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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넷째 주일)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임마누엘’
사7:10~16; 롬1:1~7; 마태1:18~25
이번 대림절 묵상에서 <마무리하기> 때 읽었던 글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성찰할 글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마음을 결정하여 권위 있게 선포된 진리에 지적인 동의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이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단지 특정한 교리 정보에 동의하려는 습관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우리의 온 존재의 회심, 즉 그리스도의 공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전 인격을 승복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의 속죄 행위, 가장 근본적인 속죄 행위, 메타노이아[회심]이자 마음의 전적인 변화인데, 즉 하나님과 맺고 있는 우리의 관계, 그리고 이 세상과 맺고 있는 우리의 관계에 관한 옛 이해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토머스 머튼, 『사랑과 삶』의 “성탄의 기쁜 소식” 중에서)
이 글은 우리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도 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기독교 교리들을 믿음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때 믿음이란 대부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무조건” 믿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등등, 이런 특정한 교리 정보들을 그냥 수용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오래 다니게 되면, 이런 교리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명을 듣게 되고 공부도 하게 되지만, 실제로 이런 예수님의 복음 사건들이 실제로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띠게 되는지, 내 삶에서 실제로 어떤 작용을 하고, 실제로 나에게 어떤 힘(능력)이 되는지,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성수주일 잘하고, 잘하면 새벽기도도 하고, 말씀 열심히 읽고, 큐티하고, 내가 오늘 읽은 말씀대로 잘 살았나 반성도 하고,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던지 아니면 은근한 자부심을 갖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이란 이런 신앙 행위들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이것이 특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실제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실제로(!) 어떤 능력으로 작용하는지가 중요하겠지요.
많은 경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소위 겸손하게, 억울해도 좀 참고, 말하고 싶어도 좀 참고, 화나도 좀 참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자신을 돌보는 것은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맘껏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축복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한참 야베스의 기도가 유행한 적이 있지요? 역대기상의 족보에 나오는 중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기도문이 한때 유행했지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4:10)
아주 상반된 두 모습이지요? 자신의 욕구를 죽이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과 자신의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하는 모습, 이 상반된 모습 속에서 어쩌면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분열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우리의 온 존재의 회심, 머튼이 가장 근본적인 속죄 행위라고 했던, 마음의 전적인 변화(메타노이아)에 속한 것입니다. 이 회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맺고 있는 우리의 관계, 그리고 이 세상과 맺고 있는 우리의 관계에 관한 옛 이해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뭔가? 내가 어떻게 새롭게 되었다는 말인가? 내가 좀 기분이 좋아지고 가벼워지면 새롭게 된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일시적인지 우리가 잘 알지요.
우리 신앙은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우쳐 가는 것이고, 이 새로운 정체성을 연습(수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발견하는 것이지만(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러나 그 발견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습(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탄생의 이야기 중에 수태 고지 장면(아기가 태어날 것을 알려주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이 수태고지 장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지요. 그러나 둘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이 꿈에 천사에게서 수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관점이지요?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천사에게 환상 중에 수태 소식을 듣지요. 마리아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수태고지 장면에서 마태나 누가 이야기에는 근본적으로 일치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1) 정혼하기 전 아기의 수태 소식을 듣는다는 점.(즉, 아기가 성령으로 인해 수태되었다는 점), 2) 요셉과 마리아 둘 다 그 사실을 듣고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의심하는 마음으로 선뜻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했다는 점.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 둘 다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는 점.
