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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의 클래식 여행 16- 천둥과 번개가 치던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위대한 악성은 잠들고
음악의 신약성서, 드라마틱한 작곡가 베토벤
-베토벤이 청혼하고 거절당하기 직전에 그녀에게 보낸 사랑의 음악 편지와도 같은 애틋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는 18세의 테레제에게 바친 베토벤의 깊은 사랑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엘리제를 위하여)-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Op.61>는 베토벤이 36살 때인 1806년 작곡한 중기의 걸작인 베토벤의 하나 뿐인 바이올린협주곡으로, 멘델스존과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불린다. 초연은 1806. 12. 23일 안 데어 빈 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이루어 졌다. 2대 바이올린곡이니 3대 바이올린곡이니 하는 이야기는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곡임에는 그냥 동의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바이올린 협주곡의 왕자"라고 불리는 것은 좀 어울리기는 하다. 이 곡과 함께 또 다른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은 2곡의 아름다운 소작품 "로망스 1번Op.40과 2번Op.50과 단편의 C장조 협주곡WoO 5, 1790∼11792이 있다.
작곡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때였지만, 당시 베토벤은 어느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희망에 찬 시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장중한 악상에 풍부한 정서를 간직한 정열적인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완벽한 구성과 조형미를 갖춘 어디에도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바이올린협주곡은 안 데어 빈 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제1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프란츠 클레멘트Franz Clement, 1780∼11842를 위해 만든 곡이다. 그는 당대의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섬세함과 상냥함 그리고 우아함까지 곁들여져 있다는 평을 들었던 연주자였다.
이 곡 초연당시, 베토벤이 작곡을 너무 늦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클레멘트Clement는 그 날 악보를 처음 보며 식은땀을 흘리며 연주해야 했는데,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훌륭히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는 초연의 상황을 매우 잘 연주해서 독주자와 작곡가가 많은 갈채를 받았고 폭발적인 환호도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공감을 주었던 건 아니어서 또 다른 비평문에서는 “이 협주곡에 아름다운 점도 있긴 하지만, 음악적 사건의 연결이 간혹 일관성이 없는 듯하며 평범한 악절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피곤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연주되지 않다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44. 5. 7일, 새로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 1831∼11907은 13살의 나이에, 런던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 곡을 연주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다시 세상에 알리자 청중들은 이에 매료되었다. 이 곡은 새롭게 조명되어 오늘날에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모두가 즐겨 연주하고 즐겨듣는 명곡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이 협주곡에 매료되어 수십 번을 감상하면서 베토벤의 고마움을 기리고 있다.
이 곡의 오케스트라 제시부가 상당히 길고 마치 교향곡과도 같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청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며, 바이올린 독주가 있는 교향곡 느낌마저 드는 곡이다. 이 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연주시간은 42분 정도이다.
「제1악장 Allegro ma non troppo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D장조 4/4박자」는 소나타 형식으로 형식미도 뛰어나며 유연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화되어 구성력 또한 치밀하다.
「제2악장 Larghetto약간 느리게, G장조 4/4박자」은 변주곡형식으로 바이올린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악장으로, 가슴을 울리는 참으로 매혹적인 바이올린 음률이다. 제1변주에서는 독주 바이올린이 주제를 담당하지 않고 호른과 클라리넷이, 제2변주에서는 마찬가지로 바순이 주제를 담당한다. 2악장이 끝나면 이어서 바로 3악장으로 들어간다.
「제3악장 Allegro빠르게, D장조 6/8박자」는 론도Rondo형식으로 춤곡 풍으로 즐거움을 주는 빠른 템포의 악장이다. 바로 독주바이올린이 론도주제를 제시하면서 시작되고 오케스트라가 이를 반복한다.
<피아노솔로를 위한 바가텔Bagatelle A단조 WoO 59>는 일명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로 불리는 1810. 4. 27일에 작곡한 피아노 소곡으로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악보(자필악보는 발견되지 않았음)는 베토벤이 죽은 지 40년이 지난 뒤 뮌헨München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엘리제를 위하여, 4월 27일, L. v. Beethoven, 추억을 기리며”이라고 적혀 있었다.
A단조, 3/8박자, 포코 모토Poco moto"로 A-B-A-C-A의 5부 론도rondo형식이다. 발단을 이루는 A부분은 서정적인 분위기이다. 전개로 이어지는 B부분은 화성적이며 다소 격정적이다. 위기와 절정의 두 번째 에피소드 C가 이어지고, 결말의 A가 다시 반복된다.
루드비히 놀Ludwig Nohl은 베토벤의 자필 악보의 제목이 "Für Elise am 27 April [1810] zur Erinnerung von L. v. Bthvn"로 되어있을 것이며, <엘리제를 위하여>가 맞다고 했다. 그러나 엘리제Elise는 사실은 ‘테레제Therese’이지만 베토벤의 글씨가 워낙 악필이라 후에 출판한 루드비히 놀이 잘못 읽어 엘리제라고 붙여졌던 제목이라고 밝히게 되어, Für Elise가 아니라 Für Therese 라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베토벤이 1810년 5월에 청혼하고 거절당하기 직전에 그녀에게 보낸 사랑의 음악 편지와도 같은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는 18세의 테레제에게 바친 베토벤의 깊은 사랑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이름이 바뀌었어도 우리는 이 사랑스러운 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엘리제로 바뀐 그녀의 이름 테레제 또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독일의 음악학자 클라우스 마르틴 코피츠Klaus Martin Kopitz는 ‘엘리자베스 뢰켈Elisabeth Roeckel이 바로 ‘불멸의 연인’이며 이 곡에서 말하는 엘리제다‘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확실하지는 않으며, 정확히는 베토벤만이 알 것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 토론의 과제를 아껴두어 오랜 세월을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산사람들은 아마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다 더 많이들은 곡일 텐데, 청소차가 후진할 때면 들을 수 있던 동요 같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청소차에서, 그것도 후진할 때 이곡이 나오는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곡을 결정한 사람을 만나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
베토벤은 40세 때, 이 곡을 17세의「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Drossdik, 1792∼11851」에게 헌정하였는데,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귀족의 딸인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순수한 여성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중에 한사람인 조반니 말파티Giovanni Malfatti라는 이탈리아 출신 의사의 조카이다.
