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공자가 안회의 위나라 행을 만류하는 이야기. 그 중심은 心齋의 사상이다. 안회는 임금의 폭정에 시달리는 위나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위나라에 가겠노라고 스승인 공자에게 허락을 구하지만 공자는 가면 안된다고 만류한다. 덕은 명예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지식은 다툼에서 나온다. 명예는 서로 싸우는 것이고 지식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도구로서, 이 둘은 흉기라 할 수 있으니 극진히 행할 일이 아니다.
제1편 소요유편에서는 유토피아의 광막지야에 큰 나무를 심어놓고 유유자적하다가 낮잠 자는 무한자유를 누리는, 사고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제2편 제물론에서 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도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 이기고 짐, 옳고 그름이 모두 주관적인 것이니 시비를 따지려고만 하지 말고, 자연의 도로 조화하여 끝없는 변화에 맡기는 것이 천수를 다하는 방법이다. 나이나 편견을 잊어버리고 경계 없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바로 자연의 도로 조화하는 것이다.
제3편 양생주편에서는 양생의 비결을 얘기한다. ‘養生’은 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로 橫死하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보존하여, 있는 그대로의 生을 다하는 것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지식과 욕망을 추구하면 위태로울 뿐이니(而有涯隨無涯殆已), 養生의 비결은 일체의 선악과 시비를 무화시키는 中의경지에 따르는 것을 삶의 근본원리로 삼고(緣督爲經). 天理의 自然을 따라 도에 가까이 가는 것, 비록 힘들지만 자유롭게 구속받지 않고 사는 삶, 그리하여 安時處順으로 無爲自然의 道를 따르는 것이다.
莊子4-1 顔回見仲尼 請行 曰 奚之 曰 將之衛 曰 奚爲焉 曰 回聞衛君 其年壯 其行獨 輕用其國 而不見其過 輕用民死 死者以國 量乎澤若蕉 民其無如矣 回嘗聞之夫子曰 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 願以所聞 思其所行 則庶幾其國 有瘳乎
顔回가 仲尼를 뵙고 떠날 것을 청하자 중니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가?”
안회가 말했다. “衛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무엇을 하려느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나이가 젊어 혈기왕성하고, 행동이 독단적이어서 나라를 가볍게 사용하고,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며, 백성들의 죽음을 가볍게 여겨 나라 안에 죽은 사람들이 연못에 넘칠 정도로 가득하여 〈虐政의 심함이〉 마치 못가 수풀을 불태워버린 것 같아서 백성들이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님에게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스려진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의원의 집에는 병든 사람이 많은 법이다.’ 원컨대 선생님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그 나라는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莊子4-2 仲尼曰 譆 若殆往而刑耳 夫道不欲雜 雜則多 多則擾 擾則憂 憂而不救 古之至人 先存諸己 而後存諸人 所存於己者未定 何暇 至於暴人之所行 且若亦知夫德之所蕩 而知之所爲出乎哉 德蕩乎名 知出乎爭 名也者 相軋也 知者也 爭之器也 二者凶器 非所以盡行也
중니가 말했다.
“아! 너는 아마도 가면 형벌을 받고 말 것이다. 道는 어지럽게 뒤섞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지럽게 뒤섞이면 〈마음이〉 다방면으로 분열되고 다방면으로 분열되면 동요하게 되고 동요하게 되면 근심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면 〈남을〉 구제할 수 없게 된다. 옛날의 至人은 먼저 도를 자기 안에 보존하고 그런 뒤에 다른 사람에게 도를 보존하게 하였다. 자기 안에 보존되어야 할 도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면 어느 겨를에 포악한 사람의 소행을 바로잡는 데에 이를 수 있겠는가. 또 너는 또한 덕이 어지러워지는 까닭과 지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는가. 덕은 명예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지식은 다툼에서 나온다. 명예라고 하는 것은 서로 싸우는 것이고, 知는 분쟁에서 이기기 위한 도구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인지라, 극진히 행할 만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