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인 박중양(朴重陽·朴忠重陽, 1874~1959)이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회고록, <술회述懷>다. 일제강점기 자신의 회고담과 시국에 대한 감상 등을 335쪽에 걸쳐 작성하였는데 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고 친일행위가 구국의 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박중양은 경북 달성 출신으로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 보통중학과 수학하고 도쿄 경시청의 경찰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사무와 감옥제도를 연구했다. 귀국 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통역관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활동하였고 이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후 수많은 관직을 거치면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훈장을 받았다.
• 박중양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주요 직위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회유강연을 하였고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면서 3・1운동의 의미를 폄하했다. 심지어 3.1운동의 확산을 저지할 구체적 방안으로 대구자제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진압 활동을 지휘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 25주년을 기념해 편찬된 ????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 박중양”이라는 평가와 함께 기념표창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1945년 4월 일본이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귀족원 의원 7명을 조선인으로 칙선할 때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국세납부자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특별한 예우를 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해방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바로 병보석으로 풀려나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친일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술회>에 보면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를 배워야 하며 일제강점기 통치정책을 찬양하고 있다. 조선이 망한 것은 부패로 인한 것이어서 친일행위가 나라를 구하는 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이등박문은 세계적 위인이다. 공의 언구가 후진의 교훈이고 술자리 환담 때라도 쓸데없는 말이 없다. 이등박문은 일본에 전유할 정치가가 아니다. 각국 역사책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 (중략) 나는 이등 공을 표본으로 하고 한국중흥을 이상하였다.
이조말년정치
정치의 부패와 국민의 고통을 70세 이상 연로자는 모두 아는 바이다. 뇌물 주고 관직을 파는(行賂賣官)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대소 관리의 백성의 재물을 탐하는(民財貪取) 강도와 다르지 않았다. 임금 주위에 바른 신하가 없고 궁중 난잡은 온갖 악인이 날뛰는 형국(百鬼夜行)이다. 집정자는 자기영달에만 몰두 탐욕하고 국정일비를 무관심하였다. 고위고관자는 자기의 이해득실에만 몰두하고 백성은 죽든지 살든지 관심이 없었다(我不關焉). 국세가 이와 같이 되어 쇠망을 어찌 면할 수 있으랴. 한국의 쇠망은 그 원인이 오랫동안 누적된 정치(積年要政)에 있지 하루아침(一朝一夕)에 있지 않다. 한국을 쇠망케 한 자는 한국인 누구누구이겠는가.
일제의 식민통치
정치의 개선과 인재등용을 세상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이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생활의 불합리한 점이 없지 않았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이 매일 시무가 백성을 위한 정치(爲民政治)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조선으로 개신된 것을 세상 사람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膏血)을 흡취(吸取)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
조선인의 악벽
편협성, 배타성, 험담, 나태, 의존생활, 놀고먹기가 조선인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 의존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 속담도 있다.
박중양의 <술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에서 진행 중인 “기억을 둘러싼 투쟁-친일인명사전, 그후 10년” 기획전시(전시기간 2019.11.8.~2020.1.19.)에서 볼 수 있다. 또한 KBS역사저널 그날 243회 “청산되지 못한 역사, 친일파 제2편 – 친일파의 변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친일을 떠나 색마지사로 불렸던 박중양
잊으면 안되는 인물로 여전히 추앙받는 조선인 ‘호추시게요’(朴忠重陽) 박중양. 그는 어떤 인물일까?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는 이런 보도를 낸다. ‘당대의 일도 장관으로서 어찌 차에서 내려 흙발을 밟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박중양 씨는 기어코 차에서 내리지를 않고 촌가에 가서 소를 끌어다가 자동차를 끌어 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간직하게 되었다.’
충북도지사로 있던 박중양에 관한 기사다. 실상은 이렇다.
충북도지사로 부임한지 두달되던 해 법주사를 유람하기위해 속리산을 찾던 중 말티고개에 이르러 차가 막혔다. 시골 소로길에 불과했던 말티재에서 막히자 인근 농가에서 소를 끌고와 차를 끌어넘기게 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박중양은 이후에 보은군수를 시켜 말티재를 확장하게 한다. 박중양의 지시를 받은 당시 보은군수 김재호는 만여호의 군민을 부역에 동원한다. 당시가 농번기철인 6월임을 감안하면 부역에 끌여온 농민들의 불만이 어땠는지는 미뤄 짐작하지 않아도 뻔하다.
이에대해 동아일보는 “ 매우 울분히 여기던 중 더둑이 같은 군에서도 회남면 회북면과 같은 곳은 부역장까지 근 백여리가 되니 인민의 피해와 곤란은 이를 길이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애교에 불과하다. 박중양의 엽기적 행각은 속리산 법주사에서 정점에 이른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중양은 1924년 12월 26일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트 총독 내외를 데리고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속리산에 도착한 박중양 일행은 법주사 대법당에서 주연을 열었다. 그 당시 법주사에는 여승 200여명이 있었는데 이중 젊고 아름다운 비구니 6명을 선발해 시중을 들게하면서 질펀한 술자리를 벌였다.
이때 박순양의 눈에 20살의 비구나 양순재가 눈에 들어왔다. 급기야 박중양은 비구니 양순재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양순재는 법주사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중양에게 당한 분노와 수치심에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사건은 세달 정도가 지난 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25년 3월 6일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박중양을 ‘색마지사(色魔志士)’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