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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영혼을 침략하는 자들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피터 마스터스 목사/번역:박 계원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것은 갈릴리 산중턱에서 수 천명의 군중들에게 하셨던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올 것이나, 실상은 노략하는 이리들이다”(마태복음7장15절).
‘조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위험에 대비하여 우리 마음을 계속 집중하라는 뜻이며 우리가 항상 이성적으로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대해 철저히 평가, 검토하고 있습니까? 삶의 방식들과 가치들에 대해 충분히 점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생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말고, 그 목적에 대해서 대수롭게 생각지 말라. 떠도는 모든 사상들에 대해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네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라.’ 당신은 현재의 삶과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가치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종교의 교사들뿐 아니라 종교적이지 않은 이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도전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인생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이 양의 옷을 입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위협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줄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못된 사상은 넓게 열려 있는 문이나 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물질 우선주의, 애욕주의 등의 삶의 방식등과 같이 쉽게 군중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흔한 사상들입니다. 수많은 잘못된 사상들은 우리를 하나님과 도덕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날 우리들의 삶을 카운트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존재임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들은 ‘너 자신을 만족시키는 어떤 일이든 하라’, ‘너의 동물적 본성을 충족시키며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오늘날 사회를 주도하고, 언론과 연예계를 운영하며, 도덕의 폐지를 주장, 법제화하면서 성경적 기준들을 파괴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선생들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들의 열매(즉 이들의 결과들)를 통해서 알 수 있다’라는 분명한 기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삶에 대해 얘기하는 흔한 사상들이 빚어놓은 결과들과 그들이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들이 맺은 열매는 과연 무엇인지 확실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최근 살인, 강도, 아동 학대, 도둑질 같은 몇몇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덕적 표준들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들을 우리는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성 분별이 모호해지고, 동성애가 인정되며(최근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견해이며 오히려 큰 범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결혼의 선을 넘어선 자유로운 성행위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성적 충족의 결과들을 없애기 위해 십대들에게 피임 도구가 제공되고 있으며 잘못됐을 경우 낙태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넘어서 심지어 이기적인 태도를 가져도 무방하며 ‘너 자신만을 돌보라’는 식의 이기심이 이상적 삶의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고, ‘너 자신을 즐겁게 하라’는 사상 아래 탐욕, 술취함과 극단적인 형태의 욕망도 개의치 말고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는 성적 자극을 위해 노출이 심한 옷들이 난무하며, 텔레비전에서는 쓸데없는 언어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들을 주장하는 그들이 이 사회에 성취해 낸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들이 성취하리라 믿었던 철학적이고 관대한 사회를 만들어 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이 사회에 남겨놓은 열매는 속임, 도둑질, 사기, 폭력, 잔인, 추태, 음란, 낙태, 관능, 별거, 이혼, 중독, 술취함, 이기주의, 불행뿐입니다.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이 상황을 알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숨어서, 이런 상황이 언급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그들의 사상이 거짓이며 실패작임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증거입니다.
1950년대의 ‘엘리펀트 폭력단’(Elephant Gang)이 사용했던 칼, 자전거 체인, 쇠파이프 등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언급하면서 ‘그때(1950년대)도 지금처럼 사회 상황은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최근의 신문 기사를 저는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글의 맨 위에 기재된 글쓴 이의 사진을 보면서 그가 ‘엘리펀트 폭력단’이 활동했을 당시에 살았을 만큼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살았던 우리들은 단연코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당시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고, 아니 현재가 열 배나 더 악화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당시 강도범죄는 거의 드물었고, 소위 ‘폭력을 동반한 도둑질’엔 엄격한 형벌이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범죄들이 요즘은 너무나 흔하게 발생하며, 많은 강도범들은 검거되지도 않는 실태입니다. 사회는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성경적 기준들을 파괴한 그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밀려오는 가정의 파괴, 혼란과 고통으로 주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만으로 우리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규범들을 하루 아침에 내팽개쳐 버렸고 사회는 그로 인해 이러한 결과들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시와 찔레’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교만해서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무분별한 열정으로 범죄를 조장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한 저명한 무신론자는 텔레비전 연속물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그의 증오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종교는 모든 전쟁의 원인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스탈린이 죽였던 수 백만 명과 공산주의가 저질렀던 살인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지, 역사가운데 영토를 둘러싼 전쟁들의 긴 이야기들에 관해 알지 못하는지, 험악했던 두 번의 세계대전에 대해 그는 과연 알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분명 유명한 과학자이지만, 역사를 잊어 버린 자요, 그의 편견으로 하나님께 대항한 어리석은 자입니다.
