에 민심과 민란들은 승화와 발전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
였고 , 끝끝내 위대한 민초들의 항쟁은 정권에 걸림돌이 걸리어 좌절되었던 것이다 최씨 무인정권 ..., 그들은
이 순수한 육체의 반란을 정신적인 교화 , 감화로 계승 , 발전시키기는 커녕 악화시켰던 것이다 .
가공할 속도와 위력을 겸비하며 과시하였던 몽고군들의 침입을 저지시킨것은 승려가 조직한 노비들이었음에 ............, 비록 힘은 없었을지라도 그 정신만은 숭고하다 할 것이다
고려는 사치와 향략에 그리고 착복에 눈이 멀어 있었고 말초적인 신경의 쾌락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대비한 준비도 없었고 , 전시에 쓰일 콩 , 칼을 갈고 닦을 생각은 않고 오로지 환각에 이끌려 지내 보냈던 것이다
몽고의 3차침입이 감행되었고 , 당연한듯 국토는 짓밟히고 순식간에 이 땅의 모든것이 발가벗겨져 버렸다
그 와중에 조정은 국난극복을 기원하며 경전판 제작을 시작으로 16만에야 완성되는 8만대장경을 깍게 되는데........., 이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아비규환의 염원 , 쓰러져가는 국가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었을까 ...,
아니면 황당무계한 사치로 보아야 하나
아무튼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8만대장경속에 갇힌 민초들의 아픔 그리고 죽음 ...,그리고 ... 산하山河
몽고군들의 침입이 지루하고 지독하고 무참하였으니 ... 그래도 이것은 여유와 망중한을 느껴보려 하였을까
불교세력 ... 친원파의 주류들로 체워 진 이 불교세력이 이질적인 문명의 수용에 앞장서고 , 그렇게 스스로
육체의 반란 - 타락의 진경眞境이 보일것이 예감되었고 ..., 이미 이때부터 고려멸망의 모태가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고려사 사관은 말한다 -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하여 지 분수를 모르고 , 조금도 두렵게 생각하거나 꺼리낌이 없었으니 ...,그 죄가
진실로 죽어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참담한 이 광적인 사치는 진실로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일까 ..., 다만
역사가 아니라 몽고앞에서 ... !!!
이제 몽고의 어중간한 4차침입이 이어지고 , 간헐적인 대몽항쟁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그렇지만 고려는
지쳐있었고 , "공격하라"는 말까지 내뱉기 힘겨웠을 것이다 대몽항쟁 , 그 지루한 싸움을 끝내기 위한 ,
최선을 다 하기 위한 정치 , 경제 , 사회의 뒷받침의 상태는 되어 있었던가 ..., 무엇에 지쳐버린건지는
알 수 없으나 지쳐간다 그 대항마가 요구된다
이제 최우가 죽고 무신정권도 정비되는 기간이다 , 최우의 아들이 후계자로 올라졌다 하지만 이도 물건이다
그는 최우의 서자이자 , 그 보다 덜떨어진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창기 즉 기생의 소생으로서 출가하여 절에
있었던 몸이다 . 승려를 끌어모아 조직을 만들고 고리대금업도 겸하여 돈놀이에도 심취해 있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자 특유의 시기심으로 신망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죽이거나 귀향길에 오르게 하였다. 계모
를 죽이고 , 계모의 피붙이를 생매장으로 끌어 묻고 ..., 그리하여 천기출신의 무뢰배승려가 휘두르는 권력을
맞게 되는 것이다 ........ 타락되어만 가는 불교의 자학 .........그리고 스스로 저지러는 , 스스로에게 가하는
사형선고 ...., 그리고 백성들이 느꼈을 끔찍한 세상 당연지사 그도 신망을 잃었다 . 사치와 향락을 벌이며
사람을 죽인 이유이지만 ..., 차라리 무능력자였다면 동정과 위로는 얻었으리라 !!! 누구처럼 ....