베토벤은 <첼로소나타 3번>을 헌정한 첼리스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의 소개로 제자인 테레제를 만났는데, 테레제에게 얼마나 마음을 빼앗겼는지는 글라이헨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를 봐야한다. "그녀와 관계된 것은 뭐든지 좋아합니다. 그것은 상처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약한 사람은 상처를 건드려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녀의 손이 닿으면 그 상처는 씻는 듯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베토벤이 1810년 18세의 테레제에게 보낸 청혼의 편지에는 "당신도 어느 정도는 날 생각하겠지요.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하겠어요. 나는 내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이다.
사실 후세에 우리가 베토벤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한마디로 분수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말파티Malfatti집안에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고 예술가로서 존경했지만 결혼 대상으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테레제는 1816년에 드로스틱 남작과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이 빈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던 제자였던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처음부터 도저히 이루어질 수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베토벤이 남긴 달콤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이 짧은 소품에는 끝내 이루지 못한 그의 애틋한 사랑의 아픔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베토벤은 수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작곡한 음악가이기에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귀족들의 문을 두드리고 돌아다닌 음악가였다고 하면, 베토벤은 그들의 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돌진해 들어간 작곡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베토벤의 일생은 그의 걸작 <운명 교향곡>이 대변해주듯 투쟁과 극복, 승리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으며, 인간승리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예술가였다. 그에게 30대부터 찾아온 귓병으로 들리지 않는 등의 수많은 고통이 찾아왔지만 이를 딛고 불멸의 위대한 음악들을 작곡하였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위대하다.
베토벤 사후에 그에 대한 평가는 "고전주의를 훌륭하게 마무리하고 낭만주의의 시작을 알렸다는데 있고, 또 가장 인간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극명하게 표출했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영원한 위안을 주고, 보다 높은 경지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게 바로 베토벤을 악성樂聖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위대함을 귀가 거의 들리지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스메타나도 베토벤처럼 귀가 들리지 안했던 작곡가였으며, 헬렌 켈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의 위대함은 어떤 곤경에 빠져도 항상 진보했다는 것, 그는 낭만주의의 선구자였고 성악음악이 중심이었던 그 시대에 기악음악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베토벤은 그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작곡가였다. 또 감정의 공개적 표현을 자기음악의 가장 일관된 지침으로 삼았던 첫 작곡가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를 음악의 구약성서로, 베토벤의 소나타들을 신약성서라고 말한바 있다. 생애최후의 4년을 제외하면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피아노곡을 썼다. 그 작품들은 일정의 영혼의 일기이며 음악사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영향력 있는 여행의 기록이다.
베토벤의 생애는 한 편의 드라마이고 자신에게 닥쳐온 육체적인 시련의 한계를 넘어서며 역경의 인생을 살다간 작곡가이다. 청력을 상실하고, 지나칠 정도의 괴팍한 성격, 조카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집착, 유서의 작성 그리고 연인에게 보낸 많은 편지 등은 지금도 전설적인 이야기로만 남아있다. 말년에 그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귓병이 악화되면서 절망에 빠진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남긴 후 사람들과의 만남은 없어지고 작곡에만 몰두했다. 빈의 교외에 거대한 자연녹지 "빈 숲"이 있다. 가까이에 한가로운 작은 마을「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가 있다. 이 마을에서 6번 교향곡 <전원>을 작곡했으며 그 유명한「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던 곳이다. 병마와 싸우다 유서를 남겼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유서를 남긴 후 25년이 지난 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에서 베토벤을 “세계의 완성자! 은혜로운 비가 되어 이 땅을 적시고 바다위에 내리고 모든 만물위에 떠돌며 하늘을 형성하는 자!”라고 찬양하였다.
44세가 되던 해 부터는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 고뇌에 찬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의 음악이 이제 우리들의 것이니 감상해 보시기를 감히 권하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그의 음악에 대해 토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베토벤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행동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혼수상태에서 갑자기 깨어나서는 하늘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음악에서도 그런 느낌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열정과 함께 찾아와 천둥과 번개가 빈의 하늘을 가득 채우던 1827년 3월 26일 어느 암울한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위대한 악성은 떠나고 말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56년이라는 세월로 막을 내렸다. 링거 묘지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은 2만여 명의 군중이 애도하는 속에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교향곡 제6번, 전원>의 4악장과 같은 날이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던 작곡가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1811∼11885는 베토벤이 서거하자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간직하였는데, 이 머리칼은 훗날 소더비의 경매를 통해 미국 산호세주립대학교의 베토벤연구센터가 소유하게 되었다.
*위대한 악성 베토벤을 그리는 글은 16회로 마감하고 비발디편이 연재됩니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양형재박사)