사실 전쟁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류의 부패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간 좋은 행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또한 동시에 연약하고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전쟁들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과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그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코 안정된 사회와 실제적 희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신 교사는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우리에게 새로운 변화, 새 생명 그리고 소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의 가르침은 완벽하며 그의 기준은 순결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삶을 사셨으며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가운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 믿는 자들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이후로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도덕적 기준들을 반대하는 사회의 교사들과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무신론에 의해 영향받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발견하시고 그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경이로우신 하나님
글: 피터 마스터스 목사/ 번역: 박 계원목사
3천년 전 훌륭한 왕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라’(시편4장4절)는 것입니다. 무엇이 경외입니까? 언젠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간 때가 기억납니다. 어떤 소년이 힘차게 떨어지는 그 폭포수를 보면서 압도 당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한 소년이 기억납니다. 그 소년은 폭포의 위력과 장엄함에 사로잡혀 여러 날 동안 자신이 직접 경험한 그것을 반복해서 이야기 하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처음으로 장례식에 참여하는 젊은 사람들은 죽음의 심각성과 죽음의 영원한 결과를 경험하곤 합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와이트 섬(Isle of Wight)에서 머물렀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컬버(Culver)라는 절벽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때 갑자기 엄청난 모양으로 하늘로부터 번개가 쳐서 바다를 가로질러 내리쳤고, 약 1마일 떨어져 있는 절벽이 흔들릴 정도의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떠들썩했을 저희들이었지만 그 때에는 한 시간 동안이나 침묵 가운데 그것을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에 굉장히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뛰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입니다.
동물과는 달리 사람은 이성과 도덕적 양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창조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언어 구사력과 영원에 대한 본능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정말 축복 받은 존재들이며 동시에 이러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동물들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가치 없다고 하는 생각들을 우리의 마음에서 없애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서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경이로움으로 서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경외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어느 회사 사장의 인생 경험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두 살이 되었을 무렵 2차 세계 대전 중 그의 부모들은 적기의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부호였던 부모님의 유언에 따라 고아들의 교육을 위한 자선단체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고아원생들 중 한 명으로 자유롭고 분방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가 열 여섯살이 될 무렵 자선 단체를 돌보고 있는 변호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변호사는 그에게 열여덟 살이 되면 엄청난 양의 재산이 상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엄청난 부자였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충격 속에 기숙사로 돌아왔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된 그를 보며 친구들은 그에게 무슨 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의 머리 속에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습니다. 자신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그의 마음은 놀라움과 책임감이 교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주어졌다는 것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가 느낀 종류의 경외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 가운데 기다리며 그분이 누구신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왕을 보러 간다면 우리는 그녀를 오두막집에서 찾지 않고 궁궐에서 찾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 가운데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전능하시며, 전지하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환경학자인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교수 같은 전문가가 런던과 리버풀이 100년 안이나 심지어 50년 안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지구 온난화에 대해 걱정하게 되곤 합니다.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렇게 추측하고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홀로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만 무엇이 아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도 정확하게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완벽하시며 죄를 미워하시고 참으로 정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기 원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놀랍게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3위로 존재하십니다. 3위 중 두 번째 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 되시고자 인간의 몸과 인격을 취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완벽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한한 값을 치루셨습니다. 성부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고 우리들의 죄들을 대신해 예수님을 처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형벌로 고통 당하셨으며 잃어버린 바 된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한 속죄물이 되기 위해 얼마 동안 무덤에 갇혀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자께 "경외 가운데" 서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구원 계획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그의 사랑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경외심으로 감동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또한 다른 의미의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죄로 인해 닥치게 될 두려운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모두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수배 중인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노하게 했으며 하나님의 법을 어겼으며 하나님을 경멸하고 무시함으로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받을 수 없으며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 채로 지내도록 하나님께 저주받았습니다. 단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을 필요는 있음을 절박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구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다윗왕은 '경외 가운데 서 있고' 또한 '잠잠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중인 저주받은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낙담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배반과 거짓, 자만, 욕심, 불신, 이기심, 그리고 모든 다른 죄들에 대한 벌을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것에 놀라십시오. 우리들의 지난 죄악들을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믿으면서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모두에게 용서와 새로운 삶이 값없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경외함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 결과들을 깨달음으로 두려워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러한 '경외' 없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태도와 행복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경외, 즉 놀람과 기쁨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알 때, 우리는 회심의 실재로 인한 경외감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