사실, 이 수태 고지 이야기는 과학 실증주의로 세례 받은 현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달갑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이 꼭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하지? 저항감이 들고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이지요. 반대로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인데, 무조건 믿어야 해”, “모르는 걸 믿는 게 신앙이야”, 라고 의심에 쐐기를 박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걸 믿는 게 신앙인 것은 맞지만, 무조건 믿어! 라는 식으로 우리의 이성을 깔아뭉개는 게 신앙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수태고지 이야기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에 절대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개입을 정말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보여주시려고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을 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처녀가 잉태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면서 “우째 이런 일이!” 하면서 과학적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라, “아,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굉장히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의 분명한 개입을 경험하게 되면, 그 일은 그냥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엄청난 신성(거룩함)이 흘러들어오든 하나님의 자비에 감싸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이 크게 경험될 때에는 특별히 초자연적 사건으로 경험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신성)이나 자비가 초자연적으로 다가올 때에는 저항과 의심, 혼란과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무슨 두려움이나 의심이 들까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 자비, 사랑은 모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저항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이야기해주는 예수님의 수태 이야기에서는 요셉이 중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젊잖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한 줄에 담겨 있는 요셉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이 느꼈을 혼란과 두려움, 의심과 배신감, 분노, 좌절은 성경에 다 기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고 아기예수의 수태를 알려주지요. 그때 마리아가 한 말은 단지 한 마디였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한 마디에 묻어있는 마리아의 혼란함, 황당함, 어처구니없음, 두려움, 경악을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시는 아기예수를 받아들인 가정(보통 성 가정이라고 하지요), 성가정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받아들이기 전에, 엄청난 시험을 당한 겁니다. 그로 인해 느꼈을 두려움, 의심, 분노, 황당함, 경악 등등...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아기예수를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를 임신했던 기간 10달 내내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은 아마 대단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고, 길을 가다가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을 껍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오늘 동정녀가 낳을 아기의 이름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기원은 이사야서에 나오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제1독서 가운데 나옵니다. 주전 8세기 유다왕 아하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던 아람(시리아)이라는 나라와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동맹을 맺고 유다에 쳐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은 두려움과 불안에 몹시 시달립니다. 이사야서7장 2절의 말씀이 이 사실을 전해줍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만나 전한 신탁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먼저, 시리아-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다고 해서 그렇게 흔들리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9절,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임 로 타아미누, 키 로 테아메누>)(여기서, <아만>이라는 동사가 두 번 나오는데, “확고하게/굳게 선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로 쓰입니다. 같은 어원입니다) 그 다음 한 징조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라는 겁니다.
두려움과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확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개입(이것은 꼭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을 “굳게 믿는다면” 그 징조로 왕실에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거지요.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극히 현실적인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가장 친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조차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내 삶은 왜 이런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부재나 외면이 아니라 내 안에서 태어나야 할 아기의 징조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기예수가 태어날 때에도 심한 혼란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기예수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요시아 왕 때, 심한 혼란과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확고히 서 있으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라는 징조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은, 이렇게 우리의 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이것이 한 아기가 태어나는 조건이며 상황입니다. 여기서 한 아기는 이천년 전 아기예수이기도 하지만, 오늘 내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 즉 새로운 나의 정체성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 때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성탄은 우리가 이천년 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태어나는 한 아기를 축하하는 날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아기의 탄생에는 언제나 혼란과 두려움과 의심과 당혹스러움이 따라옵니다. 산고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 안에서 들리는 이런 사랑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두렵고 불안하고 의심하는 모든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네 안에 신성한 아기가 태어나려고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네 안에서 태어나는 ‘임마누엘’의 탄생을 볼 것이다. 그 임마누엘이 진정 네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러면 너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서 믿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태고지 이야기는 예수님만의 수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수태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14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성탄절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루셨고, 끊임없이 이루고 계신 영원한 탄생을 이 자리에서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탄생이 지금 우리{인간본성} 안에 제 때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탄생이 끊임없이 일어나더라도,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대림절은 이천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임마누엘이 태어나셨듯이, 오늘 우리 안에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어둠은 깊고 밤은 깊어 아기의 탄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일어나도록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일, 확고히 서서 믿음 안에 서 있으려는 결단,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기도의 태도일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제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는 한 아기를 선물로 주실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요셉과 마리아처럼 우리 안에도 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인 임마누엘을 우리가 사는 이 생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