군사 , 외교에는 대책없이 뻗대었고 , 코 앞에 대치하고 있는 적군은 애써 무시한 체 외면하였다 적군의
장수는 왕자를 보내 집에 돌아가던지 ,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만 하여라" 고 하였는데 그래도 체면은
있어서인지 막무가내 , 일언지하에 모든 평화와의 거래를 단절 버렸다
몽고 장수의 명은 하나 ...., " 모조리 쓸어 버려라 !!! "
이제 백성들과 토지 , 모든것을 적이 포식하게끔 만들어주고 , 그러한 다음에야 왕자를 보냈던 무신정권
..., 이 얼마나 어리석은 정권인가 ...이때 고려의 한 장수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농민 , 천민들로 구성된
군사들을 재조직 하여 적군을 격퇴시키는 또 하나의 위대함이 탄생된다
과연 나라는 무엇인가 ...,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가는게 나라인가 , 그렇다면 국민들은 그 희생물일 따름인가
그 최항이 죽고 또 다시 그 아들이 정권을 이어 받는다 . 최씨일가의 4대 60년이 종지부를 찍는다 그가 최의
이다 ... 이는 여종과의 사이에서 난 소생으로 그 또한 집권초반부에는 민심수습의 행각을 벌였다 .... 해를
넘기기 전 까지 .... 야수의 본성을 숨겼다는 것이다 그는 아비가 창기출신이고 그 또한 그러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심각한 열등감에 샇여 안절부절 못하고 주위에서 누가 욕을 하는지 살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정적을 제거할려면 그의 출신에 대해 " 당신 외가는 천하다 " 라는 말만 하면 정적은 물론 ,
그 집안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이시기에도 변함없이 몽고의 침입이 이어지고 제 7차의 강간과 겁탈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그는 측근에 의해 살해된다 . 그 이듬해 고려의 국왕이 죽었는데 그의 재위기간 46년을 몽고에 맞선 (?)
최氏정권의 인질노릇으로 일관한 왕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 하겠다
왕실 ........... 고려왕실의 사치와 방탕 그리고 이것의 문란에서 오는 쾌락은 고질적이고 또한 본질적인
것이다 . 스스로 정화할 수 없는 지위와 위치에 있다면 백성들에게 폐를 안끼치면 되는데 ...,그렇지만
무신정권은 어떠하였는가 !!! ... 알다시피 무신정권은 , "박정희 신화" 와 달리 근검 , 절약하지 못하였다 .
그러나 혹시 엄격하고 강건한 도덕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문신에 대한 열등감이 겄던 만큼 ...,??? ,
자기 위화감에 ...,??? 하지만 " 혁명적 청년 장교 "의 신화와 연관된 이 기대는 , 그러나 매우 헛된 것이다
건강한 도덕이란 언제나 균형의 결과인 까닭이다 . 문과 무사이 , 육체와 영혼사이 , 감성과 지성사이 ,
본능과 이성사이의 균형사이 에서 ..., 역시 발전이란 그 균형의 질이 높아져 간다는 뜻이다
박정희의 시대 !!! 그 시대의 전과 후를 따지지 않고 그 시대만 보면 , 쿠데타적 혁명과 ..., 혁명의 쿠데타로
18년 독재의 시대이다 ..., 하지만 이것은 별 중요치 않다 갖다 붙힌 단어일 뿐 ...왕조의 눈으로 보면 청년장수가 구국일념의 자세와 정신으로 칼을 들었다 할 것이다 지금의 시대로 보면 ...,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누구를 불러 밥이나 먹고 해대며 , 탁상공론을 벌이며 그러한 것보다는 식사자리에서의 밥숟가락을 던지고
탁상공론의 탁자도 부수어 직접 ... 소매 걷어 부치고 , 발로서 먹고 사는 현장으로 뛰어 든 것이다
민주사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 국민들이 이렇게 죽어 나자빠지고 몇가지나 안고 있을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에 절여 있는 모습은 아니리라 ..., 살만 하게 만들어 주고 , 살만 한 세상으로 발전시키고 , 거듭
나게 하는게 민주의 본 모습은 아닌가 한다
군사정권때는 불만과 불신에 , 그리고 분함에 사로 잡혔다 왜냐면 그들의 과 능력과 재능 보다 그들의 자격과
