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 치아사리 ,고성 금강산 건봉사 (乾鳳寺)
고성(강원도) ㅡ 금강산 건봉사
건봉사 乾鳳寺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의 금강산 남쪽자락 건봉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경덕왕 17년(서기 758년) 발징스님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다. 세조 10년(서기 1464년)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和尙)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 세조 2년(1456)에 임금이 행차하여 이곳을 왕실의 안녕을 비는 왕실 원당(願堂)*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御室閣)을 지으며 큰 사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아 훈련시키던 장소이며, 종전 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왜군이 훔쳐간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때 3200여 칸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몇 차례 화마(火魔)를 입어 중건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1989년 이래 현재까지도 계속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조선 고종 15년(1878)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에 다시 고쳐 지었다.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규모를 회복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고성 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터는 휴전하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부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 염불만일회: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 의식
* 원당 : 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
*말사: 본사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본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
건봉사불이문 乾鳳寺不二門
건봉사불이문은 1920년에 세워졌다. 한국 전쟁 때 모두 무너진 건봉사 터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원통형으로 다듬은 4개의 돌기둥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형태이다. 각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은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도구인 금강저(金剛杵)를 나타낸 것이다. 금강저는 고대 인도에서 쓰던 무기로, 부처를 수호하고 번뇌를 없애는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정면에 걸린 현판은 서화가 김규진의 작품이다.
'불이(不二)'란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하며 이곳을 통과 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사찰 입구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세 개의 문을 지나도록 구성되는데, 이 중에서 천왕문은 부처의 가르침과 불국정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공간이다. 건봉사는 천왕문을 따로세우지 않고 불이문에 금강저를 새겨서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더하고자 하였다.
적멸보궁
보궁치아사리탑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선덕왕5(636년)에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 중 일부입니다. 자장법사는 643년에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5대적멸보궁(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1592년(선조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하여 갔습니다.
그 뒤 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 왔습니다.
1724년(경종 4) 사명대사는 이 불사리가 재차 왜적의 침탈 표적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모시고, 그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치아사리탑 입니다.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여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 하였습니다.(석가여래치상탑비)
건봉사에서는 1724년(경종4) 사리탑을 세워 이 진신사리를 다시 봉안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건봉사 진신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 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 부터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민통선 안에 위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웠고, 그 만큼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전문 도굴범들이 사리탑을 열어 사리함과 사리를 절취해 갔습니다. 하지만 이 사리함 및 사리는 도굴범들이 다시 돌려보냄으로써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리를 훔쳐간 일당들은 절취 후 꿈에서 절에 사리를 돌려보내라며 꾸짖는 부처님의 꿈을 똑같이 며칠 간 계속 꾼 후 결국 사리를 돌려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총 12과 중 8과만 회수되었는데, 나머지 4과의 행방은 아직 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건봉사에서는 1996년 8과 중 3과를 사리탑에 다시 봉안하였으며, 나머지 5과는 일반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사리함을 별도로 만들어 종무소안 염불원에 모셔놓았습니다.
고성 건봉사 능파교 ㅡ보물 제 1336호
건봉사 능파교는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홍교[虹橋:무지개 모양의 다리]로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능파교를 처음 축조한 시기는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33년(1707) 사이로, 이것은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에 있는 능파교신창기비(凌坡橋新倉記碑)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능파교는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석계[石階: 돌계단]와 산영루(山暎樓)수축(修築)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이 높이가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아치(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능파교는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이 함께 있어 홍예교 연구 중요한 자료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석교(石橋: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다리이다.
2003년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중 변형된 부분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하던 중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2005년 10월에 복원되었다.
보안원 ㅡ(부처님 진신치아사리 친견장)
보안보살(普眼)은 원각경보안보살장>에 부처님의 대중(對衆)의 대표로 등장하는 보살로 널리 일체중생을 관하는 자비로운 보살의 눈으로서, 환(幻)을 여의고 행(行)을 닦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신중탱화 중앙에 배치되는 동진보살은 원래 32천의 우두머리인 위태천신으로 유리광불이 출현하셨을 때 도를 이루어 보안보살로도 불려 '동진보안보살'이라고 하며 팔만사천근이나 되는 금강보저를 들고 불법수호를 서원 하였다고 한다.
부처가 열반하였을 때 속질귀(速疾鬼)라는 나찰이 부처의 치아를 훔쳐 달아나자 쫓아가 되찾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발이 빠르고 제석천과 더불어 불법의 수호신으로 불경을 간행할 때 동진보안보살상을 새겨 넣어 경전 수호의 상징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에 건봉사는 철종 13년(1862)에 조성되었다가 소실된 만일회장판「불설대목련경」경판복원과 함께 치아사리와 경판의 수호신인 동진보안보살을 조성하여 불기 2566(2022)년 1월 15일 염불원에 모셔졌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보안원으로 이운하여 봉안(奉安)하고 점안(點眼)법회를 봉행(奉行)하였다.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건봉사는 세계에 15과뿐인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가 봉안된 사찰이다. 치아사리는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다. 건봉사 염불원에 5과 적멸보궁에 3과가 모셔져있고 4과는 분실되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산서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의 진신사리와 금관가사, 구엽경 등을 나누어 가지고 환국하여 일부는 오대산 월정사와 통도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약탈해 간 것을 선조 38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행하였다가 찾아와 사리탑(강원도기념물 51호)에 봉안하였다.
1986년도 6월 10일경 문화재 전문도굴범에 의해 도난당했던 것을 다시 찾아와 대한불교조계종에 보관 되어온 것을 건봉사에 다시 모셔와 지금에 이르렀다.
극락전|極樂殿
건봉사는 역사상 최초로 염불만일회를 개최한 최고의 아미타염불사찰로서 불보사찰 통도사,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전국 4대 사찰 중 한 곳이었다.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極樂殿)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이라고도 한다.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동향(東向)으로 배치하여, 참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후불탱화로는 주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 극락구품탱(極樂九幀)이 봉안되는데, 건봉사는 아미타탱화를 봉안하였다.
법당의 내부구조는 연꽃화문(花文)과 거북, 원앙, 붕어 등으로 장식한 불단(佛壇)을 비롯하여, 주불 위에는 닫집인 천개()를 만들고 용(龍)과 여의주 그리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극락조인봉황(鳳凰)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건봉사는 불기2564(2020)년 12월 극락전 복원불사를 회향하고, 이듬해인 2021년 4월 3일 아미타삼천불 봉안 및 점안법회에 이어 같은해 8월24일(음력 7월 17일) 제7차 염불 만일기도입재식을 봉행하였다.
금강산 건봉사 (金剛山 乾鳳寺) : 염불만일회와 등공대(騰空臺
금강산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절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 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승려 아도(阿道)가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승려 발징(發徵)이 절을 고쳐 짓고 1만 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 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시초가 되었다.
염불만일회와 등공대(騰空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