자질을 본 것이다 . 그리고 유능하고 고급의 인력들이 짓밟히고 사장되는 것을 볼 수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찬가지가 아닌가 , 유능한 엘리트의 인재들이 쓰임새 없이 버려진다 아군이냐 . 적이냐에 의해 갈리어 진다면 아군만 충복으로 쓰일 것이다
어느때이건 어느곳에나 소수는 있다 . 그것까지는 안고 갈 수는 없다 하더래도 그 소수가 어디를 향해 있느
냐도 따져 봄 직 하다 . 생활에서 주어진 빈부의 격차인가 아니면 이념의 방향인가 ..., 무엇이 되었건
다수가 소수에 의해 희생되고 무시되어지는 흐름이다 이렇게 되는 물줄기를 경계하며 좌시할 수는 없음이다
최氏정권과 군정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분명 틀리다
일인독재라는 측면에서는 마찬가지이나 그것은 어느정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군정의 시대에도 엄연히
민주의 시대였지만 ..., 그들이 너무 휘둘렀고 막지 못했음인데 ... 또한 비슷한 얘기이다 무신정권은 능력부재로 몰고 가 왕권을 이용하고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절대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 (도덕성 때문이라도 ...) 아니 한 것이라고도 할 수는 있지만 , 그러한 여건과 힘이 되었음에도 !!! 그들은 책임을 회피 할
목적도 있었겠거니와 일단 눈치를 보며 조정을 받기 보다는 눈치도 안보며 조정을 하기가 쉬울 일 일것이다
정권을 어떻게 잡거나 국가의 통수권자에 오르는 이들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향한
구체적인 설계의 구상과 그리고 그에대한 추진력이 중요하다
강력한 리더쉽을 원하는가 ...!!! , 대책없는 무질서의 깽판의 인물의 쇼맨쉽을 바라는가 다시 말하면 , 힘은
있지만 부드러운 장수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능력도 , 아무것도 없지만은 힘만을 달라고 하는 졸개를 바랄
것인가
이제는 힘과 능력을 국민에게 요구하고 있는 시대이다 단지 지도자는 방향만 정해 줄 뿐이다 이것이
민주시대의 모습일지 모르겠으나 유능하거나 무능하거나 이제 지도자는 최고통수권자가 아니라 국민
스스로에게 맡겨지는 모습이다 또한 짐을 지고 가야만 하는게 무겁게만 보인다
방향을 정하는것도 가는 사람보다 결코 쉽거나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 그러하니. 자신의 실수와 자제력
그리고 무능함이 통수군에게 일임 , 전가하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항상 그렇지만 옳은것은 옳은것이며
그른것은 그를 뿐 이다 . 전부 자기책임의 범주안에 놓아야 한다
분명 노대통령의 탄핵이 그의 모든 전후 사정을 살펴 국회에서 내린 결정이다 탄핵에 반대하고 ,
촛불시위에 참석한 이들 ..., 정녕 이들은 최고통수권자와 함께하고 ...,함께 살고 함께 죽음에
영광된 삶을 느껴보려는가 ... 아니면 ... 누구를 보호하고 , 하였다고 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였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
그렇다고 하여 자신들이 그 책임에서 빠져나왔다고는 생각치 마라
그 올가미가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덫임을 ........... 아는가 !!!
석천회장님의 말씀대로 나중에 대통령의 이 탄핵이 어떠한 꽃으로 피고 열매를 맺을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 탄핵반대한 이들이 도망치지 않고 어떠한 책임을 지려 할 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었음을 알고 ,
웃어보고 싶다
첫댓글 장문이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의 리더쉽이 새로운 리더쉽인지는 알수없으나 제 눈에는 리더쉽으로 보이질 않는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비열한 사기꾼에게 사기당했음을 모르는 우둔한 천재들의 집단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